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수족의 신비한 문자 ‘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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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9-2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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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 서예[사진=현지 정부 제공]


인민화보 리후이펑(李慧鵬) 기자 =수족(水族)의 문자 ‘수서(水書)’는 중국 은나라 때 기원했다. 수서와 갑골문은 뿌리가 같고 한족의 역경(易經)과도 일맥상통한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수서 덕분에 소수민족인 수족은 자신의 민간 지식과 종교ㆍ문화를 집대성할 수 있었다. 또한 수서의 존재 덕분에 수족은 중국의 56개 민족 가운데 자신만의 언어와 전통 문자를 지닌 17개 민족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수서는 표의 그림, 표의 기호로 이루어진 문자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수족의 종교ㆍ천문ㆍ지리ㆍ전쟁ㆍ건축ㆍ윤리도덕ㆍ수공예ㆍ외출ㆍ결혼ㆍ농경ㆍ어업ㆍ수렵ㆍ역법ㆍ점괘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을 기록ㆍ보존하고 있다. 수서는 매우 실용적이고 응용 가능할뿐 아니라 수족 사회의 여러 모습을 담은 ‘백과사전’이자 중화민족의 역사적ㆍ문화적 유산이기도 하다.

수족은 자신들을 스스로 ‘수(雖)’라 칭한다. 수족의 언어는 ‘늑수(泐雖)’라 불리며 문자는 ‘수서’ 또는 ‘수문(水文)’이라 한다. 수족의 생산 경제와 일상생활은 수서 조례(條例)에 의해 제약되고 그 영향을 받기 때문에 모든 것이 수서에 의해 선택되고 행해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수서는 수족의 원시종교에서 많은 역할을 한다. 지난 2006년 수서는 중국의 제1기 서류문헌유산명록과 국가급 물질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수서 서적[사진=현지 정부 제공]


수서 창시자 ‘육봉공’

현존하는 최고(最高)의 수서로 쓰인 문서는 바로 명나라 때의 필사본이다. 수서는 ‘귀서(鬼書)’, ‘반서(反書)’라고도 불린다. 그 까닭은 구조 때문이다. 수서의 일부 글자는 한자(漢字)를 모방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한자를 반대로 쓰거나 거꾸로 쓰거나 한자의 외형을 변형한 형태다. 수서 문자는 왜 한자와 다르게 쓰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수서의 창시자에 대한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

수서 문자는 육봉공(陸鐸公)이라는 수족의 선조가 창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봉공과 관련한 수서 창제설화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으나 이 중 하나는 육봉공 등 여덟 명의 노인이 신선이 사는 곳에서 수족 문자를 배운 뒤 이를 가지고 온 것이라는 설화다. 이 여덟 명의 노인들은 처음 수서를 배울 때 모래바닥 위에 수족의 각 지방에 있는 각종 가축과 들짐승, 날짐승 및 각종 도구의 모양을 그림으로 그렸고, 신선이 이를 보고 인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면 해당 모양에 따라 ‘늑수’, 즉 수족의 문자를 그려냈다.
 

수서 서예[사진=현지 정부 제공]


이 여덟 명의 노인은 각종 그림형태를 마음속에 잘 기억했다가 마침내 ‘늑수’를 창제한 후 이를 대나무나 천조각에 새겨서 고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다섯 명의 노인이 병사하고 살아남은 육봉공만이 천신만고 끝에 ‘늑수’를 가지고 집에 돌아왔으나, 한 악인에게 도난당해 결국 한 권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육봉공은 기억에 의존해 일부 글자를 복원했지만 글자 수는 이미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그는 더 이상 악인의 피해를 입지않기 위해 일부러 왼손으로 글씨를 써 필적을 바꿨고, 몇몇 글자는 반대로 쓰거나 거꾸로 쓰고, 필획을 가감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지금의 독특한 수족 문자가 전해 내려오게 됐다는 것이다.

전통의 맥을 잇는 사람들

수족 사회에서 수서는 수족집단 누구나 읽고 쓰거나 활용할 수 있는 글자가 아니다. 수서의 계승은 주로 ‘수서 선생’에 의해 이뤄진다. 수서 선생은 전통적인 수족 농경사회에서 일반 농부이면서 동시에 생존의 지혜가 풍부한 ‘지혜로운 자(智者)’이기도 하다.

수족민들의 일상생활에서 관혼상제를 비롯해 가옥을 고치거나 타지 외출, 제사 등의 중대한 사항은 모두 수서 선생의 행동 지도가 필수적이었다. 이 때문에 수서 선생은 수족의 전통사회에서 매우 높은 사회적 명망을 지니고 있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수서 문자[사진=현지 정부 제공]


수서 선생은 보통 스승에게서 사사하는 방식으로 수서를 습득한다. 수서 공부는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여 년이 걸리기도 했다. 일례로 구이저우(貴州)성 리보(荔波)현의 국가급 수서 선생 전승자인 판라오핑(潘老平)은 10세 때부터 조부에게서 수서를 배우기 시작해 조부가 돌아가시자 다시 부친에게서 수서를 배웠다. 28세에 스승의 문하에서 벗어났고 33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현지 마을주민들의 제사 활동에 단독으로 수서를 운용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수서를 배우는 자는 본격적으로 수서에 입문하기 전에 사부를 모시는 입문의식을 치른다. 이는 사부가 자신이 거둔 제자를 수서의 창시자인 육봉공에게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의식 거행일은 아무때나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부가 길일을 점쳐 거행한다. 길일이 택해지면 사부는 집안에 향안(香案)을 놓아두고 수서를 처음 배우는 이들을(6명 미만일 경우 다른 사람으로 채워 6명을 만든다) 탁자에 둘러앉게 한 다음 모든 제기용품을 늘어놓는다. 그러고 나서 사부는 향안을 마주하고 육봉공을 향해 제자들의 기본 소개와 수서의 학습 동기를 설명한다. 이어 제자들에게 선행에 힘쓰고 다른 사람을 힘껏 도우라는 당부를 하면 모든 의식이 끝난다.

하지만 수서는 관례에 따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자를 배제하고 남자에게만 전해진다. 게다가 젊은이들이 이 같은 문화적 계승을 거부하는 일이 많아 현존하는 고령의 계승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수서는 계승이 단절될 위험에 놓일 수 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수서 선생은 채 200명이 못된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자 무형문화(정신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가로막는 인습과 폐단을 깨고 수서를 수족 여성에게도 전승하여 수서가 계속 이어지도록 하려는 일부 수서 선생들의 움직임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정부 역시 수서 풍습을 널리 알리고 수서의 계승을 권장하며 수서를 응용한 콘텐츠 상품을 개발하는 방법 등을 통해 더 많은 젊은이들이 수서에 담긴 풍부한 역사문화적 가치를 접할 수 있도록 힘과 노력을 쏟고 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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