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배철현의 아침묵상] 자기자신自己自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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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7-12-0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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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1인칭
내가 인식하는 세상은 셋이다. ‘나’, 그리고 내 주변에 존재하는 ‘너’, 그 외 내가 당장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그것’이다. 우리는 흔히 세 가지를 1인칭, 2인칭 그리고 3인칭이라고 부른다. 이 셋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서로 필수불가분의 운명적인 구성원들이다. ‘나’를 당장 존재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너’이며, ‘나’와 ‘너’의 집합이 ‘우리’다. ‘우리’는 ‘저들’이 만들어준 조그만 연결이다. ‘우리’가 아닌 ‘그들’도 ‘우리’를 전제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만일 내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이라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존재하게 만들어주는 필요충분조건은 바로 ‘너’다. ‘나’는 ‘너’를 통해서만 존재가 가능한 실재다. ‘너’는 나에게 그 경우가 우연일지라도 운명적으로 주어진 환경이다. ‘나’와 ‘너’라는 공동체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한, 편견과 착각에 사로잡힐 것이다.

월터 휘트먼의 ‘나 자신’
내가 스스로 3인칭이 되어 ‘1인칭인 나’를 ‘나 자신’이라고 부른다. 오늘 아침, 조그만 방석위에 좌정한 후, 나는 오늘 내가 열망하는 ‘3인칭이 된 나’를 상상해 본다. 그 ‘나’는 ‘나에게’ 감동적인 ‘나’일 뿐만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나’다. 자신이 열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심오하고 독창적인 노래를 부른 시인이 있다. 윌터 휘트먼(1819~1892)이다. 그는 미국이 낳은, 그리고 미국 민주주의 정신을 규정한 인간이다.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휘트먼의 학력은 11살 때 끝난다. 초등학교 중퇴인 그가 어떻게 미국정신을 만들었을까? 그는 노동자, 사환, 신문팔이로 연명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당시 대부분 미국의 사상가들이나 문인들은 동부의 저명한 대학에서 고전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휘트먼은 스스로가 자신에게 스승이 되어, 문학, 연극, 역사, 지리, 음악, 고고학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미국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틈틈이 습작하여 시로 기록하였다. 그는 시들을 모아 37살 되던 1855년 ‘풀잎’이란 시집을 자비를 들여 출간하였다. 이 시집은 1891년에는 ‘자기자신을 위한 노래(Song of Myself)’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2011년 미국 문학비평가 제이 파리니(Jay Parini)는 ‘자기자신을 위한 노래’를 가장 위대한 미국 시로 평가한다.

‘자기자신을 위한 노래’
전체가 52단락으로 구성된 ‘자기자신을 위한 노래’의 첫 단락의 첫 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1)나는 내 자신에게 예배하고 내 자신을 찬양합니다(I celebrate myself and sing myself).” 충격적인 시작이다. 그는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영미시의 기본 형태인 약강오보격(弱强五步格)으로 시작한다. ‘약강오보격’이란 단어의 강세가 없는 ‘약’과 강세가 있는 ‘강’으로 이루어진 다섯 개 음절이 한 줄이 되는 전통적인 시구 형식이다. 그가 이 전통적인 음보형식으로 시작하지만, 두 번째 행부터는 그 순간에 몰입한 자신의 생각을 전통적인 형식을 초월하여 거침없이 써내려간다.

그가 첫 행을 전통적인 격식을 따르는 것 같지만, 그 내용은 파격적이다. 서양 서사시의 효시인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 시인의 ‘일리아스’는 영감의 원천인 ‘뮤즈’신에게 영감을 달라고 기원한다. ‘일리아스’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오, 뮤즈 신이시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찬양하십시오.” 서양문학의 모체인 ‘일리아스’에서 노래의 주체는 뮤즈신이다. 그리고 노래의 대상은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고대 이스라엘 다윗왕이 지었다는 ‘시편’도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노래한다. ‘시편’ 1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과 함께 걷지도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않으며, 남을 비방하는 무리들 가운데 안주하지도 않는다.”

휘트먼의 시의 주체는 호메로스의 시처럼 ‘뮤즈’신이 아니다. 그 시의 대상도 ‘일리아스’ 시처럼,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아니다. 그리고 그 주제도 자신과 상관이 없는 타인도 아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예배하고, 내 자신을 찬양할 뿐이다.” ‘예배하다’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셀레브레이트’(celebrate)의 원래 의미는 “자주 가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다”다. 휘트먼은 자신하고는 상관 없는 사상을 가르치는 학교나 종교를 설파하는 종교시설에 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자신’이라는 거룩한 신전에 드나든다. 그곳엔 자신에게 감동적인 원대하고 숭고한 자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신전으로 들어가 ‘자기자신’을 찬양할 뿐이다. 그는 이곳에서 현재의 자신이 예배를 드릴 만한 지, 찬양할 만한 지를 묵상한다.

그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행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2)내가 취한 것을 당신도 취할 것이다(And what I assume you shall assume). (3)왜냐 하면 내게 속한 모든 원자가 당신에게도 속하기 때문이다(For every atom belonging to me as good belongs to you).” 이 문장들에서 1인칭 ‘나’와 2인칭 ‘너’는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 휘트먼은 ‘나’를 ‘자기자신’뿐만 아니라, 이 시를 읽고 있는 독자와 인류전체로 확장한다. 그 ‘나’는 고대 힌두 시인이 깨달은 자기자신(‘아트만’)이면서 동시에 우주전체(‘브라만’)인 신비한 주체다.

휘트먼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그의 ‘나’는 그 당시 미국이 실험하고 있었던 ‘민주적인 자아’다. 그 자아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자아로 굳어져 반목과 분열을 조장하는 ‘나’가 아닌 조화와 통합, 그리고 포용적인 ‘나’다. 인간과 인간을 구분하여 질시와 전쟁을 야기하는 이데올로기와 소유체계를 무너뜨린다. 그는 “내가 취한 것을 당신도 취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된 ‘나’는 ‘너’와 물질, 사상, 감정 등을 공유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땅에서 자라던 풀이 오늘 내가 먹는 식탁에 올라와 나의 일부가 되고, 태평양 심연에서 잡힌 참치가 내 입으로 들어와 내 살이 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들은 끊임 없이 관계를 맺고 생명을 통해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뿐이다.

영어 2인칭 대명사 ‘유(you)’는 무차별적이다. 한국어에서는 2인칭에 해당하는 대명사가 ‘너’, ‘너희’, ‘당신’, 그리고 ‘당신들’로 자세히 구분된다. 그러나 영어 ‘유(you)’는 연인들이 서로를 부르는 친밀한 단어이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처음 만나는 낯선 자이도 하다. 혹은 나를 괴롭히는 원수를 만났을 때,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고 수 없이 많은 집단을 총체적으로 이르는 용어다. 휘트먼은 이 모든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로 ‘유’를 사용한다.
 

월터 휘트먼[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빈둥거리기
휘트먼은 4~5행에서 내가 하는 일을 기술한다. “(4)나는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초대한다(I loaf and invite my soul). (5)나는 (땅 바닥에) 기대 빈둥거리며 편하게 여름 풀잎을 관찰한다(I lean and loaf at my ease observing a spear of summer grass).” 휘트먼은 이 행들에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동사들에 새로운 의미를 주입한다. 그가 주로 하는 행위는 ‘빈둥거림’이다. ‘빈둥거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태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는 남이 나에게 부여한 억지스러운 일을 멈추고 자신이 해야 할 고유한 임무를 찾는 창의적인 노력을 ‘빈둥거림’으로 표현한다. 내가 오늘 완수해야 할 임무는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가는 지적이며 육체적인 활동이 빈둥거림이다. 그는 이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임무를 발견한다. “나는 내 영혼을 초대 한다.”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갈릴레오는 자신에게 집중하여 자신에게 숨겨진 위대한 영혼의 소리를 거침 없이 외친 사람들이다.

관찰하기
휘트먼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정교한 철학이나 종교를 관찰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관찰과 탐닉을 통해 학파, 교리, 그리고 분파를 만들어 숭배한다. 이 분파의 특징은 경쟁과 싸움이다. 그러나 자신을 심오하게 묵상하고, 자신의 일상을 섬세하게 관찰하는 사람들은 신비와 경외를 경험한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존경, 배려, 인내를 실천한다. 휘트먼 관찰의 대상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여름풀잎’이다. ‘여름풀잎’이라는 ‘일상’ 안에 위대함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예배드릴 만한 나’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스스로에게 ‘노래할 만한 대상’인 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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