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45] 明나라는 어둠의 제국인가? ①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1-16 08:07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어둠의 나라 明

[사진 = 주원장 초상화]

몽골이 물러간 중원은 주원장의 명나라 차지가 됐다. 중국 대륙에 명나라가 들어선 것은 역사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적어도 명나라가 취한 행보를 기준으로 판단해보면 그렇다. 특히 동양과 서양이라는 지역을 분리해서 보면 세계사의 주도권을 서양으로 넘겨주는 시점이 바로 명나라 때라고 할 수 있다. 주원장의 명나라는 밝은 명(明)자를 앞세운 나라였지만 실제로는 어둠의 나라였다.

▶ 부정적 요인 안고 출발한 明

[사진 = 주원장 효릉(남경)]

명나라는 출발 때부터 부정적인 요인을 안고 있었다. 그 것은 다분히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개인 탓이 컸다. 주원장의 시대는 중국 역사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공포정치의 시대였다. 그 어둠의 출발이 결국 명 제국 내내 어두운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주원장은 가장 밑바닥 출신이었다. 유랑 빈농의 집에서 태어나 탁발승이 된 적도 있었다.

3년 간 유랑 걸식을 하며 지내기도 했다. 백련교라는 종교에 들어가 홍건적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출세의 길을 달리다 결국 천하를 평정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맨 밑바닥에서 가장 상층부에 올랐다는 점에서 그의 인생 역정은 대단하다. 하지만 출신 배경에 대한 이상한 열등감은 그를 광적으로 독재 권력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 것은 엄청난 부작용을 불러왔다. 어렵게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면 지난날을 소중하게 여길 법도한데 주원장은 그렇지 못했다.

▶ 어처구니없는 언론 탄압
문자(文字)의 옥(獄)이라는 불리는 언론 탄압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과거 자신의 신분을 떠올리게 하는 문자들을 정해 놓고 그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을 모독했다고 해서 가차 없이 사형에 처했다. 그 문자라는 것이 광(光) 독(禿) 승(僧) 생(生) 적(賊) 칙(則)과 같은 것이다. 光과 禿은 대머리, 즉 중의 머리를 의미하는 글자로 그가 떠돌이 중노릇하던 때를 야유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진 = 망나니 춤(명나라)]

물론 僧은 중을 가리키는 말이고 生은 僧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사용을 금지했다. 賊은 자신이 기반을 마련했던 백련교의 조직 홍건적을 의미한다. 則 역시 賊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작칙수헌(作則垂憲: 법칙을 만들어 모범을 나타낸다)이라는 문장을 사용했다가 황제를 홍건적에 비유했다고 처형당한 사람을 비롯해 이 문자를 사용했다가 처형당한 사람은 부지기수에 이르렀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여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얼마나 공포정치가 만연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로 들어 보았다.

▶ 칼바람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
주원장은 모든 권력을 자기 자신에게 집중시키면서 누구라도 권력을 넘볼 여지가 있는 사람은 그냥 두지 않았다. 가장 그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유능한 부하들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자신의 측근부하들을 혼자만의 심증을 갖고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측근 호유용(胡惟庸)과 남옥(藍玉)을 제거하면서 여기에 연루됐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한 사람이 무려 5만 명에 이르렀다. 이를 두 사람의 성을 따서 호람(胡藍)의 옥(獄)이라 부른다.
 

[사진 = 명나라 무장]

명나라 건국 공신으로 공․후․백․작에 봉해진 130여명 가운데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은 사람은 다섯 명에 불과했으니 측근들이 얼마나 호된 칼바람 속에 전전긍긍했는지를 알 수 있다. 칭기스칸이 몽골제국 건설에 기여한 자신의 너흐르들을 거의 형제의 예로 대하면서 포상하고 적극 활용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 금의위(錦衣衛) 통한 공포 정보정치
공포정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정보기관과 스파이 조직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가 반드시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것이 이 조직이다. 금의위(錦衣衛)가 명나라 특무기관의 이름이었다. 사법기관과 상관없이 거침없이 행동했던 이 기관이 곳곳에 심어 놓았던 스파이들이 야기한 참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사진 = 마황후 초상화]

증거도 증인도 필요 없이 금의관에게 한번 찍히면 그 것으로 그 사람은 파리 목숨이었다. 유능하거나 존경을 받는 인물은 제거대상 1호였다. 그러한 사람이 살아남는 방법은 초야에 숨어 숨죽이고 사는 길밖에 없었다. 주원장은 평생 유일한 동지였던 부인 마황후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승상 제도도 없애 버렸다. 제 2인자는 자신의 자리를 넘볼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행정부인 6부도 자신이 직접 통괄했다. 완전한 원 맨 시스템이었다. 말하자면 지방의 군수까지도 자신이 정할 정도로 모든 업무를 관장했다. 그래서 본인은 서류더미 속에 묻혀서 지내야할 지경이었다.

▶ 자식도 믿지 못한 독재군주

[사진 = 자금성 위치]

지방의 軍조직도 언제 반기를 들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믿지 못했다. 스물여섯 명의 아들 대부분을 각지의 왕으로 보내 지방의 군을 장악하도록 했다. 그리고서도 안심하지 못해 승려 한사람씩을 보내 비밀리에 아들을 감시하도록 했다. 간단히 언급한 사례만 봐도 출범 초기의 명나라가 얼마나 보기 드문 독재국가였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형태의 통치가 명나라의 성격을 극도로 부정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