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지속(持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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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4-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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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 수트라 I.14

[사진=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정원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지금부터 30만년 전 북아프리카에 처음 등장한다. 인류는 기원전 9000년경 ‘우연히’ 농업을 발견하기 전까지 자연이 선물한 과일이나 근채류 식물을 주워 먹거나, 사냥을 통해 연명했다. 채집과 사냥은 이들의 삶의 방식이다. 자신이 아닌 동식물에 대한 심오한 관찰과 전략이 그들의 생존을 보장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조상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우리의 유전적인 조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들과 유전적인 염기 서열이 일치할 뿐이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문화적인 소양’이 부족하다. 기원전 3만2000년부터 극히 일부 ‘호모 사피엔스’가 겉보기에는 생존하고는 상관없는 이상한 행위를 하기 시작한다. 빙하기에서 생존하던 그들은 다음 호모 사피엔스들과는 달리 긴 창을 들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맘모스, 사슴과 같은 동물들을 사냥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화산활동으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산속의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이들은 여기에서 그림과 음악과 같은 예술행위를 하고 죽음을 기억하고 영생을 염원하는 의례를 시작한다. 인류는 이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란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난다. 이들은 우리의 유전적인 조상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조상이다.

인류는 기원전 9000년경 빙하기가 끝나면서 오늘날 중동지방으로 몰려와 거주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농업을 발견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농사(農事)는 한곳에 머물러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자연의 적절한 일조량과 강우량을 기원하고, 가을에 추수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농사는 자연이 가져다주는 햇빛, 습기, 물, 더위와 추위와 같은 다양한 현상에 대한 인간의 인위적이며 기술적인 반응이다. 농사에 해당하는 영어단어인 ‘애그리컬쳐(agriculture)’는 ‘땅’을 의미하는 ‘아그리(agri)’와 ‘보살피다·지키다·개간하다·수련하다·존경하다·예배하다’처럼 다양한 의미를 지닌 ‘쿨투라(cultura)’에서 유래했다.

농업의 한 분야인 ‘정원(庭園)’이 인류의 삶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12세기다. 인류는 농업을 통해 먹을 것을 해결한 후, 정신적이며 시간적인 ‘여유(餘裕)’를 누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이야기들을 모아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인류를 하나로 묶어 정체성을 제공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다. 인도에서는 리그베다, 이란에서는 아베스타, 팔레스타인에서는 히브리 성서, 그리스에서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의 근간이 되는 노래들이 등장한다. 성서는 신과 인간이 함께 지내던 환상적인 공간인 ‘에덴동산’ 이야기로 시작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의 정확한 번역은 ‘에덴에 있는 동산’이다. 여기서 ‘에덴’이란 자연이 마련해 준 ‘평원’이란 의미이며 ‘동산’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심미적으로 뛰어난 기획된 공간이다. 인류가 상상한 신의 모습은 에덴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온갖 나무와 동물을 배치하는 조경사다. 이곳엔 특별한 나무가 있다. 바로 ‘인간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알게 만드는 나무’다. 흔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번역되는 이 나무는 상징적인 나무로, 우주와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도와주는 나무다. 그 뿌리는 땅에 두었지만 끝은 하늘을 향하는 나무다. 신은 인간을 에덴동산을 가꾸는 정원사로 임명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에는 라에르테스 정원이 등장한다. 특히 기원전 4세기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고레스교육기>라는 책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왕 키루스를 정원사로 묘사한다. 키루스는 제국건설을 위해 원예를 전쟁만큼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문화로 소개한다. 전쟁이 지상의 영토를 정복하고 확장하는 예술이라면, 정원이나 원예는 마음의 영토를 가꾸는 예술이다. 크세노폰은 정원을 의미하는 고대 페르시아어 ‘파이리다에짜’을 차용해 그리스어 ‘파라디소스(paradisos)’ 즉 ‘다른 곳과 구별되게 경계로 사방(파라)이 담으로 쌓인 (디소스) 장소’란 의미다.

‘세 가지 생각’과 ‘연습의 사요소’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들은 ‘정원’과 같다. 그 정원에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한 ‘청정한 생각’인 ‘사트바(sattva)’가 존재한다.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만드는 생각들, 인내, 용기, 자비, 용서, 영적인 열망과 같은 것이 바로 샤트바다. 정원 안에는 잡초와 같은 욕심으로 가득한 ‘라자(raja)’도 있다. 자신의 생각을 수련하지 않고 방치하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등장하는 자만, 욕심, 시기, 게으름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생각을 장악한다. 이 잡초와 같은 생각은 심지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병충해’를 유인한다. 이 병충해와 같은 생각이 바로 ‘타마(tama)’다. 요가는 바로 마음의 정원 가꾸기이며, 요가 수련자는 정원사와 같다. 자신이 원하는 미적으로 아름답고 정서적으로 영감을 주는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는 잡초와 병충해를 제거해야 한다. 이 제거 작업은 인내와 정선을 요구한다. 정원사가 잠시 방심하면 정원은 금방 잡초와 병충해로 득실거린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13에서 언급한 요가의 목적인 ‘연습’을 I.14에서 구체적으로 친절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 투 디르카칼라 나이란타르야 사트카라-아드라-아세비토 드리다부미((sa tu dīrghakāla nairantarya satkāra-ādara-āsevito dr̥ḍhabhūmiḥ).” 즉 “요가의 목적인 연습은 오랜 기간에 걸쳐, 쉬지 않고, 정성으로 존경을 담아 수련할 때,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된다.” 파탄잘리는 이 문장에서 요가수련의 성공을 위한 네 가지인 장기(長期), 지속(持續), 정성(精誠), 존경(尊敬) 등을 언급한다.
 

조각가 로타 스푸르젬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동상.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요가 연습의 성공은 ‘디르가칼라(dīrghakāla)’, 즉 ‘긴 시간’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시시각각으로 외부의 자극을 통해 일어나는 잡념들을 잠재우기 위해서 일주일이나 한 달 혹은 일 년은 부족하다. 우리가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습득하기 위해서 투자한 시간을 상기해보자. 영어를 한 달이나 1년간 영어를 공부한 사람은 기초적인 회화 몇 마디를 할 뿐, 감동적인 소설이나 영자신문을 읽을 능력이 없다. 적어도 10년 정도를 영어 공부에 투자해야만 외국인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신문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영어를 사용해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감동을 줄 수 있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감상하기 까지는 일생이 걸릴 것이다. ‘긴 시간’은 완벽을 추구하는 요가 수련자의 마음가짐이다.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는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신적인 불꽃’이 있다고 말한다. 요가 수련자는 이 불꽃을 찾기 위해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순례를 떠나는 사람과 같다. 이 여정은 인간의 삶 전체기간을 요구하는 긴 시간이지만, 동시에 분명한 목적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한 순간, 한 시간, 그리고 하루가 바로 긴 여정을 위한 거를 수 없는 단계다. <바가바드기타> VI.45에서 요가수련자의 ‘노력(야트나·yatna)’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요가 수련자는 노력과 절제하는 마음을 통해, 악을 완전히 제거해야한다. 그리고 그 수련은 한 생애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그런 후 가장 높은 단계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tato yāti parām gatim).” 요가수련이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나를 숙연하게 만든다.

요가 연습의 두 번째 요소는 ‘나이란타르야’, 즉 ‘지속’이다. 지속엔 쉼이 없다. 요가수련자는 하루 종일 24시간 자신이 스스로 수련중이라는 사실을 각성한다. ‘지속’이란 산스크리트 단어 ‘나이란타르야’는 ‘중간(antar)에 빈 시간과 공간이 없다’란 의미다. 다이어트를 위해 혹은 허약해진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도 요가수련을 한다. 그러나 이것만을 위한 요가수련은 또 다른 잡념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행위다. ‘지속’이란 요가 수련을 자신의 일과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정하는 마음이다. 지속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신적인 불꽃인 ‘이스바라(Isvara)’에 온전히 승복하는 행위로, 자신이 추구하는 감동적인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끊임없이 일치하려는 노력이다. 지속을 통해 요가 수련자인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미래의 자신을 바로 이 시간, 이 장소에서 구체적인 생각, 말, 그리고 행동으로 드러낸다. 요가수련을 잠시 중간에 중단하는 것은 호시탐탐 마음속에 숨어 나의 영혼을 탈취하려는 ‘노상강도’인 라자와 타마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방심한 마음을 틈타 잡초와 병충해가 나의 마음의 정원을 침범한다. 끊임없는 정진만이 타오른 불꽃으로 잡초와 병충해를 제거한다.

파탄잘리는 요가 수련에 필요한 시간인 ‘장기’와 ‘지속’을 언급한 후 이 시간들을 사용하는 수련자의 마음가짐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 번째 마음가짐이 ‘정성(精誠)’이다. ‘정성’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 단어 ‘사트카라(satkāra)’는 ‘올바르고 가장 이상적인 행위’라는 의미다. 요가 수련자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일들을 본능적으로 이기심에 근거하여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취해야할 최적의 전략을 짜고 최선의 모습으로 반응한다. 그는 그 사건을 가볍게 여기지 않다. 작고 사소한 일들이 모여 나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가 수련자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정성스럽게 처리한다. 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사람이 되어 매사에 신중하다.

요가연습의 마지막 요소는 ‘아다라(adara)’, 즉 ‘존경(尊敬)’이다. ‘존경’이란 남에 대한 배려이다. 남에 대한 배려의 출발은 자신에 대한 배려다. 자신의 소중하게 생각하고 처신하는 사람만이 이웃이나 외부인들을 자신만큼 대접할 수 있다. 요가 수련자는 자신의 생각을 존경하기 때문에, 상스럽거나 거친 생각을 제거하려고 항상 노력한다. 그는 자신의 말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침묵을 수련하며, 말을 한다면 언행일치를 보장한다. 그의 행동은 깊은 생각을 통해 자연히 드러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나지 않다. 그의 행동은 독창적이지만 건방지지 않고 겸손하지만 아첨하지 않는다. 요가를 오랫동안 쉬지 않고 수련한 자는 자신의 몸에 자연스럽게 자신, 이웃, 자연, 그리고 신에 대한 정성과 존경이 배어있다. 그는 정성과 존경을 자신의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나의 마음의 정원에는 어떤 꽃이 만개했는가? 잡초와 병충들만 우글거리는가? 나는 오늘 완벽하고 감동적인 자신을 위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수련하고 있는가? 나의 몸가짐에서는 정성과 존경이 풍겨 나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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