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⑲] 美·中·英 "한국민 노예상태, 독립할 능력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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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19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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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이로의 불길한 메시지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화민국의 장제스 세 연합국 수뇌가 모여 열린 회담. (왼쪽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사진=루스벨트 기념관 제공]

일제가 태평양의 절반을 휩쓴 건 반년이 고작이었다. 일본해군 연합함대는 미드웨이해전(1942.6)에서 항모 여섯 척 중 네 척을 잃었고,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에 넘어갔다. 8월, 미 해병대가 과달카날에 상륙했다.
공수(攻守)가 바뀐 것이다. 겨울에 접어들면서, 유럽 동부전선의 독일군 역시 밀려나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이 마지막 발악에 나서면서 전쟁의 양상은 더 비참해졌지만, 연합국의 시야는 이미 전쟁 이후를 향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세계 질서는 어떤 원칙으로,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 식민지 해방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에 강점되어 추축국의 전쟁에 동원된 한반도의 운명은? 임시정부는 다급했다.
성엄은 임시정부 외교위원 겸 선전위원, 한국독립당 상임위원 겸 조직부 주임으로서, 1인4역을 맡아야 했다. 성엄은 충칭 시내 허핑로(和平路)로 한국독립당사에서 살았다. 창당 이래 처음으로 마련한 당사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땅에 지어진 2층 주택을 세내어, 아래층은 회의실, 위층 2/3는 사무실, 그리고 남은 단칸방 하나를 성엄 부부가 썼다.
옆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이 들었다. 의장 만오(晩悟) 홍진(洪震)과 백강 조경한은 이곳에서 자취를 했다. 수당은 제법 괜찮은 찬거리가 생기면 반찬을 만들어 보냈다. 후동이가 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므로, 수당은 충칭과 투차오를 오가야 했다. 1944년 여름, 후동이의 방학이 끝날 무렵, 수당 가족은 충칭으로 이사했다.
 

[1941년 9월 23일 투차오에서 동암 차리석 회갑 기념. 밑에서 둘째줄 오른쪽 끝에 앉은 이가 수당, 셋째줄 왼쪽에서 세번째 남파 박찬익 밑에 앉은 어린이가 수당의 아들 후동이다. 사진=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김규식과 장건상의 충칭행(重慶行)
1941년 초, 청두(成都)에서 대학 교수를 하던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이 충칭으로 왔다. 그는 민족혁명당 소속이었으나, 일찌감치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지낸 바 있고, 백범 등 한국독립당계 인사들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우사가 충칭에 왔다는 것은 양당 사이에 가교가 생겼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해 가을, 충칭에 반가운 인물이 또 한 명 나타났다. 소해(霄海) 장건상(張建相)이었다. 그는 상해에서 왜경에 체포되어 국내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소해는 출옥 뒤, 금강산관광을 하는 척하며 왜경의 감시를 따돌리고, 걸어서 만주로, 만주에서는 배편으로 홍콩으로, 홍콩에서 비행기편으로 충칭에 도착했다.
장건상은 국내 정세를 소상히 전했다. 중국 당국자들에게도 정세보고를 했다. 소위 지도층 인사들이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한심한 상황에서, 동포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압제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중국정부로부터 평가미(平價米)나마 배급받고 있지만, 동포들은 좁쌀죽도 못 먹는다. 무엇보다 우리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수당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우사와 소해의 충칭행은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두 사람은 곧 행동에 나섰고, 1941년 말 민족전선계의 한 갈래인 조선민족해방동맹이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해방동맹은, 세력은 미미했지만, 충칭에서 유일하게 공산주의를 표방하던 단체였던 만큼, 이는 좌우합작의 기운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해방동맹의 핵심간부인 김성숙(金星淑)은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의 스승이자 동지였던 붉은 승려 김충창의 실제인물이다.
 

[광복군 제2지대원들(1942.2)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백범과 약산, 마침내 손을 잡다
임시정부는 당시 국내와 연결이 사실상 완전히 끊어져 있었고, 만주나 중국공산당과 연계된 한인혁명세력과는 유대관계가 없었다. 더욱 비참한 노릇은 충칭의 한인사회에서조차 이리 갈리고 저리 갈려서 이렇다 할 중심세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임정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못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난립된 항일단체들을 규합하려는 임정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조선의용대 간부와 대원들이 옌안으로 떠나자, 충칭에 남아 있던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는 조선민족전위동맹을 이끌고 임정에 가담했다.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으로 구성되어 있던 민족전선계에서, 민족혁명당만이 임정에 참여하지 않는 단체로 남았다. 만주와 팔로군 작전구역을 제외하면, 민족혁명당만이 한국독립당에 비견되는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드디어 통합 계획이 실천에 옮겨졌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다. 당시 광복군에는 제1지대, 제2지대, 제5지대의 3개 지대가 있었으나, 제1지대와 제2지대는 징모분처를 승격시킨 것으로 인원이 십여명 수준에 불과했다. 약산이 조선의용대의 남은 대원들을 이끌고 합류하면서, 제1지대의 인원은 백명 가까이 늘어났다.
같은 해 9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시안에서 충칭으로 다시 이전했다. 이어 10월에는 임시의정원이 개편되었다. 매우 뜻깊은 변화였다. 민족혁명당계가 의정원 개편 선거에 참여한 것이다. 의장에는 한국독립당계 홍진이 당선되었고, 분과위원장 8명은 한독당계 4명, 민혁당계 3명, 무정부주의자연맹 1명으로 좌우합작의 모양새를 갖췄다.
 

[광복군 제3징모분처 환송 기념(충칭, 1941.3.6)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통한의 “in due course”
1943년이 되자, 일본의 패색이 확연해졌다. 독일도 쪼그라들었다. 유럽 남부전선에서는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이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독일군 수개 군단을 발칸반도에 묶어놓은 덕분에, 연합군은 그리스와 이탈리아 진공작전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에서는 이 역할을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수행했어야 했다. 하지만, 만주와 중국 대륙 북부에서 항일전에 참여한 한인청년들은 사실상 팔로군 소속이었다. 참전국 지위를 획득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했다. 그리고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영국 수상 처칠, 중국 수상 장제스가 카이로에서 만나, 전후 처리의 기본원칙을 밝혔다. 카이로선언. 여기에 향후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조항이 담겨 있었다. “3국은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즉시’가 아니라 “적절한 시기”라니. 불길한 메시지였다. 수당이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장제스는 회담에서 즉시 독립을 지지했으나, 루스벨트가 단서를 달았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독립 자체에는 이의가 없었지만, ‘한국은 당장 독립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러일전쟁 직후 가쓰라-태프트 조약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걸 루스벨트만의 책임이라고 돌릴 수 있을까.
독립운동세력은 중국대륙에서도, 미주에서도, 이리저리 갈렸다. 다음 회에 자세히 설명하겠거니와, 미국 국무부의 눈에 비친 한국 교포사회의 분열상은 신뢰와 존경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종전 직전인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과 외무부장 조소앙을 샌프란시스코회의(국제연합 창립 준비회의)에 파견하려고 중국정부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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