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그래그래] 용퇴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최보기 작가·북칼럼니스트
입력 2017-10-27 05:0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사진=최보기 작가·북칼럼니스트]


'용퇴(勇退)'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봤더니 '명사: 구차하게 연연하지 않고 선뜻 직책 따위에서 물러남'이다. 대표적인 실용문장의 예로는 '그는 후배들의 진로를 열어 주기 위하여 용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와 '사람이 자기 사업이나 지위가 절정에 올랐다고 여겼을 때 물러나는 급류용퇴(急流勇退)의 기회는 한 번밖에 없다'가 있다. ‘급류용퇴’는 ‘벼슬자리에서 제때에 쾌히 물러남’이다.

용퇴에 관한 가장 최근 뉴스는 ‘사상 최대 분기실적을 발표한 날 후배들이 경영쇄신을 할 수 있도록 용퇴를 발표’했던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에 관한 것이었다. 또 어떤 이들은 ‘30~40대 신인들이 정치권에 진입해 실업과 저출산 같은 젊은이들의 고통을 그들의 눈높이에서 해소할 수 있도록 586(나이 50대, 1980년대 대학 입학, 1960년대 출생)들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용퇴할 때’라는 주장도 한다.

상명하복, 기수문화가 강한 군대와 법조계에서는 후배 기수가 선배들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 후배가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선배들이 옷을 벗는 용퇴가 관례이기도 하다. 물론, 능력에 따라 맞는 자리에서 각자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면 되지 굳이 선후배를 가리는 이런 문화는 민주주의를 위해 절대 좋은 문화가 아니다.

다들 뻔히 아는, 생뚱맞은 용퇴 이야기가 길어졌다. 국영방송 KBS의 대표적 장수프로그램 중 ‘전국노래자랑’이 있다. ‘최불암 유머 시리즈’가 나왔을 만큼 인기였던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순돌이 아빠가 나오는 ‘한 지붕 세 가족’ 같은 드라마보다도 더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전국노래자랑은  1980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37년을 이어왔다.

생업에 묻힌 서민들과 각양각색의 남녀노소가 가식이나 장식 없이 부르는 노래와 장기자랑의 맛이 색다르다. 유명한 탤런트가 아닌 옆동네 감나무집 아저씨나 아랫집 미용실 아줌마가 텔레비전 전국 방송에 나오는 것도 신기하다. 때문에 간만에 일요일 늦잠을 즐기다 느긋하게 ‘아점’을 먹은 후 거실에서 뒹굴며 이 프로를 보는 것이 별미인 사람들이 많다.

전국노래자랑은 또 정상적인 과정으로 가수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던 상황의 촌뜨기 무명이 오매불망하던 데뷔의 꿈을 이루는 천우신조의 기회를 주는 것도 매력이자 공헌이었다. 왕년엔 스타였으나 이젠 한물 간 퇴역가수들이 대중들에게 ‘나 아직 있어요’ 하기에도 이만한 프로그램이 없기에 한 번 출연하려 줄을 선다고 들었다.

이 프로그램의 그 모든 것에는 서민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울고 웃는, 구수한 말씨의 노련한 사회자 ‘송해 어르신’이 계신다. 1988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30년 사회를 맡고 있는 송해 어르신은 인터넷 정보상 1927년생으로 올해 만 90세이시다. 그 시절에는 태어난 해 즉시 호적에 올리지 않은 경우도 많았으므로 실제 연세는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꽃할배 이순재 어르신(82세)이나 신구 어르신(81세)보다 거의 열 살이 더 많으시다. 그 아래 한참 젊은 후배일 것으로만 알았던 ‘뽀빠이 이상용’마저 알고 보니 고희를 훌쩍 넘겨 73세이시다.

바로 얼마 전 전국노래자랑 프로그램은 명절을 맞아 호주, 하와이, 우즈베키스탄 등 해외동포 편이 방송됐다. 대형기획이어서 그랬는지 평소와 달리 송해 어르신과 가수 장윤정씨의 공동사회로 진행했다. 송해 어르신 연세의 절반 나이도 안 되는 37세의 장윤정이 MC를 보조하니 이전과는 좀 다른 이색적 생기가 흐르는 것이 보기 좋았다.

난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실직고, 사실은 그날 방송을 보면서 ‘아! 이제 송해 어르신이 전국노래자랑 프로그램을 하실 만큼 하셨으니 후배들에게 길을 터줘도 부족함이 없겠구나. 과유불급, 이젠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경륜과 지혜를 나누어 주셔도 되겠구나’란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만 그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리 생각하리라 ‘확신’까지 들었다.

확신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수의 주변 사람들에게 ‘송해 어르신의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용퇴와 계속’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결과는 아주 의외였다. 애초 계획한 대로 ‘용퇴’를 주장하는 글을 쓸 수 없게 돼버렸다. ‘용퇴’와 ‘계속’이 어림잡아 5대5로 비긴 것이다. 절반이 ‘인생 백세 시대의 모범’이라며 ‘계속’에 박수를 쳤다. 또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뜻밖의 의견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은근히 시골 사람들 비하하는 프로그램 자체를 폐지하라’는 사람이 있었고, ‘송해 선생님 맘대로 하시게 옆에서 간섭하지 말자’는 사람도 있었다.

이번 조사를 계기로 나는 어떤 사안이 됐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나와 다른 그들의 생각이 틀린 게 아니란 것도 깨달았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저 마지막 사람의 의견으로 낙찰됐다. ‘그래그래, 송해 어르신의 문제는 송해 어르신에게!’

사족이나, 원래는 이 대목에서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을 앞두고 지어 보냈다던 여수장우중문(與隨將于仲文) 시(詩) 전문을 인용하려 했다. 그러나 자칫 ‘국민 오빠 송해’ 어르신의 팬들로 인해 ‘포털 실검 1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책구천문(神策究天文) 전승공기고(戰勝功旣高)-신기한 계책이 하늘에 이르러 승리의 공이 이미 높다네’로 인용을 줄인다. 나는 맷집이 매우 약하니까.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