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칼럼-중국정치7룡] 시진핑의 盟友, 이름도 출세도 편지에서 편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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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18-02-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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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⑭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리잔수(1)

리잔수 상무위원.[사진=신화통신]

용사는 말 위에서 만리를 헤매고 지사는 천수의 시를 짓다가 눈물을 흘리네. 한 밤의 추풍이 송화강 달을 스치면 흔들리는 두세 점 등불이 고향이로구나. <리잔수(栗戰書) 강반사향(江畔思鄕)(1)*>

“나는 스포츠와 액션물과 경극 TV시청을 좋아하지만, 운동에 소질이 없고 노래는 거의 음치수준이다. 내 성격은 마치 두 얼굴을 가진 것 같다. 어떨 때는 호방하나 어떨 때는 소녀감성이다. 원래 내 꿈은 정치가가 아니라 신문기자였다. 지금도 나를 아마추어 기자라고 생각한다." <리잔수 헤이룽장성 성장 시절 한 인터뷰에서 고백(2)*>

◇ 그의 이름에 담긴 슬픈 사연

리잔수(栗戰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오랜 맹우(盟友)이자 신뢰하는 친신(親臣)이다. ‘좌(左) 잔수, 우(右) 후닝’이라고나 할까? 시진핑 집권 1기 지난 5년간 시 주석은 국내외 출장시 항상 그의 왼편에는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대통령 비서실장 격)이자 최고 친신인 리잔수를, 오른편에는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이자 최고 책사인 왕후닝을 대동했다.

리잔수는 1950년 8월 허베이성 남서부 핑산(平山)의 산간오지 벽촌에서 3대가 항일열사와 공산혁명전사의 선혈로 물든 ‘홍색가문’(紅色家門)에서 태어났다. 특히 그의 넷째 종조부 리자이원(栗再温, 1908~1967)은 베이징대학 재학시절 1927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이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 혁혁한 공로를 세워 산둥성 부성장, 당서기를 지낸 공산중국의 거물급 혁명열사이자 고관대작이다. 하지만 리잔수의 생애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람은 리자이원이 아니다. 그의 숙부 리정퉁(栗政通, 1923~1949)이다.

14세 어린 나이에 항일전쟁에 참전한 리정퉁은 1949년 국공내전 승리를 앞두고 산시(山西)성에서 전사했다. 꽃다운 나이 26세였다. 리잔수의 부친 리정수(栗政修, 1920~1998)는 동생의 시신을 한 달여를 걸려 고향으로 운구해 장사를 치렀다. 리정퉁은 그의 짧은 생명을 불태운 십여년간 '전선편지'를 고향에 보내왔다.

마지막 '전선편지'에는 사진 몇 장이 동봉되어있었다. 맨 마지막 추신은 아래와 같다.

“이 사진들은 내 마음 한 조각의 징표다. 인민을 위해 싸우다 마지막 피한방울을 쏟을 적에 포연으로 감싸인 나의 혼백이 고향 부모형제 친지들과 표표히 떠돌기를 바란다.”

리정수는 동생이 전사한 이듬해, 태어난 첫 아들에게 ‘전선편지’라는 뜻의 ‘잔수(戰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전장에서 요절한 동생을 애도하는 마음이었다.(3)*

2001년 리잔수는 리정퉁 순국 52주년에 즈음하여 장편의 추도문을 썼다. 그 중 한 구절에 “그가 마지막 피한방울을 쏟을 적에 나는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영웅이자 우상이다.”라고 썼다. 

◇편지 1통이 뇌물 1만금보다 효과가 좋아

1972년 허베이성 스자좡(石家庄)지역 재경무역학교(초급대학) 물가학과를 이수한 리잔수는 스자좡 지역 상업국 판공실(사무처)에 배치받았다. 거기서 그는 간사, 부주임으로 승진해 허베이성 스좌좡 지역 당위원회 판공실 자료과 간사를 맡으면서 주경야독으로 허베이사범대학교 야간학부 정치교육학과를 나왔다.

1980년대초 중국 대륙에는 공산당의 영도와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사조가 횡행했다. 이러한 사조에 혁명가문 출신 리잔수는 강한 반감을 품었다. 그는 ‘사회주의가 좋아(社會主義好)’ 라는 대표적 혁명가요를 부르지 않는 풍조를 개탄하며 후야오방(胡耀邦) 당시 총서기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그는 중국 각계각층의 행사때 ‘사회주의가 좋아’ 제창을 의무화할 것을 제안했다. 또 원래의 가사 “우파분자(마오쩌둥 시절 덩샤오핑의 개혁파를 지칭했던 용어)가 꾀하는 반대는 반대가 될 수 없어” 를 “반동분자(반 개혁파)가 꾀하는 반대는 반대가 될 수 없어”로 개사할 것을 건의 했다.

편지는 중앙선전부에 접수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리잔수의 건의대로 개사된 ‘사회주의가 좋아’를 각계각층의 행사때 제창을 의무화한다는 기사가 당중앙 기관지 인민일보 1982년 5월 26일자 4면에 대서특필됐다.

이후 리잔수의 관운은 웅비 도약했다. 이듬해 1983년 정월, 우리나라 지방공무원 7급 정도였던 33세의 관초(官草, ‘민초’에 대응한 필자의 조어)가 허베이성 우지(無極)현 당서기(군수 격)로 발령받았다. 무려 5~6계급을 한꺼번에 건너뛴 벼락 승진이었다. 

“이름도 편지, 출세도 편지, 편지에서 편지로(from letter to letter)” ‘전선 편지’라는 이름을 가진 리잔수(栗戰書)는 편지 한통으로 '어변성룡(魚變成龍)'했다. 등용문의 폭포를 단숨에 뛰어오른 잉어가 용으로 화신하여 등천하듯. 잘 쓴 편지 1통이 뇌물 1만금보다 효과가 좋았다.

◇시진핑 현서기 옆 동네 현서기

남한 면적보다 96배나 넓은 중국은 성(省)급 –지(地)급 –현(縣)급-향진(鄕鎭)급 4단계 지방행정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2018년 1월 현재 한국의 군(郡)에 해당하는 중국의 현급 행정구역은 2853개나 된다. 광활한 중국 땅에서 인근 현 출신이거나 인근 현에서 공부하거나 일한 경력이 있다면 이는 매우 가까운 지연관계라고 할 수 있다.

리잔수가 자신이 건의한대로 개사된 ‘사회주의 좋아’를 들으면서 당서기로 취임한 우지현의 동쪽에는 정딩(正定)현이 접해있는데 그곳엔 때 마침 시진핑이 당서기로 재직하고 있었다.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 비서(현역 중령)에서 농촌지역 고을의 수장으로 내려온 시진핑은 나이가 세 살 위인 데다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리잔수에게 많은 조언을 구했다. 혁명열사 고관대작 가문 출신인 둘은 서로 호형호제 의기투합하며 가끔씩 술자리도 함께하면서 돈독한 교분을 맺었다. <계속 ☞>



※주석

(1)*리잔수 헤이롱장성 부성장시절 (2004년 9월 28일)중추절 밤에 하얼빈시내를 흐르는 쑹화(松花)강가에서 고향을 그리면 쓴 시, 이 [강반사향]으로 그는 ‘시인성장’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2)*리잔수 헤이롱장성 성장시절 (2008년 12월 19일) 홍콩의 봉황TV 인터뷰에서

(3)*[주간조선] 창간특집(2017.10.28.)은 "잔수(戰書)’라는 이름은 ‘선전포고서’란 뜻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런 호전적인 이름이 많다."라고 오보하고 있다. 리잔수의 생년월일 1950년 8월 30일생, 중국의 한국전 참전은 그해 10월 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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