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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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7-08-0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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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천년고찰과 문화재를 보호하면서 잘 싸우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전쟁 중에도 우리문화를 유난히 사랑하며 보호했던 문화경찰이었다. 그러면서도 차일혁의 부대는 전투도 잘했고, 전공도 타 부대보다 항상 앞섰다. 목숨이 오가는 숨 가쁜 전쟁터에서 차일혁은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천년 고찰(古刹)을 비롯하여 국보급 문화재를 지켜가며 빨치산을 토벌해야 되는 어려운 임무를 자청(自請)해 수행했다.
 
 그렇다고 빨치산을 토벌했던 모든 경찰과 군대가 차일혁처럼 그랬던 것은 아니다. 차일혁만이 유독 문화재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이들 문화재를 전란(戰亂)으로부터 구해내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차일혁이 토벌작전을 전개했던 전라북도와 경상남도 등 지리산을 끼고 있는 지역의 천년 사찰들이 전쟁의 화마(火魔)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고,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많은 사찰들이 고스란히 살아남을 수 있게 됐다. 1,129일간의 6·25전쟁으로 인해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던 우리 민족의 고유 문화유산인 천년 사찰들이 전란으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이 점령했거나, 피아(彼我)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거나, 또 빨치산들이 준동했던 지역일수록 이들 사찰들의 피해가 훨씬 컸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에게도 천년 사찰과 국보급 문화재를 지키는데 어려울 때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차일혁은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문화재에 불어 닥친 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하곤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구례 화엄사와 그 경내에 있었던 국보급 문화재인 각황전(覺皇殿)이었다. 차일혁은 이들을 전쟁의 화마(火魔)로부터 어렵사리 구해냈던 것이다.

 6·25전쟁 때 군에서는 여름철이 되면 빨치산의 은신처가 될 만한 작전지역의 사찰들을 모두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빨치산을 토벌하는 전투경찰은 군의 통제를 받고 작전을 했다. 그러다보니 군의 작전지시를 받게 됐다. 그것을 어길 시에는 이유 불문하고 처벌을 받게 됐다. 이른바 명령불복종 내지는 지시 불이행이었다.

 1951년에도 녹음기를 앞두고 군으로부터 어김없이 빨치산들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이나 암자 등을 소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에서 내려온 명령을 전투경찰들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 내려온 군의 지시에 의하면 경찰의 작전지역 내에 있는 구례 화엄사도 소각(燒却)해야 했다. 문화재를 사랑했던 차일혁에게는 화엄사가 자신의 작전지역이 아닌데도 그런 지시가 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끔찍하게 들렸다.

 그래서 차일혁은 화엄사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방득윤 전투경찰 대대장에게 묘안을 제시했다. “군에서는 화엄사가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될 뿐만 아니라, 작전 중에 관측과 사격에 지장이 있어서 소각하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절을 태우지 않고도 관측과 사격이 용이해질 수 있도록 하면 어떻겠느냐?”며 의견을 냈다. 화엄사를 불태우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방득윤 대대장도 차일혁의 말을 듣고, “차 대장, 여부가 있겠소? 그런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라며 귀를 쫑긋했다. 차일혁이 “제게 묘안이 있으니, 1개 중대만 빌려 주시오?”라고 말하고, 방득윤 대대장과 함께 부하들을 데리고 화엄사로 달려갔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화엄사에 당도한 차일혁은 부하들을 향해, “문짝을 모두 떼어내 대웅전 앞에 쌓아 놓아라!”고 지시했다. 차일혁의 지시에 함께 따라 온 방득윤 대대장이, “차 대장, 어차피 태워 버릴 거라면 문짝만 따로 떼어내어 무엇에 쓰겠소?”라고 물었다. 차일혁은 방 대장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으면서, 대웅전 앞에 수북이 쌓아놓은 문짝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문짝은 금세 활활 타올랐다. 보다 못한 방득윤 대대장이 “차 대장, 도대체 무엇을 하는 거요, 왜 문짝만 태우는 거요?”라고 소리쳤다. 이에 차일혁이 “원래 사찰을 소각하라는 이유가 빨치산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겠소? 이렇게 문짝을 뜯어냈으니 관측과 사격이 훨씬 용이해지지 않겠소?”라며 웃었다.

 그때서야 방득윤 대대장도 알았다는 듯이, “이제야, 차 대장의 깊은 뜻을 알겠소. 우리는 작전명령에서 요구한 원래의 의도대로 관측과 사격이 용이하게끔 했으니, 완벽하게 작전 명령을 수행한 것이 아니겠소?”라며 안도해 했다. 이로써 차일혁은 천년 국보 각황전이 있는 천년 고찰 화엄사를 소실(燒失)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이 모두가 차일혁의 뛰어난 기지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차일혁은 화엄사를 원래 지시대로 완전히 소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중에 징계를 받고 봉급이 깎이는 감봉(減俸) 처분을 받았다. 작전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차일혁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행한 일에 당당해 하면서, 자신이 한 일을 뿌듯하게 여겼다. 차일혁의 그런 행동에 부하들이 “왜 그렇게 불이익을 받을 줄을 뻔히 알면서 무리를 해 가며, 사찰을 보호했느냐?”며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에 대한 차일혁의 대답이 참으로 걸작이었다. 차일혁은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는 길이 남을 명구(名句)를 남겼다.

 차일혁의 문화재 보호와 사랑에 대한 보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일혁이 그런 보답을 받으려고 사찰과 문화재를 보호한 것은 아니었으나, 불교계에서는 그대로 있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지 5년째가 되던 1958년 5월 5일, 차일혁이 공주경찰서장으로 재직할 때, 조계종 초대 종정(宗正) 효봉(曉峰) 스님으로부터 전란(戰亂)에서 화엄사 등 6개의 천년사찰을 소실에서 구해 준 것에 대한 감사장을 받았다. 효봉 스님이 준 감사장에는 “충청남도 공주경찰서장 총경 차일혁. 1950년부터 1953년까지 6·25동란 당시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으로 재직 중 전라남도 백양화엄(白羊華嚴) 천은사(泉隱寺), 전라북도 선운(禪雲) 금산사(金山寺), 경상남도 쌍계사(雙溪寺) 등 6개 사(寺)가 전화(戰禍)로 소실(燒失)될 재난(災亂)을 면(免)케 한 공헌이 다대(多大)함으로 기념품을 증정하고 감사를 표(表)하나니다. 1958년 5월 5일. 종정 이효봉(李曉峰)”이라고 쓰여 있다.

 불교계에서는 차일혁의 고마움을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이번에는 화엄사가 주체가 됐다. 화엄사에서는 차일혁이 타계한지 40년이 되던 해인 1998년에 화엄사의 경내에 차일혁을 기리는 ‘공적비’를 건립했다. 공적비의 비문(碑文)은 당대 최고시인인 고은(高銀) 선생이 찬(贊)했다. 고은 선생이 쓴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해원의 때가 무르익었으니 찬하의 영봉 지리산을 생사의 터로 삼아 동족상잔의 피어린 원한을 풀어, 그 본연으로 돌아감이 옳거니, 여기 근본법륜 화엄사 청정도량에 한 사람의 자취를 돌에 새겨 기리도록 함이라.

 차일혁님은 일찍이 조국의 아픈 시련 가운데 태어나, 그 시련에 몸을 바친 생애의 파란만장으로 다하였나니, 소년시절 의(義)에 목말라 나라를 기어이 찾아내자하여 중국 땅으로 망명, 그 곳 중앙군 포병대대장으로 혁명전사 김학철 등과 함께 항일전선에 참가하였다가 해방 뒤 돌아왔으니, 이번에는 한국군 대위로 육이오사변에 참전한 다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서남지구 전투경찰에 다시 한 번 투신하여 토벌전을 지휘하였음이라.

 그동안 차일혁님은 작전상 당우(堂宇)를 불태우라는 명령 앞에서도 불자의 신심과 문화유산에 대한 한없는 경의를 품고 그것들을 필사적으로 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나니 이곳 화엄사를 비롯하여 천은사, 쌍계사,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그리고 덕유산 사찰들까지 잿더미를 면하기를 아슬아슬하였음이라.

 어디 그뿐이랴. 그 백척간두의 상황 중에서 서로 이념을 달리하는 핏줄 하나라도 구출하자는 숭고한 인간애를 낱낱이 보였으며, 전설적인 상대였던 이현상의 시신을 정중하게 장사지내기도 하였거니와, 조계종 통합종단 초대종정 효봉 대종사로부터 감사의 뜻을 받기도 하였던 바, 새삼 그의 유덕(遺德)을 길이 전하는 까닭을 이에 밝혀 놓으니, 지나는 길손이여 한 겨를 머물러 주소서. 산은 여기 있고 물은 먼 데로 흘러감이라.”

 공적비 비문에서 보았듯이, 차일혁은 깊은 산중에 자리 잡은 수많이 사찰들이 토벌작전에 방해가 됐음에도, 작전을 나갈 때마다 부하들에게 늘, “절을 절대 불태우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다. “차라리 빨치산을 놓칠지언정 사찰을 불태워서는 안 된다.”고 했다. 부하들도 차일혁의 그런 문화재 사랑과 부처님에 대한 깊은 불심(佛心)을 잘 알고 따라줬다. 그렇게 해서 차일혁은 전란의 와중에서 자칫 불에 타 재가 될 뻔한 천년사찰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 차일혁이 소실(燒失)될 위기에서 구해낸 사찰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구례 화엄사를 비롯하여 지리산의 천은사와 쌍계사, 김제 모악산의 금산사, 장성 백암산의 백양사, 고창의 선운사, 그리고 덕유산의 크고 작은 사찰들이 있다. 이들 천년 고찰들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애정과 관심 그리고 보호로 안전하게 지켜졌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차일혁의 그런 문화보호 정신에 뒤늦게나마 화답(和答)했다. 차일혁 사후(死後) 50년째가 되는 2008년 6월 5일, 문화재청에서는 차일혁 경무관에게 감사장을 수여한데 이어, 같은 해 10월 18일에는 대한민국 경찰관으로서는 전무후무하게도 ‘보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당시 문화재청이 준 감사장에는 “전란 속에서도,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역사에 대한 신념에 따라, 지리산 화엄사를 지켜주신 데 감사드립니다.”라고 쓰여 있다.

 차일혁으로 인해 대한민국 경찰이 덩달아 우쭐해졌다. 무섭게만 보였던 전투경찰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문화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문화경찰(文化警察)’이 됐다. 경찰로서는 이 보다 더 영예가 있을 수 없었다. 경찰의 자존감이 한껏 올라갔다. 그렇게 된 데에는 차일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일혁이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다 이유가 있다.

 차일혁은 유난히 우리 문화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평소 차일혁은 “문화를 잃으면 우리 마음을 잃고, 우리 마음을 잃으면 우리나라를 잃는다.”며 우리 문화에 강한 애착심을 보였다. 그런 마음가짐이 결국 전쟁의 와중에도 힘을 발휘하여, 천년고찰을 보호하고 국보급 문화재를 살려내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런 ‘문화인(文化人) 차일혁’이 마침내 정서가 메마른 대한민국 경찰을 ‘문화경찰’로까지 승화시켰다. 차일혁을 다시 존경하게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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