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70] 대칸의 죽음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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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0-15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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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사진 = 13세기 러시아와 동유럽]

러시아 정벌을 마무리 지은 몽골의 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동유럽 쪽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정벌과는 달리 동유럽 정벌은 한 차례 몰아친 거친 광풍이었다.

▶리그니츠 전투 대승

[사진 = 몽골군 동유럽 공격도]

동유럽으로 기수를 잡은 몽골 연합군은 두 개의 진로를 택했다. 하나는 폴란드, 다른 하나는 헝가리였다. 차가타이의 손자 바이다르와 카이두가 이끄는 별동대는 1241년 4월 리그니츠 평원 부근 왈슈타드라는 곳에서 폴란드와 독일기사단의 연합군과 마주쳤다.

[사진 = 리그니치 전투도]

'리그니츠(Liegnitz) 전투' 또는 '왈슈타드(Wahlstadt) 싸움'으로 알려져 있는 전투다. 당시 유럽은 교황과 황제들이 분쟁을 하고 있었고 각 지역이 봉건영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 구성이 어려웠다. 그래서 리그니치공이 독일 기사단과 연합해 몽골군에 대항했다.
 

[사진 = 몽골군 폴란드 점령]

장비와 전략적인 면에서 아주 대조적인 두 집단의 싸움에서 몽골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의 결과 폴란드는 거의 몽골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헝가리에서의 잔혹한 징벌행위

[사진 = 사요강 전투도]

같은 시기에 바투와 수베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3개의 부대로 나뉘어 헝가리로 공격해 들어갔다. 사요강에서 맞붙은 몽골군과 벨라(Bela)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의 치열한 전투 역시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와 전투 이후 벌어진 몽골군의 잔혹한 징벌행위는 헝가리 측의 기록과 페르시아 사서에 남아 있다. 그 내용은 역시 러시아 연대기와 마찬가지로 잔혹함의 극치를 이루는 내용들이다. 이후 계속적으로 몽골군의 승전이 이어졌다.
부다와 페스트라는 두 도시까지 몽골군에게 함락되면서 헝가리는 몽골군에게 거의 점령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유럽에 내린 신의 축복

[사진 = 유럽 기마병과 몽골 기마병]

이제 서유럽이 몽골군의 침공에 곧바로 대응하고 나서야할 상황이었다. 1241년 7월, 도망간 헝가리의 벨라 4세를 뒤쫓아 비엔나 교외의 노이슈타드까지 접근해 들어갔던 바투의 군대는 그 해 겨울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넜다. 이제 서유럽과 몽골군의 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동유럽이 무너지면서 독일과 이탈리아 등은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도망 나온 피난민들로 넘쳐 났다.

서유럽 전체가 공포의 도가니 속에 빠져든 것은 당연했다. 유럽의 단결을 주장한 프레드리히(Friedrich) 2세외에는 누구도 적극적인 대응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몽골군이 진격을 멈췄다. 서유럽에게는 신의 축복이 내린 것이다.

▶오고타이 죽음과 함께 몽골군 귀환

[사진 = 몽골 경기병]

이때가 1242년 3월로 몽골본토로부터 바투에게 오고타이가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귀환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몽골은 대칸이 죽으면 모든 전투를 멈추고 본대로 돌아가야 했다. 거친 바람을 유럽 쪽으로 몰아가던 몽골의 푸른 군대는 말머리를 돌려 동쪽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놓였던 서유럽은 이 예기치 않은 상황발생으로 파멸직전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몽골군의 주력부대가 서둘러 본토로 돌아가는 동안 바투는 헝가리 등을 유린하면서 여유 있게 볼가강변 본영지로 회군했다. 그리고 주치 울루스를 정비해 러시아를 지배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한순간의 악몽처럼 스쳐간 몽골군이 유럽지역에 남겨 놓은 것은 공포였다.

▶오늘날까지 남겨진 공포의 잔상

[사진 = 몽골 중기병]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150 Km 남쪽에 있는 왈샤와라는 곳의 성마리아 교회 탑에서는 매일 정오만 되면 나팔을 불고 있다. 770년 이상 이어져 온 애도의 트럼펫을 부는 이 일상 행사는 바로 몽골군이 이 지역을 공격해 왔을 당시 이를 알리던 나팔수가 화살에 맞아 숨진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 몽골군의 공격 당시 상황을 흉내 낸 프로그램이 오늘날까지 축제 행사 때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몽골군의 침공은 당시 동유럽 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그 공포의 잔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한 차례의 일진광풍이었는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특별한 결과는 가져오지 않았다.

▶사라진 ‘아시아 괴물’의 전설

[사진 = 말안장과 발걸이( 몽골 국립박물관)]

비록 서유럽은 몽골의 말발굽에 유린되지는 않았지만 공포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일 그 때 오고타이 칸의 죽음이라는 변수가 발생하지 않아서 몽골군에게 귀환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서유럽은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유럽 전체가 몽골의 말발굽 아래 유린 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우선 유럽이 힘으로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몽골군을 대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몽골의 기마군과 유럽의 기마군의 전투 방법의 차이를 감안하면 유연성이 부족한 유럽군이 바람처럼 휘젓고 다니는 몽골군을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유럽 전체가 몽골의 수중에 떨어졌을 것이고 세계사의 물줄기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만약은 항상 만약일 뿐이다. 다만 나중 뭉케 대칸의 죽음이 중동지역 정벌의 변수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칸의 죽음이 세계사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사진 = 몽골병사 복식(몽골 국립박물관)]

어쨌든 몽골군의 철수로 서유럽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유럽은 동쪽에서 몰아친 광풍의 정체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몽골군이 물러간 다음해
교황으로 선출된 이노센트(Innocent) 4세는 몽골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몽골을 회유하기 위해 카르피니(Carpini)를 구육의 즉위식에 보냈다. 또 프랑스의 왕 루이(Louis) 9세는 루브루크(Louvrek)를 몽골에 보내기도 했다. 이들이 몽골을 다녀와서 남긴 기행문은 유럽에게 동방에 대해 보다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줬다. 이때부터 적어도 아시아에 괴물이 산다는 허무맹랑한 전설은 사라졌다. 또 중국의 활판인쇄와 화약제조 기술 등이 유럽에 전해지고 동서교역이 되살아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것은 전쟁이 남긴 플러스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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