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6] 한(漢)나라는 왜 조공을 바쳤나?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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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07-27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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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영특한 묵특, 어리석은 유방
역사가 ‘백등산(白登山)의 전투’로 기록하고 있는 흉노와 한 고조 유방의 한판의 승부로 중원 땅의 한나라가 오랑캐로 여기던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며 사실상 군신의 예를 취하게 된다.
중국으로 보면 치욕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사마천은 사기는 이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영특한 묵특과 어리석은 유방을 잘 대비시켜 놓고 있다.
 

[사진 = 묵특 흉상]


▶ 눈속임에 말려든 한나라
분쟁의 씨앗은 흉노의 본거지인 후흐호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산서성(山西省)의 지방 왕인 한왕(韓王) 신(信)이 흉노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흉노에 투항한데서 비롯됐다.
이를 항의하기 위해 유방은 흉노에 사신을 보냈다.

묵특은 정예부대와 살찐 말 등은 숨기고 노인이나 아이 그리고 여윈 말만 보여줬다.
일부러 약점을 보여주어 적의 눈을 속이려했던 것이다.

묵특의 술수에 말려들어 사신들은 돌아가는 즉시 흉노를 치자고 건의했다.
단 한사람 유경(劉敬)이라는 인물만 “흉노가 단점만 보여줘 안심시킨 뒤 공격을 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흉노를 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사태를 정확히 보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미 흉노를 칠 마음이 굳어진 유방은 화를 내며 유경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 묵특의 손안에 든 유방의 운명

[사진 = 몽골 주요 5부족]


기원전 2백년, 유방은 직접 병력을 이끌고 흉노를 치기 위해 나섰다.
유방은 기마 부대를 이끌고 먼저 떠났고 그 뒤를 32만의 보병이 뒤따랐다.

묵특의 부대는 정예병을 숨기고 계속 지는 채 하면서 달아났다.
계속된 승전에 유방은 신이 났다.

하지만 그는 유목 기마병이 가장 잘 구사하는 전술이 바로 스키타이 이래로 도주 전술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좋다고 뒤쫓은 유방은 전술의 기본도 무시한 능력 없는 장군이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유방은 본대보다 앞서 평성(平城:산서성 대동의 동쪽)에 도착해 백등산에 올랐다.
32만 명의 본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바로 여기서 묵특의 반격이 시작된다. 40만 명의 흉노 정예부대가 산을 완전 포위한 것이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려 병사 열 명 중 두 세 명이 동상에 걸려 손가락이 잘려 나갈 정도였다.
선발대라 식량도 충분하지 않았다.

흉노군은 동쪽에 청마, 서쪽에 백마, 남쪽에 적마(율모마:栗毛馬), 북쪽에 흑마를 포진시켜 한나라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는 사방 사색을 조합 배치한 것으로 여기에 중앙의 황색을 더하면 오방 오색으로 음양 오행설과 조화를 이루는 진영이었다.
유방의 운명은 풍전등화로 완전히 묵특의 손안에 있었다.

▶ ‘질투심 이용’ 책략으로 목숨 건져
이 때 진평(陳平)이라는 자가 묘책을 짜내지 못했다면 항우를 누르고 중원을 장악했던 유방의 운명도 여기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사마천의 사기는 진평의 책략으로 선우의 연씨에게 사신을 보냈으며 이로써 포위가 풀려 유방은 탈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책략은 비밀에 부쳐져 누구도 들은 자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책략이 비밀에 부쳐진 것은 그 방법이 다소 창피하고 졸렬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유방은 흉노의 연씨에게 뇌물을 바치고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연씨에게 뇌물을 줬다고 해서 묵특이 쉽게 탈출구를 열어준 것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지만 진평은 영웅 묵특에게 아킬레스건인 연씨의 질투심과 입김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후일 후한(後漢)의 환담(桓譚)이라는 학자는 그의 저서 신론(新論)에서 당시의 진평이 연씨를 설득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한나라에 이 세상에서 본적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있습니다.
이제 어려움에 빠진 황제가 이 여인을 불러 묵특선우에게 진상하려 합니다.
선우께서는 이 여인을 보는 즉시 총애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연씨마마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여인이 도착하기 전에 어서 황제를 탈출시키도록 하십시오.”

바로 여인의 질투심을 촉발시키는 전략이 성공했다는 얘기다.

▶ 동생의 나라가 된 한나라
묵특은 포위망의 한쪽을 열어 줬고 유방은 포위망을 빠져 나와 본대가 있는 쪽으로 꽁무니가 빠지게 달아났다.
여기서 묵특이 유방에게 살길을 열어주지 않고 처리했다면 한나라는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중원은 큰 소용돌이에 휩싸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을 두고 후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평성(平城)의 치(恥)라고 기록했다.
이후 한나라는 흉노와 형제의 규약을 맺고 황실의 여인 한명을 연씨로 보내는 동시에 매년 비단과 쌀, 무명, 술 등 조공을 흉노에게 바치기로 했다.
이때부터 70년 동안 동아시아의 패권국은 한나라가 아니라 흉노였다.

그리고 그동안 한나라는 흉노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방은 옥에 가두었던 유경을 풀어주며 사과했다.

비록 능력이 모자라기는 했지만 자신의 잘못이라고 판단되면 주저 않고 인정하는 것이 유방의 장점이자 매력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항우를 누를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도 유방이 지닌 그러한 장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 유목민의 시대를 연 전투
백등산 전투는 흉노와 한의 전투만으로 끝나지 않는 의미가 있다.
이 전투는 통일된 유목국가와 통일된 농경국가의 맞대결에서 유목국가가 승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기동성이 뛰어나고 용맹성을 갖춘 유목민의 전사들이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를 만나 효과적으로 조직화되고 운영됐을 경우 농경국가의 대군이라도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였다.

또한 이 전투를 계기로 유목민의 시대가 열렸다고도 볼 수 있다.
칭기스칸이 초원을 통일하고 정주민을 대상으로 한 정복전쟁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출발점도 여기에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묵특을 기원전 시대의 칭기스칸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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