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9)] "마땅히 일본도 항복할 것" 류영모 풍자시조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0-06-03 09:05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위암 장지연이 쓰던 감방에 앉아 '세상이 옥살이'임을 깨닫다

[다석 류영모]



일본이 못 읽어냈던, 류영모 풍자시

아침에 한산(漢山)을 두고 낮 못돼 송악에 대니
즈믄해 거스른 일을 한 나절에 보는구나
갈릴 때 생각으로는 돌아봄이 늦었네

아침에 한산을 두고 낮 못돼 송악에 대니
꺾인 즈믄 거스른 일이 한 나절에 돌아오다
갈릴 때 나는 대(竹)로는 역력히도 같구나

아침에 한산을 두고 송악의 낯 없어서니
즈믄해 거스른 일은 한 나절에 보는구나
갈릴 때 나는 대로는 한 맘인가 하노라

아 처음 한산 두고 낯 없이도 송악의 짝
즈믄해 꺾인 거울이 마주 서서 조상(照像, 弔喪)이라
갈릴 때 생각으로야 이럴 줄이 있으랴

아 첨의 한산을 두고 낯 마주 송악에 대니
즈믄해 거스른 일로 한 나절에 보리라
갈릴 때 나는 대라니 마디마디 나노라

                 다석 류영모의 연시조(聯時調) '개성당일왕복'

성서조선 마지막호(제158호)에는 <개성당일왕복(開城當日往復), 베드로 후서 3장8절>이란 제목의 시조가 실려 있었다. 류영모가 기고한 것이었다. '한양(서울)에서 개성까지 하루 만에 갔다 왔다'는 제목의 이 시조에 대해선 류영모가 직접 언급한 말이 있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일본 사람들이 나를 붙잡아 이것저것 모두 묻는데 거기 성서조선에 또 '개성당일왕복'이라는 이런 내 글이 또 하나 있었어요. 개성이라는 데는 서울에서 일백육십 리 떨어져 있어요. 내가 서울사람으로서 일백육십 리 밖에 있는 명소들, 개성 송도 명소를 나이 50이 되도록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게 괴상한 일 아닙니까. 이미 의주까지도 가본 사람입니다. 또 평양 정주는 수십 년을 왔다갔다한 터인데 가까운 개성, 거기를 한 번도 들르지를 않았어요. 그래 살아오다가 어느 때 일부러 개성 구경을 갔어요. 가는데 급히 가니까 하루 만에 빨리 다녀왔어요. 그래 개성에는 가서 봐야 선죽교 하나 본 것뿐이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갔다온 소감을 떡 써놓고 본 즉 그 제목을 뭐라고 할까 하다가 개성당일왕복이라 했어요. 그런데 그 시가 말끔, 민족감정이 단단히 들어있는 시입니다."

서울과 개성을 왕복하는 여정은, 묘한 감회를 불러 일으킨다. 시간으로 표현하면 고려 500년과 조선 500년을 하루 사이에 왕복하고 있는 게 아닌가. 1000년의 역사를 오가며 그 처음과 끝을 바라보는 시간여행인 셈이다. 이런 느낌을 살려내서 류영모는 시를 썼다.

비슷한 말을 반복하여 흥(興)을 키우며 의미를 심화하면서 미묘한 변주로 상징을 확장하는 독특한 방식의 시조다. 비교적 쉬운 말로 되어 있으나, 맥락을 풀어줄 필요는 있어 보인다.

[시조 풀이 : 첫 연- 아침에 한산(서울)을 두고 출발하여 정오가 못 되어 송악(개성)에 당도하니 1000년 뒤로 돌아가는 일을 한 나절에 볼 수가 있구나. 조선 500년 역사에서 고려 500년 역사로 돌아가는 걸 한 나절에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갈릴 때 생각'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뀔 때의 생각이다. 나라는 바뀌는 이유를 일찍 반성했어야 같은 결과를 빚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담았다. 

둘째 연- 꺾은 천년(500년)을 거슬러가는(역주행) 일이 한 나절에 돌아오는 거리라고 말한 뒤에, '갈릴 때 나는 대'라는 말을 꺼낸다. 고려가 끝날 때 정몽주가 죽었고 선죽교의 대(竹)가 피를 흘렸다. 조선이 망할 때 민영환이 피흘린 곳에도 대나무가 솟았으니 양쪽 왕조의 종말이 닮았다. 역력히도 같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뚜렷하게 닮아 있다는 얘기다.

셋째 연- 송악의 낯이 없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낮이 못 되어 송악까지 가니, 사실 송악의 낮이 없다는 말일 텐데 굳이 '낯'이라고 표현하여, 고려가 면목이 없다는 의미를 담는다. 고려가 면목이 없으니 조선인들 면목이 있겠는가. 그러니, 망했을 때 피흘리는 대나무를 보면 '한 맘인가 하노라'라는 탄식이 생기는 것이다.

넷째 연- '아침에'를 '아, 처음에'로 바꿨다. 조선이 시작할 때인 그 처음에를 말한다. 왕조를 갈아치웠으니 면목(낯)이 없지만 그래도 고려의 짝인 것은 분명하다. 1000년을 반씩 꺾은 거울 같은 고려와 조선이 서로 마주 보며 비추고 있으니(서로 멸망한 일을 슬퍼하니), 왕조를 갈아치울 때는 스스로도 이렇게 될 것(망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을 것이다.

다섯째 연- 처음 시작한 것은 조선에 두었지만 얼굴을 마주하여 고려에 대는 것이다. 그것이 1000년을 한 나절에 거슬러(되돌아) 보는 일이 아닌가. 서로 나라가 갈릴 때 대나무가 돋아나는 것이라. 역사라는 것은 마치 대나무 마디처럼 마디마디 돋아 전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겠는가.]


류영모의 역사 인식과 심오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조다. 고려와 조선에 대한 이런 깊은 통찰을 보인 이가 또 있었을까. 한편 제목에 왜 '베드로 후서 3장8절'이란 말이 들어 있을까.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1000년 같고 1000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구절이다. 제목에 성서 구절을 넣은 것은 1000년과 하루에 대한 상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 1000년을 오가는 것은 예수가 1000년을 하루같이 여기는 것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류영모의 이 시 제목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은 제자 함석헌이었다.

"스승님, 혹시 '개성당일왕복(開城當日往復)'이란 제목이, 성문을 열어젖히는 일은 마땅히 일본에도 돌아갈 일이란 말이 아닌지요?"

제자의 놀라운 질문이었다. 개성(開城)은 성 문을 열어젖히는 일이니 항복을 의미한다. 즉, 항복(開城)이 마땅히 일본에도(當日) 다시 돌아간다(往復). 그게 '개성당일왕복'의 다른 의미다. 고려가 그랬듯이, 또 조선이 그랬듯이, 일본 또한 멸망이라는 과정이 어김없이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담았다는 얘기다. 서슬 퍼런 일제 말기에 이런 말을 누가 할 수 있었겠는가. 류영모는 개성에 가서 선죽교를 보고온 뒤 감회를 적은 시에다가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넣었고, 일제의 종말을 예견하는 말을 제목에다 심어놓은 것이다. 함석헌의 말을 듣고 류영모는 빙긋이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과연 함석헌이로군. 그것을 알아채다니···."

이들은 이심전심으로 심정을 공유했지만, 성서조선을 샅샅이 뒤진 일본 검사는 알아채지 못했다. 김교신도 그 뜻까지는 알지 못했다고 한다. '시'란 이런 것이다.
 

[다석 류영모와 김효정 부부.]



"류영모, 너는 한국의 독립을 바라는가"

류영모를 검거한 일본 형사들은, 그를 집중적으로 취조했다. 우선 '독립운동 지하단체'를 조직했느냐고 캐물었다. 자신들이 짜맞춰놓은 각본에 들어오기를 바란 것이다.

"조직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기독교의 조직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어서 교회에 나가던 것을 그만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조직을 만들려고 하겠는가. 김교신도 무교회 운동을 하고 있지만, 나는 그 집회조차도 나가지 않을 만큼 조직을 멀리하는 사람인데 무슨 지하단체 조직이란 말인가."

"김교신의 글에 독립운동 일을 하던 이승훈과의 접선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당신이 김교신의 스승이라 할 수 있으니 분명히 영향을 주었을 게 아닌가?"

"안국동에서 김교신이 이승훈을 만난 일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증거도 없는 추측을 이유로 삼아 나를 강박하는 일이 무슨 수사인가."

그들의 말이 궁해질 때쯤, 형사는 고문기구 앞으로 류영모를 끌고 갔다. 그 기구들의 사용방법을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고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위협한다. 류영모는 고문기구를 바라보며, 이 형틀에서 고통 받고 죽어간 우리 동포들을 위해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공중변소가 일본만큼 깨끗해지면 독립할 것"

그 무렵 불쑥 일본 형사가 질문을 던졌다.

"너는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있는가?"

'예'라고 대답하면 죄의 올가미를 씌울 것이고, '아니오'라고 하면 우리 겨레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일 뿐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죄를 범하는 상황이 된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조선의 사람이 되어 어찌 이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않겠는가. 그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조선의 공중변소를 보라. 참담하다. 저 변소가 최소한 일본의 공중변소만큼 깨끗하게 되는 날엔 독립의 자격이 있지 않겠는가."

이 말에 형사는 더 이상 추궁할 말이 없어 취조를 진행하지 못했다. 류영모의 '공중변소론'을 전해 들은 송두용(宋斗用)은 그 말이 지니고 있는 깊은 뜻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이후 그는 오류역에 딸린 공중변소를 날마다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독립운동은 공중변소를 청소하여 일본을 이기는 일이었다.

어디가 감옥이냐, 이 세계가 큰 감옥이다

부인 김효정은 성서조선 사건 이후 종로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를 바삐 오갔다. 그때의 일을 이렇게 말했다.

"함석헌 선생 부인은 고향인 신의주에 있었는지라 서울에 오지 못했고 김교신, 송두용 선배 부인과 함께 종로와 서대문을 오가며 면회를 신청했고 사식(私食)을 넣었지요. 내가 남편과 아들 두 사람을 면회신청하면 간수가 이렇게 말했지요. '어쩌다가 남편과 아들을 모두, 이런 나쁜 사람들을 두었소? 참 딱하오.' 나를 조롱하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두 사람이 모두 큰 고생을 하는구나 싶어서 오히려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이 사건은 처음에 악질로 이름난 구로다(黑田) 검사가 맡았다. 초기에 혹독한 수사는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담당 검사가 바뀐다. 새로 맡은 검사는 도쿄제대 출신의 후지키(藤木)였다. 후지키는 김교신을 취조하며 이렇게 물었다.

"만주사변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건 마치 일본이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탄 것과 다름없다. 섣부른 짓을 저지른 것이다. 타고 가도 결국 물려 죽고 내려도 죽고 마는 딱한 사정에 놓인 것이다."

거침없는 김교신의 대답에, 후지키는 분노하는 대신 오히려 침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검사는 증거물로 제출되었던 성서조선을 꼼꼼히 읽고 이들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글들을 읽으면서 이들에 대해 일정하게 공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조서를 넘기면서 그는 "당신들 때문에 공부 많이 하였소"라고 말했고 "기독교가 좋은 종교인 줄 처음 알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후지키는 함석헌에게 조선역사가 고난의 역사라면 세계의 역사 모두가 고난의 역사 아니냐면서, 일본의 역사를 한번 기술해 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류달영은 일본인 간수의 승진시험을 돕기 위해 개인교사 노릇을 해주기도 한다. 일본인들이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제로부터 정당한 대우만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일부의 그런 태도가 이채롭기에 기록으로 남은 셈이다. 실상은 그들에게 호통을 친 어느 일본경찰의 말 속에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지금껏 잡은 조선인 중에 가장 악질 부류다. 종교의 허울을 쓰고 민족정신을 심어서 500년 뒤에라도 독립을 이룩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자들이다." 저 500년이란 말 속에 들어 있는 시간의 감옥에 숨이 콱 막힌다. 그만큼 절망적인 시대였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욕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위대한 힘'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류영모는 고려 500년과 조선 500년도 망했는데, 너희라고 망하지 않을 것 같으냐며 시를 써놓지 않았던가.

장지연의 감방에 머물렀던 57일

류영모는 구속수감 57일 만인 1942년 5월 25일 석방된다. 그가 머물렀던 서대문 형무소 미결수 감방은 위암 장지연(張志淵·1864~1921)이 25일간 머물렀던 곳이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오늘 목놓아 통곡하노라)'을 외쳤던 이 땅의 자존심이었던 그를, 류영모는 15세의 소년 시절에 접했을 것이다. 장지연이 나라를 생각하며 시대를 통분했을 그 자리에서, 궤좌로 앉은 류영모가 사상적인 도약을 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었을까. 이 형무소는 다만 좁은 감옥이며 세상 모두가 감옥이라는 인식이다. "집이라는 것이 감옥입니다. 몸이라는 것도 감옥입니다. 예수와 석가가 가정에 갇혀 살았습니까. 하느님의 속인 무한대에서 살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은 집이 없습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일본 시인 다쿠보쿠(啄木)의 시가 떠올랐다.

"사람마다 집을 가졌다는 설움이여
마치 죽은 사람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듯
모두가 자기 집으로 들어가고 있다"

류영모는 감방에서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옥살이를 하다 보니 <오는 이 섭섭히 맞으며, 가는 이 반기네>란 말을 쓰더군요. 감옥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감정이겠지만,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오는 이를 섭섭히 맞고, 신에게로 돌아가는 일을 반긴다'는 뜻이 되지요. 이 세상이 큰 감옥인 만큼 그런 마음을 지니는 것을 배워갈 만합니다."

그는 귀가하자마자 집의 뜨락에 있는 돌에다 '수(囚, 감옥 사는 사람)' 한 글자를 새겨놓았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