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아침묵상] 9. 무모無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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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병희 기자
입력 2017-07-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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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

[사진=배철현]

 

9. 무모無謀

1.정색
나는 ‘정색正色’을 수련한다. 정색이란 자신에 처한 지금 상황을 있는 그대로, 가식 없이, 정확하게 관찰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이른 아침, 내 자신을 가만히 정색하면,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할 유일한 임무가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다. 그 날은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이다. 그 임무는 지금只今이란 시간과 장소를 숭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색으로 시작한 하루는 더 의미 있고 아름답다. 하루라고 불리는 ‘절대절명絕對絕命의 순간’을 정색이란 틀로 살피지 않으면, 그 날은 어영부영 지나간다. 그 날 저녁은 대개 후회와 좌절감으로 가득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322년)는 인생엔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목적이 있다. 그는 이 목적을 그리스어로 ‘텔로스’telos라고 명명하였다. ‘텔로스’는 목적이자 기능이며, 결과이자 과정이다. 예를 들어, 씨앗의 ‘텔로’는 땅 밑으로 뿌리를 내리고, 땅위로 싹을 내민 후, 줄기를 내고 언젠가 나무가 되는 것이다. 만일 씨앗이 나무가 되면, 씨앗은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완수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삶의 최종 목표는 ‘행복’이라고 말한다.

2.최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감정이나 상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열망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지금 정성스럽게 하는 행위는 과정이자 목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행복을 그리스어로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말했다. ‘유다이모니아’의 의미를 더 잘 전달해주는 단어는 ‘최선’이다. 자신을 깊이 응시하여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기 위한 나의 노력이 ‘최선’이다. 최선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으로, 과거와 미래를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블랙홀이다. 최선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몸에 밴 인간의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최선을 자연히 발휘할 수 있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최선을 발견하고 훈련시키고 극대화하기 위한 과정이 ‘연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은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열망하는 그 숭고한 가치를 찾을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상적인 ‘이데아’ 세계는 생각과 상상 안에서만 존재하는 원형이며 원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스승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는 이데아는 이 순간에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모습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데아를 당장의 현상으로 만드는 기술을 ‘연습’이라고 불렀다. 연습은 몰입을 통해,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행위다.
예를 들어 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푸가의 기법’ 연주를 들어보면 그렇다(https://www.youtube.com/watch?v=Mia9woisQZo).. 글렌 굴드는 영원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순간의 고통과 기쁨을 적나라하고 절제 있게 표현한 바흐의 작품을 자신의 최선을 담아 연주한다. 그의 연주는 바흐의 이상을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려는 연습을 통해, ‘푸가의 기법’을 새롭게 탄생시킨다. 그는 바흐의 의도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숭고한 연습을 통해, 자신 안에 숨어있던 욕망, 이성, 극복, 그리고 초월을 선율에 담았다. 글렌 굴드에게 바흐 ‘푸가의 기법’은 자신의 최선을 표현할 수 있는 훈련교본이다.
최선의 훈련은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 마음가짐에는, 열망과 감정과 같은 욕구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이 있다. 욕구적인 부분은 육체를 자극하여 신체의 모든 부분을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이성적인 부분은 목표를 항상 상기시켜, 자신이 가고자하는 길 위에 서게 만든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지점에 가기 위해서는 시간과 힘을 안배按排해야한다. 나는 오늘을 목표의 시점에서 최적화된 계산을 통해 정한다. 그런 행동을 ‘종말론적’이라고 부른다. ‘종말론적인 삶’이란 하늘이 열려, 어떤 절대자가 내려와 인류를 심판하는 종교적 판타지가 아니다. 오늘 이 순간을 마지막 시간의 시점에서 보려는 삶의 태도다.

3. 용기가 없는 사람
자신의 삶을 정색을 하고 응시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사람은 무모無謀한 사람이다. 무모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매일 거울을 보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지 못한다. 그가 거울을 보더라도, 그의 머리엔 온통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에 집중한다. 자신이 보기에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고, 겉모습에 쉽게 속고 열광하는 ‘타인들’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변형시킨다. 그들이 기준에 멋지다고 평가할 수 있는 모습으로 자기 스스로 옷차림, 몸가짐, 말하는 태도, 그리고 생김새까지 성형시켜버린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삶을 위해 숭고한 목표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는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설령 있다는 사실을 안다할지라도 선뜻, 그 모습을 수용하지 못한다. 자신을 살지 못하고 타인을 산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용기’라고 부른다. 얼굴도 본적이 없는 시리아 출신 아랍인 아버지와 미혼모 사이에 태어난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에 집중하였다. 우연히 1년밖에 다니지 않는 대학교인 미국 리드 대학에서 영어 글자체 수업을 들었고, 그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 흥미가 우주에게 가장 소중했다.

 스티브 잡스

그가 2005년 스탠포드 졸업식 축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세리프와 산-세리프 글자체를 배웠습니다, 내가 배운 것은 서로 다른 글자 조합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空間의 양입니다. 그 공간은 글자체를 위대하게 만듭니다. 그 공간은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으로 미묘합니다. 그 공간은 과학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간은 나를 항상 매료시킵니다.” 21세기 IT 혁명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아무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하찮아도, 그것을 응시하여 그 안에서 자신만의 임무를 찾은 사람이다. 잡스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폰트에 주목했다. 더욱이 폰트를 위대하고, 시대를 이끌며, 예술적으로 승화되어 잔잔한 감동을 주는 공간에 몰입하였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 잡스는, ‘공간’이라는 보물을 발견하여, 온 세계인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4. 인내할 수 없는 사람
무모한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용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최선을 자신에게 감동스러운 예술작품으로 창작하는 과정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한 동안 몰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있다. 그에겐 인내심이 없다. 인내심이란 어떤 상황을 수동적으로 감정적으로 견디어내는 소극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는 이 고통스런 과정이 새로운 자신을 탄생시키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사실을 누구 보다고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능동적으로 정신적으로 대면하여, 자신을 승화시키기 위한 훈련이로 여긴다. 인내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페이션스’patience의 기본적인 의미는 ‘고통’이다. 순간의 인생은 고통을 통해서면 영원한 예술로 승화한다. 이 고통을 자기완성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 수용하는 마음가짐이 바로 인내다.

5. 무모
자신의 삶을 멋지게 설계하기 위해 자신을 직시할 용기도 없고, 자신의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내도 없는 사람은 ‘무모無謀’한 사람이다. ‘무모한’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렉클리스’reckless에도 무모의 깊은 뜻이 숨어있다. ‘렉클리스’는 ‘관심; 주의’을 의미하는 ‘렉크’reck와 다른 단어 뒤에 접미하여 부정의 의미를 더하는 ‘리스’less의 합성어다. ‘렉크’의 본래 의미는 ‘목표를 향해 바른 길로 가다’이다. 후대에 이 의미가 확대되어 ‘심사숙고하다; 관심을 기울이다’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그러므로 ‘렉크리스’는 자신의 고유한 목표를 상실하여 아무렇게나 사는 삶의 방식을 표현하는 단어다. 한자 무모無謀엔 더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꾀; 지략’을 의미하는 ‘모’謀는 다말을 의미하는 언(言)과 매화나무를 의미하는 매(某)의 합성어다. 퇴계선생님께서 지병을 앓고 자신의 방 앞에 있는 매화나무를 옮겨 심으라고 말했다. 묵묵하게 자신의 결정적인 순간을 알고 싹을 내고 꽃을 만개하는 매화나무에 비해, 건강도 하나 지키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보니, 무모함이 숨어있다. 한그루 매화를 보고 깨달은 퇴계선생님의 심정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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