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트루먼-스탈린-마오쩌둥의 게임, 6·25는 국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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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아주닷컴 대표
입력 2018-06-25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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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18년 6월25일)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이다. 대체 이 전쟁은 왜 일어난 걸까. 해방을 맞은 지 5년밖에 안된 시점에서, 남과 북이 이토록 참혹한 전쟁을 치를 만큼 적대적인 관계였을까. 이념의 불화가 그토록 심했을까.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거치면서, 한반도의 '종전'논의가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 그 전쟁의 진짜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1951년 필리핀 파병대.]



# 한국전쟁을 보는 두 가지 관점

한국전쟁에 대한 질문은 해마다 이맘때면 거듭되지만, 응답은 늘 속시원하지 않다. 속시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이견들이 대치하는 듯하다. 한국전쟁은 크게 두 가지 해석의 틀을 지니고 있다. '정통주의'로 불리는 해석이 있고,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확산된 '다른 의견'이 있다.

한국전쟁은 북한 김일성이 스탈린의 사주를 받아 일으켰고,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으로 북한 지역 전체를 잃을 뻔한 위기에서 마오쩌둥의 지원을 받아 휴전선을 고착시킨 전쟁이다. 이것이 정통주의적 해석이다.

1970년대 이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다른 해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즉 전쟁은 국민 불평등과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내부 의지의 분출이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김일성은 민중의 욕구를 수용하려는 차원에서 통일전쟁을 수행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견해는 민주화 추진 세력으로 불려온 운동권의 핵심논리로 자리를 잡았다.

같은 전쟁을 사이에 놓고 이처럼 갈라지는 해석은, 국가의 비전과 가치의 분단을 가져온 점이 있다. 최근 들어, 정통주의적 해석에 힘을 실어주는 국제적인 문서들과 증거들이 보완됨으로써, 분위기는 상당히 달라졌다. 강준식씨는 한 월간잡지를 통해, 한국전쟁의 정통적 해석에 관한, 하나의 결정판이라 할 만한 자료를 내놓아 관심을 모은 바 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



# 처음엔 '서해 도발'의 국지전만 노렸던 북한

그는 1950년 당시 전쟁을 둘러싼 기류와 분위기를 입체적으로 밝혀낸다. 우선 북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한국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스탈린은 미국이 핵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음을 염두에 두면서 허락하지 않는다. 그 무렵 스탈린은 미국이 외국의 전쟁에 핵무기를 쓰지 않는 정책을 결정했다는 문서를 입수한다. 이것이 그의 생각을 바꾸게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불러 전쟁을 허락한다. 처음에 전쟁은 서해 일각을 ‘도발’함으로써 국지전을 벌이려 했다. 전쟁의 책임 문제가 생길 때 얼버무릴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전쟁의 효율성을 위해 전면전으로 전략이 바뀐다.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무슨 까닭인지 사흘 동안 더 이상의 진군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승리에 도취한 데다가, 작전을 신중하게 추진하려는 사령관의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정은 오판이었고, 우리 군과 미군이 전세를 가다듬을 시간을 줬다. 막강한 화력을 지닌 북한이 초기 전쟁에서 실패한 중요한 이유였다.

# 트루먼 "재공격 허용, 단 중국-소련의 국경은 넘지마라"

이후 낙동강까지 내려간 북한군이 맥아더의 인천상륙으로 교착에 빠지고 후퇴를 시작하면서 전쟁의 분위기는 역전된다. 서울을 탈환하고 삼팔선을 넘을 때 이승만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했다고 말해왔으나, 문서를 통해 보면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이미 그것을 허용한 발언이 나와 있다고 한다. 트루먼은 다만 중국과 소련의 국경까지는 올라가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38선을 넘었을 때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한다. 마오는 북한 영역까지 미군이 들어오는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중국공산군의 대대적 참전은 전세를 바꿨다. 1·4 후퇴로 우리 군이 쫓겨내려왔고 38선 근처에서 처절한 공방전이 펼쳐진다.

# 핵 사용 거부한 트루먼에, 맥아더 "바보같은 자식"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을 주장했다. 중국 본토를 치자는 의견도 내놓았고 이런 견해는 세계3차대전을 부르는 위험한 작전으로 이해되었다. 너무나 단호하고 거칠게 주장하는 바람에(트루먼을 '바보같은 자식'이라고 말해서 노여움을 샀다는 얘기도 있다) 사령관에서 해임당한다.

미국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높아지자,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중국의 핵보유를 요청한 기록이 있다. 스탈린은 같은 이념의 국가이긴 하지만 껄끄러운 이웃인 중국에게 핵무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답보 상태의 전쟁에 지친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에게 휴전 의사를 타진한다. 마오쩌둥도 고개를 끄덕인다.

# 휴전을 반대한 이승만

그때 휴전을 반대하고 나선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이 논의를 하자고 불렀으나 가지도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 이승만은 휴전에서 유리한 조건들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한국전쟁을 끝내기로 미국과 협상한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공군장성 출신인 윤응렬선생(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역임)은 또다른 증언을 했다. "6·25는 철저히 스탈린의 동방정책이었습니다. 스탈린은 세계 적화를 위해 유럽 쪽을 모색하다가 좌절한 뒤, 한반도를 택한 거죠."

이 전쟁은, 동족상잔이나 한반도 내전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공산화를 위한 기지 확대를 노리던 세력들이 일으킨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즉 이 전쟁은 철저히 국제전이었다. 한국전쟁의 승리는 우리 군과 미군, 그리고 유엔군이 '세계' 혹은 '자유세계'를 지켜낸 값진 승리였다는 얘기다.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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