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그래그래] 유라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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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6-0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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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그래그래

유라의 전성시대

‘이강석’은 이기붕의 아들이었지만 자손이 없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됐다. 1957년 8월 30일, 이강석이 경주에 불쑥 나타났다. 혼비백산한 경찰서장 등 기관장들은 극진한 아부·아첨과 환대로 그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가짜였다. ‘대통령의 아들 이강석’의 권력은 막강했을 것이나 그 대부분은 이처럼 ‘알아서 기는’ 간신배들로 인해 먼저 생성됐을 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모르고 권력의 단맛을 즐겼던 이기붕 일가는 4·19 의거를 맞아 권총몰살이라는 비극으로 끝났다. 그로부터 60년 후 ‘비선실세의 딸 정유라’가 말 타고 이화여대 드높은 담장을 가뿐하게 넘었다.
1980년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에 농구·사격·승마선수가 한 명씩 있었는데, 그 친구들은 일년 내내 교실에 안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체육특기생들의 수업 부재는 대학 때도 마찬가지였다. 야구부 선수 하나가 같은 학과였지만 다니던 내내 강의실에서 그를 본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 중간고사 같은 시험 시간에도 그들을 봤었는지 기억이 흐리다.
현재의 사정은 잘 모르겠고 예전 이야기인데, 고대·연대 등 유명 사립대의 체육특기생 중 아이스하키와 승마는 특히 재력가 부모의 자녀들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이 두 종목은 장비와 조건 때문에 돈이 많지 않으면 하기 어려워 ‘금수저’ 아이들이 특기생으로 입학하기 좋았다는 것이다. 반면 ‘라면도 고마웠다’는 어떤 달리기 선수처럼 ‘흙수저’ 아이들은 대부분 장비 대신 몸으로 때우는 육상이나 복싱, 씨름 아니면 핸드볼이나 하키 같은 비인기 종목으로나 스포츠가 가능했다.
정기전을 치르는 고대와 연대는 말할 것도 없고 스포츠팀 성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던 사립대들의 고교 유망 선수에 대한 스카우트 경쟁은 전쟁이었다. 그러다 보니 거물급 선수의 스카우트엔 같은 팀에서 실력이 딸리는 선수 한두 명 ‘끼워넣기’가 다반사. 여기서 '학부모, 감독, 학교'의 짬짜미가 생겼다. 어쩌다 파열음이 나 감독이 뇌물죄로 감옥에 가는 사건도 다반사. 체육뿐 아니라 가격이 워낙 비싼 특정 악기를 전공하는 음대의 입시 사정 또한 대충 그러했다고 들었다.
저간의 사정이 그랬기에 중·고등학생이던 승마선수 정유라는 엄마인 ‘비선 실세 최순실’이 "내가 다 알아서 너 국가대표도 시키고, 이대도 집어넣을 테니 군소리 말고 말이나 열심히 타라"고 말했을 게 뻔하다. 자녀의 ‘1등’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한국 학부모들의 교육열은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마저도 여러 번 칭찬하지 않았던가. 나 역시 아이가 초등학교 때 아주 못된 담임 선생을 만나는 바람에 해선 안 될 짓을 모른 체 방관했던 일이 있었음을 실토한다.
말을 타는 실력이 달리는 정유라가 국가대표를 꿰차자 정유라보다 말을 더 잘 탄다고 생각하는 다른 승마 선수들이 ‘실력도 없는 게 힘있는 부모 만나서 그렇다’고 웅성거렸을 테고, 거기에 열 받은 정유라가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돈도 실력이야"라고 맞받았을 터다. 사건 초기 일부 승마 선수들이 '흙수저'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어떤 이유인지 크게 먹히지는 않았다.
물론 정유라의 그 말이 절대로 잘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 청소년들이 주고 받는 은어 섞인 문자메시지 대화 내용을 전해들은 바로는 그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정유라의 '달그락 훅, 망할 새끼' 문장에도 시비의 말이 많았는데, 주구장창 교실 밖에서 말만 탔던 체육특기생에게 말이 되는 문장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 아닌가?
만약 정유라가 중∙고등학교 선생이나 이화여대 교수들에게 ‘당신 내게 거슬리면 엄마한테 일러서 혼내줄 것’이란 투의 협박을 했다면 그건 명백히 죄가 된다. 그러나 정유라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말만 열심히 탔을 뿐, 그녀를 '매개'로 권세와 돈에 빌붙어 부정한 이득을 취하려는 못된 어른들이 '달그락 훅, 달그락 훅··· 해도해도 안 되는 망할 새끼들···'이란 그녀의 리포트 메일에 "앗, 감사합니다"로 답장을 보낼 만큼 알아서 기었다면, 그건 짬짜미로 적폐의 단맛을 보려 했던 못된 어른들 탓이지 정유라의 탓이 아닌 것이다. 그 어른들 중 가장 나쁜 사람은 자기 자식만을 위해 교육의 공정성과 대학의 명예를 짓밟은 권력자 최순실. 다음이 구속된 이화여대의 '근엄하신 교수님'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다른 학교들은 안 그런가? 왜 우리만 갖고 그러냐'며 억울해한다는 것의 의미는 도대체 뭘까?
그러니 각설, 정유라는 역설적이게도 '대형입시비리'와 "돈도 실력이야"란 발언으로 '교육공평'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역린을 뽑음으로써 광장의 촛불을 대대적으로 발화시켜 본의 아니게 시민 민주주의 의식을 진일보시키는 데 '음으로'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됐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훈장을 주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그래, 그러니까 유라야! 이번 일을 교훈 삼아 너만큼은 너의 어머니가 널 키웠던 것처럼 그렇게 네 아들을 키우지는 말기 바란다. 화무십일홍도 꼭 기억하고. 그게 네 어머니가 너에게 ‘수인번호 628번’으로 솔선수범하신 큰 가르침이 아닐까, 나는 그리 생각한다. 성 밖의 배 안에 갇힌 304명 고귀한 생명들은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하고 수장시켰던 우리들 적폐의 어른들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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