[동하한담冬夏閑談] 남을 여(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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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함원 전통문화연구회 상임이사
입력 2017-11-0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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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변화는 무섭다. 1~2주 전만 해도 덥다며 볼멘소리를 했는데, 주말을 지나며 성큼 찾아온 한기가 제법 매섭게 느껴진다. 

행락객들을 즐겁게 했던 단풍도 이제 그 아름다움과 이별하고 낙엽으로 돌아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찬바람과 함께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가 이렇게 또 간다. 매사를 서두르며 자칫 조급해하기 쉬운 때라 '남을 여(餘)'자를 주제어로 삼았다.

여(餘)는 '먹을 식(食)'과 '나머지 여(余)'로 이루어진 글자다. 음식이 많아야 남기는 법이므로 자형적 의미는 ‘음식이 먹고 남을 정도로 넉넉하다'가 된다('욕망하는 천자문', 김근 지음).

'여'자 들어가는 좋은 말이 많지만 그중 여유(餘裕)를 으뜸으로 꼽고 싶다. 경제적으로 넉넉할 수 없으면 정신적·시간적으로라도 여유가 있었으면 한다. 특히 우리 젊은이들이 입시, 취업경쟁, 아르바이트, SNS 등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여유를 두면 좋겠다. 나이 든 분들은 여생(餘生)을 큰 병고 없이 무탈하게 사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다. 그러면 여한(餘恨)이 없을 것이라고들 한다. 

'여'자 뒤에 감성적 의미의 글자가 결합되면 그 의미가 매우 깊다. 여비(餘悲)는 '남은 슬픔'이 아니고 '다함이 없는 슬픔', '깊은 슬픔'이다. 부처님이 생로병사하는 중생의 삶을 보고는 슬퍼하심이 끝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유여비(有餘悲)'라고 했다.

여향(餘香)은 깊은 향기, 좀처럼 가시지 않는 짙은 향기이다. ‘향기 나는 삶’이란 말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들이 남긴 향기가 쉽게 가시지 않고 오래 멀리까지 남아 있다고들 했다. 여운(餘韻)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운치이고 여흥(餘興)은 아직도 남은 흥취다. 여우(餘愚)는 '지극히 어리석은 나'라는 표현이다. 한시에서 가끔 만난다. 

여적(餘滴)은 옛사람들이 글씨를 쓰기 위해 먹을 갈아 쓰고 남은 먹물인데, 그 남은 먹물로 쓴 글, 한가한 마음으로 정색을 하지 않고 쓴 잡문이라는 뜻의 겸양표현이다. 모 일간지가 오랫동안 게재하고 있는 짧은 칼럼의 제목도 여적이다.
 
'적선지가(積善之家)는 필유여경(必有餘慶)하고 적불선지가(積不善之家)는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주역, 곤괘) 여기에도 '여'자가 등장한다.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고 나쁜 일을 한 집은 반드시 남은 재앙이 있다는 말이다. 선을 쌓으면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어 당대에만 복을 받는 게 아니라 후손에게도 경사가 있을 정도로 경사가 많을 것이라는 메시지다. 재앙(餘殃)은 그 반대다. 부디 선을 쌓아 남은 경사를 이루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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