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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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8-01-1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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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박정희 장군과의 인연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은 빨치산토벌대장은 물론이고 항일독립운동을 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차일혁은 그의 길지 않은 생애동안 다양한 사람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으며 알차면서도 보람찬 삶을 영위했다.

거기에는 훗날 대통령이 된 박정희(朴正熙) 장군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의 기라성 같은 장군들, 빨치산 신분으로 있다가 차일혁의 부하가 된 이른바 ‘빨치산 부하들’, 항일독립운동시절의 애국동지들, 그리고 빨치산토벌대장으로 하면서 알게 된 김만석(金萬錫) 기자를 비롯한 여러 인연들이 있다. 그들과의 인연을 통해 차일혁은 보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다 친근하게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차일혁과 박정희 장군과의 본격적인 인연은 진해에서 시작됐다. 당시 차일혁은 충주경찰서장을 마치고 진해경찰서장으로 영전해 갔다. 진해경찰서장은 경무관으로 승진하는 자리로 널리 알려졌다. 왜냐하면 진해에는 대통령 별장이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 진해를 방문했다. 그러다보니 치안을 맡고 있는 진해경찰서장으로서는 대통령을 자주 뵐 수 있게 됐고, 그런 관계로 진해경찰서장은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경무관 진급이 보장받는 자리였다. 그런데 차일혁만 진해경찰서장 7개월 만에 이런저런 이유로 물러나게 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이유였다. 거기에 박정희 장군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차일혁이 진해경찰서장으로 있을 때 박정희 장군이 5사단장을 마치고 육군대학에 장군신분으로 입교했다. 이른바 학생장군이다. 당시 육군대학은 미국 지휘참모대학을 본떠 만든 군사학교로 육군 고급장교들의 군사소양을 위해 설치됐다. 미국에서 지휘참모대학은 주로 영관급 장교들이 입교하여 대부대 전술과 전략을 공부했으나, 군대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 군으로서는 뒤늦게나마 미 지휘참모대학을 본 떠 육군대학을 창설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영관급 장교는 물론이고 장군들까지 뒤늦게 육군대학에 입교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됐다. 그렇다고 해도 장군으로서 박정희가 육군대학에 입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단장을 마친 박정희 준장도 그런 경우에 해당됐다. 박정희 장군은 1956년 7월 15일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당시 육군대학 총장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종찬(李鐘讚) 장군이었다 박정희 장군이 사단장을 정상적으로 마치지 못하고 육군대학 학생장교로 내려오게 된 커다란 이유는 1956년도에 있은 정·부통령 선거에서 5사단의 선거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대통령 선거에서 분발하지 않았다는 문책성 인사였다. 박정희 장군은 군의 정치개입에 대해서는 내놓고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다보니 5사단장의 선거결과는 다른 사단과 비교할 때 여당 입후보자에 대해 매우 저조하게 나왔다. 그런 까닭으로 박정희 장군은 사단장직에서 물러나 진해 육군대학에 입교하게 된 것이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그런데 막상 진해에 와서 보니 전세방을 구할 돈이 없었다. 육군대학도 초창기라 학생장교들을 위한 관사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박정희가 데리고 부하들은 부관 한병기 중위와 운전병으로 이타관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박정희 장군은 염치불구하고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던 이종찬 장군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종찬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있을 때 당시 박정희 대령은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차장으로 있었다. 당시 작전교육국장은 이용문 장군이었다. 그래서 이종찬 장군을 잘 알고 있었다. 딱한 사정을 듣고 난 이종찬 장군은 진해경찰서장으로 있던 차일혁에게 박정희 장군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차일혁도 박정희 장군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차일혁이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의 제2연대장으로 있을 때 이용문 장군은 남부지구경비사령부 사령관이었다. 당시 서전사와 남부지구경비사령부는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소탕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업무적으로 왕래가 많았다. 그런 연유로 이용문 장군은 박정희 대령에 대해서 차일혁에게 자주 이야기를 하게 됐고, 차일혁은 이용문 장군을 통해 박정희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그런 인연으로 차일혁은 육군대학 총장 관사부근에 있는 여좌동에 박정희가 살 셋방을 구해줬다.

그 당시 박정희 장군의 가족들은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그해 여름 가족들이 진해에 와서 해수욕을 하며 즐겼다. 이후에도 차일혁은 청빈함을 생활신조로 살고 있던 박정희 장군에게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진해경찰서장을 떠난 후에도 차일혁은 박정희 장군과 안면이 있는 독립군 출신의 박기성 장군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으며 박정희 장군을 돕는데 일조했다. 박기성 장군도 청빈한 박정희 장군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 방도를 차일혁과 함께 모색했다. 그렇기 때문에 차일혁과 박정희는 바로 친숙한 관계가 됐다.

비록 차일혁이 얼굴도 크고, 키가 178cm로 덩치도 큰데 반해, 박정희는 차일혁 보다 훨씬 작고 왜소했다. 외모상으로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두 사람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차일혁은 박정희 장군 뿐만 아니라 육군대학 총장 이종찬 장군, 그리고 육군대학 교수부장으로 있던 김재규와도 친하게 지냈다. 진해 평안동에 있던 진해경찰서와 육군대학이 그리 멀지 않아 그들의 모임은 날이 갈수록 잦았다.

차일혁은 이종찬 육군총장, 박정희 교육생, 박정희와 육사 동기인 김재규 교수부장과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차일혁과 박정희는 여러 면에서 닮은 데가 많이 있었다. 치밀한 성격도 그렇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인정 많은 것도 그렇고, 막걸리를 마시며 흥겹게 노는 것도 그렇고, 애창하는 노래도 같았다. 둘 다 만주에 있을 때 나라 잃은 설움을 황성옛터를 부르며 달랬다. 두 사람은 만나면 ‘황성 옛터’를 구성지게 불러댔다.

차일혁은 한술 더 떴다. 차일혁이 즐겨 부르던 노래는 따로 있었다. 1953년도에 발표된 ‘봄날은 간다’였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차일혁은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명창(名唱) 수준의 차일혁 노래에 술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취흥은 고조됐다.

차일혁이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좋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반(反) 이승만 성향의 사람들이었다. 이종찬 장군은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지시한 군의 정치개입을 거부해 눈 밖에 났고, 박정희 장군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 협조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차일혁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차일혁은 반 이승만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으니, 특무기관에서 그것을 보고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차일혁을 음해하는 투서가 들어갔다. 그것은 차일혁이 충주경찰서장으로 있을 때 지역유지들에게 돈을 걷고, 극장운영 수입금을 사적인 용도로 썼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경찰내부에서 나온 내용임이 분명했다. 상황은 그랬다. 경찰은 6·25전쟁을 통해 전선에서의 전투수행과 빨치산토벌을 하느라 전투경찰인력을 과도하게 증원했다. 그런데 이현상 사살 후 정부에서는 경찰 예산을 대폭 감축했다.

예산 감축으로 경찰서 운영이 어렵게 되자 차일혁은 부족한 예산을 메우기 위해 극장운영을 통해 조달한 돈을 경찰서 운영비와 의용소방대 운영비로 제공했다. 빨치산 토벌 당시 차일혁은 기부 받은 금품은 물론이고, 토벌 공로로 받은 상금까지 피난민에게 아낌없이 나눠줬던 차일혁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상황이 달랐다. 예산 감축으로 여기저기서 사무실 운영비가 부족하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렇다고 부정한 방법을 동원할 수는 없었다. 차일혁은 궁여지책으로 극장운영을 하며, 그 수입으로 경찰서 운영경비와 의용소방대의 운영비를 마련했다.

발단은 이때 벌어졌다. 충주경찰서 직원 중 누군가가 “차일혁이 극장수입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있다.”고 여기고 감찰위원회(현재 감사원)에 투서했다. 위원회에서는 조사 결과 “사적으로 유용한 부분은 없으나, 기부금을 모집하지 말라는 지시를 위반했다.”고 결론 내렸다. 징계감이었다. 하지만 차일혁이 그 돈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뿐더러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보여준 빛나는 전과(戰果)와 훈장 수훈 등의 공적을 고려하여, 1956년 5월 초순 그 건은 징계보류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그후로 다시 차일혁을 음해하는 두 번째 투서가 있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차일혁은 그 결과 진해경찰서장으로 부임한지 7개월, 2차 투서가 있은 지 3개월 만인 1956년 9월 27일, 충남경찰국 경비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갑작스러운 발령이 아닐 수 없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인사이동이었다. 좌천이었다.

하지만 상부의 명령이니 차일혁도 어쩔 수 없었다. 정들었던 진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임인사를 하러 이종찬 육군대학 총장을 찾아갔다. 이종찬 장군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다 미운 털이 박혀 한직인 육군대학 총장으로 쫓겨난 자신의 처지와 현재 차일혁의 처지가 매우 흡사하다고 여긴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종찬 장군은 헤어지기가 마냥 아쉽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차일혁은 몇 시간을 그의 집무실에 같이 있다가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의 기약 없는 이별이었기 때문이었다. 차일혁의 인사이동 소식을 뒤늦게 듣고, 박정희 장군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박정희 장군은 떠나가는 차일혁과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했다.

진해를 떠난 후 차일혁과 박정희 장군과는 단 한 차례 연락이 있었다. 그것은 1958년 박정희 준장이 소장으로 진급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때 차일혁은 공주경찰서장으로 있을 때였다. 차일혁은 박정희 장군에게 축하한다고 연락을 취했다. 박기성 장군에게도 박정희 장군의 진급소식을 전하며 같이 기뻐했다. 박정희 장군과의 인연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차일혁이 순직했기 때문이다.

만약 차일혁이 5·16후에 살아 있었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분명 차일혁을 크게 기용했을 것이 틀림없다. 차일혁의 죽음을 못내 아쉬워하고, 차일혁의 아들 차길진에게 도움을 주려고 무던히 애쓰던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은 결코 가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박정희가 자신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도움을 주면서도 전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오히려 박정희의 남자다움을 높이 평가하고 함께 술친구로써 어울리며 의기투합했던 차일혁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에서 나온 사나이의 우정이 아니었을까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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