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커스]재건축 안전 진단 강화…삶의 질은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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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관 기자
입력 2018-02-2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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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영관 아주경제 건설부동산부 차장

지어진 지 30년 가까이 된 아파트에 살았던 적이 있다. 2000가구 규모 대단지에다 동간 거리가 넓었고 오래된 아파트인 만큼 단지 내 공원에는 벚나무와 은행나무, 소나무 등 각종 나무들이 울창해 인근 주민들도 많이 놀러오곤 했다. 다만 주차공간이 말썽이었다.

지하주차장이 없어 지상에는 주차된 차들로 항상 붐볐다. 퇴근시간 이후에는 2중 주차는 기본이고 3중 주차까지 하는 통에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또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주차공간을 찾느라 아파트 단지를 수십분씩 돌아다니곤 했으며 가벼운 접촉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출근하는 주민들은 단지 안 주차를 포기하고 도로에 불법주차를 하는 일도 흔했다.

주차도 말썽이었지만 아파트를 포기하고 이사를 감행토록 결심을 굳히게 된 사건은 따로 있었다. 어느 날 거실 천장 벽지가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주먹만 한 얼룩은 곧 천장 전체로 번졌다. 윗집 누수 때문이었다. 윗집과 협의 후 수리하는 분을 불렀는데, 아파트가 노후화돼 수리를 하더라도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의견을 들었다. 창틀 쪽 고질적인 결로현상도 문제였다.

정부가 최근 아파트 재건축의 첫 관문인 안전진단의 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평가항목별 가중치에서 구조안전성 항목의 비중은 현재 20%에서 50%로 높아지고 주거환경과 시설노후도 비중은 각각 현행 40%, 30%에서 15%와 25%로 낮아진다.

앞으로는 단순히 살기 불편한 수준을 넘어 구조적으로 안전에 큰 문제가 있을 경우에만 재건축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다. 현재 30년인 재건축 가능 연한을 40년으로 다시 높이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부의 안전진단 강화 방침에 재건축 추진 초기 단지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서울에서 재건축 연한이 도래했으나 아직 안전진단을 받지 않은 아파트는 총 10만3822가구다. 안전진단 강화 시행까지 시간이 얼마 없어 이들 단지에는 강화된 기준이 적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선 목동신시가지 아파트가 위치한 양천구와 올림픽선수촌, 올림픽훼밀리타운 아파트가 위치한 송파구가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단지 주민들이 투기수요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 아파트 입주 초기부터 살아온 실거주민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재건축을 통해 시세차익에 대한 기대감도 있지만 무엇보다 층간소음과 배수관 노후, 누수, 주차 불편에서 해방되길 고대했다.

이전 정부가 2015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재건축 연한을 40년에서 30년으로 단축한 이유도 주차장 부족과 층간 소음 등으로 주거환경이 불량한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불편 해소 효과가 클 것이라는 점이었다.

198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들은 주거의 질(質)보다 싼값에 대량 공급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었다. 30년 연한을 못 채운 아파트 단지도 주차공간 부족은 물론 소방차 진입도 어렵고 방음 문제까지 심각해 주민 간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때문에 불과 수년 만에 기준 강화로 돌아선 것은 삶의 질보다는 집값 잡기의 수단으로 재건축 규제를 활용하겠다는 의미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조합원 지위 양도 금지, 초과이익 환수 부담금 공개 등의 연장선상이라는 것이다.

최근 지어지는 아파트는 건설사들의 첨단 기술 경연장으로 불릴 정도로 우수한 품질로 지어진다. 거주민에겐 안전 못지않게 주거 편의성과 쾌적함도 중요하다. 집값 안정을 위해 이들의 행복추구권과 재산권을 침해하는 건 또 다른 불평등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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