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춘 칼럼] 코로나가 무섭나, 쓰레기가 무섭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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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입력 2020-11-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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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춘 부원장] 





요즘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공기는 건조해지고 사람들의 밀집도는 높아지고 있다. 추위 때문에 환기를 더욱 꺼리게 되면 코로나는 더욱 기세등등해질 것이다. 낮아진 체온으로 면역력까지 떨어지면 코로나 확산에는 절호의 환경이 갖추어지는 셈이다. 코로나는 삶의 고단함을 가중시키고 여기저기서 절망의 탄식을 쏟아내게 한다. 정말 이 고통이 언제까지 갈지 앞길을 내다보기 힘들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하여 벌어지는 또 다른 현상이 있다. 매주 주말 분리수거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플라스틱 폐기물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대충 눈대중으로 보더라도 코로나 이전에 비해 2배 이상은 되는 것 같다. 카페에 가면 코로나를 핑계로 일반 컵보다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강권한다. 잠시 동안의 티타임을 위해 또 하나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생산한다. 방역을 핑계로 식당에 가기보다 도시락을 주문한다. 그리고 그 후 음식물이 뒤섞인 또 다른 폐기물이 산더미처럼 복도에 나뒹군다. 그 결과로 우리는 매주 주말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보게 된다.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몰려온다. “이렇게 막 버려도 되나?”

코로나와 플라스틱 쓰레기는 둘 다 우리에게 매우 힘든 적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어느 쪽이 더 센 적일까? <총, 균, 쇠>의 저자인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한 국제세미나 강연에서 말했다. 코로나는 인류의 일부를 파괴하지만 환경악화는 인류 전부를 파괴할 수 있다고!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눈앞의 적을 상대하다가 더 무서운 적이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음을 우리는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플라스틱 쓰레기는 그 하나의 예일 뿐이다.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환경파괴는 오늘도 변함없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궁극의 환경파괴는 기후변화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이 문제에 둔감하다. 마치 내가 버린 쓰레기를 누군가가 내 주변에서 치워주기만 하면 그 쓰레기가 없어진 것으로 착각하듯, 시시각각 몰려오는 기온상승의 물리적 변화에 애써 눈을 감는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터질 일이 아니라면 나와 상관없는 일일 뿐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외부효과라고 말한다. 내 행위가 같은 시대의 다른 공간에 사는 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더라도 그 행위를 저지하거나 장려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 현 세대의 행위가 먼 미래세대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더라도 그 행위를 저지 혹은 장려할 수단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뒤죽박죽이 되어 돌아간다. 째깍째깍 시한폭탄의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줄도 모르면서! 아니다. 알고 있으나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착각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그린 뉴딜을 들고 나왔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린 뉴딜을 논하기 전에 우리의 수준을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폐기물을 한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자유롭게 버릴 권리에 익숙해 있다. 나는 버릴 수 있고 그것을 치우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일이다. 누군가가 그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를 욕한다. 왜 이 더러운 쓰레기를 치우지 않느냐고! 그 쓰레기가 어디로 가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심도 없다. 나는 그저 내가 번 돈으로 소비하고 버릴 권리를 가질 뿐이다. 그 쓰레기의 원천인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어떤가? 기업은 자기가 팔아치운 상품이 소비되어 쓰레기가 되더라도 그것을 수거할 의무가 없다. 기업은 단지 팔 수 있는 권리를 가질 뿐이다. 그 쓰레기를 치우는 데 드는 수고와 비용을 부담할 의무가 없다. 그러니 쓰레기가 덜 나오도록 상품을 만들 필요도 없다. 그냥 돈이 되는 상품을 만들면 그만이다. 그러니 우리 국민의 1인당 플라스틱 소비량(‘15)은 연간 133㎏이나 된다. 중국(58㎏)보다는 훨씬 많고 심지어 유럽(67㎏)이나 미국(94㎏)보다도 더 많다. 이게 우리의 수준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 후진국 수준이다. 그런 나라에서 그린 뉴딜은 호사일 수 있다.

얼마 전 우리나라 대통령께서도 국회연설을 통해 탄소 중립을 발표하였다. 탄소 중립 선언은 요즘 세계적으로 유행이 되고 있다. 대체로 2050년까지 탄소의 순배출량을 제로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선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조급함이 여실히 묻어나온다. 마치 돈을 갚으라는 채권자의 거친 다그침에 언제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겠다고 맹세하는 채무자와 같다. 그 채무자가 그때까지 그 돈을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그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채무자가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얼마를 조달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책을 설명해 보인다면 얘기는 다르다. 그 말에 신뢰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아니 우리나라 말고도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조차도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선언하면서도 그 구체적 방책을 말하는 나라는 그리 흔치 않다. 마치 그때까지 빚을 갚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채무자와 같은 모양새다. 우리는 이제 2050년까지 빚을 갚겠다는 말을 겨우 입에서 떼었을 뿐이다. 어떻게 갚을지는 여전히 “생각 중”인 것 같다.

코로나는 백신의 개발과 보급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 때까지 움츠리고 인내하면 된다. 그러나 무자비한 환경파괴를 퇴치할 백신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기업의 비즈니스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정부의 정책체계를 혁신할 것을 요구한다. 경제사회체제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한 셈이다. 마치 특효약이 없어서 운동과 체질개선으로 건강을 관리해 나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개인은 버릴 권리가 아니라 줄일 의무를 더 우선하며, 기업은 팔 권리가 아니라 회수할 의무를 더 우선하고, 정부는 버려진 것을 치울 의무가 아니라 규칙을 만들고 이를 어긴 자를 단속할 권한과 의무를 더 우선해야 한다. 그리고 승패는 코로나처럼 속전속결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정부가 발표한 그린 뉴딜에는 이러한 것들이 체계적으로 구상되어 있지 않아 보인다. 그린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돈벌이에 급급한 것이 아닌지 우리들의 민낯을 잘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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