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➁] ‘경극 DNA가 흐른다’…최초의 중국영화 ‘정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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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철 기자
입력 2017-06-2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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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이징 한 사진관서 탄생…원소스 멀티유스 원조격

경극인지 영화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정군산'의 한 장면[사진 출처 = 바이두]

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1905년, 중국 최초의 영화 ‘정군산’이 베이징(北京)에서 탄생했다. 영화를 처음 상영한 도시는 상하이(上海), 영화를 직접 만든 도시는 베이징이었다. 중국을 드나들던 서양 사람들이 베이징에도 영화를 가져왔다. 신기한 그림자극을 구경하던 중국인들은 “나도 영화를 찍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됐다. 그 ‘욕심’을 실현한 사람이 바로 런칭타이(任慶泰)였다.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공부에 뜻이 없었던 그는 지금의 선양(瀋陽)인 펑티안(奉天)과 상하이 등의 사진관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1874년, 24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1892년엔 베이징으로 돌아와 ‘펑타이(豊泰) 사진관’을 차렸다. 자신의 이름과 자(字)인 징펑(景豊)에서 각각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든 상호였다. 사진 현상만 하던 그는 움직이는 사진을 만들고 싶어했다.

런칭타이 또한 영화는 연극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을 찍을까하는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경극 배우인 탄신페이(譚鑫培)를 사진관 뒤뜰로 모셔왔다. 탄신페이는 삼국지에서 황충 장군이 조조군을 물리치는 전투를 묘사한 경극 ‘정군산’에서 황충 역을 맡고 있었다. 그를 경극 무대 복장 그대로 카메라 앞에 세웠다.

카메라는 약 20분 동안 돌아갔다. 탄신페이의 경극을 그대로 재현한 영화가 탄생했다. 그렇게 런칭타이는 중국 최초의 영화감독이 됐고, 탄신페이는 최초의 영화배우가 됐다.

영화 촬영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카메라에 대한 공포도 심했다. 펑타이 사진관에는 10여명의 점원이 있었다. 모두 스태프로 동원됐지만 누구 하나 카메라를 만지려 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카메라는 쉽게 폭발할 수 있는 위험물로 여겨졌다.

1904년, 실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의 칠순 잔치 때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가 필름과 영사기를 선물했다. 영화를 상영하던 중에 화재가 발생했다. 영사기를 불길한 물건이라고 생각한 서태후는 궁내에서 영화 상영을 금지했다.

영사기 안에서 돌아가던 필름의 마찰열이 일으킨 사고였다. 정군산이 만들어진 뒤 일이긴 하지만, 1906년에도 특사로 유럽에 갔던 관리들이 가져온 영사기가 상영 도중 폭발해 사람이 숨지는 사고도 있었다.

카메라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위험한 물건이기도 했다. ‘영화감독’ 런칭타이는 하는 수 없이 카메라를 고정한 채, 스태프들을 수 미터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영화의 움직임은 네 가지 경우다. 카메라와 피사체가 모두 고정된 경우, 카메라는 움직이고 피사체는 고정된 경우, 카메라는 고정되고 피사체는 움직이는 경우, 카메라와 피사체가 모두 움직이는 경우. 정군산은 그 중 세 번째 방식으로 촬영됐다.

피사체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한 카메라는 프레임 안에서 안정된 구도로 배우를 찍지 못했다. 머리가 잘려나가기도 하고, 손이 잘려나가기도 했다. 소품을 일일이 쓰지 않고 얼굴 분장이나 손동작으로 상황을 묘사하는 경극에서 배우의 얼굴이나 손이 프레임 밖으로 나가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군산은 중국 최초의 영화로 기록됐다.

중국인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뤼미에르가 발명한 서양영화는 주로 일상의 모습을 ‘기록’하는데 치우쳤다. 서양영화와 달리 중국영화는 ‘예술’을 찍었다는 것이다. 서양영화의 기원이 다큐멘터리적인 기록에 있다면, 중국영화는 예술성을 높이 샀다. 이는 영화를 연극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던 인식과 무관치 않다. 실제 중국에서는 이후 연극영화가 번성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영화의 30~40%는 연극영화였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그대로 찍거나, 연극 배우들을 데리고 야외 로케를 나가 촬영하기도 했다. 이들을 연극영화, 중국어로는 ‘희곡편’(戱曲片)이라고 부른다.

중국영화 역사에 있어 희곡편의 공헌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이 크다. 오늘날에도 희곡편 촬영에만 몰두하는 감독들도 적지 않다. 영화가 비록 서양에서 들어왔지만, 자신만의 이야기 전통과 접목함으로써 토착화를 시도한 중요한 사례다.

이로써 중국의 이야기는 신화와 전설, 역사, 소설, 연극, 영화 등으로 이어지게 됐다. 삼국지가 대표적이다. 역사에서 비롯된 이야기는 소설이 되고 연극이나 영화를 거쳐 변모해왔다. 오늘날 ‘문화원형의 다원화’를 나타내는 개념인 ‘OSMU(One-Source Multi-Use)’가 수 천년에 걸쳐 거듭돼 온 것이다.

런칭타이는 천안문 앞에 중국 최초의 영화관인 대관루극장(大觀樓影戱院)도 건립하고 매년 영화를 1편씩 찍었다. 그러나 안타깝게 1909년에는 사진관에 불이 났다. 그 때까지 런칭타이가 찍었을 5편 이상의 영화 필름은 모두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안타까운 화재로 런칭타이와 정군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정군산은 스틸인지 아닌지도 정확하지 않은 사진 한 장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일각에서는 정군산과 관련해 ‘정말 최초의 중국영화가 맞느냐’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대다수의 중국인은 자신의 예술과 서사 전통을 계승한 이 영화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1905년은 중국영화 역사의 원년으로 기록되고 있다.

중국 최초의 영화 '정군산'을 찍은 사진사 런칭타이[사진 출처 = 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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