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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스페셜-여자의병장 윤희순①]"왜놈대장 보거라"라고 외치며 창을 든 조선여인

이상국 T&P 대표입력 : 2018-03-11 16:04수정 : 2018-03-11 16:04
2019년 상해 임시정부100년 특집 - 한중 역사문화 스토리텔링 : 국난에 맞서 여성들이 창을 들었다
# 춘천서 활약한 47세 여성의병대장 

1907년 강원도 춘천에는 30명의 여성 의병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남면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의병 600여 명(일제의 고종 강제 퇴위에 항의해 일어난 정미의병) 속에는 아줌마들의 얼굴도 보였다. 이들은 병사의 식사를 준비해 날라주고 옷가지를 세탁하고 부상자나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맡았지만 군사 훈련에도 열심이었다. 창을 가지고 덤불 사이에 숨어 있다가 일본군이 지나가는 것을 가상해서 찌르기 연습을 했다. 여자 의병대 앞에는 47세의 눈빛 매서운 아줌마 하나가 훈련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름은 윤희순(尹熙順·1860~1935). 춘천 의병대(의병장은 이소응)를 움직이는 실력자인 유홍석(1841~1913)의 며느리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마도 유일한 여성 의병장일 이 여인. 시아버지와 함께 의병으로 뛰고 있는 그녀는 누구일까?
 

[사진 = 첫 여성의병장 윤희순. (국가보훈처 블로그 자료)]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 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있나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이 노래는 윤희순이 지은 <안사람 의병가>다. 광복 이후 강원대 음악학과 김현옥 교수가 채보(採譜)한 것으로 <외당선생삼세록>에 가사와 곡이 실려 있다고 한다. 윤희순은 8편의 의병가를 직접 작사해서 유포했고, 관군·조선인 밀고자· 일본군을 향한 4편의 경고문을 지었다. 그 중 몇 가지를 들어보면 이렇다.



왜놈대장 보거라
만약에 너희놈들이 우리 임금, 우리 안사람네를 괴롭히면
우리 조선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남의 나라 국모를 시해하고
네놈들이 살아갈 줄 아느냐
빨리 사과하고 돌아가라
우리나라 사람 화가 나면
황소나 호랑이 같아서
네놈들을 잡아서 처단하고 말 것이다


-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



금수들아 받아보거라
금수보다 못한 인간들아
너희 부모 살을 베어 남을 주고도
너희 부모는 살 수 있나
왜놈의 앞잡이놈들, 참으로 불쌍하고 애달프다


- 조선 안사람 윤희순
 

[사진 = 2014년 강원도 춘천에서 열린 애국지사 첫 여성의병장 윤희순 추모 콘서트.]



# 의기 높던 유홍석, 13도 의병을 지휘하던 유인석 집안의 여인

19세기의 조선 여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침없는 말투가 쏟아져 나온다. 글의 마지막에는 꼭 자신의 이름 ‘윤희순’을 적어 넣었다. 두려움 없는 여인, 뚜렷한 자아관, 치열한 애국심. 뜨거운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윤희순은 조선 말의 대학자였던 화서(華西) 이항로(1792~1868)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의 맏딸로 경기도 구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1506년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이었던 윤희평을 자랑으로 삼는 가문이다. 희평은 뛰어난 무인(武人)으로1510년 삼포왜란을 평정한 공으로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아마도 희순은 조상의 이런 장수(將帥) 기질과 DNA를 물려받지 않았을까. 게다가 강직한 천재 이항로의 가르침이 그녀의 삶에 스며들어 있었으리라. 이항로는 1866년 병인양요 때 주전론(主戰論)을 펼쳤고 대원군에 맞섰던 지식인이다. 희순이 시집간 곳은 아버지 윤익상과 함께 공부하던 유홍석의 집안이었다.

유홍석의 종친(宗親)인 유중교는 화서학맥(이항로 학파)의 2대 종주였다. 13도 의군도총재였던 유인석은 유홍석의 재종형제로 역시 이항로를 추종하는 인물이었다. 희순 주위의 인물들은 모두 이항로의 위정척사론을 따르고 있었다. “화서학파의 사상적 기저가 춘추대의에 입각한 존화양이(尊華攘夷·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침)입니다. 의리와 명분을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의리파들이었죠. 일제 침략의 상황에서 그들은 사람으로 남느냐, 짐승으로 변하느냐를 절박하게 고민했던 분들입니다.”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박민영 박사의 말이다.

# 첫날밤에 신부족두리 벗고, 화재 진압 나선 그녀

희순이 시집간 해는 그녀가 16세이던 1876년이다. 조선이 뒤숭숭하던 때였다.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대원군이 하야한 뒤 일본은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과 강화도 부근 서해안의 해로 측량을 한다며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파견해 시위를 벌였다. 초지진(草芝鎭)의 조선 수비병이 발포하자 일본은 이에 항의하며 개항을 요구했다. 강화도에서 굴욕적인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 맺어졌다.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무렵의 일이다. 춘천시 남면 발산리, 산자락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살던 고흥유씨 집이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한양에서 새색시를 태운 꽃가마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잔칫집에 큰 사고가 있었다.

저녁이 되자 동네 아낙들이 새댁 구경을 한다고 관솔불을 켜서 들고 왔는데 초가 처마 끝에 불을 너무 높이 들어 화재가 난 것이다. 불길이 거센 가운데 시아버지 유홍석은 신방에 있던 신부 희순을 번쩍 들어 안고는 집 바깥에 있는 보리밭(나중에 고추밭으로 변했다)으로 옮겨놓았다. 그때 그녀는 족두리와 저고리를 벗어젖히고 불을 끄러 달려갔다고 한다. 물단지를 들고 뛰는 새색시가 흡사 전사(戰士)와 같았다. 이 사건은 그녀의 삶을 암시하는 예고편이었을까.

# 의병장 시아버지는 친일파 춘천부사 붙잡아 죽여

그녀는 <일성록(日省錄)>에서 신혼 무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남편은 성제 댁에 가 계시고 두견새처럼 살자니 항상 쓸쓸했다.” 성제는 시댁 종친인 대학자 유중교를 말한다. 남편 유제원은 결혼 후에도 여전히 학문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집을 줄곧 비웠다. 어린 신부는 혼자 신방을 지켜야 했다. 첫날밤의 화재로 불냄새가 아직도 나는 집에서 그녀는 늘 독수공방이었다. 거기다가 나라는 강제로 문(門)이 열려 풍전등화니 신부의 귀도 온통 일본과 외세에 대한 얘기로 시끄러웠을 것이다. 사랑할 겨를이 없으니 오랫동안 아이도 없었다. 외로운 가운데 무심한 세월이 흘렀다. 그녀가 첫 아이를 낳은 것은 결혼한 지 20년이 지난 뒤(1894)였다. 얼마 안 있어 을미의병이 봉기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어 친일내각은 황후를 폐위 조치했다. 전국의 유생들은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상소(討逆疎)를 냈고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의병을 일으켰다. 시아버지 유홍석은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교전하다가 패배하고 춘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에서 의병을 규합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부대는 춘천부사로 부임하던 조인승을 붙잡아 죽이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조인승은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의 처형을 청한 인물이며 일제의 조선개혁안에 동의한 부역자(附逆者)였는데, 당시 단발령에 따라 머리를 빡빡 깎고 춘천으로 들어오다가 의병들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다.

# 남장을 하고 시아버지를 따라나선 며느리에게...

시댁에는 자주 의병 활동가들이 들락거렸다. 시아버지는 집에 오래 머무는 날이 드물었다. 나라가 흔들리는 시절에 규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몹시 답답했던 며느리 윤희순은 어느 날 남장(男裝)을 하고는 시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아버님, 저도 조선사람이니 의병이 되고자 합니다.”

유교 윤리에 투철했던 유홍석은 펄쩍 뛰었다.

“얘야,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규중 여인으로 어찌 나를 따르겠다는 것이냐. 전쟁터는 여자들이 갈 곳이 못 된다. 내가 지금 나가면 생사를 알 수 없으니 너는 남아서 조상을 잘 받들고 자손을 잘 길러서 애국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이상국 (아주T&P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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