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44] 몽골은 왜 스스로 무너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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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1-15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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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무엇이 몽골세계제국을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었을까? 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 살아 있었던 쿠릴타이 기능

[사진 = 쿠릴타이 추정도]

초원의 유목민들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한 삶은 유목문명권에서 살아온 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자연히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능력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합의에 의해 가정이나 조직 나아가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자를 지도자로 뽑는 관행은 그래서 생겨났다. 이른바 적임자 계승방법이다.
 

[사진 = 칭기스칸 가묘의 황혼]

그래서 생겨난 것이 이미 언급한 쿠릴타이다. 몽골제국의 대칸은 바로 이 쿠릴타이를 통해 탄생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이러한 지도자의 선출방법은 확실히 민주적인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칭기스칸과 오고타이, 구육, 뭉케 등은 이 방법에 의해 선출됐다. 쿠릴타이 때마다 크고 작은 진통이 있었지만 조정 작업을 통해 총의를 이끌어 내는 모습을 취해왔다.

▶ 쿠빌라이가 깨뜨린 쿠릴타이 원칙

[사진 = 쿠빌라이 즉위]

하지만 동생 아릭 부케와의 경쟁을 통해 대권을 잡은 쿠빌라이의 경우 쿠릴타이의 형식을 빌리기는 했지만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다. 반대하는 사람까지 설득한 뒤 축제분위기 속에서 추대된 대칸이 아니었다. 찬성하는 추종자만 모아 놓고 연 쿠릴타이에서 선출된 대칸은 엄격히 말하면 대칸으로 인정받을 자격이 없다.

그런데 그 원칙을 쿠빌라이가 깨뜨렸다. 말하자면 쿠데타였다. 그래도 쿠빌라이 때까지는 괜찮았다. 전쟁을 통해 경쟁자인 동생을 제압했고 강력한 지도력으로 대몽골제국을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경제적인 기반을 닦고 육지와 바다를 연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으니 대칸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있었다면 중앙아시아의 카이두 집단 정도였다.

하지만 한번 깨어진 원칙은 쉽게 잊혀 지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몽골인들의 머릿속에는 모든 몽골인의 추대가 아니더라도 힘만 있다면 대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제국 근간 흔든 쿠릴타이 변질

[가족 = 칭기스칸 황금가족도]

"쿠릴타이는 몽골인들을 통합시키고 정벌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칭기스칸의 친족들이 자기가 배당 받은 지역을 다스렸기 때문에 점차 독립적으로 되어갔고 따로 따로 살고 싶어 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자연히 쿠릴타이의 역할도 점차 감소됐다. 특히 권력을 탐내는 왕족들이 개별적으로 쿠릴타이를 소집해 자신을 칸으로 추대하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이것이 몽골세계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몽골의 원로역사학자 비라교수의 이 같은 지적처럼 쿠릴타이를 통한 정당한 권력 승계가 아니라 대결이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으면서 쿠릴타이가 형식적인 기구로 전락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과정을 거쳐 권력을 잡은 대칸은 대칸으로서의 진정한 권위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붕괴 부른 원칙 없는 권력투쟁
앞서 살펴본 대로 쿠빌라이 이후 열 명의 대칸 가운데 정상적으로 제위에 오른 사람은 거의 없다. 대칸의 자리를 둘러싼 내분과 갈등으로 상층부는 항상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권력의 핵심부가 흔들리는데 그 거대한 제국의 안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끊임없는 암투가 제국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유목민 사회의 원칙이 깨지면서 쿠릴타이가 무력화됐고 그 것이 세계제국을 떠 받쳐온 한 기둥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는 얘기다.

▶ 유목․정주 사회 접목 시도

[사진 = 칭기스칸 유훈]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망할 것이다."

칭기스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손들에게 유목민의 기질을 잃지 말 것을 이같이 당부했다. 이 당부는 유훈(遺訓)으로 자손들에게 전해져 내려갔다. 통치지역이 넓어지면서 그의 후손들은 정주민 지역을 통치의 중심지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땅에 성을 쌓고 유목사회와 농경사회의 장단점을 파악해 이를 적절히 접목시키려고 노력했다.

몽골의 역사 학자 나착도로지교수도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쿠빌라이가 대도를 건설한 것과 관련해 몽골의 풍습을 잊고 중국의 문화에 빠져들었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만 쿠빌라이는 몽골의 것을 어떻게 잘 보존하고 발달시키느냐 하는데 역점을 두고 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을 지배하는 동안 그 부분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노력해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유목마인드 유지에 노력

[사진 = 초원의 게르]

쿠빌라이가 궁궐 안에 게르를 설치해 놓고 그 속에서 잠을 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농경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유목 마인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다진 행위로 봐야할 것이다. 어차피 정주민의 사회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유목사회의 것만 고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넌 센스일 수도 있다.
 

[사진 = 초원의 말들]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이동하며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개척해나가는 일, 즉 끝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유목마인드 본질만 잃지 않으면 될 것이다. 쿠빌라이가 외형적으로 유목민의 삶을 일부라도 지켜가려고 노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유목마인드의 본질을 지켜가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한 것인지도 모른다.

▶ 변화 추구로 지킨 유목 마인드
제국을 끝없이 팽창시키고 바다를 통해 교역의 길을 열어 유라시아 대교역권을 만든 일 자체가 유목마인드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국을 거미줄처럼 엮어 물류시스템을 완비한 일, 대도를 수로를 통해 바다와 강남으로 연결시킨 일, 순환하는 은(銀)을 통해 세계와 원활한 경제 통로를 만든 일, 이 모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처럼 변화를 추구하는 동안 세계제국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쿠빌라이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켰다.

▶ 급속히 사라진 정체성(正體性)
문제는 변화를 추구하는 인물이 사라진 뒤 후계자들이 정체(停滯) 상태에 머물렀다는데 있다. 그러다 보니 몽골인의 정체성(正體性)도 급속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우선 정주민 사회의 생활은 유목민의 생활보다 안락했다. 대부분의 지도층 인사들은 그 속에 젖어들다 보니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무뎌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진 = 나담축제 말달리기]

정주민 사회에서의 삶은 향락과 사치 등 유혹의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최고 통치자가 의지를 가지고 앞에서 이끌어 가는 동안 자제해왔던 욕구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최고 상충부가 권력다툼에 몰두해 있는 동안 그러한 경향은 더욱 확산돼 갔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7-80년 동안 그런 상태가 이어졌으니 몽골세계제국이 급속히 내리막길을 걸은 것은 당연했다.

▶ 놓쳐버린 기회들
적어도 그동안 상실돼 가는 정체성을 일깨우는 개혁적인 인사가 등장해 새 바람을 일으켰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카이샨 같은 인물이 그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였다.

불행하게도 그도 권력 투쟁의 희생물이 되면서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토곤 테무르 당시의 톡토 같은 인물이 군벌을 대상으로 대규모 원정을 단행함으로써 잠자고 있던 몽골의 기상을 일깨우고 대칸이 이를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면 상황은 또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때마다 몽골인들은 작은 기회의 끈을 놓쳐버렸다. 이미 세계제국의 몰락은 운명처럼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 운명처럼 다가온 제국의 몰락

[사진 = 잉크체첵교수(몽골국립대)]

토곤 테무르 후반기 기황후의 궁정암투도 크게 보면 그러한 흐름 속에 있던 작은 사건에 불과 했다. 그래서 몽골제국의 몰락에 기황후의 야심이 큰 몫을 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몽골국립대 역사학과의 잉크체첵교수는 기황후가 몽골제국의 몰락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토곤 테무르 대칸이 대륙에서 밀려나는 과정에서 고려인 황후가 상당한 영향을 줬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 이미 몽골이 몰락 시기에 접어들었고 고려인 황후가 그렇게 큰 영향력을 미칠 상황이 아니었다. 황후의 궁정암투 때문에 몽골의 힘이 약해졌다고는 볼 수 없다. 몽골제국의 몰락은 역사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적으로 여러 황후들이 정치문제에 참여했던 일이 많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대칸을 도와주기 위한 역할을 했다. 울제이 쿠투 카툰(기황후)도 이런 전통에 따라 정치에 어느 정도 관여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 때문에 몽골제국이 망했다는 주장은 완전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몽골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제국의 멸망은 운명처럼 다가와 있었다는 설명이다.

▶ 천재지변 등도 몰락 재촉

[사진 = 만리장성]

여기에 몰락을 재촉한 몇 가지 원인들이 더 있다. 이 시기에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천재지변이 제국 붕괴에 속도를 더해줬다. 여러 가지가 겹친 상황은 필연적으로 나라의 재정을 고갈시켰다. 경제적 기반이 사라진 나라는 이미 나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때에 맞춰 한족시대의 부활을 내걸고 일어선 중국인들의 공격을 몽골제국은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중국 대륙은 다시 한족의 손에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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