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⑰] 등장인물:몽호 황학수·춘교 유동열·화강 이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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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1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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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총사령부 시안 판사처 간부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이준식, 황학수, 김학규.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몽호 황학수]


몽호(夢乎) 황학수(黃學秀, 1879~1953)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 서로군정서 참모장
충북 제천 출생으로,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유년학교 교관으로 복무했다.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 뒤 낙향,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해 육영사업에 전념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직후 상해로 망명해 의정원 의원 및 군무부 비서국장으로 선임되었다. 1920년, 남만주로 가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참모장과 군사부장으로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가담하고, 이후 난징에서 조선혁명당에 참여했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군사특파원으로 시안에 파견되었다. 1941년 광복군 총사령부가 시안에 설치되자, 광복군 총사령관 대리 및 광복군특별당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 생계부장(生計部長)으로 활동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춘교 유동열]


춘교(春郊) 류동열(柳東說, 1879~?)
대한제국의 마지막 장교… 임시정부 군무총장
평북 박천 출신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러일전쟁 당시 대한제국 파견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했으며, 무관학교 및 유년학교 교관으로 복무했다.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1907.8) 되고,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안중근 의사가 결행한 이토 히로부미 처단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일제가 조작한 소위 ‘105인 사건’으로 1년6개월 옥살이를 한 뒤, 만주로 망명해 서일(徐一), 김동삼(金東三), 김좌진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진력했다. 만세운동 직후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던 임시정부에서 각각 참모부총장(한성), 참모총장(노령), 군무총장(상해)에 임명되었을 만큼, 폭넓은 신망을 받았다. 광복 후 귀국해, 미군정청 초대 통위부장(統衛部長, 현 내각 직책으로는 국방장관)을 지냈고,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화강 이준식]

화강(火岡) 이준식(李俊植, 1900~1966)
광복군 제1지대장 … 해방후 국군 창설 주역
평남 순천 출신. 만세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해 약관의 나이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윈난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를 졸업한 뒤 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투신했다. 조선혁명당 중앙위원으로서 군사위원장을 맡았으며, 만주사변 직전 상해로 내려가 임시정부와 연결 아래 중국군에 입대했다.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으로 시안에 파견되었고, 광복군 창설 이후 총사령부 참모에 이어 제1지대장에 임명돼, 산시성 일대에서 중국군과 연합작전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의 아내 김병인이 수당을 형님이라 불렀을 만큼, 수당 가족과는 창사 시절부터 가깝게 지냈다. 우연의 일치이겠으나, 광복군 지대장으로 활약한 이준식(1지대장), 이범석(2지대장), 김학규(3지대장) 3인이 모두 1900년생이다.
광복 후에는, 이범석이 조직한 민족청년단 부단장을 맡아 백범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국군 창군에 일익을 담당했으며, 한국전쟁 당시 주요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육군중장으로 예편했으며, 재향군인회장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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