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의 해우당 일기] 강은 풀리고, 손님은 오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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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국제뉴스국 국장
입력 2018-03-1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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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의 해우당 일기]

 

[사진=김지영 초빙 논설위원(동양대 초빙교수 · 전 경향신문 편집인)]




무섬마을에 봄이 돌아왔다.

매화나무, 산수유는 가지마다 곧 꽃망울이 터질 듯하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 엄혹한 시절을 견디고 피는 올봄의 꽃들은 더욱 화사할 것이다.

그렇다고 무섬에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는 것이 꽃들은 아니다. 마을을 감싸고 도는 내성천이야말로 봄의 전령이다. 음력 정월, 설이 지나고 우수가 다가올 때 모래강은 비로소 얼음이 풀리고 물과 모래는 함께 여울져 흐른다.

그맘때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이면, 내성천은 ‘쩡-, 쩡-’하며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를 낸다. 강이 어두움 속에서 혼자 몸을 푸느라 내는 울음은 적막한 산골에 퍼져나가고, 사랑채에서 잠자는 내 이마도 흔들어 깨운다.
오래전, 아마도 1950년대 이전의 이야기가 아닐까. 마을 어른들에게 들으면, 이렇게 내성천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고 나면, 그 사나흘 뒤엔 어김없이 방물장수(박물장수; 보따리잡화상)가 마을 어귀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때는 말 그대로 산간오지였던 이곳의 주민들에게 내성천의 얼음 갈라지는 소리와 방물장수의 출현은 지리한 겨울이 가고 드디어 봄이 왔음을 알리는 표징이었던 것이다.

요즘 방물장수 존재는 구경하기조차 어렵지만, 봄이 오면 방물장수 대신 많은 손님들이 찾아온다. 우선, 무섬마을 관광객이 부쩍 늘어난다. 또 해우당을 찾아오겠다며 “가도 좋을런지···” 묻는 지인들도 많아진다. 내가 쓰고 있는 ‘해우당 일기’를 비롯해 신문·방송·SNS 등 각종 매체에 무섬마을에 관한 글이 갈수록 자주 게재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집에 찾아 오겠다는 손님이 나타나면 솔직히 걱정부터 앞선다. 우선 나는 해우당에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처지가 아니다. 혼자 자취생활을 하며 서울과 무섬을 수시로 오간다. 밥도, 설거지도, 빨래도, 청소도, 모든 살림살이를 내 손으로 하고 있다. 접빈객(接賓客)의 체제가 전혀 안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손님들의 청을 마냥 거절할 수도 없어, 결국은 서로 흉허물이 없는 손님들중 소수의 청만 받아들인다. 낯선 손님들을 받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손님들이 불편해 하거나 나중에 흉을 볼까 두렵고, 그 때문에 조상들이 물려준 ‘해우당’ 현판에 누가 될까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불편해도 괜찮다”며 꼭 재워달라는 분도 있지만 서툴고 거친 손길로 손님을 접대해야하는 나로서는 그게 아니다.

격의가 없는 손님들도 어렵기는 대동소이하다. 사실 민박업을 하며 관리하는 집이 아니면 규모가 크고 방이 많을수록 손님을 받기가 쉽지 않다. 사람도 없이 비어있는 많은 방과 집안팎을 평소 정갈하게 유지하는건 보통 일이 아니다. 온돌방은 청소와 환기뿐 아니라, 자주 군불도 때줘야 한다. 방이 10여개 있는 해우당도 마찬가지다.

한 두 개 방에 손님을 받더라도, 모든 방과 집안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치우고 침구류에 집기류까지 말끔하게 정리하는 대청소를 갑자기 해야 한다. 손님들은 으레 전통 고택의 안팎을 세밀하게 ‘견학’하려 하기 때문이다.

손님들에게 정말 죄송한 건 상차림이다. 지금까지 많을 때는 18명의 손님 상까지 차려보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무례였던 것 같다. 또 나에게는 무리한 ‘작전’이었다. 며칠 전부터 온 집안을 청소하고 손님들이 주무실 방에 군불을 때는게 우선이다. 그리고는 장보기 리스트를 정하고 장을 본다. 어차피 손님들의 미각을 감동시킬 재주는 없으므로 ‘적당한 선’에서 조처를 한다. 여러번 하다 보니 메뉴는 대충 윤곽이 잡혀있다. 상차림에 따라 그릇류도 미리 준비해 놓아야한다. 술과 안주가 우선이다. 술은 소주와 맥주, 막걸리가 기본이며 때로는 손님들이 양주나 포도주, 배갈 등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잔은 5~6가지를 준비해야한다.

안주는 ‘영주 문어’가 필수. 영주 문어의 맛에는 너나없이 감탄한다.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문어는 내륙 산골인 영주의 ‘특산물’이다. 동해안에서 열차편으로 금방 영주에 공급되는 문어는 삶는 기술과 숙성시키는 기술로 인해 ‘영주 문어’로 다시 태어난다. 영주 시내에는 문어집이 즐비하다.

나는 마트에서 고기류나 횟거리, 밥과 생선탕 재료, 채소와 과일, 젓갈류, 몇가지 소스, 음료수, 차, 디저트 등등을 사서 나의 레서피에 따라 요리를 하고 상을 차린다. 내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는 기준에서 ‘선택된’ 손님들은 험한 상차림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마시고 먹는다.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처음 깨닫는 것도 많았다. 가령 상 차릴 때와 상 치울 때, 그 기분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상차림은 머리가 복잡하고 힘은 들어도 어떤 희망같은게 있는데 비해, 상치우기는 희망이라곤 없이 그저 인내를 갖고 차근차근 의무를 해나가야하는 느낌이랄까.

밤늦게 손님들이 돌아간 뒤, 산더미같은 그릇과 음식물을 치우는 일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나 역시 손님들과 함께 즐긴 탓에 취기도 만만치 않다. 한번은 그릇과 빈 잔들을 쟁반에 받쳐들고 정지로 가기위해 방에서 댓돌로 내려서다 발을 헛디뎌 ‘와장창’한 적도 있었다. 설거지는 아무리 밤이 늦더라도 반드시 해놓아야 한다. 설거지를 다음날로 미루고 그릇과 음식을 정지 부근에 방치해두면 음식냄새를 맡은 동네고양이들이 몰려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의 손님 접대 과정에서도 나는 접빈객이 왜 중요하고도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물적 기반과 안목은 물론이지만 배려와 인내심, 심리적 균형감까지, 그것은 간단하지 않은 종합수련, 또는 종합예술이었다. 그리고 내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올봄부터는 무례와 무리를 하지 않기로 했다. 훨씬 부담이 덜한 손님들로 ‘엄선’해 훨씬 ‘소박’한 상차림을 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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