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병희칼럼] 광장과 이카로스의 날개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7-06-20 20:0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반병희칼럼
논설실장

광장과 이카로스의 날개

[사진=반병희]


광장의 미덕은 열림이다. 열림은 비움이다. 비어 채울 수있다. 해서 광장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때가 되면 뱉어낸다. 광장의 사랑이 지극히 유한한 이유다.
광장은 용광로다. 포도(鋪道) 위에 구르는 티끌마저 녹여낸다. 해서 아테에서 카다피, 차베스에 이르기까지 광장을 사랑했던 수많은 이념가, 혁명가들이 넘실대는 광장의 붉은 불기둥 속으로 사라졌다. 이념을 완성하기엔 광장이 위험한 이유다.
광장은 바다다. 한밤을 집어삼킨 광장의 이른 아침은 고요이자 평화다. 해서 순간을 속일 수 있어도 광장의 심연은 속일 수 없다. 광장에 반역이 없는 이유다.
광장은 신화(political myth)를 먹고산다. 신화는 우상을 낳고, 우상은 영웅을 만들어낸다. 영웅은 광장이라는 무대에서 역사라는 제목의 연극을 한다. 마침내 영웅은 비극의 4막을 맞는다.
어린애가 마이크를 잡고 뇌 구멍 숭숭 운운하며 “우리 엄마 아빠를 미친 소에서 보호해 주세요”라고 외치는 순간 유모부대는 영웅으로 재탄생한다. 명박산성이라는 신화도 안주로 곁들여진다. 질세라 태극기를 온몸에 휘휘 두른 채 ‘빨갱이 처단’을 외치며 혈서라도 쓸라치면 제복의 군중은 환호한다. 또 다른 영웅의 탄생이다.
덕분에 광장에서는 ‘우덜끼리’ 쏠림의 동조화가 일상이다. '군중(mob)'이다. 공동의 적을 앞에 둔 우덜 간의 전투의지는 단단해지고 광장 안과 밖을 구별하는 이분법적 진영논리는 탄력을 받는다. 급기야 집단극단화(group polarization)가 최우선의 가치로 등극한다. 중간지대가 끼어들 틈은 그 어느 곳에도 없다.
광장정치는 권력자에게 유혹의 대상이다. 대중적 지지도를 확보했거나, ‘국민’을 앞세우기 좋아하는 권력자는 정당을 통한 대의제 민주주의가 비효율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낡은 시스템이라며 광장으로 달려간다. 국민(대중 및 군중)에 대한 직접 호소가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광장정치의 정당화(正當化)다. 실패로 끝난 남미식 대중적 여론정치(going public)가 그 전형이다.
새 정부에서 벌써 불길한 조짐이 스멀스멀 다가온다. ‘대결’과 ‘대립각’이라는 정치적·전술적 구도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려는 분위기다. 문 대통령과 여당이 야당의 반대에 부딪힐 때마다 “국민을 보고 가겠다” “국민이 판단할 것이다”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언젠가 본 듯한 기시감(旣視感)이기도 하다. '우리'와 '너네'다. 우리는 잘하려고 하는데 발목이나 잡는 반(反)역사·반(反)정의·반(反)개혁 세력 때문에 될 일도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70~80%대를 넘나드는 지지율, 이견자(異見者)를 초토화시키는 문자폭탄세력이 든든한 우군이다.
북한을 둘러싼 미국과의 파열음도 광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음습한 분위기를 슬슬 만들기 시작한다. ‘평화’, ‘비핵화’, ‘사드 반대’ 등의 팻말이 부쩍 늘고 있다. 워밍업이다. 한반도 외교지형을 단칼에 날려버린 대통령 안보특보라는 인사의 발언은 심지에 불을 붙인 격이다. 정교한 검토과정을 거친 계산된 발언인지 몰라도 영 꺼림칙하다.
말 많고 탈 많던 안경환 법무장관 내정자의 자진 사퇴와 관련해서도 적폐세력의 음모 때문이라는 주장이 힘을 받는다. 관련한 네 편 내 편 논쟁이 SNS 공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에너지 정책도 그렇다. 신재생에너지(alternative energy)는 선이고 화석연료(석탄 등)와 원전은 악이라는 대립구도로는 대체에너지 마련에 따른 비용부담, 경제성, 효율성, 기술적 측면 등의 난제를 풀기 쉽지 않다. 신재생에너지의 선진국이라는 독일도 전력생성과정의 고비용으로 전기가격이 몇 배나 올랐고 예비전력원으로 갈탄발전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이산화탄소가 증가했다. 그런데도 전반적인 상황을 따져가며 단계적·종합적 정책의 개선을 말하면 악으로 몰린다. 졸지에 반(反)개혁 세력으로의 낙인이다.
장관 내정자 자질 논란에서 대립구도는 더욱 명확해진다. 문 대통령의 대표 상품인 ‘정직’과 ‘진정성’을 왜 묵혀둘까? 비서실장의 아리송한 해명 대신 문 대통령이 직접 “미안하다. 야당하던 시절 들이밀었던 잣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이해를 구한다면, 그 누가 토를 달고 시비를 할까?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에, 박근혜식 한국정치의 퇴행이 더 이상 되풀이돼서는 안 되겠기에 제안을 한다. 실사구시를 정책 입안과 집행의 원칙으로 삼아달라는 것이다. 이념은 목표로서 아름답지만, 실행수단만큼은 합리에 바탕한 탈(脫)광장이 돼야 한다.
마르크스의 논법을 빌려보자. 개인은 광장을 지키고 광장을 해방시켰다고 믿지만, 이는 착각이다. 개인은 광장과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다. 종국에 개인은 이상과 성공 가능성으로부터 소외된 채 허무한 일상에 갇힌 삶을 계속한다. 광장정치에 중독된 권력자 또한 권력작동 메커니즘으로부터 소외돼 광장으로부터 버림 받는다.
이치가 이럴진대 문재인 대통령만큼은 광장의 지지가 이카로스의 밀랍 날개와 같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문재인 정부가, 대한민국이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더욱더 그렇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