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초연(超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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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4-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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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 수트라 I.16

[사진=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침착
파탄잘리는 요가를 구성하는 두 가지를 ‘연습’과 ‘이욕·침착(沈着)’이라고 설명했다. 연습이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상정하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한 지속적이며 연속적인 노력이며, 이욕은 자신도 모르게 쌓인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걷어내는 작업이다. 이욕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가만히 응시하는 침착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을 유발하는 생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자신의 생각을 가능하게 한, 생각의 생각조차 장악하려는 의지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15에서 자신의 두 눈으로 본 것들이나 전통적으로 진리를 담고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 경전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탐닉하려는 욕망을 제어하라고 조언했다. 내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다고 해도 그 대상을 인식하는 내 눈에는 색안경이 씌워져 있다. ‘나’는 편견을 지닐 수밖에 없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역설적인 여건이 나를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내가 아무리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응시했다고 주장할지라도 그 시선은 존재론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침착은 우선, 자신이 두 눈으로 본, 그 시선에 대한 믿음을 유보하라고 조언한다. 전통적인 ‘권위’를 지닌 인물, 사상, 그리고 제도는 나의 자발적인 진리탐구를 방해한다. 나의 자발적인 수련을 통한 탐구만이 진리가 있는 곳으로 나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기 때문에 진리이고, 예수가 말했기 때문에 틀릴 수가 없다고 신봉한다. 우리에게 전달돼 내려온 고전이나 경전에, 아리스토텔레스나 예수의 주장이, 그 글을 옮긴 필사자의 의견을 배제한 채 온전히 담겼는지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고전이나 경전에 담긴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옳다고 쉽게 수용한다. ‘침착’이란 이 세상의 어떤 권위라도, 그것이 황제의 칙령이나 신앙의 교리라고 할지라도, 나의 섬세하며 초연한 분석의 대상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바가바드기타>도 침착을 수련의 가장 중요한 단계로 설명한다. “사람은 사물에 대한 오감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야 한다. 그(녀)는 ‘진정한 자아(아트만·Atman)’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와 같은 사람은 절대-진리(브라만·Brahman)를 지향하는 요가 수련을 통해 영원한 행복을 경험한다. 물질적인 쾌락은 감각할 수 있는 물건들과 만나면서 생겨난다. 이것들은 처음과 끝이 있다. 그래서 불행의 원인이다. 현명한 자는 그것들을 즐기지 않는다.”(<바가바드기타> V.21-22) 그러면 내가 이 침착을 연습한다면,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후대 학자들은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에 주석을 달았다. 기원후 7~8세기에 등장한 브야사(Vyasa)의 <요가바샤>는 최고의 주석을 평가한다. 16세기 비냐나빅슈(Vijnanabhiksu)는 <요가바샤>를 재해석한 <바가바타 푸라나>에서 비냐나빅슈는 침착이 요가 수련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히로시 스기모토의 '타스만 바다'. [사진=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비냐나빅슈는 이 책에서 침착의 단계를 설명한다. 한 현자가 자신의 침착을 수련하기 위해 물 안으로 들어가 명상하기도 마음먹었다. 그는 그곳에서 세상의 모든 유혹들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물속에서 초인적인 힘으로 숨을 참아가며 명상하고 있었을 때, 조그만 물고기 두 마리가 나타나 짝짓기를 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자 자신의 내면 깊이 각인되어 평상시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삼스카라(samskra)’가 발동됐다. ‘삼스카라’는 자신의 삶이 아니라 전생에 만들어져 자신의 유전자 안에 숨어 있었던 본능이다. 그는 미물인 한 쌍의 물고기의 짝짓기를 보고 성욕에 사로잡혀 명상을 멈추고 세속으로 돌아갔다(<바가바타 푸라나> IX.6.40 이하). 내면에 각인되어 있는 삼스카라는 언제든지 작동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자신이 마무리 침착을 수련한다 할지라도 삼스카라를 장악하기는 힘들다.

더 깊은 침착, ‘초연’
파탄잘리는 침착을 다시 두 가지로 구별한다. 하나는 물질세계의 경험으로 오는 육체적인 쾌락이나 사후세계가 가져다 줄 정신적인 보상을 기대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침착이다. 다른 침착은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원칙들을 초월하는 마음가짐이다. 힌두교철학에서 물질들은 인간에게 다음 세 가지 반응들을 유발시킨다. 첫째는 ‘사트바(sattva)’로, 흔히 ‘덕’으로 번역되는 ‘중용·선·순결·창의·긍정·평온’과 같은 높은 수준의 원칙들이다. 둘째는 ‘라자(raja)’로, 이기심에서 출발하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역동적인 움직임들이다. 셋째는 ‘타마(tama)’로, 마음의 불균형에서 야기된 ‘혼돈·걱정·불순·무관심·게으름·파괴·무식’과 같은 감정들이다. 이 세 가지 반응을 모두 통합하는 단어가 ‘구나(guna)’다. 파탄잘리는 인간이 일상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일체의 반응들인 ‘구나’에 대한 ‘초연(超然)’을 말한다. ‘초연’은 외부의 반응에 대한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인 자세로 외부의 자극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는 삶의 태도다.
요가 수행자가 연습을 통해 이기적인 ‘라자’와 폭력적인 ‘타마’를 극복할 때, 평온의 상태인 ‘사트바’를 유지할 수 있다. 그는 육체의 쾌락이 가져다주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순간적인 행복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미래지향적인 건강한 상태로 진입한다. 외부의 파괴적인 개입이 없다면, 수행자는 사트바를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고 표현한다. 그러나 라자와 타마가 수행자를 공격하면, 사트바가 불안해지고 흔들린다. 파탄잘리는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는 신적인 자아인 ‘신아’에 거할 수 있어야 초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초연’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도 알 수 없고 조절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는 개인이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으로 도피하는 마음이 아니다. 현실 안에서 유유자적하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튼튼한 배와 같다. 폭풍우가 쏟아져 커다란 파도가 일더라고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항구를 향해 조금씩 항해하는 선장의 마음이다. 산스크리트 단어인 ‘구나’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구나’는 산스크리트 문법에서 모음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기원전 5세기 산스크리트어 문법을 정립한 파니니(Pāṇini)는 ‘아(a)’, ‘에(e)’ 그리고 ‘오(o)’를 ‘구나’라고 불렀다. 이 모음들은 더 짧은 모음으로 줄어들 수도 있고, 더 긴 모음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 어떤 단어의 모임이 지닌 내재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파탄잘리는 요가를 인간이 지닌 내재적인 고유한 가치도 자신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본래의 자신, 신적인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신아
요가 수행자는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단계인 ‘사트바’의 단계조차 넘어서는, 외부의 자극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 우주를 탄생시킨 원칙이자, 그 안에서 소우주로 살고 있는 인간 본연이 존재하는 단계로 진입해야한다. 비냐나빅슈(Vijnanabhiksu)는 <요가바샤>를 재해석한 <바카바타 푸라나> III.7에서 ‘자다 바라타(Jada Bharata)’라는 인물을 소개한다. 바라타는 왕으로 태어났지만, 완벽한 요가 수련을 위해 왕좌를 내려놓고 숲으로 들어가 요가수련에 정진한다. 그는 신적인 명상을 통해 매 순간 영적인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바라타가 ‘옴’ 수련을 서너 시간쯤 하고 있는데, 한 마리 암사슴이 물가로 다가와 목을 축이고 있었다. 그 사슴은 출산 직전의 몸이었다. 그 순간 사자가 나타나자, 암사슴은 너무 놀라 강으로 뛰어들고, 헤엄쳐 나와 어린 사슴을 낳는 과정에 죽고 만다. 이 광경을 지켜본 바라타는 어린 사슴이 불쌍해 그 사슴을 자신의 자식처럼 키우기 시작했다. 바라타는 점점 요가를 소홀하게 연습한다. 그 대신 사슴 양육에 전념한다. 연민과 사랑이 잘못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숭고한 일이다. 그러나 그 연민과 사랑이 집착이 되면, 바로 영적인 쇠퇴가 시작된다. 사랑이 사람을 숭고하게 하지만, 그 사랑이 가져다주는 집착을 그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그는 왕국이 가져다주는 권력과 부, 그리고 명예를 과감하게 버리고 자신의 백성과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영적인 해탈을 시도했지만 그 사슴 때문에 다시 세상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바라타는 그 다음 생애에 사슴으로 태어났다.

파탄잘리는 또 다른 차원의 침착인 '초연'을 <요가수트라> I.16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타트바람 푸루샤-크야테 구나-바이트리스느얌.” 이 문장을 직역하지만 다음과 같다. “가장 높은 수준의 침착은 ‘진정한 자신’인 신아(神我)를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 그것은 의식의 세 단계인 ‘구나’에 대한 관심이 없으며, 그것을 초월한다.” 높은 수준의 침착은 우정·사랑·정의·평화와 같은 인간들의 숭고한 가치들조차 초월한다. 이 가치들은 요가수련자들에게 점점 집착이 돼 세상을 흑백으로 규정하고, 나와 너를 가르고, 자기애로 빠지기 때문이다. 요가 수련자가 도달해야 할 단계는 바로 ‘푸루샤’, 즉 ‘신적인 자기 자신’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3에서 호수 밑바닥에 존재하는 자신의 본연의 모습인 ‘드라스트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I.16에서는 ‘푸루샤’라는 단어로 대치하여 설명한다. ‘푸루샤’는 힌두교 경전인 <리그베다> 10권에 등장하는 우주창조신화에 나오는 단어다. 푸루샤는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존재한 거인이다. 신들은 푸루샤를 해체하여 우주를 창조하였다. 푸루샤는 요가철학의 근간이 된 상키아 철학에서 우주의 물질세계의 원칙인 ‘프라크리티’와 구별되는 정신원리다.

요가수련자는 외부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숨겨진 신적인 자아를 찾기 위해 수련한다. 내가 사람이라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수동적인 침착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침착, 즉 내 자신이 원하는 숭고한 본연, 우주가 창조될 때 나에게 부여한 고유한 내 자신인 ‘신아’를 찾아가는 초연으로 이어져야 한다. 나는 남들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들이나 덕목들을 추구하다 오히려 그것들의 노예가 되지 않았는가? 나는 나에게 부여된 본연의 나의 모습을 찾기 위해 ‘초연’을 수련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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