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계의 경제]獨‧日선 ‘代 잇는 장수기업’…한국은 ‘富 대물림’ 눈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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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철 기자
입력 2019-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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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업가치 높이기’ 주력하는 獨‧日…‘승계자금 만들기’ 급급한 韓

‘백년기업’ 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나라가 독일과 일본이다. ‘승계의 경영’이 당연시되는 이들에게 장수기업이란 국가‧지역의 대표 브랜드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약‧화학‧생명과학 기업인 머크(독일), 9대에 걸친 가족경영으로 250여년간 연필을 생산한 파버카스텔(독일), 기네스북에 오른 가장 오래된 여관인 호시료칸(일본) 등은 모두 이들 나라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기업의 대물림이 어느 곳보다 발달된 독일과 일본에서 최근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생겼다. 바로 ‘후계자’를 찾는 일이다. 경영을 이어나갈 사람을 찾기 위해 기업은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정부는 사업인계지원센터 같은 기관을 만들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안전한 승계가 투자의 지렛대 역할을 하고,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2017년 기준 독일에서 승계가 임박한 중소기업의 전체 매출은 360조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일본에서는 후계자를 찾지 못한 중소기업을 방치하면 222조원의 국내총생산(GDP)이 증발할 것으로 추산했다. 기업을 물려주는 것을 ‘부의 대물림’이 아니라 ‘승계의 경제’로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후계자 없으면 ‘찾아서’ 승계··· 대를 잇는 명품 중소기업 유지에 사활

[사진 = 아이클릭아트]


독일재건은행(KfW)이 올해 2월 발표한 ‘2018년 독일 중소기업 사업승계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까지 22만7000명의 중소기업 경영자가 사업을 후계자에게 인계할 계획을 마련했다. 이는 독일 전체 중소기업의 6%에 해당한다. 이 중 36%는 승계에 필요한 협상을 모두 완료했고, 26%는 후계자를 정해 이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보고서는 2020년까지 적어도 10곳 중 6곳(62%)이 승계 작업을 무리 없이 마무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나머지 기업이 승계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여부는 ‘후계자’의 유무가 큰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2020년까지 사업승계 계획을 갖고 있는 중소기업 중 가족이 기업경영을 이어받는 ‘가업승계’ 비중은 45%, 외부에서 후계자를 찾아 승계하려는 비중은 45%로 서로 같았다. 그런데 지난해 상반기 기준 승계 관련 협상을 완료한 중소기업 비중은 가업승계가 42%인 반면, 외부 후계자는 2%에 불과하다. 후계자 찾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인근 국가도 ‘후계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해 봄에 진행된 스위스 기업승계 분석 결과에 따르면, 승계 예정 기업 중 향후 5년 내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으로 파악된 기업은 13.4%를 차지한다. 오스트리아도 2018~2027년 중 중소기업의 29%가 승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조사돼 벌써부터 후계자 모시기에 나섰다.

‘가업’을 중요하게 생각해 자녀에게 경영을 물려주는 문화가 일찍 자리잡은 일본도 기업승계에 변화가 감지된다. 친족에게 사업을 인계한 중소기업 비중이 90%를 웃돌던 과거와 달리, 2017년 기준 가업(친족)승계 비중은 40% 아래로 떨어졌다. 일본의 신용조사기관 데이코쿠데이터뱅크(TDB)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일본 기업의 후계자 부재율은 66.4%에 달한다. 그렇다 보니 일본은 아예 ‘사업인계지원센터’를 운영하며, 변호사‧공인회계사 등이 중소기업 승계 관련 상담을 횟수 제한 없이 무상으로 상담해주고 있다. 심지어 후계자 후보가 될 인재를 매칭해주는 ‘후계자인재뱅크’를 만들어 기업승계를 적극 돕는다.

◆‘승계-투자-고용-성장’ 선순환··· 승계의 경제

지속적으로 이익을 내며 성장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우수 중소기업은 후계자가 없으면 폐업하거나 다른 기업에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 기업 가치가 떨어진다는 얘기다. 세계 각국의 1세대 창업자들의 은퇴 시기가 몰리면서 알맞은 후계자가 부족한 점도 ‘후계자 전쟁’을 촉발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특히 각국 정부가 나서 승계작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건 ‘기업승계’가 투자‧고용 등 경제에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2017년 기준 승계가 임박한 중소기업이 198만명의 근로자와 7만6000명의 연수생‧견습생을 고용하고 있다. 이들은 독일 전체 기업투자의 2.4% 수준인 93억 유로(약 12조원)를 투자하고, 매출은 중소기업 전체의 6%인 2830억 유로(약 364조원)를 차지한다.

KfW는 보고서에서 “승계 임박 기업이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무엇보다 안전한 승계는 투자의 지렛대 역할을 한다”며 “승계 문제에 시의적절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돼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경제산업성과 중소기업청은 2017년 “현재 상태를 방치하면 중소기업 폐업이 급증하면서 2025년까지 누적으로 약 650만명의 고용, 22조엔(약 222조원)의 GDP가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중소기업청은 지난해 ‘사업승계 5개년 계획’을 공포해 사업승계 지원을 집중 실시할 방침이다.

또 중소기업청이 발표한 ‘경영자를 위한 사업승계 매뉴얼’도 발간했다. 매뉴얼은 “사업승계를 위한 경영개선, 후계자나 다른 기업이 회사를 승계하거나 인수하고 싶을 정도로 회사의 매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부의 지원과 함께 현재 고령의 경영자들도 후계자의 눈에 띄기 위해 투자와 신사업 추진 등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는 뜻이다.

◆ ‘부의 대물림’에 막힌 한국…기업경영 맡기려 해도 ‘세금 때문에…’

우리나라는 기업을 승계하려 해도 규제와 세금에 막혀 있다. 자녀에게 기업을 맡기려면 ‘가업승계 지원제도’의 까다로운 요건을 10년간 유지해야 한다. 전문경영인 같은 후계자는 아예 지원을 받을 수도 없다. 가업상속제도를 적용받기 위해서는 소유주가 자녀나 친족에게만 기업을 물려줘야 한다는 기준 때문이다.

‘요건’에 발목 잡히지 않고 대내외 경영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유로운 경영’을 하려면 막대한 상속세가 부담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해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은 가업승계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점을 ‘상속세 등 조세부담’(69.8%)을 꼽았다. 2위인 ‘종합지원정책 부족’(18.6%)과의 격차는 무려 51.2%포인트다. 이에 가업상속제도를 활용해 가업을 승계할 계획인 중소기업은 전년 대비 16%포인트 하락한 40.4%로 나타났다.

김완일 세무법인 가나 세무사는 지난달 가업승계 토론회에 참석해 “세무사로서 업무를 진행하다보면 가업상속공제 사후관리 요건을 지키기가 어려워 제도를 기피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며 “일본처럼 감독기관의 승인을 통해 융통성 있게 운용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업상속공제 문턱은 매년 낮아지는 추세임에도 이를 활용하는 기업은 극히 드물다. 가업상속공제제도를 적용받은 기업은 2012년 58곳, 2013년 70곳, 2014년 68곳, 2015년 67곳, 2016년 76곳, 2017년에는 75곳이다. 매년 수만개의 기업에서 승계작업이 이뤄지는 독일과 비교된다.

가장 큰 문제는 기업의 승계 자체를 ‘부의 대물림’으로 보는 시각이다.

홍기용 인천대 교수는 “가업을 잇는 자녀는 ‘금수저 아니냐’는 시선이 있는데, 사실 기업 승계받는 건 ‘부의 대물림’과 다르게 봐야 한다”며 “가업승계 대상 대부분은 중소기업이다. 안정적인 승계를 도와 경영능력을 발휘해 기업을 유지하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다른 나라에서도 승계를 적극 돕는 건, 기업 유지가 국가적으로 긍정적이기 때문”이라며 “우리 가업상속제도는 시행된 지 22년 됐는데, 이젠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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