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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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8-27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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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수트라I.29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내면의 소리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다. 교육이란, 그 미세한 소리를 감지하는 기술이다. 21세기 IT세상이 가져온 편리함과 편함은 우리의 눈과 귀를 한순간도 가만두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현란한 정보로 나를 유혹해 결국은 탐닉자로 그리고 중독자로 만든다. 대한민국이 정보통신을 기반으로 한 기술로 괄목할 만한 경제적인 성장을 달성했지만 정작 정보통신에 담아야 할 내용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햄버거에 빵은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는 고기 덩어리는 없는 것과 같다. 우리의 미디어는 시시콜콜하고 굳이 몰라도 인생에 상관없는 잡다한 지식들과 가벼운 농담들로 가득 차있다. 더 나아가 내가 알고 싶지도 않고 보기에도 민망한 타인에 대한 과도한 노출 일색이다. 혹은 이념의 노예가 돼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상이다.

19세기말 미국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1803-882)은 '자립' 이라는 에세이를 “Ne te quaesiveris extra” 즉 “당신과 상관없는 일을 추구하지 마십시오”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에머슨은 미국이란 신생국가를 유럽의 식민지가 아니라 스스로 자립해 미래의 위대한 국가를 꿈꾸며 미국시민들에게 이 문장을 던졌다. 내 삶에 있어서 ‘나와는 상관없는’ 엑스트라는 무엇인가?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행위, 혹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무엇인가? 현대인들이 휴대폰이나 TV를 습관적으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는 이유가 있다. 우리 삶에 있어서 거추장스러운 ‘엑스트라’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엑스트라가 자신으로 착각하여 자신의 제거해야 할 욕심, 폭력, 그리고 사기라는 욕망이란 소용돌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요가는 자신의 귀를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향하게 하는 훈련이다. 요가수련자가 이 훈련을 반복적으로 인내를 가지고 진행하다보면, 그(녀)의 내면에 숨어 있던 목소리가 조그만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 커다란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이 소리들 무시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이 ‘하찮은’ 소리 그 안에서 위대함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소리의 용기를 가지고 행동한 사람이다. 붓다,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어거스틴, 단테, 밀턴, 아인슈타인 등이 모두 그런 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섬세한 소리를 경청하기 위해 스스로 구별된 공간과 시간을 만들었다. 이런 행위가 고독(孤獨)이다. 내면의 소리는 침묵을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일과로 수련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이 수련을 하지 않는 사람들, 즉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고 몰입할 수 없어 항상 동반자를 원하는 보통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들이 그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금방 무시한다. 그 소리가 자신의 생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요가수련자는 침묵을 수련해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들을 수 없지만, 온전히 자신에게 감동스러운 자신을 만들어 줄 그 ‘말’을 성인의 말이나 천사의 명령보다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발견해야 할 신이 마음속에 존재하면 그 신의 목소리만이 자신의 삶의 안내자란 사실을 확신한다. 자신의 사적인 침묵의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가락은 천사의 노래보다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의 심포니 연주보다 감동적이다. 그 소리가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권 21행부터 내면의 소리인 ‘옴’에 관해 설명해왔다. I.28에서 신의 음성적인 속성인 ‘옴’은 반복이며 ‘명상’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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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왈도 에머슨' (1878, 스틴븐 알론조 쇼스, 나무 조각)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내면의 의지
요가수련자가 ‘이슈바라’에게 온전히 승복한다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 요가수련자의 삶을 지배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29에서 ‘옴’수련을 통해 두 가지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타타흐 프라트약-체타나 아디가모 (아)피-안타라야 아바바스-차(tataḥ pratyak-cetana-adhigamo-'py-antarāya-abhavaś-ca)" 이 문장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 수련을 통해,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항상 내면을 향하는 진정한 의지(意志)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소멸됩니다.” 하나는 끊임없이 자신만의 정금(精金)과 같은 온전한 자신을 향하는 의지의 출현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찾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의 소멸이다.

첫 번째, ‘내면을 향하는 진정한 의지’라고 번역된 산스크리트어문장은 ‘프라트약-체타나(pratyak-cetana)’다. ‘체타나’는 인간의 생각을 촉발시키는 ‘의지’다. ‘의지’를 꾸며주는 형용사 ‘프라트약’이 전체 의미를 확정한다. ‘프라트약’은 ‘대항하여; 거꾸로’라는 의미의 전치사 ‘프라티(prati)'와 ‘강제로 굽게 하다’란 의미를 지닌 동사 ‘아크’의 합성어다. ‘프라트약’을 번역하면, ‘외부로 향하려는 마음을 강제로 내부로 향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자신의 내면에 항상 몰입하려는 삶의 태도이자 마음가짐이다.

인간에겐 두 가지 종류 의지가 있다. 여기에서 언급된 ‘프라트약’과 ‘파랑가(paranga)'다. 프라트약은 ‘내면을 향한’ 의지이고, ‘파랑가’는 ‘외부를 향한’ 의지다. 인간의 대부분은 ‘파랑가’다. 그들에게 외부의 평가와 시선이 자신의 삶의 기준이다. 그(녀)는 의지의 세계에서 외부를 향한 자신의 모습을 가꾸고 전시하기 위해 애쓴다. 자신의 삶의 기준이 외부에 있기 때문에, 외부의 기준을 항상 염탐한다. 다른 사람들이 환호하는 그것이 자신이 추구해야할 일생의 과업이라고 착각하여, 남들과의 무한경쟁에 뛰어든다. ‘파랑가’는 자신의 의지를 자신의 근원인 자기 뿌리에 두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뿌리에 두는 마음의 산란(散亂)에서 시작한다. 자신을 믿는 사람, 자신의 심연의 소리를 의지하는 사람, 그 사람이 천재다.

요가는 외부를 향해 질주하는 마음을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당기는 행위다. 그것은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잡기 위해 준비한 조약돌과 무릿매와 같다. 다윗은 조약돌을 무릿매 천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한 손으로 큰 원을 그리며 돌리기 시작한다. 만일 그 돌이 무릿매 주머니에서 바로 튕겨져 나가는 것을 방치한다면, 그 돌은 힘과 에너지가 실리지 않아 버려진 돌과 같다. 그러나 밖으로 향하는 돌을 자신의 중심으로 적당히 당겨 회전하기 시작하면 그 힘은 점점 강해진다. ‘옴’소리를 반복하는 명상하는 행위는 바로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찾아 잡아당기는 의지다. 요가의 목적과 과정은 밖에서 안으로 집중한다. 인생의 궁극적인 신비와 비밀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 숨어있고 다른 곳이 아닌 그곳에서만 존재한다. 요가수련자는 밖으로 향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가만히 관찰하여 의식적으로 안으로 잡아당겨야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의 이런 행위를 ‘아디가마(adhigama)'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한다. ‘아디(adhi)'는 ‘-향햐여’라는 의미고 ‘감(gam)'이란 동사는 ‘전진하다; 가다’라는 의미로 ‘드러나다; 도달하다’라는 의미다. ‘아디가마’는 자신의 내면으로 매일 매일 조금씩 전진하는 모습이다. 요가수련자의 모습은 목적지에 도달하여 기뻐하는 모습이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이다.

둘째, ‘그것을 방해하는 장애물 소멸’이다. 이 문장은 ‘안타라야-아바바스’에 대한 번역이다. ‘장애물’이라고 번역된 ‘안타라야’는 ‘-사이에서’라는 의미 ‘아타르(antar)'와 ‘가다’를 의미하는 동사 ‘이’의 합성어다. 장애물이란 요가수련자의 길을 막아 가던 길을 방해하거나 지체하는 물건이다. 파탄잘리는 그런 장애물들이 요가수련의 반복과 명상을 통해 ‘제거’된다고 기록한다. ‘소멸’이라는 산스크리트어 명사는 ‘아바바(abhāva)'다. 요가수련자가 직접 나서서 장애물을 제거할 필요가 없다. 그가 요가수련을 정진하면, 장애물들은 마치 봄 햇빛에 눈이 사르르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장애물들이란 요가수련자의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욕심, 폭력 그리고 사기와 같은 마음들이다. 이런 마음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바로잡는다면 그런 마음들은 소멸할 것이다. '요가수트라' I.2에서 파탄잘리는 요가의 목적을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잡념에 대한 소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요가수트라' I.30은 요가수련자가 자신의 내면을 희구하는 수련을 하지 않을 때 생기는 병들에 대한 나열이다. 요가수련자는 ‘옴’이라는 소리를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내면서 자신이 안주해야할 한 장소를 마음의 미궁(迷宮) 속에서 찾는다. 그 중심은 마치 나무의 씨앗과 같아서, 언제든지 발아하여 가지를 내고 큰 나무가 될 것이다.

'요가수트라' I.23-I.29는 요가수련자가 스스로 신이 돼 자신에게 위대한 삶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는 주체자의 수련기술을 나열했다. 그가 이 여정을 완주하고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수련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옴’ 주문을 통해 자신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끊임없이 개선하는 행위다. 파탄잘리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당신은 온전한 당신을 만들어 줄 자신만의 의식, 자신의 의지를 본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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