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4] 한(漢)나라는 왜 조공을 바쳤나? ①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07-25 12:24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중화사상과 화이사상
중국인은 2천년이상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젖어 살아왔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중국의 문화가 최고이며 모든 것이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로 퍼져 나가야 한다는 중국 제일주의 사상이 바로 중화사상이다.

이 중화사상은 화이사상(華夷思想)과도 통한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자신들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중원 밖의 모든 나라를 우매하고 몽매한 야만인으로 취급했던 것이 화이사상이다.
 

[사진설명 : 최초의 유목민족으로 알려진 스키타이 관련 유물들 ]


화(華)는 중국을, 이(夷)는 주변 다른 나라를 말한다. 한반도의 나라가 동이(東夷)로 불리어졌던 것이 그 이유다.
지금의 몽골이 몽고(蒙古)로 불리어졌던 연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원래 Center, 즉 중앙, 중심의 의미를 지닌 몽골에 우매할 ‘몽’(蒙)에 옛 ‘고’(古)를 붙였으니 우매하고 뒤떨어진 종족이라는 업신여김이 담겨 있는 명칭이다.

이 중화사상이 만들어 낸 부산물이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빠져본 적 있을 것 같은 무협소설이다.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 때 가장 많이 쏟아져 나왔던 무협소설에는 중국 한족이 사는 곳은 중원으로, 변방 이민족이 사는 곳은 새외(塞外)로 구분 지워 놓고 장성 밖, 한족의 영역밖에 사는 민족들을 거의 야만스럽고 비열하게 그려 놓고 있다.

이 중화사상과 화이사상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해 이어져 오고 있으니 2천 수백 년 동안 중국의 한족을 지탱시켜준 자존심이라고 볼 수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화교(華僑)라고 부르는 것도 그들의 중화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다.

▶ 조공으로 화이사상 합리화
화이사상은 또 조공(朝貢)이라는 말과도 연결된다.
중국은 속국이 종주국에게 때맞추어 예물을 바치는 이 말은 항상 익숙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받는 쪽이고 주변의 이민족들은 바치는 쪽이었으니 그 것이 그들의 중화사상을 합리화시켜 주기까지 했다.
주변의 이민족이 중원을 장악하고 다스린 경우는 종종 있어왔지만 그럴 경우에도 중국은 대부분 이민족을 중화사상 속으로 동화시켰다고 믿고 있다.

금과 원, 청 등이 그러한 나라들로 그 가운데 몽골이 세운 원은 그래도 몽골의 정신을 지켜가며 한족을 다스렸던 나라다.
하지만 중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던 나라나 종족은 별로 없었다.
있다면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몽골족의 조상으로 여길 수 있는 유목국가 흉노(匈奴)다.

▶ 사마천이 남긴 흉노 이야기
이제 중국의 중화사상에 상처를 준 흉노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흉노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司馬遷) 의 사기열전(史記列傳)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돼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의 오제(五帝)로부터 한 무제(漢 武帝)에 이르는 ‘본기(本紀) 12편과 각 시대의 역사 연표를 기록한 ‘표(表) 10편 ’, 정치․사회․문화․과학 등의 이론을 기록한 서(書) 8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를 기록한 ‘세가(世家)’ 30편 그리고 제황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기록한 ‘열전(列傳)’ 70편 등 모두 13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흉노의 얘기는 열전 50편에 들어 있다.

사마천은 흉노에게 포로로 붙잡혔다가 흉노로 귀순한 친구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한 무제에 의해 궁형에 처해진 사람이다.
확대 해석한다면 흉노 때문에 궁형이라는 치욕을 겪었다고도 볼 수 있다.

옥에 갇혔던 사마천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였다.
법에 따라 주살되거나 돈 50만전을 내거나 아니면 궁형에 처해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돈이 없는 사마천이 살아서 역사를 집필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수 있는 선택은 궁형밖에 없었다.
그래서 궁형에 처해진 뒤 고통 속에서 사기의 집필을 시작했다.

사마천이 살았던 그 시대는 흉노와 전한(前漢)사이에 전쟁이 치열했던 시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흉노의 얘기가 흉노열전 외에 사기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것은 흉노에 대한 사마천의 감정이 남다른 탓도 있었을 것이다.

흉노 영웅 묵특의 등장
기원전시대에 유목민의 시대를 열었던 흉노의 본거지는 지금 중국 내몽골의 성도(省都)인 후흐호트였다.
흉노의 왕은 선우(單于)라 부르고 선우가 머무는 곳을 선우정(單于庭)이라 부른다.

선우정은 건물을 짓고 성벽을 쌓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게르(몽골 유목민 이동식 집)와 같은 왕의 숙소가 초원 위에 들어서면 그 곳이 바로 선우정이다.

선우정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나면 그 자리는 다시 흔적도 거의 남지 않는 초원이 된다.
후흐호트는 바로 그러한 선우정이 가장 오래 동안 머물러 있었던 곳이었다.

오르도스 지방 중심부의 후흐호트에 자리 잡고 중원을 위협했던 흉노는 정주민인 중국의 한족에게 유목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심어주고 당시 역사 흐름의 방향을 좌지우지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후 두 문명권간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그러한 관계를 만들어낸 인물이 흉노의 영웅 묵특(冒頓)이다.

▶ 몽골인의 선조, 흉노
흉노는 그 생활방식이나 습성이 지금 몽골인들과 거의 같기 때문에 몽골인의 조상이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흉노의 왕 선우의 정식 명칭은 ‘텡그리 고도 선우’다.

몽골인들이 최상의 신으로 받드는 하늘, 즉 텡그리가 이때부터 유목민들에게 최상의 숭배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도는 아들을 가리키고 선우는 광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는 ‘위대한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이 된다.

선우의 부인은 연씨(閼氏)라고 부른다. 즉 흉노족의 황후다.
여인들이 사용하는 화장품 연지(燕脂)에서 나온 이름으로 추정된다.

당시 흉노가 장악하고 있던 연지산에서 피는 꽃에서 추출한 화장품이다.
몽골이 나중에 고려를 장악했을 때 몽골에서 고려로 전해진 풍습가운데 하나가 바로 결혼식 때 신부가 볼에 바르는 연지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흉노인의 삶은 바로 후대 몽골인들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정확한 핏줄의 연관성을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같은 땅에서 같은 줄기로 이어지는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몽골족은 흉노의 후손이라 할만하다.
몽골 국립박물관에서는 흉노가 자신들의 선조라며 흉노관을 만들어 칭기스칸 이전시대까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