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영상톡]“미투,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것”..‘히든 워커스’ 코리아나미술관 개관 15주년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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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성 기자
입력 2018-04-04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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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아나 앙굴로 작가의 ‘유토픽 네그로]

성폭력·성희롱 고발인 '미투(#Me Too·나도 당했다)'가 확산되면서 페미니즘(feminism·성평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성별 임금 격차에 항의하고 기업들에 이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페이 미투(#PayMeToo)' 운동이 일어나는 등 전반적인 남녀차별 해소 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15년간 '여성'과 '여성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전시를 진행해온 코리아나미술관(관장 유상옥·유승희)이 보이지 않은 여자들의 노동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코리아나미술관이 개관 15주년을 맞아 6월 16일까지 여성들의 '숨겨진 일'을 조명하는 기획전 '히든 워커스'(hidden workers)를 연다.

국내외 작가 11팀이 영상과 사진, 설치, 자료 등 총 14점을 전시한다.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의 '하트포트 워시: 닦기/ 자국/ 메인터넌스']


코리아나미술관 지하 1층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니 '히든 워커스'라는 전시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영문 대문자 'HIDDEN WORKERS'가 마치 워터마크처럼 보인다. 이 'HIDDEN WORKERS'를 제대로 보려면 정면이 아닌 대각선 방향에서 봐야 한다.

이러한 재밌는 장치 하나로 이 기획전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여성의 가사와 돌봄 노동은 생산적인 일을 하는 남자들을 돕는, 부차적이고 큰 가치가 없는 일로 가주되곤 한다. 자연스레 여성의 노동은 사회적 시야에 잡히지 않게 된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도 변했지만 여전히 가사와 육아 그리고 돌봄 노동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자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히든 워커스’는 이렇게 가려진 여성의 노동에 집중한다. 여성 작가들은 본인이 직접 노동의 당사자가 되어 작품에 등장하기도 하고 일에 대해 각자 취한 입장들을 작품에서 풀어낸다.

행위예술과 여성주의 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의 작품이 국내 최초로 전시된다.
‘메인터넌스 예술을 위한 선언문1969!’(1969)은 작가의 평상시에 하던 가사노동이 예술 활동임을 선언한 글이다. 그 옆에는 ‘하트포트 워시: 닦기/ 자국/ 메인터넌스’(1973)라는 각각 4시간 동안 진행했던 행위 예술이 사진으로 걸려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미술관 밖을 청소하고 있다. 집안에서 하는 가사 노동(유지관리)을 미술관에서 함으로써 여성 노동을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작업을 오랫동안 진행해 온 마사 로슬러의 ‘지배와 일상’ 작품도 눈에 띈다.
이 작품은 영상과 소리로 구성됐다.
영상을 보면 작가는 집안에서 라디오를 틀어 놓고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라디오에서는 미술에 관한 인터뷰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이를 돌보는 일과 미술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한때 섞여서 일어나고 있다. 두 가지 일 중에 어떤 일이 더 중요하다고 서열을 매길 수 없다는 의미를 담았다.

[임윤경 작가의 작품 ‘너에게 보내는 편지’]


임윤경 작가의 작품 ‘너에게 보내는 편지’(2012-14)는 육아를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작가는 미국 유학 시절에 베이비시터로 일하면서 보모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이 친구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비디오 설치 작품으로 독서실같이 칸막이가 있는 곳에서 한 명씩 헤드셋을 끼고 감상할 수 있다.
비디오 내용은 보모들이 각자가 돌봤던 아기에게 영상 편지를 보내는 형식이다.
아이를 돌보면서 기뻤던 일과 슬펐던 일이 인터뷰를 통해 보인다.
여자들이 사회 진출을 많이 했지만 그 빈자리는 다른 여자들이 메꿔지고, 서비스 노동은 감정이 깊게 베기 때문에 단순히 서비스와 자본의 교환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릴리아나 앙굴로 작가의 ‘유토픽 네그로’(2001)는 흑인 여성들의 뼈아픈 과거를 과장된 분장을 통해 유쾌하게 풀어낸다.
아홉 장의 사진에서 작가는 벽지와 같은 무늬의 옷을 입고 머리는 수세미로 장식했다. 신나게 다리미질을 하는가 하면 빗자루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벽지와 같은 무늬의 옷을 입음으로써 몸이 벽과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백인 가정에서 안 보이게 일을 해왔던 흑인 여성들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출신 작가인 마야 자크의 작품에는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여성들의 숨은 노력이 담겨있다.
‘마더 이코노미’(2007) 작품에서는 한 깡마른 여자가 집안을 돌아다니며 이상한 행동을 한다.
과학수사 하는 것처럼 재보고, 적고, 기록하기도 한다. 요리하기도 하지만 집 안에는 가족이 없고 여인뿐이다.
이런 행동들은 과거 2차 세계대전 때, 집안에서 억압이 있었던 상황에서 여자들의 숨은 노력에 대한 작가의 오마주(존경의 표시로 인용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가정주부의 모습이 아닌 차갑고 계산적이고 통제하려고 했던 노력이 있었기에 암흑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혜정 김숙현 작가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


조혜정 작가와 김숙현 작가가 함께 만든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은 서비스 노동자들의 감정 노동을 퍼포먼스 형식으로 풀어낸 24분짜리 영상이다.
이 영상에서 무용수들은 각 직업에 해당하는 옷을 입고 어려운 동작의 유지하고 있다.
기복이 없이 늘 일정한 감정을 유지해야 하는 서비스 종사자들의 마음을 어려운 안무로 치환해 보여준다.

[김정은 작가 네일레이디]


김정은 작가는 뉴욕에서 활동했던 시절 생계유지를 위해 손톱관리사(네일레이디)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네일레이디’로 이름을 붙인 이 작품에는 실제로 손톱관리를 받았던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다.
조지는 신사적인 남자로 표현했고 미셸은 진상 고객으로 표현했다.
세 개의 작품은 이름만 있고 내용이 없다. 전시 기간에 ‘레일레이디 퍼포먼스’를 하면서 만나는 관객들 손 중에 실제 이름의 손과 유사한 손을 찾아 사진을 찍어서 전시할 계획이다.

[심혜정 작가 ‘아라비아인과 낙타]


심혜정 작가는 ‘아라비아인과 낙타’(2013)라는 30분짜리 단편 영화를 내놨다.
이 작품은 우화 ‘아라비아인과 낙타’와 그 내용이 연결된다. 우화에서는 낙타가 천막에 들어와 주인을 쫓아내고 천막을 차지한다.
작품에서는 어머니를 간호하는 재중동포 아주머니가 본인 중심으로 집을 바꿔놔서 정작 딸인 작가는 어머니의 집이 낯설고 어색하다.
본인 엄마 집이지만 작가는 이방인처럼 느끼고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던 재중동포 아주머니가 오히려 여기서 더 편하게 살고 있다. 그런 이상한 대비 관계를 다뤘다.

폴린 부드리 & 레나트 로렌즈의 ’차밍 포 더 레볼루션’(2009)은 11분짜리 영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바꿔서 젠더(Gender·성)에 의해 이원화된 노동의 구조와 그 안의 불평등을 비꼰다.
남자처럼 옷을 입고 험악한 표정을 짓는 여자는 “공장에서, 가정에서, 병원에서, 극장에서, 미술관에서 경제라고 불리는 백인 이성애자와 결혼했다. 우리가 살길은 이본밖에 없다”고 외친다. 반면 말끔하게 차려입고 새와 같은 형상을 한 남자는 한량처럼 거북이를 산책시키기고 느릿느릿 어슬렁거린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뒤틀어서 남자가 오히려 말끔하고 여성스럽고 여성은 강인하고 공격적인 이미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게릴라 걸스]


1985년부터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고릴라 가면을 쓰고 익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 예술가 집단인 게릴라 걸스의 작품도 눈에 띈다.
이들은 예술계 내에서 일어나는 성차별과 권력계 비리를 폭로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거리에 붙이는 활동을 해왔다.
달러 이미지 포스터는 미국의 여성이 남자의 3분의 2밖에 돈을 못 번다는 내용이 담겼다.
노란 포스터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여성은 벗어야 하나?’라는 자극적인 질문도 있다. 이 미술관의 작품은 대부분 남성 작가의 작품이고 여성은 누드 그림의 대상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비꼬아 표현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고릴라 가면의 입술에는 항상 분홍색 립스틱이 발라져 있다.

마리사 곤살레스의 17분짜리 다큐멘터리 작품 ‘여성, 바깥 공간 점령자들’도 있다.
이 작품은 홍콩에서 일하고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가사 노동처럼 사적인 형태로 이뤄지는 노동들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게 사실, 하지만 이런 노동이 경제에서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미술관에서는 전시 외에 한 가지 특별한 퍼포먼스 진행한다.
‘그들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무임금 노동이라고 말한다’ ‘집에서 밥이나 하지’ ‘청소는 청소기가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잖나’ ‘독박유아’ 등 없어져야 할 문구들을 적어 놓고 관람객에게 지우개를 나눠줘 지우게 한다.
하지만 그 글씨들은 지우개를 열심히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일부러 지워지지 않는 글씨를 지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여성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힘들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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