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교수의 차이나 아카데미] 두 차례의 '난징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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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2-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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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의 서울' 난징…태평천국의 수도…청나라 진압군 대학살 자행

  • 국민당 중화민국의 수도…난징대학살 만행 저지른 일본군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과 교수]

포난생음욕(飽暖生淫慾), 편안하게 잘 살면 방탕해진다고 했다. 물 좋고, 땅 좋고, 경개 좋고, 인물 좋고, 어디 하나 빠진 곳 없이 살기 좋은 땅, 난징(南京)은 풍요로움 그 자체다.

하지만 평생을 치열한 혁명의지로 살고 죽기를 각오한 영웅이라면, 난징은 오래 머물 땅이 아니다.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영웅이 풍만한 난징의 품속에 일단 안기면 오묘한 안온감에 도취되어 정신이 혼미해지는걸까. 청신한 상무기풍(尙武氣風)이 넘치던 영웅이 난징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시나브로 부패한 탐관으로 전락되어져 간다.

난징은 영웅에게 죽기 전에 이미 죽는 곳이며 육체는 살이 찌나 정신은 썩어지는 곳이다. 부패삼매경에 빠져 정신적으로 죽은 지 이미 오랜 영웅이 육신의 생을 마감하면 그 시체의 온기가 식기가 무섭게 무수한, 무고한, 무심한 백성들의 대학살의 혈하가 창강(長江)으로 흘러나왔던 곳 난징이다.

그러한 영웅의 타락으로 인해 난징의 평민 백성은 19세기와 20세기 두 차례의 ‘난징대학살’을 겪어야 했다.

1853년 2월 11일 태평군의 영웅 홍수전(洪秀全, 1814~1864년)은 210만명의 태평군(여군 30만명)을 이끌고 난징을 점령했다. 홍수전은 국호를 태평천국으로, 난징을 ‘하늘의 서울’이라는 뜻으로 '천경'(天京)이라 정했다. 대륙의 남반부를 12년간 점령 통치하며 내걸었던 기치는 원시 기독교적 평등주의였다. “땅이 있으면 모두 똑같이 농사를 짓고, 밥이 있으면 모두 똑같이 먹고, 옷이 있으면 모두 똑같이 입고, 돈이 있으면 모두 똑같이 쓴다”는 사회다. 태평천국에서는 의식주는 물론 관리의 임면, 등용, 파직, 재판에 이르기까지 균등하고 공평하게 행해진다.

그러나 태평천국은 철저히 실패했다. 그 실패의 원인을 요약한다면 혁명정부의 '공약 제1조'라고 할 수 있는 토지의 평균주의적 분배 약속의 불이행에 따른 농민들의 실망 및 혁명 지도세력의 내부분열, 의병의 형태로 무장한 사대부 세력의 반발과 외세의 개입이다.

무엇보다도 난징 정착이 가져다 준 무사안일과 무사태평 속에서 태평천국은 지도층의 내분과 기존 왕조와 다를 바 없는 사치와 방탕, 부패와 타락의 삼매경에 빠졌다. 홍수전은 옥새를 만들고, 백성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고, 천왕으로서 권위를 과시하고자 미녀 18명을 뽑아 후궁으로 삼는 등 중국의 역대 제왕과 같은 형태를 추구하였다. 혁명군 지도층의 부패는 그들에게 타도됐던 구지배층을 훨씬 능가했다.

청 나라의 진압군은 1864년 7월 19일 ‘하늘의 서울’ 난징을 함락한 청나라의 진압군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학살을 자행하니 이때 죽은 사람이 20여만 명이다. 하늘의 서울이 ‘지옥의 서울’로 변하였다. 이러한 ‘19세기 난징대학살’ 후 몇 십 년이 탄환처럼 흘렀다.

1927년 4월 18일 국민당 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蔣介石, 1887~1975)는 난징을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하였다. 그로부터 10년간 지도층은 부정부패와 흥청망청에, 서민층은 안분지족·안빈낙도·태평세월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지난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단 한 달 만에 30여 만명의 무구한 인명을 살해하고 9만여 명의 여성을 강간했다.

중국 장기체류 시절의 어느 여름날, 필자는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을 방문한데 이어 관광객들의 대열에 섞여 무심코 또 다른 관광지 ‘난징 대학살 기념관(1)*’을 찾았다. 거기서 필자는 매일 평균 1만명 살육, 3000명 강간이라는 천인공노할 '악마의 굿판'을 벌인 일제 만행의 거증물을 목도했다.

거기서 필자는 지옥을 보았다. 악마를 보았다. 임산부의 배를 도려내면서도, 일본도(刀)로 소년의 목을 잘라내면서도, 그들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기념관 앞 광장으로 뛰쳐나온 필자는는 명치께 부근 뭔가 심하게 엉키고 뭉친 걸 풀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줄기 눈물로는 쉽게 뽑아낼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절망을, 역사에 대한 분노를, 창자까지 쏟아낼 듯한 토악질로 마구 해댔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난징에서였다.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과 교수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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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중국 정부는 2014년부터 12월 13일을 난징 대학살에 따른 ‘국가 추모일’(國家公祭日)로 지정하고 매년 국가차원의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2014년에 개최된 첫 번째 추모식에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직접 참석해 “일제 침략의 엄중한 범죄를 잊지 말아야 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어떤 행위도 인류 평화를 해치는 것으로 단호히 반대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유네스코는 2015년 10월 일본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난징 대학살 관련 자료들을 중국측의 신청에 따라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참고서적: 강효백, 『협객의 나라 중국』, 한길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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