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82] 왜 대칸이 두 명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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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1-1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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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쿠빌라이, 대칸 취임

[사진 = 경화도와 북해공원]

장강에서 돌아온 쿠빌라이의 세력들은 지금 북경 근처 중도의 경화도(瓊華島)에 모였다. 그리고 다음 수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카라코룸에 있는 아릭 부케는 몽골본토의 총독이자 카라코룸의 유수로서 쿠빌라이에게 뭉케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쿠빌라이는 아예 그럴 생각이 없었다. 형 쿠빌라이 측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아릭 부케도 위기감을 느끼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뭉케의 세력을 불러 모으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한 준비에 들어갔다.

[사진 = 금련천 초원]

중도 근처 경화도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쿠빌라이 진영으로는 더 많은 세력들이 몰려들었다. 대세가 자신의 쪽으로 기운다고 느낀 쿠빌라이는 봄이 되자 자신이 세운 도성 개평부가 있는 금련천 초원으로 돌아갔다. 쿠빌라이 진영은 아무리 세력이 우세하다고 하더라도 모든 지파(支派)들이 참석한 쿠릴타이에서 대칸으로 선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정통성 여부를 제쳐두고 일단 자신들의 세력만으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자리에 오르는 선수를 치기로 했다. 1260년 6월, 금련천 초원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쿠빌라이는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쿠빌라이 나이 46살로 유목민으로서는 거의 노년에 해당하는 나이였다.

▶ 두 명의 대칸 시대

[사진 = 대칸의 취임]

쿠빌라이가 서둘러 대칸의 자리에 올랐지만 이 선출은 칭기스칸 가문의 법통에 따르면 사실상 무효였다. 대칸을 뽑는 예케 쿠릴타이는 칭기스칸 일족의 네 울루스의 대표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열려서 전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비로소 그 효력이 발생한다. 쿠빌라이처럼 자신의 세력만으로 개최한 쿠릴타이는 엄격히 말하면 쿠릴타이라고 할 수 없었다.

쿠빌라이의 대칸 취임은 그 것이 비록 불법이라 하더라도 아릭 부케 진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릭 부케는 자신도 대칸을 칭하는데 망설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몽골 본토에 체류하고 있는 세력을 모아 카라코룸 근처 강변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쿠빌라이가 대칸 임을 선언한지 한 달 만에 아릭 부케도 스스로 대칸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사진 = 북해공원(베이징)]

이로서 두 명의 대칸이 존재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몽골본토를 책임지고 뭉케의 장례식을 주관하는 아릭 부케가 정통성을 가진 대칸이었다. 쿠빌라이는 반란자에 불과했다. 당시 킵차크한국의 지도자 베르케는 비록 긴급 개최된 쿠릴타이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아릭 부케에 대한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차가타이家와 오고타이家, 동생 훌레구가까지도 아릭 부케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 필연적인 형제간 제위전쟁
두 명의 대칸이 대립하는 상황은 필연적으로 권력 장악을 위한 형제간의 피비린내 나는 격돌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4년간의 제위 계승전쟁은 초반부터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닌 쿠빌라이 진영의 우세로 시작됐다. 우선 전쟁에 나선 두 진영 사람들의 정신적인 자세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동방 3왕가 등 쿠빌라이 진영에 가담한 사람들은 제위 계승전쟁에서의 패배는 곧 자신들의 가문이 몰락하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진 = 카라코룸 추정도]

때문에 죽기 아니면 살기의 자세로 나섰다. 이에 비해 아릭부케 진영에 가담한 옛 뭉케 정부의 인물들은 아릭부케의 대칸 즉위를 반대하지 않는 정도의 소극적인 가담자가 대부분이었다. 필사적인 자세로 나선 사람은 아릭 부케 일가를 제외하면 얼마 되지 않았다. 전투력 자체를 놓고 봐도 쿠빌라이 진영이 우세했다. 여기에 중국이라는 풍부한 물자를 지닌 보급기지를 배후에 둔 쿠빌라이 진영과 중국이라는 기존의 보급 통로가 끊긴 채 카라코룸에 머물고 있는 아릭 부케 진영의 전력차이는 장기전이 될수록 더욱 벌어졌다.

▶ 고립무원 상태에 빠진 아릭 부케

[사진 = 폐허가 된 상도 성터]

힘의 균형이 점차 동방의 쿠빌라이에게 기우는 것이 드러나자 아릭 부케 진영에 잠재된 불안요소들까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쿠빌라이 진영이 화북지역에서 카라코룸으로 가는 물자의 공급로를 차단하자 아릭 부케 진영은 점점 더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됐다.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아릭 부케는 물자조달을 요청하며 차가타이가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뭉케 정권의 등장과 함께 거의 몰락하면서 복수심을 감추고 있었던 차가타이가는 오히려 쿠빌라이와 손을 잡고 아릭부케 정권 타도에 나섰다. 아릭 부케는 앞뒤로 적을 만난 꼴이 됐다. 할 수없이 아릭 부케는 카라코룸을 버리고 이웃 차가타이가의 본거지인 일리 지역으로 들어가 그 곳을 장악해 버렸다.
 

[사진 = 몽골군 지뢰폭탄]

일리는 지금의 중국 이녕(泥濘)으로 카자흐스탄과의 국경지역에 있는 도시다. 차가타이군의 일부는 옛 호레즘 지역으로 달아났다. 일족의 영토를 점령한 것만 해도 할아버지 칭기스칸의 지침을 위반한 것인데 아릭 부케는 여기에다 포로로 잡은 차가타이가의 장졸들을 거의 모두 죽여 버리는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다.

이 어처구니없는 행위에 아릭 부케 진영의 관리들까지 점차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세력이 멀어지면서 아릭 부케는 고립무원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263년 봄부터 일리계곡에 심한 기근이 들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 반란자에서 승리자로

[사진 = 몽골군 전투]

이제 아릭 부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항복 밖에 없었다. 1264년 7월 얼마 되지 않는 세력에 이끌려 아릭부케는 쿠빌라이 진영에 투항했다. 4년에 걸쳐 대권을 놓고 벌인 형제간의 골육상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역사는 몽골제국의 5번째 대칸이 아릭 부케인지 아니면 쿠빌라이인지를 놓고 입장에 따라 엇갈린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비록 대칸으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했지만 정통성이라는 측면에서 아릭부케를 다섯 번째 대칸으로, 쿠빌라이를 여섯 번째 대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우세한 것 같다. 정통성을 가진 정부가 타도되고 쿠데타로 일어선 정부가 권력을 장악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대권 다툼에서 승리한 상황에서 그런 것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진 = 초원의 길(하르잠)]

어떤 면에서 보면 몽골 초원 통일 당시 케레이트 옹칸의 보호 아래 힘을 키운 뒤 옹칸을 제압하는 반란을 통해 승리자가 된 할아버지 칭기스칸(테무진)의 기질이 쿠빌라이에게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쿠빌라이는 동방 진출의 근거지에 자신의 터전을 마련해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 그 동방 세력을 등에 업고 대칸의 자리를 움켜진 것이다. 동방으로 향하는 금련천 초원에 발을 딛으면서 키웠던 쿠빌라이의 꿈은 이처럼 13년 만에 성공적으로 첫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쿠빌라이 정권은 초원보다는 동방에 치우쳐져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이 정권이 나아갈 방향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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