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허상虛想 혹은 상상想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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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3-0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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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 수트라 I.9

[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기호(記號)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고 관찰하는 세계를 ‘말’을 통해 인식하고 소통한다. ‘말’이란 자신이 태어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오랫동안 상호소통을 통해 만든 약속이다. 소수의 유인원이 말을 정교한 기호체계로 변화시켜 호모 사피엔스가 됐다.

‘말’은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려는 구체적인 대상을 음성으로 표시한 이미지 혹은 ‘음성’ 기호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은 개과에 속하는 일련의 동물들을 고양이과에 속하는 포유류와는 달리 ‘개’라고 부른다.

그러나 ‘개’를 개라는 개념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인이나 영국인들은 ‘도그(dog)’라 부른다. 그러나 ‘개’나 ‘도그(dog)’란 이름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소통을 위해 편의상 붙인 것이다.

그것들은 실제 개와는 상관없는 임의적이 명칭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운명적으로 태어난 지역공동체가 오래 전에 만든 언어라는 ‘기호’를 통해 사고할 수밖에 없다.

기호는 그 공동체가 만든 말, 이미지, 소리, 냄새, 맛, 행동 혹은 물건들이다. 이것들은 그것 자체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에스키모 사람들에겐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을 표현하는 단어가 수십개 있지만, 모래를 본적이 없기에 ‘모래’를 표현하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

반대로 사하라 사막에 사는 아프리카인들에게 ‘모래’를 지칭하는 수십 가지 다양한 단어들이 존재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물건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때만, ‘기호(記號)’가 된다.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는 기호를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기호가 취하는 형태, 예를 들어 ‘개’라는 소리를 ‘기표(記標)’로, 다른 하나는 ‘개’라는 소리가 상징하는 개념을 ‘기의(記意)’로 불렀다.

언어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때 의미가 있다. 실제 ‘개’라는 존재와 개념이 없다면, ‘개’라는 말은 의미가 없으며, 반대로 ‘개’라는 말은 실제로 짖고 꼬리를 흔드는 개과의 동물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개’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개’라는 개념과 관련된 심리적인 이미지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특정한 개, 예를 들어 ‘진돗개’라는 특정한 개의 특징을 지닌 개의 모습으로 확인된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를 심리적인 용어로 사용했다. 소쉬르의 기호이론을 수용해, 인류가 떠 올린 ‘신’이란 기호를 생각해보자.

인류 최초의 문자를 발명한 수메르 인들은 ‘신’이란 개념을 물질을 통해 표현했다. 그들은 신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한 가시적인 물건을 ‘별’이라고 생각했다.

별은 낮에는 보이지 않지만 밤에는 항상 등장하는 존재다. 인간은 별을 멀리서 볼 수 있지만 접근할 수는 없다. 신은 그들에게 별과 같은 존재였다.
 

수메르 쐐기문자 'dingir'. [아주경제DB]


은유적으로 신은 별이다. 그들은 쐐기문자로 표시하고 ‘딩길(dingir)’이라고 발음했다. 문자와 음성 이미지 ‘딩길’은 기표다.

그들은 ‘신’이라는 기의를 시각적인 문자와 청각적인 음성으로 표현했다. 수메르는 기원전 20세기경 이란에서 침공한 엘람인들과 시리아에서 몰려온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멸망한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수메르 문자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셈족어로 ‘일룸(ilum)’으로 발음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수메르인들과 동일한 기의인 ‘신’이란 개념을 ‘딩길’이 아닌 ‘일룸’으로 다르게 표현하였다. 영어로는 ‘갓(god)’, 한자로는 ‘신(神)’, 그리고 한국어로는 ‘하느(나)님’으로 발음한다. ‘신’이란 기의를 각기 다른 언어전통에서 딩길, 일룸, 갓, 신, 혹은 하느(나)님으로 다양하게 부른다.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기의가 없는 기표’ 혹은 ‘허상’
파탄잘리는 ‘요가 수트라’ I.6에서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다섯 가지 생각의 방식을 소개한다.

이 다섯 가지 방식들 중 첫 두 쌍은 ‘통찰’과 ‘착각’이다. ‘통찰’과 ‘착각’에는 관찰의 대상이 존재한다. 관찰자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 사물의 핵심을 간파할 수도 있고 혹은 관찰자가 편견이라는 색안경을 착용하여, 자신이 관찰하는 대상을 자신이 보고싶은 대로 보기도 한다.

파탄잘리는 ‘통찰’과 ‘착각’ 다음에 ‘허상’과 ‘망상’을 소개한다. 이 두 가지 생각유형의 특징은 관찰의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다. 관찰자는 그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말’로만 존재하는 ‘허상’과 ‘말’로도 존재하지 않는 ‘망상’을 소개한다.

YS 1.9는 다섯 가지 생각의 유형들 중 세 번째로 ‘허상’으로 흔히 번역되는 ‘비칼파(vikalpah)’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브다-즈나나-아누파티 바스투-순요 비칼파(śabda-jñāna-anupātī vastu-śūnyo vikalpaḥ)’. 이 문장을 직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허상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말뿐인 지식이다.” (<요가 수트라> I.9)

파탄잘리는 ‘허상’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를 시작한다. ‘실재’라는 산스크리트 단어 ‘바스투(vastu)’는 세상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여 오감으로 확인 가능한 물건이다.

우주는 오감으로 존재하는 실재다. 우주가 존재하기 전의 상태를 ‘공허(空虛)’라고 부른다. 공허란 존재 이전의 상태인 무-존재, 혹은 질서 이전의 혼돈이다.

산스크리트어 ‘순요’는 ‘공허’를 의미하는 전치사로 ‘-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바스투-순요’는 ‘실재가 없는 상태’이다. 소쉬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허상은 ‘기의’의 부재다.

이 문장의 첫 구절은 세 단어의 합성어다. ‘말’을 의미하는 ‘사브다(sabda)’, ‘지식’을 의미하는 ‘즈나나(jnana)’, 그리고 ‘의존하는’ 혹은 ‘따르는’이란 의미의 ‘아누파티’다. 이 구절을 번역하면, ‘(허상은 실재하지 않는) 말에만 의존하는 지식’이다.

‘거짓’
‘말’로는 존재하지만 ‘실재’나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거짓’이라고 말한다. 바빌로니아의 창조신화인 ‘에누마엘리쉬’는 기원전 17세기에 아카드어로 기록됐다. 태고의 두 신인 바다의 여신 ‘티아맛’과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남신인 ‘압수’가 뒤엉키는 혼돈의 묘사로 시작된다.

7개 토판문서로 기록된 ‘에누마엘리쉬’의 제 1토판 첫 다섯행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1) 높은 곳에서는 하늘이 이름으로 붙여지지 않았고, (2) 아래에서는 땅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을 때, (3) 우주의 모든 것을 낳은 모체 티아맛 여신(바닷물)과 (4) 모든 것들을 배태한 태고의 압수 신(강물)이, (5) 서로의 물을 하나로 뒤섞고 있었다.”

우주가 창조되기 전 공허를 장악하는 두 신은 티아맛과 압수다. 아직 인간들이 창조되지 않아, 조그만 신들이 강제노역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천상의 신들에게 자신들을 억압하는 티아맛과 압수를 물리쳐달라고 간청한다. 천상의 신들은 티아맛의 가공할 만한 폭력을 두려워해 벌벌 떨고 있었다. 그 때, 젊은 영웅 마르두크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만이 티아맛을 무찌를 수 있다고 장담한다. 천상의 신들을 그의 말의 진실성을 실험하기 위해 시험한다. 신들은 하늘의 별들을 원래의 모습에서 이탈시켜 혼란스럽게 펼쳐놓는다. 그들은 마르두크에게 말한다.

“네가 신이거든, 이 별들을 너의 말로 다시 원래의 상태로 진열하여라!”

마르두크는 별들에게 “일렬로 정렬하여라”라고 말하니 별들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자 신들은 마르두크를 찬양하며 최고신으로 모신다. 신은 자신의 말로 우주를 움직이는 자다.

말은 행동이며 행동은 말이다. 말은 사건이며 사건은 말을 통해 시작한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6세기에 기록한 우주창조 이야기에서 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신의 ‘빛이 있으라’ 말하니 빛이 생겼다.”(<창세기> 1장3행)

신은 자신의 말을 구체적인 사건과 물건으로 표현하는 자다. ‘말하다’라는 히브리 단어는 ‘아마르(amar)’다. 이 단어의 심층적인 의미는 동일한 셈족어이지만 히브리어보다 훨씬 이전에 등장한 아카드어에서 찾을 수 있다.

동일한 어근을 가진 아카드어 동사 ‘아마룸(amarum)’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나타나게 하다; 보이게 하다’이다.

‘말’이란 ‘행동’으로 가기 위한 첫 신호이며 ‘행동’으로 완성한다. ‘행동’으로 완수되지 않는 말은 거짓이다. “신의 ‘빛이 있으라’ 말하니 빛이 생겼다”라는 문장은 신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말’이 실제의 ‘사건’이 된 사건을 ‘성육신’으로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연습’이란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프락시스(praxis)’를 통해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말’이 구체적인 사건으로 이전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장이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로고스)이 있었다.” 그 말이 예수라는 인간을 통해 세상에 왔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다.

‘허상’과 ‘상상’
파탄잘리의 ‘비칼파’는 ‘허상’뿐만 아니라 ‘상상’을 의미한다. ‘허상’과 ‘상상’을 굳이 구별하자면, 허상이 미래에도 구체적인 물건이나 사건으로 전환될 수 없는 수동적이며 비관적인 공허라면, 상상은 실재로 변환 가능한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공허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오감의 도움 없이 상상을 통해 미래를 개척했다. 상상은 인간이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상상을 위한 기본 수련이 바로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이야기 안에 등장하는 선택된 단어는 듣는 자로 하여금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판타지를 자아낸다.

1905년 스위스 베른의 특허청에 근무하던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사고실험’이라는 상상을 통해 그 당시 과학의 신이라고 추앙받던 아이작 뉴턴(1642-1727)의 만유인력 이론을 폐기시켰다. 

300년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고 경험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 경험을 백년의 시로 썼다. 바로 ‘신곡’이다. 단테는 이 상상으로 중세시대를 마감하고 르네상스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인간이 자신에게 감동적인 자신, 인도의 베다 시대와 우파니샤드 시대에 등장한 우주적인 자아인 ‘푸루샤(purusha)’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규정한 과거의 개념에 사로잡혀 실재로 전환하지 못하는 ‘허상’을 초월할 수 있다.

나의 생각은 허상인가 아니면 상상인가? 나는 나에게 감동적인 우주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남들이 정해놓은 말이라는 개념에 나를 감금시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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