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⑫] 백범, 동포청년 총에 맞고 중상…臨政 충격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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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1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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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일전, 때가왔다" 독립운동 진영 단결 꾀하다가…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1939).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백범(앞줄 된쪽에서 네번째)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1937년 7월,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지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세 개의 사건이 일어났다. 먼저 7일, 베이징의 류거우차오(蘆溝橋, 이 다리는 금나라 때인 12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으며, 마르코 폴로가 그의 <동방경문록>에서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다리”라고 소개해 서양에서는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 불린다)에서 일본군이 중국군을 공격했다. 이것이 중일전쟁(1937~1945)의 서막이다.
시안(西安·서안)의 대반전에도 여전히 항일전을 주저하던 장제스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4일, 그는 장시성(江西省·강서성) 북부 휴양지 뤼산(廬山·여산)에서 공산당의 2인자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만났다. 이어서, 국민당은 난징에서 제5기 삼중전회(三中全會,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중일전쟁은 임시정부가 기다리던 바였다. 중국정부가 항일전을 미룰수록 대륙에서 독립운동의 입지는 줄어든다. 무엇보다 무장투쟁이 불가능해진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홍군에 가담했고, 이것이 다시 독립전선에 균열을 냈다. 국공합작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한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1937.8)를 조직해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꾀했다.
 

[난징대학살 현장.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난징(南京)대학살
중일전쟁 발발의 소식은 수당에게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상해를 떠나 성엄이 중국 관리로 일한 세월. 그전보다는 안정된 생활이었다. 상해에서는 시장에 갈 때나 중국어를 썼지만, 중국인으로 행세하면서 말도 늘었고, 후동이의 공부를 돌봐줄 여력과 시간도 생겼다. 그러나 밥벌이 하며 애 키우자고 고국 땅을 등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수당은 때가 왔다고 느꼈다. 돌이켜 보면, 지난 5년은 무척이나 지루했다. 상해에 있는 동안, 그들 부부는 누가 뭐래도 독립운동에 뛰어든 열혈청년이었다. 어느덧 삼십대 후반에 이른 나이. 손기정의 금메달(1936년 베를린올림픽)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 현실이 부끄러웠다. 스포츠 영웅 백 명이 태어난다 한들, 해방에 비하겠는가.
일제는 금메달이 군국주의의 우월함을 뒷받침하는 증거인 양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어이없게도, 이런 작태는 해방이 된 조국에까지 이어졌다. 독재정권 시절, ‘국위선양(國威宣揚)’이라는 네 글자가 신문지면을 장식할 때면, 수당은 속이 다 메스꺼웠다. 그건 일제가 만든 말이다. 국민은 억압에 눌려 신음하는데, 나라의 위엄을 널리 떨친다니….
수당은 임시정부가 있는 난징으로 즉시 가고 싶었으나, 무턱대고 합류하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8월, 일본군이 상해에 총공격을 개시했다. 중국정부는 ‘전면항전’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쟁 초기 국면에서, 중국군의 후퇴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수당 부부가 서둘러 난징으로 달려가지 않은 이유는, 중국정부를 따라 임시정부 역시 난징에서 곧 물러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1937년의 마지막 달, 중국정부의 수도 난징이 함락됐다. 일본군은 민간인 수십만을 살육했다. 문명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야만적인 대학살. 일본 신문 현지특파원은 누가 먼저 100명의 목을 벨 것인가 내기를 건 두 소위의 만행을 중계방송 하듯 속보로 타전했고, 일본인들은 환호했다. 침략의 광기(狂氣)란 이처럼 인간을 가장 잔인하고 비열한 나락으로 떨군다.

 

[동포 청년이 난사한 총에 맞아 숨진 묵관 현익철]

# 동포 청년의 총에 맞은 백범
상해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중국정부는 충칭(重慶·중경) 천도를 발표했고, 임시정부는 후난성(湖南省·호남성) 창사(長沙·장사)로 옮겼다. 수당은 창사로 가겠다는 편지를 백범에게 보냈다. 어서 오라는 백범의 답신을 받은 수당 부부는, 1938년 2월 주장(九江·구강), 우한(武漢·무한)을 경유해 임정 식구들과 합류했다. 요즘 같으면 자동차로 2시간이면 갈 거리인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수당 부부가 창사에 도착한 지 석 달이 지났을 때, 본격적인 항일전을 모색하던 임시정부에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터졌다. 회의를 하러 모인 임정 요인들에게 이운환이라는 동포 청년이 권총을 난사한 것이다. 이 총격으로 조선혁명당 중앙책임비서 묵관(黙觀) 현익철(玄益哲)이 목숨을 잃었고, 백범은 총탄이 심장을 스쳐가는 중상을 입고, 임시정부 참총장 춘교(春郊) 유동열(柳東說)은 허리관통상을 당했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몇 년 뒤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는 백산(白山) 이청천(李靑天)도 총에 맞았다. 이운환은 조선혁명당원으로 왜경의 끄나풀이 되어 백범을 노린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범인을 넘겨받은 중국 당국은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 치욕적이기 짝이 없는 참담한 사건이었다. 백범이 동포에게 저격을 당하다니.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어떻게 보겠는가.

 

[임시정부의 이동경로. 그래픽=임이슬 기자]

# 장장 1만 리 피난길의 시작
일본군은 가는 곳마다 만행을 저질렀다. 어느 일요일, 창사에서 수당과 부인 몇이 아이들을 데리고 모처럼만에 산행을 갔다. 화창한 날씨에 나들이 나온 중국인들로 붐빈 교외 야산에 갑자기 일본군 전투기가 나타나 무차별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군인도 군사시설도 없는 곳이었다. 수당 일행은 가까스로 목숨을 보전했지만, 아비규환의 수라장 속에서 민간인 수십명이 희생됐다.
7월 초, 창장(長江·장강·양자강)을 따라 서쪽으로 진군하던 일본군이 창사 지척까지 다가왔다. 임시정부는 짐을 꾸려 광둥성(廣東省·광동성) 광저우(廣州·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백 명이 넘는 대식구였다. 찌는 듯 불볕더위에 비좁은 열차 안에서 사흘을 갇혀 있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난민 신세나 다름없이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어야 하는 임정의 처지. 모두 울었다.
임시정부는 광저우에 자리 잡고, 당분간 머무를 계획을 세웠다. 연락소를 시내에 두고, 요인과 식구들은 25km쯤 떨어진 포산(佛山·불산)으로 옮겨가 짐을 풀었다. 집을 한 채 전세로 빌려 임정 사무실로 쓰면서, 석오, 성재, 우천과 수당 가족이 살았다. 수당이 임정의 안살림을 맡게 된 게 이때부터다. 다들 그리 하는 게 마땅하다고 여길 만큼, 그는 신임을 얻고 있었다.
간신히 숨을 돌렸나 싶었더니, 계획은 어그러졌다. 10월 초, 일본군이 광둥성에 상륙해, 광둥성 전역에서 치고 올라왔다. 광저우와 포산은 해안선에서 가까웠으므로, 창사 때보다 상황이 더 급박했다. 일본군의 진격 속도는 빨랐다. 짐을 다시 꾸려 포산역으로 모이라는 임정의 지시가 내려졌다. 그것이 장장 1만 리가 넘는 피난길의 될 줄, 그 순간에는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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