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더 살벌했던 中日갈등, 아베는 어떻게 풀어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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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3-1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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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1차 센카쿠 사태, 2012년 2차 사태 거치면서 중일관계 최악상황에 아베정권 등장

  • 거대한 내수시장과 아베노믹스로 경제제재 무력화, 동시에 끈질긴 노력으로 외교복원

  • 5년전 그토록 험악했지만, 지금은 화난 중국인들 한국 대신 일본여행 선택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사진=연합뉴스]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2012년 12월26일 일본 제 96대 총리로 취임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총재. 그가 전임자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가 이끌던 민주당 내각으로 물려받은 것은 '최악'을 넘어서 '극악'한 단계까지 와있던 중일관계였다. 당시 중일관계는 지금의 한중관계보다 더 심각했었다. 2010년, 2012년 두차례의 센카쿠열도 사태를 거치는 동안 중일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지금의 중일관계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한반도 사드배치에 성난 현재의 중국인 여행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국 대신 일본행을 선택하고 있으며, 중국기업들은 부품공급상으로 한국기업 대신 일본기업을 찾고 있다. 아베 총리가 거둔 외교성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베는 어떻게 중일관계를 풀었을까. 일본의 중국과의 갈등스토리를 다시금 되짚어본다.

◆40년전에는 말도 못꺼냈던 中

중일 양국간에는 과거사 문제, 남중국해 문제 등도 갈등요인이지만, 가장 첨예한 갈등은 동중국해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열도 영유권을 두고 벌어진다. 5개의 무인도와 3개의 암초로 구성된 센카쿠 열도는 인근 해역에 대규모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다. 게다가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중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일동맹의 힘이 충돌하는 지리적 군사적 요충지다. 중일 서로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중이던 1895년 센카쿠를 주인이 없는 섬이라며 자국영토에 일방적으로 편입한 후 아직까지 실효지배하고 있다. 중국은 명나라 때부터 자국 영토였으며, 불평등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 탓에 일본에 뺏겼다고 맞선다.

1972년 수교 당시만 해도 일본의 경제 지원이 절실했던 중국은 센카쿠 열도를 거론하지 않았다. 1978년 중일평화우호조약을 맺을때도 중국은 침묵했다. 군사력 경제력은 물론 종합적인 국력에서 일본의 적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 덩샤오핑(鄧小平)마저도 1978년 일본을 방문해서 "댜오위다오 문제를 거론하면 양국간의 다른 협력사안들이 난항을 겪게 된다"며 "다음 세대는 분명 우리보다 똑똑할 것이니, 댜오위다오 문제는 다음세대의 지혜에 맡기겠다"고 비껴갔다. 
 

댜오위다오. 일본명 센카쿠 열도.[사진=바이두캡쳐]



◆급소 희토류, 하루만에 굴복시켜

이후 중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거듭했으며, 2010년 2분기 일본을 제치고 세계 GDP 2위국에 올라섰다. 전세계가 미중 G2시대의 개막이라 평가했고, 중국의 부상에 놀라워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인 2010년 9월 센카쿠 사태가 발생한다. 센카쿠 인근 해역에서 조업중이던 중국 어선이 일본 경비선과 충돌했고, 일본 해경은 중국 선장 1명을 구속했다. 중국은 항의했지만 일본은 자국법에 따라 재판을 받게 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는 댜오위다오가 일본법의 영향이 미치는 일본 영토임을 명확히 하겠다는 의도였다.

중국은 분노로 들끓었다. 우리나라에도 대규모 직원관광단을 보내 유명한 건강용품 업체 바오젠(寶健)은 1만명의 일본여행 계획을 취소했고, 중국 주요도시에서는 반일시위가 잇따랐다. 별다른 효과가 없자 중국은 대일본 희토류 수출을 중단시켜버렸다. IT제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의 85%를 중국산에 의지하고 있던 일본이었다. 대안이 없던 일본은 희토류 수출 중단조치가 나온지 하루만에 중국인 선장을 석방했다. 일본이 중국에 백기투항한 것이나 매한가지. 중국 인민들은 열광했고, 기세등등했던 일본은 고개를 떨궈야 했다.

간 나오토(菅直人) 당시 총리의 지지율은 15%까지 떨어졌다. 결국 간 총리는 이듬해 8월 퇴임했다. 이후 일본은 희토류 구매선 다변화를 꾀해 중국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낮췄지만 '소잃고 외양간 고친'격이었다.

◆성난 日, 센카쿠 국유화로 되치기

뜻밖의 굴욕을 맛본 일본은 급속히 우경화하기 시작했다. '중국 위협론'이 국민감정을 자극하면서 우익 정치인들이 득세했다. 굴욕 2년후인 2012년 7월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당시 일본 총리는 여론에 떠밀려 센카쿠 열도를 국유화하겠다는 방침을 표명했다. 개인소유였던 섬을 일본 정부가 구매하겠다는 것.

중국은 또다시 들고 일어났다. 일본 국민은 ‘우리나라 내부 문제에 왜 중국이 간섭하냐’며 반발했다.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중국 국가 주석이 그해 9월9일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장에서 노다 총리에게 자제를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내 강경여론을 거스르기엔 너무 늦은 상황. 노다 총리는 회담 이틀 뒤 센카쿠 열도 국유화를 전격 단행했다. 중국은 후 주석의 당부를 노다 총리가 내팽개쳤다며 더욱 불쾌해했다.
 

2012년 9월 성난 중국인들이 일본 차량에 화풀이를 하고 있다.[사진=바이두캡쳐]



◆中 민관합동 초강경 경제보복

2012년 9월 중국 대륙은 활활 타올랐다. 100여개 도시에서 즉각 반일 시위가 벌어졌다.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 파나소닉 공장이 성난 중국인들로부터 습격당했다. 일본 매장 및 일본계 차량들이 파괴당했다. 중국 대륙 전체가 '일본은 떠나라'는 구호로 가득했다. 중국은 '중일수교 40주년 기념식'을 무기 연기했다. 양제츠(楊潔篪)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일본이 댜오위다오를 훔쳐갔다"며 맹비난했다. 중국 기업가들은 미국 유력지에 '댜오위다오는 중국땅'이라는 내용의 광고를 실었다.

일본계 자동차공장은 차량이 팔리지 않자 중국내 공장가동을 중단시켰다. 전일본항공(ANA)도 2012년 9∼11월 중국 관광객 감소로 모두 4만6000석의 좌석이 취소됐다. 일본의 유명 패션업체 유니클로는 반일 중국인 시위대들의 무차별 공격을 우려, 9월 14∼24일 간 169개의 중국 매장 가운데 60개의 문을 일시 닫았다. 중국정부는 자국민의 일본 관광도 금지시켰다. 당시 3개월여 반일 시위기간 일본의 경제적 손실은 2억5000만달러로 추산됐다.

◆최악상황 물려받은 아베의 카드

2012년 말 일본제품과 일본의 브랜드들이 중국에서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일본인들은 분노했고, 더욱 우경화의 길을 걸었다. 민주당은 2012년 12월 열린 총선에서 패해 정권을 자민당에 넘겨줘야만 했다. 이로써 아베 신조(安倍晋三)를 총리로 하는 보수내각이 등장하게 됐다.

2012년 12월 집권한 아베 총리는 중국의 제재로 인한 경제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아베 총리가 꺼내든 것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버티기’였고 둘째는 ‘양적 완화’로 대표되는 ‘아베노믹스’.
 

중국인들이 일본에 대한 개전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반일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바이두캡쳐]


◆거대 내수시장 있기에 버티기 가능

일본에는 거대한 내수시장이 존재한다. GDP 대비 수출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다. 지난해 GDP에서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7.6%였다. 또한 일본의 수출액 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1년 19.7%였다. 이 수치는 지난해 17.5%로 낮아졌다. 산술적으로 일본 GDP대비 대중 수출비중은 약 3%선이다. 3%에 가해지는 충격은 충분히 버틸 만 하다.

2년전 희토류 금수조치의 쾌감을 다시 맛보길 꿈꿨던 중국인들의 인내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닥을 드러냈고, 센카쿠 국유화가 1년여쯤 지나자 중국의 일본에 대한 제재들도 흐지부지됐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상황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수출비율은 지난해 46%였다. 수출 중 대중수출 비중은 25.1%며, 홍콩을 포함하면 31.7%다. 우리나라 GDP대비 대중 수출비중은 12%에 달한다. 이에 더해 중국과의 비정규무역이나 관광산업을 따지면, 중국은 우리나라 내수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아베노믹스, 값싼 일본의 유혹

아베 총리는 세계3위의 경제규모와 산업경쟁력, 금융경쟁력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시중에 돈을 풀어 엔화약세를 유도했다. 아베노믹스는 일본 제품들의 가격을 훌쩍 낮춰놓았다. 값이 싼 고품질 일본제품들의 수출이 늘어났으며, 중국 이외 지역에서의 해외여행객들이 값싼 일본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일본은 중국충격을 상쇄해나갔고, 아베 총리 집권 1년후 일본의 경제는 모두 예년수준을 회복했다.

2013년 말이 되자 중국인들은 값싸고 품질이 월등한 일본제품에 슬그머니 눈길을 줬고, 역시 값이 싼 일본여행상품들을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렇게 중일갈등은 민간에서부터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외교관계 복원위해 끈질긴 구애

정치분야에서는 냉랭한 관계가 이어졌다. 시진핑 주석을 필두로 한 중국 지도부들은 일본에 대한 날선 비판을 이어갔다.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은 물론 공식적인 고위급 외교채널도 끊기다시피했다.

시진핑 주석 측은 센카쿠를 국유화해버린 일본 지도부를 만날 명분이 없었다. 아베 총리 역시 일본에 대한 날선 비난을 가하는 중국의 지도부를 쉽게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인접국끼리 언제까지 얼굴을 붉히고만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관계가 악화되더라도 갈등관리의 필요성은 존재하며, 정식 외교채널은 가동되야 한다.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아베 총리였다. 아베 총리는 기회가 날 때마다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아무리 얄밉다고 해도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을 언제까지 거절과 외면으로 대할 수는 없다.
 

2014년 11월 만난 양국 정상. 시진핑 주석의 굳은 표정이 이채롭다.[사진=신화통신]


◆정상회담 물꼬트자 정상화 급물살

취임 2년여가 되어가던 2014년 11월 아베 총리는 베이징 APEC회담을 기회로 시 주석과 첫 조우를 하게 된다. 시 주석은 국제행사의 호스트로서 일본 지도자를 초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이징을 찾은 아베 총리는 활짝 웃으며 시 주석에 다가갔지만, 시 주석은 잔뜩 불쾌한 표정으로 아베 총리를 맞았다. 정상회담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잠시 동안의 대화가 이어졌고, 두 정상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자국 지도자가 푸대접을 받았으니, 일본인들은 불쾌했겠지만, 만남 이후 중국인 여행객들이 봇물 터지듯 일본으로 몰려가 값싼 일본제품들을 싹쓸이쇼핑했다.

양국 정상의 두번째 만남은 첫번째보다 훨씬 수월했다. 두 정상은 2015년 4월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 60주년 기념 정상회의가 열리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회담 분위기는 한층 좋아졌으며, 양국관계 발전이 논의됐다. 이어 양국 정상은 2016년 9월 항저우(杭州) G20회의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은 센카쿠열도에서의 갈등관리 문제를 논의했다.

◆한국 싫다고 일본 가는 중국인들

중국은 2012년 센카쿠사태 이후 지속적으로 해경선을 센카쿠 열도 인근에 보냈고, 중국의 전투기들 역시 센카쿠 영공에 수시로 들락거리며 일본을 자극했다. 중일 양국의 해상경비함이 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반복됐지만, 일본으로서 더 이상 중국을 자극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두 정상은 2016년 9월 항저우 정상회담에서 동중국해에서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양국 방위 당국 간의 핫라인 구축을 위한 협의를 가속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양국 정상은 "현안이 많을수록 대화를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레벨의 대화를 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당시 일본 국민들은 이 정상회담에 대해 68%가 긍정평가를 했으며, 아베 내각 지지율은 57%로 상승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 화난 중국인들은 한국 대신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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