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미술관, 잊혀진 '은일지사' 윤용구 회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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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1-2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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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이 '남작' 봉하자 거절..이후 시서화 몰두 '석촌양식'이뤄

용구, 설경, 비단 <석촌 윤용구 화첩>20폭 중, 18.5x24.5cm, 국민대 박물관

(아주경제 박현주기자) “완민(頑民)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어찌 또 다른 주군(主君)을 모실 수 있겠는가.)

1910년 10월 14일 석촌(石邨) 윤용구(1853-1939)는 ‘작위를 사양하고 반납하였다’. 10월 7일 일본왕이 조선귀족 명단을 발표하고 그 조선인 76명 가운데 석촌을 ‘남작(男爵)’에 봉하자 윤용구가 이를 단호히 거절한 사실이 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옛 관료와 지식인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거나 이민족에게 국권을 강탈당했을 때 수절자정(守節自靖)으로 대응해 왔다. 절의를 지킴으로써 스스로를 다스렸던 것이다. 당시 76명의 수작자(授爵者) 가운데 오직 8명만이 작위를 거절했다. 거절의 이유를 말로 밝힌 사람은 윤용구 뿐이었다.

윤용구가 말하는 주군은 직접 순종황제를 지칭하는 것이겠지만 제위에서 물러나 경운궁(덕수궁)에 유폐된 상황(上皇) 고종황제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또 관료, 지식인의 존재가치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나라와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석촌은 19세에 문과 병과에 급제해 이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지냈고 이후 법부·탁지부·내부 대신에 수차례 임명됐으나 모두 사절했다.

이후 윤용구는 초야에 묻혀 시서화는 물론, 금기(琴碁)에 이르는 오절(五絶)로 은일지사(隱逸志士)의 생애를 견뎌나갔다.

시서화금기 다섯 가지 분야 모두에서 빼어난 성취를 거둔 윤용구는 1985년 '한국미술사전'과 '한국음악사전'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古鼎茶煙歇 옛 솥 차 향기 멎고
秋鐙畵理深 가을 등잔 앞 그림의 뜻 깊구나

윤용구, 석란 황산곡, 종이, 30x129cm
석촌 윤용구의 작품을 모은 ‘윤용구 회화전’이 김종영미술관 신관 사미루에서 열리고 있다.

윤용구의 산수, 죽난, 괴석등 윤용구 회화는 '석촌양식'으로 불리울만큼 독보적이며 개성적인 필치와 구도를 갖추어 식민지시대 회화사에서 한 획을 긋고 있는 거장이다.

가벼운 붓놀림의 선묘에 싱겁고 꾸밈없이 담박하고,길이가 짧은 선과 묽은 선염을 다양하게 구사하여 변화를 구하는 특징이 있다.

윤용구는 산수, 난죽, 괴석에서 자신만의 양식을 이룩했지만 문하를 개창하여 제자를 배출하거나 자신의 양식을 퍼뜨리지 않았다.

그는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우성(又誠) 김종영(金鍾瑛. 1915-1982) 가문과의 인연이 깊어, 창원 소답동 김종영 생가 별채였던 ‘사미루’의 현판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윤용구의 회화 30점과 김종영 생가에 보존된 현판 15점을 선보인다.

김종영미술관은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독 서화 분야에서 윤종구에 대한 평가는 배척 당하고 있으며 특히 서예 분야에서는 격이 높지 못하다거나 근대서예 문화에 ‘공헌한 바가 없다’는 폄훼를 당하고 있다"면서 "회화 분야에서는 ‘문인의 풍미가 흐를 뿐’이라는 정도 외에 긍정이건 부정이건 논의마저 이뤄지지 않고 있어 이번 전시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전시는 3월18일까지. (02)3217-6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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