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화 칼럼] 정치혁명 보다 경제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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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교수
입력 2018-05-02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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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교수]


우리가 아는 명예혁명
오늘날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사적 흐름은 인권과 민주제도이다. 그러면서 서구의 입헌군주제도와 의회민주주의를 정착한 영국의 명예혁명(1688~1689) 사례를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한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명예혁명의 이미지는 ‘무혈혁명’, ‘입헌군주제’, ‘구교와 신교의 다툼’ 정도로만 묘사되고, 그러한 사실들 역시 제대로 알기란 무척 어렵다. 그만큼 유럽의 역사에서 영국의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을 평가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하물며 이 안에 어떠한 경제적 배경이 깔려있는 지는 대중들에게 더더욱 익숙하지 않다.

제임스 2세의 농업에서, 윌리엄 3세의 제조업으로
자유주의 발전의 역사적 맥락이라는 측면에서 명예혁명의 경제적 쟁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명예혁명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그 시기 영국 사회가 아직 자본주의 시대로 완벽하게 진입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중세적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그렇다고 해도 네덜란드와 영국의 발전사항은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국가나 문명권 보다는 1세기 이상 빠른 것이었다.

명예혁명 이후 새롭게 왕이 된 네덜란드 출신의 윌리엄 3세는 물론 잘못된 통치와 아집으로 인해 쫓겨난 왕인 영국의 제임스 2세도 경제적 팽창이 근대적 통치술의 핵심이며 그들 자신이 신민들의 경제적 복지를 향상시킬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두 인물 모두 거기에 충실했다. 다만 이 둘은 ‘근대 국가’에 대한 매우 다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태양왕’이라 불리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성공에 큰 자극을 받았던 제임스 2세는 경제적 부의 원천을 토지와 농업에 두고 국왕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며 정치적으로도 통일된 강력한 관료국가를 추구했다.

반면 윌리엄 3세는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 공화국으로부터 근대 국가에 대한 영감을 끌어와 부(富)의 원천을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바꿨다. 또 법을 통한 재산과 종교적 관용을 보장함으로써 산업 발전의 동인을 제공하는 국가를 구상했다. 이렇듯 근대 국가에 대한 서로 다른 비전이 충돌하는 명예혁명의 과정에서 국가의 목적을 신민의 복지 또는 물질적 번영과 관련해 이해하는 입장이 확고히 자리를 잡아갔다.

영국 명예혁명의 가치를 압축하자면 농업경제를 바탕으로 강력한 관료적 통치 국가를 지향하던 제임스 2세를 종교적 탄압이라는 명분을 두고 메리 2세의 남편인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즉 윌리엄 3세를 왕으로 교체한 사건이다.

 

영국의 제임스 2세(좌)와 네덜란드 출신의 윌리엄 3세.얼핏 보면 제임스 2세는 악역, 윌리엄 3세는 주인공을 맡고 있는 것으로 문화계를 비롯한 세계사에서는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당시는 유럽을 포함한 거의 모든 국가와 왕조들의 경제적 원천은 농업이 가장 높았고, 프랑스는 그 정점을 찍었던 왕조다. 제임스 2세의 강력한 관료국가 추구는 이런 세계사적인 분위기에서 평가해야 한다. [사진=임종화 교수 제공]


네덜란드의 무역항로(貿易港路)에 영국도 끼어들다
궁금한 점은 왜 사이도 좋지 않은 네덜란드 출신의 왕을 영국인들 스스로가 메리 2세와 함께 공동의 왕으로 앉혔느냐다. 게다가 명예혁명 시기는 네덜란드와 2차 영란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조금 지났을 때로 영국과 네덜란드의 서로에 대한 앙금이 정점을 찍었던 때다. 

잘 알려졌다시피 오늘날까지 유럽 왕조는 각 왕조별로 유기체적인 혼맥(婚脈)을 통해 연결되어 있고, 이러한 왕실의 혼인관계를 통해 강력한 귀족들과 의회를 견제해 왔다. 종교적 탄압으로 인해 완전히 통치력을 상실한 제임스 2세와 같은 경우가 영국 역사에서 처음도 아니었지만, 제임스 2세의 농업경제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관료국가 추구는 당시 영국의 경제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던 정책이었다. 당시 영국은 제조업에 종사하는 중간계급의 인구가 늘어나는 시기였고, 해외 시장을 선점한 네덜란드의 무역항로를 영국도 무사히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의 명예혁명이 제도권의 궁극적 변화를 가져온 데에는 실패했다고 이론은 많다. 그러나 16~18세기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 통계치에서 나타난 두 세기에 걸친 네덜란드와 영국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국가 모두 오늘날까지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는 국가인 동시에 가장 먼저 개방경제를 통해 부를 축적한 국가들이기도 하다. 혁명을 통한 제도의 변화는 지배구성원의 교체가 아닌 시장의 발전과 경제적 팽창, 삶의 질에 긍정적 영향을 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명예혁명의 경제적 측면을 우선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촛불혁명은 명예혁명이 아니다
지난 1년 동안 한국인들의 귀에 매우 익숙한 단어는 '촛불'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UN)총회 연설에서 “대한민국 새 정부는 촛불혁명이 만든 정부” 라는 발언과 함께 “세계 민주주의에 새로운 희망을 보여줬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연설을 마쳤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집권 1년 만에 고용시장은 급격하게 얼어붙고 있다. 이른바 ‘소득주도 성장론’을 근거로 한 노동시장의 급격한 개입과 규제가 ‘재난적’ 역효과를 내고 있다.

정부 또한 혁신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원칙론에 동의하는 듯하다. 혁신성장의 본질은 규제를 혁파하고, 기업의 투자의욕을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소득주도 성장 정책과 충돌하고, 기업과 시장을 개혁의 대상이자 적폐의 일부로 보는 정권의 근본 시각과도 배치된다. 그러한 이유로 혁신성장은 ‘구호’에만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본인들이 주장하는 정권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촛불혁명(Candlelight Revolution)이 긍정적이기 위해서는 그 결과가 생산적이어야 한다.

영국의 명예혁명이 농업위주의 경제구조를 제조업 중심으로 바꿔놨다. 이런 영국의 열린 사고는 영국은 물론 서유럽의 모습도 탈바꿈 시켰고, 그 여파는 산업혁명까지 이어져 전 세계에 영향을 줬다. 지금 대한민국의 의지는 광화문 광장의 촛불 열기를 남북문제로 연결시켜 정치적 슬로건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기업을 향한 과도한 규제를 혁신적으로 풀어 고용시장의 확대와 기업의 순이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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