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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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8-02-2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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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김의택 전북 도경국장과의 인연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과 전북 도경국장 김의택(金義擇) 경무관은 순전히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북한 남침이후 차일혁은 전북편성관구사령관으로 전주에 내려온 신태영(申泰英) 장군에 의해 육군대위로 임관한 후 7사단구국의용대장을 맡았으나, 국군이 퇴각하자 다시 옹골연유격대을 만들어 북한군과 싸우다가 그 과정에서 부상을 당해 부득이 군에서 제대를 하게 됐다.

그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던 지역을 수복하고 있었고, 전북지역의 지방 공산주의자들은 무주(茂朱) 구천동을 비롯하여 회문산과 내장산 등 전북지역의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들어가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낙동강전선까지 내려왔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북한군 중에는 미처 38선 이북으로 도망가지 못하고 지리산 등 남한의 산악지형으로 숨어들어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됐다. 그 가운데 지리산과 연결되어 있는 전북지역으로 이들 북한군이 들어와 지방 공산주의자들과 합류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전북지역의 빨치산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게 됐다. 그들은 산악지형을 활동무대로 하여 후방지역의 주민들을 괴롭히며 그곳 치안을 불안하게 했다.

전북도경(道警)에서는 급기야 전투경찰대대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때 급히 만들어진 전투경찰대대가 제18전투경찰대대였고, 그 대대장에 임명된 사람이 바로 차일혁이었다. 김의택 경무관과 차일혁은 그때 만났다. 상관과 부하로 만난 셈이다. 차일혁에게 제18전투경찰대대장 보직명령서를 전달한 사람이 당시 전북 도경국장으로 있던 김의택 경무관이었다. 차일혁은 청년방위대 활동경력과 유격대 활동 등을 인정받아 경감(警監)으로 특채(特採)됐다.

차일혁이 경감 계급으로 특채된 자리에서 김의택 도경국장은 “차(車) 대장, 나는 차 대장을 부하로 대하는 것이 아니고, 동지로 만나는 것이오. 최석용(崔錫鏞) 대령 이하 전북유지들 그리고 경찰간부들이 한결같이 차 대장을 추천하기에 초빙하였는데, 오늘 그 용자(勇姿)를 보니 참으로 마음 든든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의택 도경국장은 듬직한 차일혁을 보고는 내심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이후 김의택 도경국장은 차일혁이 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믿고 신뢰했다. 그리고 차일혁과 제18전투경찰대대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였을까. 김의택 도경국장은 차일혁 부대가 빨치산토벌을 하러 출정하는 날이나 차일혁 부대가 전공을 세우게 되면 반드시 부대를 방문하고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매번 어려운 전투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차일혁과 제18전투경찰대대가 대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김의택 도경국장이 출정식이나 차일혁 부대의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하나의 관례가 됐다. 차일혁 부대가 첫 출전하는 날인 1950년 12월 26일부터 그것은 하나의 전통이 되다시피 했다. 첫 출정한 날 김의택 도경국장은 도청 앞에서 거행된 출정식에서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으로부터 출정신고를 받고나서, 차일혁에게 지휘관의 상징인 지휘봉을 직접 수여했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그리고 첫 출정을 떠나는 차일혁 부대를 위해 경찰악대로 하여금 연주를 하게 함으로써 출정하는 대원들의 사기를 드높여 주었다. 그래서인지 차일혁부대는 첫 전투부터 대승(大勝)을 거두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차일혁과 김의택 경무관과의 믿음과 신뢰는 그렇게 쌓여갔다.

김의택 도경국장과 차일혁은 닮은 데가 있었다. 불의(不義)를 보고 참지 못하는 곧은 성정이었다. 김의택은 1909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출생했다. 그는 1930년 광주 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판임관고시(判任官考試)에 합격하여 행정 관료의 길을 걸었다. 광복 후에는 전라남도 경찰부청장을 시작으로 경기도 수원경찰서장을 거쳐 1950년 11월 충청북도 경찰국장을 역임하고, 전라북도 경찰국장으로 오면서 차일혁과 만나게 됐다. 김의택은 전북도경국장에서 물러난 후 정계에 투신했다.

1954년 그는 고향 함평에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정계로 진출하게 됐다. 제4대 때는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됐고, 이후 그는 신민당 조직부장, 신민당 대회의장, 신민당 지도위원, 신민당 수석부총재 겸 정무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야당정치계의 지도급 인사로 활약했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정통야당의 사수를 외치며 민권당을 창당하여 총재를 맡아 그 직을 수행했다. 그러다 1983년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향년(享年) 74세였다.

그러니까 차일혁과 김의택과의 만남을 되새겨 볼 때, 차일혁은 경찰을 시작하면서 김 국장을 만나게 됐고, 김 국장은 경찰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차일혁을 만나게 된 셈이다. 김의택 도경국장은 차일혁의 뛰어난 리더십과 전투지휘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대신 김의택 도경국장은 어려운 임무가 있으면 차일혁 부대를 투입하여 이를 해결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칠보발전소 탈환 임무였다.

누가 봐도 불가능한 임무를 김의택 도경국장은 차일혁을 믿고 맡겼다. 김의택은 차일혁의 뚝심과 전장에서의 번뜩이는 지혜, 부하들로부터 받고 있는 절대적인 신뢰,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시절부터 다져진 다양한 전투경험들을 믿으면서 차일혁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에게 어려운 임무를 맡기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그 임무를 달성하면 김 국장은 차일혁 부대로 달려가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칠보발전소 탈환을 비롯하여 주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때마다 김 국장은 만사를 제쳐두고 차일혁 부대를 방문하여 표창장을 수여하고, 전공을 치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탓인지 김의택 경무관은 차일혁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긍정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차일혁이 빨치산토벌을 하는데 있어서 무력에 의한 토벌뿐만 아니라 선무(宣撫)를 통한 방법을 제안했을 때도, 김 국장은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며 거기에 찬동(贊同)하고 나섰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차일혁은 정읍작전을 앞두고 빨치산들에게 전단을 살포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작성했다.

                                    빨치산 간부 및 전사들에게
빨치산 전사와 그 간부들에게 이 글을 보내노니, 그대들 지휘관의 눈을 피하여 끝까지 읽어보고 믿어주시오. 이 글은 어쩌면 그대들 자신의 생사를 좌우하는 중대한 것이므로 진심으로 그대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바입니다. 빨치산 전사들, 그리고 간부 여러분. 그대들의 귀여운 자녀와 다정한 아내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입산(入山)한 지 이제 6개월이 지났습니다. 작년 겨울 무서운 추위에 그대들 손발은 얼어터지고, 심신은 모두 지쳐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는 빨치산 전사, 간부 여러분. 이제 우리 경찰과 군인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단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대들에게 권고하니 따뜻한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시오. 매일 밤 그대들 친지가 있는 부락에 내려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강탈하는 것이 그대들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대들도 달뜨는 저녁, 꽃피는 아침 깊은 산중 고요한 가운데서 한줄기 눈물을 흘렸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자식과 피를 나누어 준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들 지휘관은 지금 그대들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비록 누추할망정 그대들 가족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오시오. 우리는 같은 민족 한 형제로 언제부터 우리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알았단 말입니까. 인간 본연으로 돌아와 형제의 품에 안기시오.

나와 조상의 명예를 걸고 그대들에게 약속합니다. 그대들에게 어떤 죄가 있더라도 진심으로 과거를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관대히 선처하여 가족의 품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굳게 약속드립니다. 이처럼 간곡히 부탁하는데도 나의 충고를 무시한다면 필경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서로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오. 어서 빨리 그대 지휘관들의 허위에서 벗어나 자유대한의 품에 안기시오. 제18전투경찰대대장 차일혁(車一赫)

김의택 도경국장은 차일혁이 작성한 전단 내용을 각 경찰서와 전투경찰대에 공문으로 즉각 하달하겠다고 했다. 그리고선 차일혁에게 “차(車) 대장도 이제 빨치산 토벌이 무력(武力)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나 보오.”라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에 차일혁도 “예, 국장님. 저희들은 용감히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속히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며 웃으며 화답(和答)했다.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김 국장은 평소 강철 같은 무인으로만 생각했던 차일혁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치하했고, 차일혁도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는 김 국장에게 감사한 표현을 그렇게 했던 것이다. 김의택 도경국장과 차일혁은 서로를 이해하며 부족한 것을 채워줬다.

김 국장은 차일혁의 부대를 위해서 출정식마다 부대를 찾아와 격려를 잊지 않았고, 차일혁 부대가 체육대회를 할 때도 부대를 방문하여 사기를 올려줬다. 차일혁은 그런 김 국장에게 전공(戰功)으로 보답했다. 두 사람사이에는 서로 말을 안 해도 서로의 마음을 알고 헤아려 주는 것이 있었다. 김의택 국장은 차일혁 부대의 사기와 전투력 향상을 위해 제18전투경찰대대에 많은 차량을 지원해 줬다. 이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격이었다. 동분서주하며 빨치산토벌을 해야 했던 차일혁 부대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기동력이었다. 이는 차량지원에 의해서 해결됐다.

그런 김의택 도경국장은 차일혁과 오랜 시간을 갖지 못했다. 1951년 7월 19일 김의택 도경국장이 다른 부대로 전출해갔기 때문이다. 차일혁에게 김의택 국장의 전출은 커다란 심리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차일혁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밀어줬던 김의택 국장이 없는 경찰생활은 차일혁에게 의미가 없는 듯했다. 이때부터 차일혁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경찰을 떠날 생각을 자주하게 됐다. 김의택 국장만한 인품과 정의감이 있는 존경할만한 경찰 선배가 별로 없던 당시 상황에서 차일혁에게 김의택 국장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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