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오늘, 딱 한 잔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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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전 국회 부대변인)
입력 2018-09-1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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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



“형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결국 우린 적이야.”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을 보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대사다. 당시 필자 나이는 서른다섯. 김광석이 ‘서른 즈음에’에서 말한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였다. 심장은 뜨거웠고 피는 따뜻했던 시절이다. 박찬욱 감독은 체제와 분단의 아픔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영화는 시종일관 따뜻하지만 차가운 현실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적이며 슬프다. 남한 이수혁 병장과 남성식 일병, 북한 오경필 중사와 정우진 전사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분단 조국을 살아가는 청춘들이다. 비록 서로 다른 군복을 입었지만 한민족, 젊음이라는 이유로 이념과 오랜 분단 세월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짧은 만남, 우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JSA는 남과 북이 날카롭게 대치하는 최전선이다. 이곳에서 네 명의 청춘은 술을 나눠 마시고, 김광석의 노래를 함께 듣고, 닭싸움을 하며 형과 동생으로 호칭한다. 유쾌한 동화는 죽음과 자살, 파국으로 마무리된다. 분단이라는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영화를 처음 본때로부터 18년이 흘렀다. 2000년 가을 개봉한 공동경비구역 JSA를 떠올린 이유가 있다. 3차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다. 어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은 평양 순안공항에서 뜨겁게 포옹했다. 올해 들어서만 세 번째 만남이다. 언론은 파격적인 환대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형식을 뛰어넘는 파격보다는 서로 예우하며 배려하는 진실함이 감동을 안겼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느꼈던 감동과 여운이 그대로 느껴졌다. 김정은 위원장 부부의 환대와 의장대 사열, 예포 발사 그리고 오픈카퍼레이드까지 진전된 환대로 가슴이 열렸다. 문 대통령 숙소인 백화원에서 두 정상이 주고받은 대화는 진실하고 따뜻했다. 장성한 아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난 부모를 모시는 정성과 다르지 않았다. 세계로 전파된 만남은 한 편의 영화였다.

앞선 4.27 판문점 만남에서도 남북은 환호했다. 남북 정상들은 신록이 우거진 봄날, 그 초록보다 신선한 감동을 선물했다. 도보다리에서 30분여 환담은 그 어떤 연출된 장면보다 아름다웠다. 김정은 위원장을 지긋이 바라보는 문재인 대통령 눈에는 공감과 안타까움이 스쳤다. 안타까움은 핵무장 완성이 가져올 파국을 염려하는 것으로 읽혔다. 또 비핵화와 국제사회로 나오려는 의지를 확인한 공감이었다. 비록 대북압박에 공조하고 있지만 파국을 막아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이다. 세 차례 이어진 남북 정상 만남은 영화 공동경비구역이 비현실적인 동화만은 아님을 환기시켜줬다. 김정은 위원장은 “하나의 언어, 하나의 전통, 하나의 핏줄”이라는 말로 남과 북이 하나임을 강조했다. 체제와 이념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언제든 가슴을 풀어 헤치고 만날 수 있는 이들이 남과 북이다.

영화 속에서 연합국 사령관은 한반도 상황을 말한다. “한반도는 마치 겨울 숲(Winter Forest)라고 할 수 있지. 조그만 불씨 하나라도 큰 화재가 될 수 있는 곳 말이야.” 남북 대치 국면이 강대 강일 때는 이 말이 틀리지 않다. 지난 9년 동안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전쟁 위기감이 한껏 고조됐다. 철책선과 NLL을 두고 팽팽한 긴장감이 가시지 않았다. 연평도 포격, 금강산 관광객 피살, 개성공단 폐쇄 그리고 문재인 정부 초기 전쟁 위기까지. 남북은 언제든 작은 성냥불 하나로도 온 산을 태워버릴 바싹 마른 겨울 산이다. 여기에 럭비공 같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 전쟁 위기설에 좋은 소재였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 촉진자 역할이 빛을 발했다. 이제는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정착을 기대하게 됐다. 남북관계에서 정략적인 판단을 거두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반도 8천만 민족의 생명이 담보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4.27 판문점 비준 동의, 평양 방문을 정략적으로 계산했다는 비난이 나온다.

다시 영화 이야기다. 남한 이수혁 병장은 명사수다. 그는 북한 정우진 전사에게 사격술을 가르친다. “실전에서는 말이야, 뽑는 속도 같은 건 중요치 않아. 얼마나 침착한가! 얼마나 빨리 판단하고 대담하게 행동하는가! 이게 다야."라고 한다. 비핵화, 종전선언, 항구적인 평화정착, 공동번영. 우리 앞에 놓인 숙제다. 얼마나 담대하게 행동하느냐에 답이 있다. 물론 디테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통 큰 결단은 트럼프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에게만 요구되는 게 아니다. 한반도 평화와 공동번영이란 명제 앞에 우리 정당들도 통 크게 결단할 때다.

진보, 보수도 뛰어 넘자. 담대한 결단이 있을 때 평화도, 경제발전도 가능하다. 북한 오경필 중사의 멋진 대사. “자, 우리, 광석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우.” 우리도 진보, 보수를 뛰어넘어 오늘 딱 한 잔만 하자. 성공적인 정상회담과 비핵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이념이고 체제고 다 필요 없어. 결국 우리는 하나야”로 바뀔 그날을 위하여!

/객원 논설위원(전 국회 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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