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화첩서 반구대 비경 작품 추가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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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1-1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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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반구대.


아주경제 울산 정하균 기자 = 이달희 반구대포럼 상임대표(울산대 교수)는 2008년 처음으로 발굴된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 '반구' 외에 겸재의 화첩으로 알려진 '교남명승첩'에서 '반구대' 작품 한 점이 더 존재함을 확인했다고 19일 밝혔다.

반구대의 비경을 한시로 표현한 선현들의 작품은 많지만 그림으로는 표현한 것은 지금까지 겸재의 '반구'가 유일했다.

교남명승첩은 1964년 간송 전형필의 아들 전영우(현 간송미술관장)의 미술사학연구 논문을 통해 알려지고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상하 2권 58폭으로 구성돼 있고 그림 한 장의 크기는 가로 26cm, 세로 38cm다.

교남명승첩의 1권에 30폭, 2권에 28폭, 후미에 제발 1면을 담고 있으며 지명과 함께 명소를 표기했는데 영남지방의 34개 지역 58개 명소가 이름을 올렸다.
 

겸재 정선의 반구대.[사진]


언양 '반구대' 그림은 이 화첩의 1권 23면에 실려 있다. 겸재 정선이 경상도 하양(지금의 경산)과 청하(지금의 포항) 현감을 8년 간 지내면서 반구대를 방문,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언양 '반구대' 그림이 최초로 일반에 소개된 것은 1996년 5월 19일부터 6월2일까지 열린 간송미술관 개관 25주년 기념 '진경시대전' 전시회로, 당시 모 중앙일간지에서 100여점 이상의 전시작품 중 이 그림을 대표작품으로 게재한 바 있다.

하지만 전시가 끝난 이후 지난 20여 년 동안 어떠한 이유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반구대' 그림은 1995년 반구대 인근의 대곡리 반구대암각화가 국보로 지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울산은 물론 미술계에 더 이상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화폭에 담긴 풍경은 지금의 반고서원 주변에서 본 반구대 일원 풍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정몽주와 조선시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올라가 시를 짓고 여흥을 즐겼다고 전해지는 반구대 너럭바위 위에 갓을 쓴 선비들이 묘사돼 있다.

또한 그림의 왼쪽엔 옛 반고서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대곡천 건너 언덕에 여러 채의 가옥으로 이뤄진 마을이, 오른쪽 산기슭엔 격조가 있어 보이는 정자(집청정으로 추정)도 묘사돼 있다.

하지만 교남명승첩은 작품에 낙관이 없어서 제작 시기와 작가에 대한 논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96년 '한국고미술' 창간호에서 겸재 정선의 그림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란이 있는 '교남명승첩'의 진위를 가리는 특집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최완수(당시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는 이 화첩을 겸재 정선의 50대 작품으로 진작이라고 수차례 밝혔으나 후에 정선의 작품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일부에선 겸재 작품으로 보고 있는 반면 지난 2008년 겸재의 '반구'를 발굴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진영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장은 '교남명승첩'을 겸재 정선이 아닌 정선의 손자인 정황(1739∼1800)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달희 반구대포럼 상임대표는 "'반구대' 작품이 겸재 정선의 진작이던 혹은 손자인 정황의 작품이던 250여 년 전 대곡천 반구대 주변 모습을 상세히 묘사해 그동안 선현들의 한시로만 전해온 반구대의 명승절경을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며 "대곡천의 반구대암각화, 천전리암각화와 함께 대곡천 문화유산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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