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하늘에 있는 북(天鼓)도 두드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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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2-02-08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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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귀경하는 길에 고속도로 노선을 바꾸었다. 청주 교외에 사는 도반 절에 들렀다가 인근 유적지를 돌아볼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이다. 혼자라서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된다.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에 머물 때 자주 다녔던 익숙한 길 ‘단재로’가 나타났다.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 사당과 묘소가 있는 인연으로 생긴 도로명이다. 그 시절에는 매번 ‘들러야지!’ 하면서도 뭐가 그리 바쁜지 안내판만 보고 지나치기만 했다. 태극기가 도열한 작은 길로 핸들을 꺾었다. 이내 기념관 주차장이 보인다.

 

[단재영각과 묘소입구]


 단재(丹齋)는 ‘일편단심’에서 비롯되었다. 호가 말해주듯 당신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일관한 삶이었다. 묘소 자체도 당신의 인생만큼 드라마틱하다. 중국 여순(旅順·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뒤 유족들에 의해 유골은 1936년 2월 압록강을 건너 고향 마을 뒷산에 암장했다. 1941년 만해 한용운 스님(1879~1944) 등이 묘비를 주선했고 문중에서 봉분을 조성했다. 암장부터 봉분까지 고령 신씨 가문의 보이지 않는 뒷일이 함께했다. 일제강점기인지라 이로 인한 집안의 불이익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해방 후 1972년 원래 무덤자리에서 20m 떨어진 옛 집터로 이장했다. 1960년 신씨 문중에서 건립한 사당 역시 1978년 이 자리로 옮겨왔고 1981년 영정(한광일 그림)을 봉안하면서 ‘단재영각’이란 공식현판을 달게 된다. 세연을 다한 지 오십여년 만에 유택이 완성된 것이다.
 
주변은 고요하다. 기념관 역시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문을 닫았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고드미’ 마을(청주시 낭성면 귀래리)이란 우리말 이름이 정겹다. 역사적으로 올곧았던 사람들이 대대로 살았던 동네라는 자부심이 가득한 이름이다. 끝이 있으면 시작도 있듯 묘소가 있으면 생가도 있기 마련이다. 내비게이션 검색어는 대전 중구 어남동을 가리킨다. 도반 사찰의 입간판 앞은 그냥 통과해야 했다. 처음 세웠던 계획이 일그러졌다. 하긴 계획이란 변경하라고 있는 것이라고 했으니.
 
‘도리미’ 마을. 여기도 한글 이름이다. 도로명도 ‘단재로’다. 충청권에 두 개의 길이름을 만들 수 있는 이것이 바로 신채호 선생의 위엄이다. 1992년 생가터 발굴을 시작으로 1998년 완전 복원했다. 1998년 안동권씨종친회 부지 기증에 대한 감사를 담은 헌정비가 저간의 사정을 알게 해준다. 단재 선생과 삼종간인 신이호(申二浩) 여사의 기억에 따라 옛집을 복원했고 그 아들 권용민(權容民) 선생이 문중회의에서 토지기증을 이끌었다는 내용이다. 단재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공이 안동권씨와 결혼한 인연으로 진외가(陳外家 할머니의 친가. 아버지의 외가)에서 8세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그러고 보니 친가에는 묘지와 사당이 있고 외가에는 생가가 있다. 할아버지로 인하여 두 집안의 복이 고스란히 사후 손자에게 옮겨간 셈이다.

 

[단재 생가]


독립운동과 연구집필 활동의 주 근거지는 중국 북경(北京·베이징)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베이징 중법대학(中法大學) 이석증(李石曾) 교장의 도움으로 도서관을 열람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받았다. 숙소는 인근지역의 사찰이었다. 1910년대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베이징 뒷골목의 작은 사찰을 전전했다. 1918년 한국사 연구집필에 전념했던 때는 보타암(寶陀庵 1918년 절터를 알리는 비석을 세움)에서 살았고 1923년 석등암(石燈庵 어떤 민가의 대문이 석등암에서 옮겨온 부재라고 구전함)의 여행자 숙소에서 반년가량 머물며 연구에 매진했다. 1924년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서 잠시 몸을 의탁했던 관음사(觀音寺)를 포함하여 당신이 머물렀던 모든 절과 암자는 현재 재건축으로 사라졌다.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에는 서울 종로구 북촌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 집터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현재 ‘선학원’ 중앙선원이 있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이래저래 절집과 인연이 많았다.
 
위당 정인보 선생(1893~1950)은 “단재는 역사학 이외에 불교학에도 특별이 조예가 깊어 유마경 능엄경 등 모든 경전의 이해도가 당대 백의(白衣 재가불자) 가운데서 최고다. 특히 유마경을 좋아하여 벗들에게 읽어보기를 권하였으며 또 마명(馬鳴)보살이 지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깊이 연구하였다”고 했다. 또 김성숙 스님(봉선사 홍월초 제자)은 “신채호가 삼국유사를 줄줄 외웠다”고 증언했다. 특히 선생은 고려 묘청 스님(?~1135)의 서경(西京· 평양)천도론과 금나라 정벌론 그리고 1135년 대위국(大爲國)을 주창한 일을 두고서 ‘조선 일천년 이래 가장 큰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1921년 1월부터 한문으로 된 잡지 ‘천고(天鼓)’를 발행했다. ‘천고’라는 명칭도 법화경과 화엄경에서 빌려 왔다. 총 7권 가운데 1권 2권 3권이 북경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천고는 치지 않아도 필요하다면 저절로 소리가 난다는 북을 말한다. 도리천 선법당(善法堂)에 있는 “천고(하늘북)가 저절로 울리면서 그 소리가 널리 퍼졌다(天鼓自鳴 妙聲深遠)”고 했다. 방일하거나 게으름을 피울 때 저절로 울려 하늘세계에 살고있는 사람들과 천신들을 꾸짖었다는 그 북소리다. 일제강점기에 지혜로운 말씀으로 대중을 일깨웠던 당신은 스스로 천고뇌음불(天鼓雷音佛)의 화신(化身)임을 자처하신 것은 아닐까.

 

[단재총서 및 저서]


 
'천고송(天鼓頌)’ 전문을 단재기념관 입구의 돌에 새겼다. 필요한 부분 두 줄만 인용한다.
오지고천고자(吾知鼓天鼓者) 나는 하늘북 치는 법을 알지.
환이천만인기(喚二千萬人起)이천만 백성을 불러 일으켜 세우리라.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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