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74] '타타르 멍에'는 무엇을 남겼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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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0-1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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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몽골 지배가 남긴 마이너스 유산 ①

[사진 = 모스크바 전사(戰士)]

이제 240년간에 걸친 몽골의 지배, 즉 ‘타타르의 멍에’가 러시아에 무엇을 남겨는 지 한번 짚어 보도록 하자. 이 부분은 조금 무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전문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러시아 말과 역사를 공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몽골의 역사와 러시아 역사를 함께 비교해 보면서 나름대로 느낀 부분을 기술해 보려고 한다. 몽골의 지배가 러시아에 남겨 놓은 흔적은 적지 않다.

그 대부분이 러시아인들에게는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파괴와 학살 그리고 수탈에 의한 가난의 고착화 등이 우선 드러난 피해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유형의 피해 보다 더욱 큰 것은 러시아라는 나라의 기본 틀에 끼친 영향이었다.

▶해방과 함께 전제정치 강화한 러시아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15세기 말이다. 몽골 지배를 소멸시키는 작업을 마무리 지은 인물은 이반 3세다. 그 공(功)으로 러시아 역사는 그를 이반 벨리끼 즉, 이반대제(Иван Великий: Ivan the Great)라고 부른다. 이때부터 짜르(Царъ:Tsar)라는 명칭을 썼다.
 

[사진 = 이반 뇌제(4세) 초상화]

황제를 의미하는 이 명칭이 '모든 루시 사람들의 전제 군주'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이반 3세는 러시아를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단일국가로 급속히 변모시켜 갔다. 루시의 명칭이 지금의 러시아로 바뀐 것도 이때였다. 러시아를 통일국가로 변모시키면서 이반 대제는 전제정치를 강화하고 과거 몽골 지배하의 농민 수탈구조를 바탕으로 농노제도를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역사의 새 멍에- 농노제도

[사진 = 알렉산드르 1세]

농노제도는 봉건주의 체제의 바탕을 이루는 장원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영주와 농민 사이의 예속적인 관계를 그 기본으로 한다. 문제는 당시 서유럽은 이미 봉건제도가 무너지면서 농노제도가 폐지되고 자본주의로 옮겨가기 위한 기본적인 움직임이 축적되고 있는 시기였다는 데 있다. 서유럽이 시민 사회로 옮겨가기 위해 걸음을 옮겨 놓고 있는 것과는 달리 러시아는 농노제도를 강화시키는 쪽으로 뒷걸음치면서 시대의 흐름에 반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가 2백년 이상 몽골의 지배아래 놓여 있는 동안 서유럽의 시대적 흐름과 차단된 채 살아왔다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서유럽과 반대의 길 걸은 러시아

[사진 = 에까쩨리나 여제]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아래 놓여있는 동안 서유럽은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 사회를 변화시켜 가고 있었다. 인본주의와 합리주의의 싹이 돋기 시작하고 종교 개혁과 지리상의 발견 등으로 상업과 교역이 중요시되는 상황으로 사회가 변해가면서 봉건주의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었다. 자연히 봉건제도의 틀 속에 신분 제약을 받았던 농노들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 신분이 정해져 태어난다는 의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페스트 등으로 인한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봉건제적인 생산 양식에 한계점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했다.

이에 반해 러시아는 같은 시기에 농노제도가 오히려 틀을 갖추고 제도화되는 현상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인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 몽골의 지배와 그 후유증이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던 것이 분명하다.

▶농노제도 본격 제도화

[사진 = 뿌가초프 처형(붉은 광장)]

러시아의 귀족과 농민 관계에 있어 귀족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이 생산의 10분의 1를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수탈구조 때문이었다.
원활한 징세를 위해 킵차크한국의 지배자는 공후나 귀족의 권한을 크게 강화시켜 줬다. 비록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이미 고착화 된 관계를 바꾸어 놓을만한 토양이 러시아에서는 서유럽과는 달리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단일국가의 형성과 함께 이를 군주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반 3세는 장교들로부터 충성과 복종을 유도하기 위해 새로운 토지 소유제인 포메스티(Pomestie)제도를 도입했다. 이것이 19세기까지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을 대변하면서 숱한 반발과 저항을 불러온 농노제도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었다.

▶어둠 속에 머문 러시아 역사

[사진 = 뾰뜨르대제 동판상]

물론 서유럽도 봉건주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상태에서 국왕과 왕권의 이익을 앞세우는 절대주의 국가로 변해갔다. 하지만 중상주의의 태동과 함께 새로운 상인계급이 등장하고 시민계급이 성장하는 등 자본주의 사회로 옮겨가기 위한 대변혁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이 때의 변화 움직임이 없었다면 계몽주의의 등장과 산업혁명의 발발 등 시민사회로 옮겨갈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사진 = 뾰뜨르, 스웨덴과 전투 지휘]

[사진 = 뾰뜨르 기념관(성 뻬쩨르부르그)]

그러나 2백년 이상 정체된 체제에서 살아온 러시아는 변화의 바람에 둔감한 상태에서 제정 러시아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전제정치 체제를 강화하고 있었다. 18세기 뾰뜨르대제(피터대제:Peter the Great)가 들어서 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그를 건설해 유럽 쪽으로 창을 내고 서구화를 통한 근대화를 주도해 나가지만 후계자들이 반동정치를 강화하면서 그 효과를 살리지 못한 채 여전히 러시아를 어둠의 역사 속에 머무르게 만들었다. 이러한 러시아 역사의 흐름은 그 순간마다 직접적인 배경과 원인이 있겠지만 그 밑바닥에는 몽골의 러시아 지배의 유산이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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