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재발견]기미년 3월1일 왜 여자들이 나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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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T&P 대표
입력 2018-03-1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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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초상화]



# 3.1운동은 세상을 놀라게 한 이 땅의 여성운동

1919년에 일어난 3.1 만세운동을 떠올리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 없는가.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궐기한 이 날, 역사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람은 유관순이다. 16세 밖에 안되는 소녀였다. 당시 봉건적인 사회 속에서 어떻게 나이 어린 여성이 대담하게 거리로 뛰어나와 식민통치의 강대한 권력에 맞설 수 있었을까. 죽음으로 그 뜻을 관철한 유관순이라는 개인의 신념도 놀랍지만, 이 땅에서 여성이라는 '젠더'가 질곡을 떨치고 사회의 전선(前線)으로 뛰쳐나왔다는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3.1운동을 되살피면서 여성의 참여를 눈여겨 보는 관점은 뜻밖에 드물다. 3.1운동은 매우 의미있는 여성운동사의 한 장(章)이며, 유관순은 그런 역사적인 함의를 지닌 아이콘임에 틀림 없다. 일제 시대의 신문은 이미 이런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삼일운동 전체가 조선인민 전부에게 많은 정치적 의식을 환기한 것은 물론이지마는 조선신진여성으로서 정치적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때를 최초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1928년 1월6일자 동아일보는 언급하고 있다.
 

[사진 =sbs의 3.1운동 특집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1967년에 나온 '이화팔십년사'에도 비슷한 관점의 기록이 있다. "3.1운동 때 여학생들은 대부분 생명을 걸고 일선에 나서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이런 활동은 여성을 봉건제도와 남성들의 이중 속박에서 늦추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즉 3.1운동을 계기로 여성들이 남성 중심 사회의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 '사회 일선'으로 진출해 의사를 표현했다는 얘기다. 이 책은 또 이 사건 이후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고 자유를 누리는 서곡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3.1운동은 어떤 측면에서 여성운동이기도 했다.

이것을 여성운동으로 적극적인 해석을 보여준 사람은 3.1여성동지회 명예회장인 박용옥(성신여대 사학과)교수다. "우리나라의 여성운동은 서방국가의 경우와는 달리 주로 항일민족독립운동의 추진과정 속에서 발전했다. 일제하 여성 항일운동은 근대적 한국의 여성상 정립의 필수적인 요체였다."고 밝히고 있다. (1996년 출간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 참조) 우리가 유관순을 비롯해, 남자현, 윤희순 등 봉건적 질곡을 떨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성들의 기억을 간직하게 된 것은, 시대적 흐름의 결과인 셈이다.

# 일본 경찰은 경성의 기생들과 술 마실 때 소름이 끼쳤다

1919년 십대의 여학생들에 못지 않게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놀랍게도 기생들이다. 조선시대 기생 신분의 여성들은 집안(규방)이라는 영역을 벗어나 남성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사회적 영역에서 활동했던 독특한 계층이었다. 일제하의 기생에 대한 기록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다. 3.1운동 이후인 1919년 9월 경성의 치안책임자였던 일본경찰 지바료는 총독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를 하고 있다.

"내가 부임하였을 때 경성 화류계는 술이나 마시고 춤이나 추고 놀아나는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8백명의 기생은 화류계 여자라기 보다는 독립투사라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튀었고 그곳으로 놀러오는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독립사상을 불지르고 있었다. 경성 장안 100여곳의 요정은 불온한 소굴이었다. 간혹 일본인들이 기생집에 놀러가면 그 태도는 냉랭하기가 얼음장같고 이야기도 않거니와 웃지도 않는다. 그 분위기야 말로 유령들이 저승에서 술을 마시는 기분이었다."(최은희의 '한국근대여성사' 중에서)
 

[사진 =sbs의 3.1운동 특집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 우리는 논개와 계월향의 후예다

3.1운동은 기생의 삶도 180도 바꿔놓았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기생들은 '사상기생'이라 불렸다. 그해 3월 29일 수원에선 기생조합원들이 자혜병원 앞으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 경찰이 병원으로 달려왔지만, 학생과 상인, 노동자들이 기생을 둘러싸 보호하면서 함께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3월18일 저녁 진주의 기생들은 한 자리에 모여 만세운동을 논의했고 이튿날 박금향 등 32명이 대대적인 시위를 주도했다. 악대를 앞세운 예기(藝妓)들은 막아서는 일본 경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자랑스런 논개의 후예다. 진주 예기의 전통과 긍지를 잃지말자." 그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기생 시위는 통영에서도 일어났다. 3월 28일과 31일, 그리고 4월까지 이어졌다. 통영기생 정홍도와 이국희는 금비녀와 금반지를 팔았다. 광목 4필을 구입해 태극기를 만들어 33명이 시위를 했다. 

보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기생 시위는 해주기생들이다. 김월희, 문월선, 김용성(예명은 해중월), 문재민(예명은 형희), 옥운경(예명은 옥채주) 등 5명의 기생결사대는 "남자의 힘을 빌지 않고 서로 합심동체가 되어 독립운동의 투사가 되자"고 언약한다. 그들은 만세투쟁일을 4월1일 오전10시로 잡았다. 독립선언서를 얻을 길이 없었던 그들은 직접 선언문을 썼다. 월희와 월선이 국문으로 글을 지어 인쇄물로 만들어 시위참여자에게 나눠준다. 이들의 평양의 유명한 애국적 기생 계월향의 후예임을 내세웠다. 그들이 시위를 주도하자, "기생들도 독립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하는데..."라며 가정 부인들까지 합류했다. 시위대는 3천명에 이르렀다.

# 피투성이로 저항했던 기생들에겐 나라는 무엇인가

한국 최초의 여성 신문기자로 유명한 최은희는 당시 감옥에 가 있었는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생들이 당하는 고문 현장을 보고 들었다. "온몸이 멍이 들고 화상을 입었다. 매를 맞아 시퍼런 몸뚱이는 구렁이를 칭칭 감아놓은 것처럼 부풀어 올라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당시 남성들로부터도 무시받고 사회계층으로도 천대받던 그들에게 '나라'는 무엇이었으며 겨레의 자존감은 또 무엇이었을까. 무엇이었기에 고통을 자초하고 죽음을 각오했을까. 후대의 우리가 편안하고 안전한 자리에 앉아서 짐작하고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3.1운동은 만세나 부르고 귀가한 운동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해 석달 사이에 7509명이 살해된 참혹하고 무시무시한 참극 속에서 일어난 거대한 몸부림이었다. 이 피와 고통을 먹고, 이 땅의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위상을 만들어왔다.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몇 겹의 질곡을 뚫고 나온 아름다운 애국혼으로, 더욱 높이 새겨져야 하지 않을까.           이상국 아주T&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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