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중국정치7룡] 시련과 극복의 황토굴 7년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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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18-04-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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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⑥

시진핑의 어렸을 적 사진.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공자)

나이 15세를 일컬어 지학(志學)이라고 한다.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라는 의미다. 1969년 1월 13일, 학문에 뜻을 두었어야 할 지학의 15세 청소년 시진핑(習近平)은 마오쩌둥(毛澤東)의 교시에 의해 산시(陝西)성 북부 황토고원 량자허(梁家河)라는 오지의 농촌 노동자로 내던져졌다.

2004년 8월 당시 시진핑 저장(浙江)성 당서기는 옌안TV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옌안으로 가는 상산하향(上山下鄕) 전용 열차에서 학생들은 거의 모두 울었다. 내가 탄 객차칸에 울지 않는 학생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나만 웃었다. 한 친구가 물었다. 너는 왜 울지 않느냐고. 나는 이 기차에 타지 못했으면 울었을 건데, 만일 내가 베이징에 남는다면 언제 죽을 목숨인지도 모르는데 떠나는 게 이 얼마나 좋은가? 너희들은 왜 우는데? 그러자 훌쩍이던 학생들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

‘양씨네 하천’이라는 뜻의 량자허(梁家河)는 하천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좁다란 개울이 황토마을을 지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량자허는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당시 12년간 홍색중국(중국공산당)의 수도이자 혁명성지 옌안((延安)에서 동북쪽으로 113㎞ 떨어진 곳에 있다. 붉은 황토 위로 난 검은 색 아스팔트 길을 자동차로 굽이굽이 두시간 쯤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산골짜기 마을이다.

시진핑은 여섯명의 학우들과 함께 좁은 황토굴에서 살게 됐다. 몰락한 고관의 자녀지만 도시에서 곱게 자란 그는 처음엔 고달픈 농촌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와 벼룩이 밤마다 괴롭혔다. 시진핑은 다른 학우들과 날마다 산에 올라가 빈둥거리고 게으름을 피웠다. 당연히 촌민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줬고 관계는 악화됐다. 시진핑은 3개월 쯤 뒤 야음을 틈타 베이징으로 몰래 도망을 쳤다. 그러나 곧 홍위병 학습반에 의해 구금되었다. 구금기간동안 베이징 하이뎬(海淀) 중관춘 일대의 하수관 매립 작업에 투입됐다. 베이징에서 당하는 강제노역이 량자허에서의 노력봉사보다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당당히 두발로 서서 밭을 가는 농부들이 그리워졌다.

‘양씨네 하천’이라는 뜻의 량자허(梁家河)는 하천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좁다란 개울이 황토마을을 지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시진핑의 이모부 내외는 타이항(太行)산맥 근거지에서 활약한 팔로군 전사였다. 그들은 시진핑의 어머니 치신을 15세 어린 나이로 혁명의 최전선에 서게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방황하는 외조카에게 량자허로 돌아가라고 권했다.

“우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중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네가 지금 군중에 파고들지 않으면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마땅히 너는 군중속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1969년 10월 시진핑은 량자허로 다시 향했다. 귀로에서 시진핑은 지식청년 왕치산(王岐山, 1947~ 전 중기위 서기, 현 국가부주석)을 만났다. 그 역시 반동분자의 아들로서 량자허에서 80km 가량 떨어진 옌안(延安)현 펑좡(馮莊) 인민공사에서 노역 중이었다. 시진핑은 왕치산의 토굴에서 하룻밤을 신세 졌다. 두 반동분자의 자식들은 한 이불을 덮고 누워 밤새 대화를 나눴다. 당시 시진핑은 경제 관련 책을 한 권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왕치산에게 주고 왔다.

량자허로 돌아온 시진핑은 심기일전하여 제2의 도전을 시작했다. 2012년 시진핑의 푸젠(福建)성 성장시절 <서부대개발> 9월호에 실린 〈나는 황토땅의 아들이다(我是黃土地的儿子)〉라는 회고문을 살펴보자.

베이징을 떠나 낯선 환경에 투입된 나는 현지 농민들의 불신과 냉대를 받아 한때 깊은 고독에 빠졌다. 그러나 내 부모를 키워준 황토고원은 드넓은 가슴으로 세상 모르는 15세 소년을 품어주리라 믿었다. 진실로 농민들과 하나가 되고 고단한 나날의 시련을 견디어 내기로 다짐했다. 그 기간 나는 네 개의 관문을 넘었다.

첫째, 벼룩의 관문. 베이징에서 나는 벼룩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량자허의 여름에 벼룩과 함께 잠을 잘 수 밖에 없었다. 한번 물면 한 번 긁고 전신에 종기가 생겼다. 그러나 2년 후 벼룩이 아무리 물어도 꿀잠을 잘 수 있게 됐다.

둘째, 음식의 관문. 베이징에선 흰 쌀밥과 가는 면발만 먹었는데 거기선 껄끄러운 잡곡만 먹었다. 처음엔 도저히 목구멍에 넣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점차 산베이(陝北,산시 북부 황토고원지대)의 음식에 중독됐다. 지금도 쏸차이(酸菜 산베이의 시큼한 배추절임)를 생각하면 군침이 돌 정도다.

셋째, 노동의 관문. 처음에 내 노동력 평가는 6점으로 부녀보다 낮았다. 2년 후 나는 10점 만점 노동력으로 농사일을 최고수가 되었다. 여름에는 보리를 메고 날랐는데 최대 100㎏을 메고 10리 산길을 단숨에 내려왔다.

넷째, 사상의 관문. 이게 가장 중요하다. 나는 농민의 실사구시와 각고면려의 정신을 배웠다. 농민과 황토와 나는 하나가 되어 갔다. 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내 황토굴은 마을회관처럼 변해갔다. 촌민들이 찾아와 동서고금의 온갖 문제에 대해 상담했다.

내가 량자허에 온 첫해 봄철에 거지들이 몰려 왔다. 우리는 그들을 일일이 쫓아내고 개를 풀어 물게도 했다. 당시 우리 도시 청년들의 관념 속 거지들은 모두 나쁜 놈이고 잉여인간이었다. 처음엔 무엇이 ‘살찐 정월, 깡마른 이월, 반쯤 죽는 삼사월’이라는 걸 몰랐다. 묵은 곡식은 거의 떨어지고 밀은 아직 여물지 않아 집집마다 겨와 푸성귀로 겨우 입에 풀칠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내보내 동냥질을 해서 얻은 곡식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건장한 남자들에게만 먹였다.

나는 이런 사정을 현지 실제 생활에서 알게 되었다. 량자허에서 난 필생의 두 가지 큰 가르침을 배웠다. 하나는 무엇이 실사구시이며 무엇이 군중이라는 실체를 온몸으로 깨달았다. 또 하나는 칼은 돌 위에서 날카로워지고 사람은 역경속에서 단련된다는 진리를 실천으로 체득했다. 나의 성장과 발전은 산베이 7년 생활에서 출발했다.

15세 나이로 이곳 황토땅에 왔을 때 나는 미망(迷妄)에 빠져 방황했으나 22세 나이로 이곳 황토땅을 떠날 때 나는 이미 견고한 인생목표를 가졌고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나는 정판교(鄭板橋, 1693-1765)의 죽석<竹石>을 몇 글자를 바꿔 내 생활신조로 삼았다. 기층에 깊이 들어가 놓지 않으니(深入基層不放鬆) /군중 속에서 뿌리를 내렸네(立根原在群衆中)/천번을 깎이고 만번을 때려도 굳건하거늘(千磨萬擊還堅勁)/동서남북 바람이여 마음대로 불어봐라(任爾東西南北風).


 

시진핑의 하방 시절.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뿌리는 산시(陝西), 혼은 옌안(延安)인 나의 제2고향은 옌촨(延川)이다 (시진핑)

량자허촌 토굴 시절 시진핑은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공청단) 입단을 신청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반동분자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생산대대 지부(支部)서기를 토굴로 초청해 계란덮밥 요리와 오가피주를 베풀며 청탁했다. 결국 공청단 가입은 8번째 도전만에 뜻을 이루었다.

시진핑은 1972년 8월 지식청년 열성분자로 펑자핑 인민공사 자오자허 대대로 파견돼 ‘사회주의 사상교육’을 진행하면서 촌민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의 공산당 입당은 21살이던 1974년에 이루었다. 입당 신청 11번째다. 시진핑의 공청단 입단은 7전 8기, 공산당 입당은 10전 11기인 셈.

연이어 시진핑은 량자허 대대 지부 서기(우리나라의 면장급)로 선출됐다. 21세에 산베이 전역을 호령한 아버지 시중쉰 산간벤 소비에트 주석에 비해서는 아무 것도 아닌 최말단 지방행정관 자리였지만 그는 매사에 솔선수범했다.

우선 량자허의 홍수 예방과 토사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제방을 쌓는데 앞장섰다. 서북풍이 거세게 몰아치는 한겨울에 촌민들과 함께 둑으로 나갔다. 시진핑은 가장 먼저 솜저고리와 솜바지를 벗고 얼음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촌민들도 모두 뛰어 내려왔다.

시진핑은 쓰촨성 전역에 메탄가스가 보급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직접 쓰촨 현지로 가서 살펴본 후 량자허도 연료를 메탄가스로 대체키로 작정했다. 농민들을 이끌고 전신에 똥물을 뒤집어쓴 채 메탄가스 시설을 만들었다. 량자허 거주호 70% 이상이 메탄가스로 불을 밝히고 취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량자허는 산시성 최초로 메탄가스 사용을 보편화시킨 촌이 되었고 또 이를 계기로 시진핑은 옌안지구 대표 지식청년으로 떠올랐다.

2012년 11월 16일자 <뉴욕타임스>는 ‘시진핑 총서기, 10대 하방(下放) 시절 독서광’ 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그 미국의 대표 일간지는 “그 비범한 소년은 잠들기 전까지 항상 두꺼운 책을 읽었다”며 시진핑과 3년간 살았던 한 촌로의 증언을 상세히 실었다.

황토굴 7년 세월 동안 시진핑의 학구열은 끊임없이 불탔다. 아버지의 실각과 함께 풍비박산 난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시진핑은 공부의 부족을 깨닫고 책을 놓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책으로만 가득 채워진 큰 상자 두 개를 가지고 와서 낮에는 일하고 깊은 밤까지 석유등 아래서 책을 읽었다.

광란의 문화대혁명도 끝물에 이른 1975년 여름 어느 날, 베이징의 칭화대(淸華大)에서 공농병(工農兵) 추천생 모집광고가 났다. 공농병 추천이란 당에 대한 충성이 강하고 업무실적이 뛰어난 젊은 ‘노동자(工)·농민(農) 병사(兵)’들을 상대로 현지 당간부가 (오늘날의 입학사정관과 흡사한 자격이 되어) 대학 입학을 추천하는 방식이다. 칭화대는 옌촨현에 2명의 공농병 추천생을 할당됐다.

시진핑은 ‘붙여주면 들어가고 아니면 그만두지’라는 생각으로 1, 2, 3지망을 모두 칭화대로 썼다. 그의 칭화대의 공농병 입학추천장을 써준 사람은 왕천(王晨, 1950~ 전 인민일보 사장, 현 전인대 부주석) 옌안지구 이쥔(宜君)현 당간부였다. 왕천은 시진핑과 같은 베이징 태생의 지식청년이었다.

또한 ‘반동분자’ 아버지 시중쉰을 감시 감독하고 있었던 뤄양(洛陽)의 내화재료공장 책임자는 “시중쉰 동지의 문제는 당내문제로 그 자녀의 진학과 취업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현지 증명’을 발급했다. 덩샤오핑과 시중쉰 등 핍박받고 있던 개혁파 인사들을 흠모한 류빙(劉冰, 1921~2017) 당시 칭화대학 제1부서기는 시진핑의 입학을 최종 허락했다.

1975년 10월 7일 량자허 모든 촌민이 일제히 일손을 놓았다. 그들은 모두 시진핑의 칭화대 입학 상경길 양쪽에 도열했다. 7년간 정들었던 젊은 지도자의 ‘붕정만리’(鵬程萬里)를 축원하며 배웅했다. 13명의 열성 촌민은 30km나 떨어진 현 소재지까지 따라갔다. 시진핑은 밤이 되자 이들과 국영여관 큰 방에서 함께 잠을 잔 뒤 다음날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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