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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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8-01-07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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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빨치산총수 이현상을 사살하고 후방을 안정시키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서전사 제2연대장 차일혁(車一赫) 총경과 빨치산총수 이현상(李鉉相)과의 결전의 날이 차츰 다가왔다. 차일혁의 칼날이 점차 이현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상의 핵심 부대들이 차일혁 부대에 의해 하나둘씩 소탕됐다. 제1대대장 김동진을 습격했던 이영회부대의 송관일이 제2연대 수색대와 618부대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1954년 8월 20일 매복 중이던 산청경찰서 삼장지서 서원들에게 사살됐고, 같은 날 반야골과 뱀사골에 은신하다가 제2연대의 공격을 받고 쫓기던 김지회부대장도 구례경찰서의 연곡출장소 경찰대에 의해 사살됐다.

전남도당 병기과장은 제3연대의 공격에 쫓기다가 광양경찰서의 황죽출장소 경찰대에 사살됐고, 전남도당 진위대 88부대장은 하동서의 형사대에 의해 사살됐다. 전투경찰의 물샐 틈 없는 포위와 수색 작전으로 빨치산 핵심 간부들이 점차 잘려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이현상의 수족들이었다.

빨치산총수 이현상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현상을 떠받치고 있던 제5지구당이 북한에서 반당 종파분자로 낙인찍힌 박헌영과 이승엽의 계파로 몰려 해체되면서 이현상의 지위도 격하됐다. 그때가 1954년 8월 26일이었다. 경찰이 이런 고급정보를 입수하게 된 것은 제5지구당 비서실장이던 이형련을 체포하면서부터였다. 이형련은 차일혁의 수색대에 의해 체포됐다. 이형련은 그 직책으로 보아 이현상의 소재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 군과 경찰은 남한 내 빨치산총수인 이현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거기에는 최근 발표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한몫했다. 이승만은 특별담화를 통해 “지리산의 평정 없이는 남한 내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이현상의 생포 없이는 지리산을 평정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이현상 체포를 강력히 지시했다. 나아가 이승만은 “이현상을 생포하는 사람에게는 일 계급 특진시키고 상금을 내리겠다.”까지 했다. 미 국무부에서도 훈장과 엄청난 현상금까지 포상으로 내놓았다.

그러니 군과 경찰이 경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현상을 생포하거나 사살하게 되면 지리산의 빨치산토벌은 물론이고, 남한 내 후방지역도 안정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군경이 잡아야 될 이현상의 소재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달 동안 이현상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작전을 짜냈지만 모두 실패했다. 간혹 생포한 빨치산들도 이현상의 소재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빨치산들은 그들의 총수격인 이현상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재를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그때 이현상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제5지구당 이형련이 체포됐다. 그러나 이형련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이현상의 소재를 알아내려는 차일혁에게 “나를 더 이상 욕보이지 말고 죽여 달라!”고 대들었다. 그런 이형련에게 차일혁은 오히려 자신의 권총을 주면서 “당신 소원이 죽는 것이라 해도,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일 수는 없소. 당신이 굳이 죽으려거든 당신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오. 이 권총 안에는 한 발의 실탄이 남아 있소. 스스로 목숨을 끊든가, 아니면 나를 쏘든가,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의 돌발행동에 연대장실은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형련이 자결하지 않고, 차일혁을 쏘게 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때 차일혁은 “만약 이형련이 자신을 쏜다면 그것도 운명”으로 생각할 참이었다. 그러나 이형련은 자결도, 차일혁도 죽이지 못하고 총을 내려놓으면서, “자결하지 못하는 나를 비웃지 말고, 나를 그냥 쏴 죽이시오.”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차일혁은 그런 이형련에게 “당신은 제5지구당 기요과장(비서실장)이 아닙니까? 전쟁은 이미 끝났소. 그러나 지리산만은 아직도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소. 얼마 전 내 부하인 1대대장과 대원 5명이 당신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소. 나 역시 계속해 당신들을 죽이고 있지만 이젠 나도 지치고 지겹소.”라며 추궁하듯 말하자, 이형련도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소. 그러나 우리는 산을 내려올 수 없소. 이승만과 그 주구들이 인민들을 괴롭히는 한, 우리는 최후의 한사람이 남는다 해도 계속 투쟁할 것이오.”라며 거칠게 대답했다.

차일혁도 포기하지 않고, “이 선생, 한 가지만 대답하시오. 이현상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습니까? 북으로 올라갔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지리산에 있습니까? 절대로 이현상에게 위해를 입히지 않을 테니 그의 거처를 말해 주시오.”라고 물었으나, 이형련은 입을 다문 채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구서칠 구례 경찰서장이 데려온 이형련의 처는 울음을 터트렸다. 만 3년 만에 보는 남편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상을 입고 많은 피를 흘린 이형련은 당장 수혈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지경이었다. 차일혁은 자신의 피를 뽑아 수혈하라고 의사에게 말했다. 의사는 “연대장님 죄송합니다. 급한 대로 연대장님의 피를 뽑겠습니다.”라며 수혈을 했다. 수혈을 받은 이형련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런 이형련에게 차일혁은 “당신은 의사니까 파상풍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거요.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결과는 모르겠소. 이현상의 거처와 있는 곳을 말하지 않아도 괜찮소. 당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시오.”라고 말하자, 이형련도 자신에게 선의를 보인 차일혁에게 “당신들이 그토록 찾고 있는 이현상 동무는 이제 평당원으로 강등되었소.”라며 그간의 사정을 털어놨다.

이형련의 병세는 심각했다. 파상풍균이 온 몸에 퍼져 몇 시간을 넘기지 못할 상황이었다. 차일혁은 중국에 있을 때 보았던 민간요법이 생각나 돼지껍질을 구해오게 했다. 중국에서는 파상풍에 걸리면 돼지껍질을 씌워 치료를 하곤 했다. 돼지를 잡아 껍질을 이형련에게 덮어 씌웠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치료는 불가능했다. 차일혁은 안쓰러운 마음으로 “나중에 우리가 구천에서 만날 때는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없는 곳에서 만납시다. 이제 말을 안 해도 좋으니 고개만 끄덕여 주시오.”라며, 차일혁이 지도를 펴서 이현상이 숨어 있을 만한 몇 곳을 가리켰다. 반야봉 남쪽 빗점골을 가리키자 이형련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형련의 시신은 부인이 수습해 가도록 했다.

이형련을 통해 어렴풋이 이현상을 소재를 알게 된 서전사에서는 김종원 사령관 주재로 긴급 작전회의가 열렸다. 차일혁은 심문결과를 사령관에게 보고했고, 서전사 작전과장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이날 회의로 새로운 작전명령이 하달됐고, 작전 지도를 그렸던 작전주임은 작전이 끝날 때까지 영창에 가두어 둘만큼 보안을 철저히 유지했다. 서전사 전방지휘소를 경남 하동 용강에 설치하고, 제2연대는 본부를 인근 쌍계사로 전진 배치했다.

이현상이 있다고 알려진 빗점골은 쌍계사에서 4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였다. 그곳은 반야봉 남쪽의 1,183고지로 향하는 능선으로, 그 일대는 1천 미터 이상의 험산 준령으로 이어져 있어. 시계(視界)가 극히 불량하고 가파른 절벽과 계곡으로 작전이 힘든 지역이었다. 빗점골은 지리산 한복판으로 이동이 쉬운 곳이었다. 북으로 주능선을 넘으면 바로 뱀사골로 이어지고, 벽소령을 넘으면 함양군 백무동으로 갈 수 있었다. 불무장등 너머 서쪽으로 피아골이 있고, 오른쪽으로 고개 하나만 넘으면 넓은 대성골이 펼쳐져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직 울창한 숲 사이로 물줄기가 흐르고 있어 은신하기가 아주 좋았다.

차일혁 부대는 이현상을 잡기 위해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갔다. 그때가 1953년 9월 6일이었다. 빗점골 부근을 수색하던 618부대는 원범리에서 빨치산 송덕룡 부대원 일곱 명이 마을에 나타나 식량을 빼앗아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618부대의 1소대장은 빨치산을 추격해 1,183고지 남쪽에서, 아침을 먹고 있던 그들을 기습해 김진영과 김은석을 생포하고 총기 2정을 노획했다. 심문 결과, 김은석과 김진영은 제5지구당이 해체되기 전에 7명으로 이루어진 이현상의 호위병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제5지구당의 해체와 이현상이 평당원으로 강등당해 빗점골에 은신하고 있고, 조만간 경남도당으로 이송될 것이라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이현상은 전남도당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경남도당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김진영과 김은석을 2연대 수색대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수색대는 33인이 되었고, 이들 중 빨치산 출신이 아닌 자는 최순경 뿐이었다.

1953년 9월 13일, 서전사 작전명령 9호가 하달됐다. 빗점골을 완전 포위하고 수색대를 잠복시켜, 이현상을 생포한다는 작전이었다. 이에 따라 제1연대는 남원군 산내면을 경유하여 반성리에 부대를 배치하여 포위망을 형성했다. 제3연대와 제5연대는 각각 구례와 함양 마천에서 포위망을 구축했다. 차일혁이 지휘하는 제2연대 제1대대는 남원 주천에 주둔하여 서전사가 있는 남원 외곽의 경비를 맡고, 제2대대, 제3대대, 618부대는 하동 용강에 집결하여 빗점골 일대에 대한 작전을 개시했다. 차일혁은 수색대로 하여금 하동 용강을 출발하여 범불사, 삼정을 경유하여 빗점골 일대의 6개 지점에 매복하도록 지시했다.

수색대는 오후 8시경 3~4명으로 보이는 빨치산들과 조우하여 접전을 벌였으나, 빨치산들은 순식간에 도주하고 전과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빗점골에 빨치산들이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고, 이현상의 은신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이미 호위병도 없이 거의 감금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현상이라지만, 평생을 공산주의 운동에 몸바쳐온 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차일혁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작전상황을 보고받았다.

다음 날인 9월 18일 오전 11시경 김용식이 지휘하던 수색대로부터 전과 보고가 있었다. “연대장님. 어제 밤에 전투가 있었으나, 빨치산들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방금 그 일대를 수색하다가 늙은 공비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김진영과 김은석에 의하면, 이현상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엎드려 있는 시체를 발견하고 몇 발의 확인 사살을 하긴 했지만, 이현상은 등에 총을 맞고 죽은 것 같습니다.

어제 야간전투 중에 그때 총에 맞아 죽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등에서 가슴까지 관통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맞은 것 같습니다.” 이현상의 7인조 호위병이었던 김진영과 김은석이 “선생님 죄송합니다.”라고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김진영과 김은석에 의하여 일차적으로 이현상이 틀림없음을 확인했으나, 이현상과 안면이 있던 연대본부 수색대원 양희근 외 여러 명이 다시 확인함으로써 이현상의 사살이 사실로 판명됐다.

차일혁은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지금 내 앞에 누워있는 이 자가 바로 이현상이란 말인가? 믿기지 않았으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차일혁은 사령부 전방지휘소에 이현상의 사살 사실을 보고하자, 출타 중인 사령관을 대신하여 전방 지휘소장으로 나와 있던 서전사 작전과장이 믿기지 않은지 몇 번이고, “이현상이 틀림없느냐?”고 되물었다. 이현상 사살이 확인되자, 서전사에서는 “제2연대 수색대가 1954년 9월 18일 오전 11시에 이현상을 비롯한 몇 명의 빨치산들과 교전을 벌여 이현상을 사살했다.”고 공식 발표했고, 차일혁의 제2연대에서는 1953년 9월 23일, 화개초등학교에서 이현상 사살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현상의 시신(屍身)은 방부(防腐) 처리되어 서울로 올라가 명동에 소재한 경찰병원에 안치됐다. 그때 이현상의 고향친구이며 정치인인 유진산이 그의 시신을 보고 “현상아, 너도 늙었구나?”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이현상의 시신은 창경원에서 유품과 함께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됐고, 성북경찰서 앞 도로변에 전시됐다.

그러다 가족에게 시신을 인계하기 위해 하동의 화개장으로 돌아왔다. 이현상의 고향인 금산군 외부리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이현상의 숙부는 “집안을 풍비박산 냈다.”며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 이현상의 시신은 다시 차일혁에게 돌아왔다. 차일혁은 난감했지만, 간소하게나마 장례를 치러주고 싶었다. 제3연대장 방득윤 총경도 백운산작전에서 경남도당 작전주임을 사살한 후, 시신을 수습하여 정중하게 화장(火葬)을 해 준 적이 있었다. 제5연대장 정인주 총경도 차일혁에게 “차 총경, 비록 빨치산의 괴수(魁首)로서 국가를 혼란하게 했던 자였지만, 그래도 한판 승부를 겨루었던 상대가 아니오.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적장(敵將)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소?”라고 말했다. 차일혁도 “맞습니다. 비록 빨치산의 괴수였지만, 그도 이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빨치산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마지막 가는 길을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줍시다.”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1953년 10월 8일, 차일혁은 제2연대 본부 옆에 있는 섬진강 백사장에서 이현상의 시신을 화장했다. 그리고 타다 남은 이현상의 뼈를 자신의 철모에 담고, M1소총으로 곱게 빻아 섬진강 물에 뿌렸다.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공산주의자 이현상이 한 줌 재가 되어 섬진강을 따라 흘러갔다. 차일혁은 이현상의 명복을 빌며 다음 세상에서는 서로 총구를 겨누는 적으로 만나지 않기를 염원했다.

이현상을 사살한 후 차일혁은 빨치산 잔당의 소탕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중에서도 무주 구천동에서 패배를 안겨줬던 이영회부대 섬멸에 주력했다. 1953년 11월 27일, 차일혁의 수색대가 이영회 부대를 포착하여 5시간의 교전 끝에 이영회를 비롯한 빨치산 56명을 사살했다. 이에 따라 지리산은 물론이고, 빨치산에 의해 휘둘렀던 남한의 후방지역이 비로소 안정을 되찾게 됐다. 차일혁이 그동안 밤낮으로 임했던 토벌작전이 드디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 무렵 이현상 사살에 대한 공로 다툼이 합동진상조사단의 조사로도 매듭을 짓지 못하다가, 결국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경찰의 공로로 판정이 났다. 이에 따라 내무부 장관과 김장홍 치안국장, 김종원 서전사 사령관이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서전사 작전과장이 금성충무무공훈장, 차일혁이 금성화랑무공훈장, 제2연대 수색대장 김용식이 은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훈장수여가 끝난 뒤 제18전투경찰대대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김만석(金萬錫) 기자가 찾아왔다.

김만석 기자는 차일혁의 얼굴을 응시하며, “차 대장은 현지 부대장으로 일등 공훈을 세우고도, 어떤 이유로 공로를 내세우지 않았소. 당신이 가장 높은 상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소. 현지 지휘관이었던 차 총경보다 사령부 작전과장이 더 큰 상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현지에 있지도 않았던 사령관이 제일 높은 훈장을 타는 것도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며 상훈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런 김만석 기자를 향해 차일혁은 “훈장을 받고자 빨치산토벌을 한 것은 아니요. 또 이현상을 죽였다고 해서 금방 이 땅에 평화가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빨치산을 향해 돌진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이 끝나면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깨끗이 가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김만석 기자는 숙연한 자세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드디어 차일혁도 전장을 떠나게 됐다. 서전사 제2연대장으로 지리산에 들어온 지 2년, 제18전투경찰대대장을 시작으로 빨치산토벌에 밤낮없이 전장을 누빈지 5년, 차일혁에게도 피비린내 나게 했던 전투도 서서히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었다. 차일혁은 화약냄새가 밴 전투복을 벗고, 민생과 치안을 다루는 일선 경찰서장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다. 이로써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대장으로서 ‘빨치산토벌과 후방지역 안정’이라는 부여된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물러나게 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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