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70] 티베트 불교는 어떤 변화를 불러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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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2-11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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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몽골정신 강화 시도

[사진 = 비라교수(몽골 원로역사학자]

알탄 칸과 달라이 라마 3세의 만남은 어떤 이유에서 이루어졌을까? 적어도 양측 모두 만남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라교수와 다시바타르교수 등 몽골의 다수 학자들은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은 양측 모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튼튼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알탄 칸이 실질적으로 몽골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자이기는 하지만 대칸도 아니었고 몽골은 여전히 혼란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몽골인의 정신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티베트 불교의 도움을 받아 이루려 했다는 설명이다.

▶ 황교, 몽골 도움으로 주도권 장악시도

[사진 = 총카파]

티베트에서도 주도권을 잡기 위한 여러 종파의 다툼이 이어지고 있어 정치가 혼란스러웠다. 여러 종파 가운데 14세기, 청해의 총카파가 제창한 겔룩파라는 종파가 다른 종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이 황모파 또는 황교라고 불리는 겔룩파가 정치․군사적으로 몽골의 도움을 받아 티베트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동안 황교의 간단 대승원 좌주(座主)는 7년마다 교대하는 자리여서 티베트 불교 전체를 통합하는 상징적인 인물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전생활불(轉生活佛) 제도를 도입해 종파의 통합을 꾀하려 했다. 전생활불 또는 활불로 부르는 제도는 덕망 높은 승려가 죽었을 때 그를 보살의 화신이었다고 간주하고 반드시 전생하여 구제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믿는 데서 생겨났다.
 

[사진 = 소남 갸초]

고승이 죽음에 임박해 전생의 방향을 유언하면, 고승이 죽은 지 10개월이 지난 뒤 49일 이내에 그 지방에서 태어난 어린이 중에서 활불을 선정한다. 황교가 몽골과 손을 잡는 과정에서 생겨난 달라이 라마는 바로 최초의 전생활불로 등장한 것이다. 1,2대 달라이 라마를 정하고 소남 가초를 3대 달라이 라마로 정한 것도 바로 전생활불제도의 예에 따랐기 때문이다.

▶ 전생사상이 변화시킨 몽골

[사진 = 티베트 불교 주관 행사]

달라이 라마 3세가 탄생하면서 티베트와 몽골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그 것은 특히 몽골을 티베트 불교로 개종시키는 출발점이 됐다. 이것은 몽골 사회에 격심한 가치 변동을 불러왔다. 그 가장 큰 변화의 바탕은 바로 티베트 불교가 가져온 전생사상(轉生思想), 즉 윤생사상(輪生思想)이었다. 이것은 불교의 윤회사상에 따라 전생자(前生者)의 영혼이 뒤에 태어난 사람의 육신으로 전이(轉移)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전생 활불제도는 원래 티베트 불교의 한 종파인 칼마파에서 시작했으나 겔룩파가 이를 활용해 달라이 라마를 탄생시킨 것이다. 윤생사상의 유입은 무엇보다 칭기스칸의 가계 핏줄이 아니면 칸이 될 수 없다는 그 때까지의 사회 통념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알탄 칸과 달라이 라마 3세의 만남을 과거 쿠빌라이와 팍파의 관계가 재현된 것으로 보았다.

즉 알탄칸을 쿠빌라이의 전생(轉生)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쿠빌라이가 다시 나타났으니 알탄칸의 권위가 칭기스칸 왕가의 권위를 능가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달라이 라마 3세는 알탄 칸에게 전륜칸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제는 달라이 라마가 칸의 지위를 부여하는 사람은 칭기스칸 가계의 핏줄이 아니더라도 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 몽골인 달라이 라마 탄생

[사진 = 에르데니 쥬 사원]

이후 티베트 불교는 몽골 사회에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몽골 고원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할하 투멘의 군주 아바타이 칸은 달라이 라마와 회견하는 등 불교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1587년 폐허가 된 옛 수도 카라코룸에 에르데니 쥬 사원을 세웠다. 티베트 불교의 도입과 함께 들어온 윤생사상은 더욱이 민족적 차이까지 해소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달라이 라마 3세는 1582년 알탄 칸이 75세로 죽은 뒤 후흐호트를 방문해 알탄 칸의 화장을 집전했다. 그리고 몽골에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그 곳에서 1588년 죽었다. 달라이 라마 3세가 죽었으니 그 전생으로 달라이 라마 4세가 나타나야 했다. 여기서 달라이 라마 3세의 전생자로 지목된 사람이 알탄 칸의 손자였다. 티베트 내부에서 반대가 있었지만 일부 급진세력들이 알탄 칸의 손자인 스멜 타이지를 전생자로 인정한 것이다.

[사진 = 불교사원 참배객]

그가 바로 달라이 라마 4세인 윤딩 갸초다. 티베트인이 아닌 몽골인이 티베트 불교의 수장으로 등장했다. 당연히 몽골인들이 윤생사상에 감명을 받고 티베트와 일체감을 느끼는 분위기가 확산된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후에도 티베트의 고승이 몽골의 왕가에서 전생되는 사례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면서 몽골과 티베트는 급속하게 일체감을 갖게 된다.

▶ 티베트 불교가 가져온 변화

[사진 = 몽골의 오보]

이 같은 상황 속에 몽골도 티베트 사회와 똑같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세속이 종교에 종속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세속의 세력은 티베트 불교의 종교적 권위를 지지하든가 아니면 종교와 일체감을 이루어 권력을 잡을 수밖에 없는 사회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근세에까지 이어진다.
 

[사진 = 승려들의 행렬]

그래서 이후 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의 밑바닥에는 티베트 불교와의 연관성이 깔리게 된다. 몽골 사회에서 티베트 불교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몽골의 모든 문화가 티베트 불교의 영향 아래 변해가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몽골에는 민간 무속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티베트 불교의 황교가 유입되면서 점차 민간 신앙을 밀어내고 몽골을 티베트 불교 국가로 만들었다.
 

[사진 = 티베트 불교 승려들]

어떤 경우에는 티베트 불교와 몽골의 민속 신앙이 접목한 몽골 특유의 종교 의식이 생겨나기도 했다. 티베트 불교는 짧은 시간에 학문과 예술, 의학, 과학, 철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쳐 몽골인들은 새로운 정신문화를 축적하게 된 것이다. 초원 곳곳에 티베트 불교 사원이 들어서고 많은 젊은이들은 머리를 깎고 라마승이 됐다. 티베트 불교로의 개종은 야생적이었던 몽골인의 기질까지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사진 = 티베트불교 어린 승려들]

많은 사람들은 말에서 내려 이제 칼이나 활 대신 불경을 손에 들었다. 이후 몽골 역사의 변화는 이러한 기질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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