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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갤럭시 26이 던진 질문 … 우리는 진정 AI 강국인가
며칠 전 새로 출시된 갤럭시26 스마트폰을 구입해 사용하고 있다. 최신 기술이 집약된 기기답게 화면과 카메라, 배터리 성능, 디자인까지 모두 인상적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하드웨어 기술이 한 손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서 자부심도 느껴졌다. 한국 기업이 만든 스마트폰이 글로벌 시장에서 여전히 강력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며칠 동안 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과연 진짜 ‘AI(인공지능) 강국’이 될 수 있을까. 갤럭시26은 분명 뛰어난 제품이다. 그러나 이 스마트폰의 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한국 기술의 강점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이 스마트폰을 만든 기업은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다. 하드웨어 설계와 제조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운영체제는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최근 스마트폰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능인 AI 역시 구글의 제미나이(Gemini) 같은 글로벌 플랫폼 기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제조 기술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플랫폼과 핵심 AI 기술에서는 해외 기술에 기대고 있는 구조다. 갤럭시 26은 한국 기술의 경쟁력과 동시에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처럼 느껴졌다. 이 대목에서 얼마 전 일본경제신문에 실린 한 사설의 내용이 떠오른다. 일본은 최근 ‘디지털 적자(digital deficit)’라는 새로운 경제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다. 일본 기업과 개인이 클라우드 서비스 이용료, 인터넷 광고비, 디지털 콘텐츠 라이선스 비용 등을 해외 거대 테크 기업에 지불하는 금액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국가적으로 막대한 부가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재무성의 국제수지 통계에 따르면 디지털 분야의 적자는 2023년에 5.5조엔(약 55조원)에 달해 불과 5년 만에 두 배로 증가했다. 2024년에도 증가 속도는 더 빨라져 6.6조엔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의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제공하는 디지털 서비스는 이제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프라가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할 때마다 상당한 부가 해외로 이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경제신문은 이 문제를 두고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해외 디지털 서비스에 대한 의존이 커지는 현실을 당장 바꾸기 어렵다면 일본은 무엇으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결국 일본 내부에서 새로운 혁신과 산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디지털 적자는 계속 확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한국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자. 최근 중동에서 이어지는 전쟁을 지켜보면서 또 하나의 변화가 분명해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전쟁의 양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전쟁은 화력 중심의 경쟁이었다. 더 많은 병력과 더 강력한 무기가 승패를 좌우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드론이 전장을 누비고 AI가 표적을 분석하며 위성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군사 작전을 결정한다. 전장의 핵심 자산이 점점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약의 시대가 저물고 ‘비트(Bit)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전쟁의 변화는 국가 경쟁의 방식도 바꾸고 있다. 군사력뿐 아니라 기술력, 공급망, 금융 시스템, 에너지 자원까지 모두가 전략 자산이 되는 시대다. 지정학과 지경학, 그리고 기술 전략이 하나의 체계로 결합되고 있다. 미국의 아마존을 비롯한 빅테크와 팔란티어, 앤트로픽 같은 AI 벤처들이 전장(戰場)에 대거 포진되어 있는 모습이 그 상징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최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던진 발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미들파워 국가들이 협력하지 않으면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메뉴에 올라갈 것이다.”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중견 국가들이 아무 전략 없이 움직인다면 결국 국제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그는 또한 미들파워 국가들의 연대(middle power coalition)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카니 총리는 현재 국제 질서는 ‘단순한 변화의 과정(transition)이 아니라 단절(rupture)의 상태’라고 정의했다. 기존의 글로벌 질서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진단은 지금 국제정치와 경제 질서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 글로벌 공급망 재편, 첨단 기술 패권 경쟁, 에너지와 금융을 둘러싼 갈등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세계 질서의 구조 자체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분명 세계적인 산업 강국이다. 경제 규모와 산업 경쟁력, 군사력 모두 세계 상위권에 속한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디스플레이, 전기차 배터리 등 여러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제조 기반 산업에서 한국의 경쟁력은 매우 강하다. 메모리 반도체와 조선 산업 등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은 미국이나 중국처럼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패권국가와는 다른 위치에 있다. 한국은 ‘미들파워 국가’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한국 전략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특히 기술 분야에서 한국의 위치는 매우 상징적이다. 한국은 기술 강국이지만 동시에 기술 패러다임 전환의 중간 지점에 서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 기술 경쟁의 중심에는 AI가 있다. 많은 국가들이 AI 전략을 국가 차원의 핵심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국 역시 AI 강국을 목표로 다양한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조금 더 냉정하게 보면 한국은 지금 디지털 전환(DX)에서 인공지능 전환(AX)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 DX는 데이터를 디지털화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자동화하는 단계였다. 이에 비해 AX는 조직의 의사결정과 운영 자체를 AI 중심으로 재편하는 단계다.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기업 구조와 산업 구조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이다. 한국 기업들은 DX 단계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AX 단계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전환이 시작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생성형 AI에서 에이전틱 AI로 이어지는 기술 흐름도 같은 맥락이다. AI가 단순히 콘텐츠를 생성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 업무를 수행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산업 경쟁의 기준 자체를 바꾸고 있다. 여기서도 한국은 전환기를 맞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기술 강국이지만 동시에 기술 중간지대에 서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갤럭시 26이 보여준 모습도 바로 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 한국이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술 패권 경쟁을 벌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기술 경쟁에서 주변 국가로 머물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한국이 가진 강점을 활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바로 제조 기반 산업과 첨단 기술을 결합하는 전략이다. 반도체, 배터리, 로봇, 자동차, 조선 등 한국이 강점을 가진 산업에 AI와 데이터 기술을 결합하면 새로운 산업 경쟁력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것이 한국형 기술 미들파워 전략의 현실적인 방향일 것이다. 이 얘기도 실은 귀가 닳도록 듣고 있다. 전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실행력이다. 최근 정부와 기업의 발표를 보면 ‘AI 강국’, ‘디지털 강국’, ‘첨단 산업 선도국’과 같은 거창한 목표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선언적 구호에 머물러서는 의미가 없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화려한 청사진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책이다. 과학기술 정책과 산업 정책이 실제 기업과 연구 현장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연구개발 투자, 인재 양성, 규제 혁신, 산업 생태계 구축 같은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특히 AI와 반도체, 배터리, 로봇 같은 전략 산업에서는 정책의 속도와 실행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갤럭시 26을 사용하며 떠올린 질문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과연 어떤 기술 국가가 될 것인가. 이 질문을 생각하던 중 며칠 전 폐막한 중국의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 회의에서 중국 정부가 가장 강조한 정책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과학기술과 AI였다. 중국은 이번 전인대에서 AI, 반도체, 양자기술, 첨단 제조를 국가 경쟁의 핵심 분야로 다시 한번 분명히 언급했다. 특히 ‘AI+’ 전략을 통해 AI를 제조업, 의료, 교통, 금융 등 산업 전반에 빠르게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동시에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 구축과 데이터 활용 확대, 핵심 반도체 기술 자립을 위한 국가 차원의 투자를 계속 확대하겠다는 방침도 확인했다. 눈에 띄는 점은 정책의 방향이 매우 분명하다는 것이다. AI를 단순한 기술 산업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 개발과 산업 적용, 데이터 정책과 컴퓨팅 인프라를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묶어 추진하고 있다. 물론 중국의 방식이 그대로 한국에 적용될 수는 없다. 정치·경제 체제도 다르고 산업 구조도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는 있다. 기술 경쟁의 시대에는 정책과 실행의 속도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기술 질서를 만드는 국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가 만든 기술 질서를 따라가는 국가가 될 것인가. 갤럭시 26이 던지는 질문은 무겁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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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중동發 '지정학적 폭탄'… '3고(高)'가 오는 가
최근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돌아보면 오랜만에 경제를 둘러싼 낙관이 넓게 퍼져 있었다. 주식시장은 상승세를 이어갔고, 개인 투자자들의 기대감도 크게 높아졌다. 오랫동안 이어진 경기 둔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이제는 경제가 정상 궤도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희망이 곳곳에서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언제나 국내의 기대와 별개로 움직인다. 국제 정세의 작은 균열이 순식간에 금융시장과 실물경제를 흔들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런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했고, 이란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에너지 수송의 대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밝히면서 국제 경제가 긴장에 휩싸였다. 이른바 중동발 ‘지정학적 폭탄’이다. 이란의 보복 공격은 걸프 지역의 에너지 시설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원유 생산시설과 액화천연가스(LNG) 설비가 있는 지역에 대한 공격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글로벌 에너지 공급에 대한 우려가 빠르게 커지고 있다. 이미 여러 유조선이 공격을 받아 항해가 어려워졌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은 이런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에너지 가격과 환율, 채권금리 등 핵심 지표들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단순한 해상 통로가 아니다. 이란과 아라비아 반도 사이에 위치한 이 좁은 해협은 세계 에너지 시장의 핵심 동맥이다. 전 세계에서 거래되는 석유의 약 20%와 LNG의 상당 부분이 이곳을 통과한다. 세계 경제의 심장으로 향하는 에너지의 흐름이 이 좁은 해협을 지나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이 지역의 긴장은 언제나 국제 경제의 가장 민감한 위험 요소로 꼽혀왔다. 과거에도 이란은 여러 차례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봉쇄가 실행된 적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해협이 완전히 봉쇄되면 이란 역시 원유 수출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단순한 정치적 위협 이상의 긴장감을 낳고 있다. 유조선 공격과 에너지 시설에 대한 무인기 공격이 실제로 발생하면서 시장은 더 이상 이 상황을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국제 에너지 시장을 즉각적으로 흔들었다. 중동 정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원유와 LNG 가격이 빠르게 상승했다. 에너지 가격은 세계 경제의 거의 모든 산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은 곧바로 금융시장 전반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특히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직접적인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역시 그중 하나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70% 이상을 중동 지역에 의존하고 있으며, LNG도 약 30%를 이 지역에서 들여온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에너지의 대부분이 바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은 곧 한국 경제의 긴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만약 해협 봉쇄가 장기화되거나 에너지 생산시설의 피해가 확대된다면 한국 경제는 두 가지 위험에 동시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가격 충격이고, 다른 하나는 공급 충격이다. 먼저 가격 충격이다.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면 그 영향은 경제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된다. 석유와 가스는 단순한 연료가 아니라 산업과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사용되는 기본 자원이다. 원유 가격이 상승하면 정유제품 가격이 올라가고, 이는 운송비와 생산비 상승으로 이어진다. LNG 가격 상승은 전력과 도시가스 요금 상승 압력으로 연결된다. 결국 물가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인플레이션 요인이 된다. 여기에 환율 문제까지 겹치면 부담은 더 커진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불확실성이 커지면 달러가 강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원화 가치가 약세를 보이면 같은 에너지를 수입하더라도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더 커진다. 즉 국제 가격 상승과 환율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면 수입 비용은 이중으로 증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 경제가 우려하는 ‘3고(高)’ 현상이다. 환율 상승, 물가 상승, 금리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상황이다. 환율이 상승하면 수입물가가 올라가고,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지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금리가 상승하면 가계와 기업의 금융 부담이 커지고 경제 전반의 활력이 약해질 수 있다. 그러나 에너지 위기의 또 다른 측면은 공급 자체의 문제다. 가격이 오르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은 공급이 실제로 줄어드는 경우다. 다행히 한국은 과거의 석유 위기를 교훈 삼아 상당한 수준의 전략 비축 체계를 갖추고 있다. 현재 한국의 원유 비축량은 국내 소비 기준으로 약 221일분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만약 공급이 일시적으로 차질을 빚더라도 즉각적인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문제는 LNG다. LNG는 극저온 상태에서 보관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장기간 대량 저장이 쉽지 않다. 현재 한국의 LNG 재고는 약 50일 남짓한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중동 지역 공급이 장기간 차질을 빚게 되면 LNG 수급 문제가 현실적인 위험으로 떠오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중동 긴장은 단순히 유가 상승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에너지 안보의 구조적 취약성을 다시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에너지 소비 역시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에너지 자원의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국제 정세의 작은 변화도 경제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을 곧바로 경제 위기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국제 분쟁이 발생하면 금융시장은 대개 초기 단계에서 과잉 반응을 보인다. 위험을 피하려는 자금이 이동하면서 환율과 금리가 빠르게 움직이고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커진다. 하지만 분쟁이 빠르게 진정되면 상당 부분이 다시 안정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지금 한국 사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과도한 공포에 휩싸이지 않는 것이다. 금융시장과 경제는 심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소비자와 기업이 동시에 위축되면 실제 경제활동이 줄어들고, 이는 경기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 시장이 상승할 때는 지나친 낙관이 문제지만, 위기가 닥칠 때는 과도한 비관이 더 큰 문제를 만들 수 있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침착함이다. 주식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상승기에는 모든 사람이 낙관에 빠지고, 하락기에는 공포가 빠르게 확산된다. 그러나 시장은 언제나 이러한 감정의 진폭을 반복해 왔다. 이런 때일수록 감정에 치우친 '투매'나, 반등을 노린 무리한 '빚투(빚내서 투자)'는 가계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는 치명적인 실수가 될 수 있다. 지금은 공격적인 자산 증식보다는 '방어적 자산 관리'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고금리 기조가 예상보다 오래 유지될 가능성이 커진 만큼, 부채 규모를 줄이고 현금 흐름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또한 유가 상승에 따른 물가 압박이 실물 경기에 반영되는 시차를 고려할 때, 불요불급한 소비를 줄이는 등 가계 경제의 기초 체력을 비축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위기일수록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자산을 지키는 최고의 전략이다. 그러나 국민의 침착함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구체적인 시나리오(컨틴전시 플랜)에 기반한 대응 전략이다. 시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위기 그 자체보다 '정부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확실성이다. 단순히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는 식의 원론적인 답변으로는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먼저 단기적으로는 금융시장 안정이 중요하다. 환율이 과도하게 흔들릴 경우 시장의 공포가 확대되지 않도록 안정 장치를 가동할 필요가 있다. 외환시장 개입이나 유동성 공급 같은 정책 수단을 통해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완화해야 한다. 채권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시장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 금융 시스템 전체에 부담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 채권시장 안정 조치를 준비해야 한다. 동시에 에너지 공급 안정 대책도 중요하다. 정부와 에너지 기업은 중동 이외 지역에서의 대체 조달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미국, 호주, 동남아 등 다양한 공급원을 활용해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전략 비축 물량을 탄력적으로 방출해 가격 급등을 완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국제 협력 역시 중요한 수단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를 중심으로 한 소비국 간 협력 체계를 활용하면 에너지 시장의 급격한 변동을 완화할 수 있다. 실제로 과거의 에너지 위기에서도 주요 소비국들이 협력해 전략 비축을 공동으로 활용하면서 시장 안정에 기여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중장기적인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 이번 사태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 에너지 공급의 상당 부분이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언제든 경제적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에너지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다양한 에너지원을 균형 있게 활용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산업 구조를 개선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동시에 기업과 금융기관의 환율 위험 관리 능력을 강화해 외부 충격에 대한 대응력을 높여야 한다. 경제 위기의 대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국민은 과도한 공포를 경계해야 하고, 정부는 과도한 낙관을 경계해야 한다. 사회 전체가 침착함을 유지하면서도 정책은 철저히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 지금의 상황은 분명 긴장을 요구하는 시기다. 그러나 동시에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 경제는 여러 번의 외부 충격을 이겨낸 경험이 있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경제 시스템을 단단하게 다져 왔다. 위기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러나 준비된 사회는 그 충격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준비다. 국민에게는 차분함을, 정부에게는 명확한 시나리오와 신속한 대응을 요구해야 할 때다. 경제는 결국 신뢰 위에서 움직인다. 그 신뢰가 유지되는 한 어떤 외부 충격도 한국 경제를 쉽게 흔들 수는 없을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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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AI가 당신의 앱을지운다 …소프트웨어의 권력 이동
최근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요 언론과 투자 리포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AI가 소프트웨어 산업을 붕괴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시장의 반응과 기술 변화를 동시에 살펴보면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의 징후라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실제로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밸류에이션이 AI 도구 등장 이후 급격히 흔들리고 있으며, 투자자들은 기존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Software as a Service) 모델이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특정 기업의 경쟁력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인 층위에 있다. AI가 소프트웨어의 역할 자체를 대체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소프트웨어는 인간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였다. 사용자는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고, 메뉴를 선택하며, 데이터를 입력하고, 결과를 해석해야 했다. 그러나 생성형 AI와 에이전트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작업 수행의 주체가 사용자에서 AI로 이동하고 있다. 사용자는 더 이상 애플리케이션을 조작하지 않는다. 의도를 표현하면 AI가 여러 시스템을 가로질러 작업을 완결한다. 이는 인터페이스의 변화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소비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수준이다. 이 변화가 특히 두드러지는 영역은 ‘앱의 경계 붕괴’다. 기존 디지털 환경에서 기업은 CRM(고객 관계 관리), ERP(전사적 자원관리), 협업툴, 분석툴 등 다양한 SaaS를 별도로 도입해 사용해 왔다. 각 애플리케이션은 독립된 기능 묶음을 제공했고, 사용자는 애플리케이션 간 이동을 전제로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AI 에이전트는 이러한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하나의 명령으로 데이터 조회, 문서 작성, 고객 응대, 일정 조정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기능은 더 이상 애플리케이션 단위로 소비되지 않는다. 필요 기능이 작업 흐름 속에서 동적으로 호출된다. 다시 말해 실행 시점에 필요한 작업을 지능적으로 선택·추론해 호출하는 것이다. 이른바 ‘언번들링(unbundling)’ 현상이다. 이 같은 흐름은 이미 글로벌 기술기업 전략과 시장 구조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글로벌 기술기업들은 기존 소프트웨어 기능을 강화하는 수준을 넘어, 애플리케이션 자체의 필요성을 줄이거나 업무 수행 구조를 바꾸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AI를 별도의 제품군이 아니라 기존 소프트웨어 스택 전체에 통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애저(Azure) 클라우드와 협업 도구, 개발 환경에 AI 모델을 결합하면서 AI 관련 서비스가 플랫폼 수익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부상했다. 실제로 애저 매출은 AI 수요에 힘입어 높은 성장세를 보였고, 코파일럿 계열 서비스는 2026년에는 플랫폼 매출의 40% 이상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제조업 현장에서는 AI 에이전트를 통해 데이터 조회와 의사결정을 자동화하면서 유지보수 사고 감소와 생산성 개선을 달성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아마존은 클라우드 서비스 자체의 성격을 바꾸는 방향으로 AI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막대한 규모의 AI 투자를 통해 연산 인프라와 모델 생태계를 동시에 강화하고 있으며, 자체 AI 칩 개발로 비용 구조까지 재편하고 있다. 한편 AWS는 파트너십을 통해 AI 모델 공급망을 확보하는 동시에 기업 업무 자동화를 위한 AI 에이전트 환경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앤스로픽과의 전략적 협력 및 투자 확대는 클라우드 고객이 단순한 데이터 분석 도구가 아니라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는 AI 시스템을 직접 활용하도록 유도하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이런 흐름은 SaaS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대신 클라우드 기반 AI가 업무를 직접 처리하는 구조로의 전환을 가속한다. AI 확산은 특정 기업 전략을 넘어 시장 전반의 구조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기업들은 소프트웨어 공급업체 수를 줄이고 AI 도구로 동일 업무를 수행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평균 SaaS 사용 애플리케이션 수 감소와 공급업체 축소가 진행되고 있다. AI 에이전트가 여러 단계 업무를 자동으로 수행할 경우 한 사람이 다수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어 좌석 기반 라이선스 수요가 줄어드는 구조가 형성된다. 생산성 도구 영역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AI 도입을 통해 기존 CRM 소프트웨어를 대체하거나 대규모 조직 운영 소프트웨어 인력 구조를 축소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으며, 향후 SaaS 좌석(사용자/계정) 수가 두 자릿수 비율로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클라우드 운영 영역에서는 AI 에이전트를 활용해 자원 배치와 비용 관리까지 자동화하는 플랫폼이 등장하며 기존 관리 소프트웨어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 주거·의료 운영 분야에서는 일정 조정, 청구, 유지보수 요청 처리 등 관리 업무를 수행하는 AI 서비스가 확산되고 있으며 과금 방식 역시 사용자 수가 아닌 관리 자산 규모 기준으로 변화하고 있다. 개발 영역에서는 AI 코딩 도구가 반복적 프로그래밍 시간을 크게 단축시키며 생산성 도구 자체가 AI 기능에 흡수되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변화는 SaaS의 핵심 수익 모델에도 직접적인 충격을 준다. SaaS 산업은 좌석 기반 과금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사용자 수가 늘수록 매출이 증가하는 구조다. 하지만 AI 자동화가 확산되면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업무를 수행하거나 일부 역할 자체가 사라진다. 라이선스 수요가 줄어드는 것이다. 일부 기업에서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를 축소하거나 도입 계획을 재검토하는 사례가 보고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또 다른 구조적 충격은 진입장벽 붕괴다. 과거에는 복잡한 기능을 갖춘 소프트웨어 구축에 대규모 개발 조직과 자본이 필요했다. 그러나 AI 개발 도구는 기능 구현 비용을 급격히 낮추고 있다. 소규모 팀이 짧은 시간 내 기존 SaaS 기능을 재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제품 희소성이 약화되고 가격 결정력도 떨어지고 있다. 산업 전체가 과잉 경쟁 상태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프트웨어 붕괴’라는 표현은 완전히 근거 없는 과장이라 보기 어렵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의 의미를 정확히 정의하는 일이다. 소프트웨어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프트웨어는 더 많이 필요해진다. 변화하는 것은 전달 방식과 경제 모델이다. 애플리케이션 접근권을 판매하던 구조가 결과 수행 능력을 제공하는 구조로 전환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이 전환 속에서 한국의 위치를 살펴보면 복합적인 평가가 나온다. 한국은 소프트웨어와 AI 핵심 스택에 대한 해외 의존도가 높은 국가다. GPU(그래픽 처리 장치), 클라우드 인프라, 핵심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등 주요 구성 요소 상당 부분을 외국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글로벌 AI 질서가 미국과 중국 중심으로 형성되는 상황에서 전략적 자율성 확보는 쉽지 않은 과제다. 독자 모델 개발 시도 역시 외부 기술 의존 논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은 중요한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 산업 현장에서의 AI 도입 속도는 매우 빠르며 제조,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물리 산업 기반 데이터 자산이 풍부하다. 이는 범용 모델 경쟁에서는 불리할 수 있으나 산업 특화 AI에서는 강력한 경쟁력을 제공한다. 또한 반도체 공급망에서의 역할과 AI 인프라 투자 확대는 중장기 전략 자산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조건을 고려할 때 한국이 취해야 할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기술 완전 자립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전략적 자립을 추구해야 한다. 범용 컴퓨팅 자원은 글로벌 협력을 활용하되 특화 영역에서는 독자 기술을 확보하는 이중 구조 접근이 현실적이다. 둘째, 초거대 모델 경쟁에 집착하기보다 산업 AI에 집중해야 한다. 제조, 로봇, 물류 등 실제 물리 시스템과 결합된 AI는 진입장벽이 높고 글로벌 경쟁력이 확보될 가능성이 크다. 셋째, 오픈소스 생태계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는 기술 접근성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중견국(미들파워) 전략이다. 넷째, 컴퓨팅 인프라 투자를 국가 전략 자산으로 인식해야 한다. AI 시대의 주권은 데이터나 모델뿐 아니라 연산 능력에서도 결정된다. 다섯째, 소프트웨어 수출 전략을 재정의해야 한다. 애플리케이션 판매 중심에서 운영 서비스, 통합 관리, AI 오케스트레이션 제공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AI가 촉발한 변화는 단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산업 패러다임 전환이다. 앱 중심 구조에서 작업 수행 중심 구조로 이동하는 흐름 속에서 기존 경쟁 구도는 크게 재편될 것이다. 한국이 직면한 도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의 창도 열리고 있다. 애플리케이션 중심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었던 국가가 실세계 시스템 통합과 산업 AI 영역에서는 오히려 유리한 위치를 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위기를 구조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다. 소프트웨어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정의가 바뀌고 있다. 그리고 그 전환의 순간마다 새로운 산업 질서가 형성되어 왔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변화 역시 그 연속선 위에 있다. 한국이 이 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소비자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질서의 설계자 중 하나가 될 것인지는 지금의 전략 선택에 달려 있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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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K-경제 '올인원 전략' …쪼개면 지고 뭉쳐야 산다
지금 한국 경제를 둘러싼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수출은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주식시장은 5000포인트 돌파를 앞두고 있다. 이와 동시에 원화 약세, 부동산 가격 재상승, 청년 고용 악화라는 경고음도 분명히 울리고 있다. 누군가는 이를 대전환기의 기회라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침체로 가는 냉각기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경제는 이 둘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작동하는, 가장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방식의 문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미 상당 부분 명확해졌다. 문제는 그것을 어떤 순서로, 어떤 속도로, 어떤 방식으로 추진하느냐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의 정책 사고방식은 결정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정책 문서와 보고서에는 여전히 익숙한 도식이 반복된다. 먼저 안정을 되찾고, 그 다음 성장 동력을 확보한 뒤, 마지막으로 구조개혁에 나선다는 순서다. 안정, 도약, 구조전환으로 이어지는 시계열적 선형 로드맵은 오랫동안 교과서처럼 사용돼 왔다. 그러나 지금 이 방식은 현실을 단순화하는 수준을 넘어, 오히려 현실을 왜곡한다. 이 접근 방식은 세 가지 전제를 깔고 있다. 외부 환경이 비교적 안정적일 것, 내부의 사회적 신뢰가 유지될 것, 정책이 시간을 벌 수 있을 만큼 성장 여력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지금의 한국은 이 세 조건을 모두 상실했다. 글로벌 환경은 기술, 안보, 에너지, 통화가 뒤엉킨 상시적 경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 번의 판단 지연이 수년의 격차로 이어지는 시대다. 국내적으로는 자산과 소득, 세대 간 격차가 누적되며 사회적 신뢰가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성장 잠재력은 남아 있지만, 정책이 순서를 핑계로 시간을 끌 여유는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는 안정, 내년은 도약, 그 다음은 구조개혁이라는 말은 더 이상 전략이 아니다. 사실상 미루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국민에게는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지금의 유권자와 시장은 이런 메시지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지금 한국이 처한 문제는 여러 위기가 나열된 상태가 아니다. 위기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복합 위기 상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가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지만, 한국의 상황은 유독 더 복잡하다. 한국은 여전히 성장해야 하는 국가이면서 동시에 선진국이 겪는 구조적 문제를 이미 안고 있기 때문이다. 추격형 성장의 과제와 선진국형 구조 문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구간에 서 있다. 환율 문제만 보더라도 그렇다. 환율은 단순한 외환시장의 문제가 아니다. 환율은 물가를 자극하고, 물가는 가계 부담을 키우며, 이는 소비와 내수를 위축시킨다. 동시에 기업의 투자 판단에도 영향을 준다. 환율 안정만 따로 떼어 관리하겠다는 발상은 현실적이지 않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주거 문제는 자산 문제를 넘어 노동 이동성과 청년 고용, 출산과 인구 구조까지 연결돼 있다. 부동산을 나중의 구조개혁 과제로 미루는 순간, 청년 정책과 노동 정책은 이미 실패로 기울기 시작한다. AI와 첨단 산업 역시 다르지 않다. 기술은 도약의 영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력망과 데이터, 인허가와 규제라는 구조적인 문제와 깊이 얽혀 있다. 기술 도약을 말하면서 구조전환을 뒤로 미루는 것은 현실을 오해한 접근이다. 이 모든 과제는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정책만 과거의 시간표에 묶여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한국 경제에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시계열 로드맵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는 패키지 전략이다. 안정과 도약, 구조전환을 나누지 말고, 서로를 지탱하는 하나의 묶음으로 설계해야 한다. 그 핵심은 분명하다. 2026년 1년 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성공 궤도에 올라섰다는 것을 국민이 체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완결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고, 완성이 아니라 비가역성이다. 안전은 출발점이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환율, 물가, 주거, 금융에 대한 불확실성을 동시에 낮춰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기술적인 미세 조정이 아니라 정책 주체들의 집단적 신호다. 정부와 중앙은행, 연기금이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면서 시장과 국민에게 한 방향의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이 문제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신호가 분명해야 한다. 도약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정부 문서에는 AI와 첨단 산업이라는 단어가 넘쳐나지만, 중요한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실제로 작동하는 조건이다. 전력과 데이터, 인허가와 규제, 인재 유인 구조를 한꺼번에 풀지 않으면 도약은 구호에 그친다. 도약은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현재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구조전환은 더더욱 미룰 수 없다. 청년 고용과 노동 이동성, 지역 격차, 인구 구조 문제는 이미 현재 진행형이다. 이 문제들에 대해 원칙과 방향을 지금 제시하지 않으면 정책은 곧 신뢰를 잃는다. 구조전환의 핵심은 당장 모든 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방향을 분명히 고정하는 데 있다. 여기서 관건은 국정 컨트롤이다. 이처럼 안정과 도약, 구조전환을 하나의 패키지로 동시에 밀어붙이는 정책은 어느 한 부처에 맡겨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의 과제가 아니다. 기획재정부의 문제만도 아니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나 산업통상부, 국토교통부, 고용노동부 가운데 어느 한 곳의 소관으로 정리될 수도 없다. 환율과 재정, 산업과 전력, 주거와 고용, 기술과 규제가 서로 얽혀 있는 이 국면에서 필요한 것은 부처별 정책의 합이 아니라 국정 전체를 관통하는 조정과 통제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청와대, 다시 말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국정 컨트롤 타워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부처 간 충돌을 조정하며, 단기 안정과 중장기 전환을 하나의 방향으로 묶는 작업은 대통령의 권한이자 책임이다. 이는 단순한 실무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문제다. 더 나아가 이 과정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 능력이 국민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동시에 가장 냉정하게 평가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말로 하는 개혁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 부처가 동시에 움직이고 정책의 방향이 일관되게 유지되며 국민이 체감하는 변화가 나타나는지가 대통령의 리더십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성공하면 국정 신뢰는 단기간에 회복되지만, 실패하면 어떤 설명도 변명이 되기 어렵다. 지금 한국 경제는 그런 시험대 위에 올라 있다. 안정과 도약, 구조전환을 나눠서 생각할 수 없는 이 국면에서 대통령이 직접 책임지고 국정을 묶어내지 못한다면, 그 어떤 정교한 정책도 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지금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 능력이 국가의 생존 가능성과 직결되는 순간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현실이 있다. 오는 6월 치러질 전국동시지방선거다. 이 선거는 지금 논의되고 있는 어떤 경제 정책보다도 강력한 변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선거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선거가 정책을 포퓰리즘으로 끌고 가는 구조적 관성이 문제다. 선거는 정책을 단기성과 중심으로 압축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결정은 뒤로 미루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자석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정책은 일관성을 잃기 쉽다. 환율, 부동산, 요금, 재정 같은 민감한 사안은 특히 그렇다. 선거 국면에서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이 반복되고, 그 사이 문제는 누적된다. 정책의 방향은 유지된다고 말하지만, 실제 실행의 강도와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진다. 국민은 이 미묘한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감지한다. 문제는 앞서 강조한 안전·도약·구조전환의 패키지 전략이 선거에 가장 취약한 유형의 정책이라는 점이다. 이 전략은 단기간에 인기 있는 선물을 나눠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단호함과 일관성, 그리고 일정한 사회적 부담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가 다가올수록 흔들릴 가능성도 커진다. 만약 이 패키지가 선거 국면에서 속도를 잃거나 방향을 바꾼다면, 정책은 실패하는 것뿐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신뢰의 손상을 남길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선거라는 거대한 정치적 이벤트 속에서도, 단호하고 일관된 패키지 정책을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첫째, 정책을 ‘공약’이 아니라 ‘국정 원칙’의 차원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선거용 메시지와 국정 운영 원칙을 명확히 분리하지 않으면 정책은 흔들린다. 안전·도약·구조전환 패키지는 특정 지역이나 계층을 겨냥한 선거 공약이 아니라, 국가 생존과 직결된 운영 원칙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는 선거 기간일수록 더욱 공개적으로 강조돼야 한다. 둘째, 정책의 핵심 방향과 일정은 가능한 한 제도화해야 한다. 법과 제도, 중장기 계획, 독립적 위원회와 같은 장치는 정치 일정의 영향을 완화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모든 것을 법으로 묶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정책의 큰 방향과 되돌릴 수 없는 기준선은 제도 속에 남겨야 한다. 그래야 선거 국면에서도 정책이 완전히 흔들리지 않는다. 셋째, 정책의 성과를 ‘미래 약속’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보여줘야 한다. 선거는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그러나 동시에 국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체 상태에도 불안을 느낀다. 패키지 정책이 선거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2026년 안에 눈에 보이는 변화가 일부라도 나타나야 한다. 방향이 이미 바뀌었고, 되돌릴 수 없는 궤도에 올랐다는 신호가 있어야 한다. 넷째, 대통령의 역할은 이 지점에서 더욱 중요해진다. 선거 국면에서는 부처가 스스로 움직이기 어렵다. 책임 회피와 관망이 늘어난다. 이때 정책을 붙들고 가는 유일한 주체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정책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선거와 무관하게 유지돼야 할 원칙을 직접 천명하지 않는다면, 패키지 전략은 쉽게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결국 선거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선거가 정책을 집어삼키도록 내버려둘 것인지는 전적으로 국정 운영의 문제다. 지금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 선거를 이유로 단호한 결정을 미루는 것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국가적 위험에 가깝다. 안전과 도약, 구조전환을 동시에 추진하자는 요구는 선거를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선거라는 현실을 직시한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국정 기준을 세우자는 제안이다. 선거는 지나가지만, 경제의 방향은 그 이후 수년을 좌우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또 한번의 시험대에 서 있다. 정책이 선거의 자석에 끌려가느냐, 아니면 선거 위에서도 방향을 지켜내느냐. 그 선택의 결과는 고스란히 국민의 삶으로 돌아올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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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엔트로피(Entropy)가 높아진 세계, 2026년의 결정적 질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더 이상 세계를 파괴하지 마라.” 이처럼 직설적이고도 엄중한 문장이 일본의 대표적 경제지 사설에 실렸다. 2026년 1월 18일자 일본경제신문 사설이다. 외교적 수사와 절제를 중시해온 일본 언론의 문법을 감안하면, 이 표현은 이례적일 정도로 강경하다. 더욱 주목할 점은 이 사설이 특정 정책에 대한 일시적 비판이 아니라, 오늘날 세계 질서가 처한 구조적 위기를 향한 경고라는 점이다. 사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 이후 1년 동안 전후 국제질서를 떠받쳐온 핵심 기둥들이 연쇄적으로 훼손됐다고 진단한다. 세계무역기구(WTO) 규칙을 무시한 고관세 정책은 자유무역 질서를 흔들었고, 동맹국과의 협력 관계는 거래 대상으로 전락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협상 과정에서 드러난 러시아에 대한 유화적 태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의 신뢰를 약화시켰으며,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 병합에 대한 집착은 동맹의 존재 이유 자체를 의문에 빠뜨렸다고 지적했다. 이란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일방적 군사 행동, 다자 국제기구 탈퇴로 인한 기후변화·빈곤·공중보건 협력의 후퇴, 미국국제개발처(USAID)를 비롯한 행정 기구 해체로 인한 전문성 상실도 사설이 열거한 문제들이다. 언론 자유에 대한 압박, 이견 배제와 정적 제거 시도, 연방군 투입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일본경제신문은 이를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태”라고 규정했다. 사설의 결론은 분명하다. 이러한 흐름이 남은 임기 동안 지속된다면 세계는 바람직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이며, 일본을 포함한 동맹국들은 미국이 다시 국제 협력의 궤도로 돌아오도록 집단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구상을 그 대안적 나침반으로 제시한 대목 역시 인상적이다. 일본경제신문의 이 사설은 단순한 외교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질서가 관리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비용 구조, 다시 말해 엔트로피가 급격히 높아진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경고다. 엔트로피(Entropy)는 원래 물리학 개념이다. 시스템이 얼마나 무질서해졌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알려져 있지만, 이를 일상 언어로 풀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엔트로피가 높아진다는 것은 같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와 비용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정리된 방에서는 물건 하나를 찾는 데 큰 노력이 들지 않지만, 어질러진 방에서는 같은 물건을 찾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시간과 힘이 필요하다. 국제질서도 마찬가지다. 규칙이 분명하고, 합의가 존중되며, 약속이 지켜지는 세계에서는 갈등이 발생해도 관리 비용이 비교적 낮다. 그러나 규칙이 무시되고, 합의가 언제든 뒤집히며, 힘이 우선하는 환경이 되면 각국은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더 많은 군비를 쌓고, 더 많은 외교 자원을 투입하며, 더 많은 보험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이것이 국제 시스템의 엔트로피가 높아진 상태다. 지금 세계는 이미 여러 개의 위기를 동시에 감당하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불안,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기후 변화, 인공지능(AI)의 급속한 확산까지 겹쳐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질서마저 불안정해지면, 작은 충격도 시스템 전체를 흔들 수 있다. 일본경제신문이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더 이상 세계를 파괴하지 말라”고 경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특정 발언이나 정책 하나가 아니라, 세계 질서의 마찰계수를 급격히 높이는 정치 방식이다. 트럼프 정치의 특징은 다자 질서를 경시하고, 동맹을 거래 대상으로 바라보며, 규범을 협상의 카드로 사용하는 데 있다. 단기적으로는 강경하고 결단력 있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신뢰를 소모하고,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며, 결국 세계 전체의 엔트로피를 끌어올린다. 그 비용은 각국의 재정 부담, 기업의 투자 위축, 시민들의 불안으로 되돌아온다. 중요한 점은 세계가 더 이상 이런 엔트로피 상승을 감내할 체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 냉전 시기에는 갈등이 존재했지만 질서는 비교적 단순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기술·경제·안보·환경이 서로 얽힌 고차 방정식 위에 놓여 있다. 여기에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더해지면, 시스템은 빠르게 임계점에 접근한다. 그래서 2026년 세계가 마주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엔트로피를 낮출 것인가. 이는 도덕적 선언이 아니라 현실적 생존의 문제다. 엔트로피를 낮춘다는 것은 규칙을 복원하고, 예측 가능성을 높이며, 갈등을 관리 가능한 범위로 되돌리는 l일이다. 힘의 과시보다 제도의 신뢰를, 즉흥적 결정보다 지속 가능한 질서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미국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일본, 유럽, 한국을 포함한 선진 및 중견국들, 그리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어느 나라든 엔트로피를 증폭시키는 정치에 편승할 것인지, 아니면 비용이 들더라도 질서를 유지·복원하는 길을 택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혼란의 시대마다 두 유형의 지도자가 등장했다. 엔트로피를 키워 순간적 지지를 얻는 지도자와, 불편한 선택을 감수하며 질서를 재구성한 지도자다. 전자는 박수를 받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후자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시스템을 지켜냈다. 지금 세계는 다시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일본경제신문의 사설은 그 갈림길 앞에서 울린 경고음이다. 2026년은 더 이상 혼란을 정치적 개성이나 스타일로 소비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이제 세계는 묻고 있다. 누가 더 큰 소리를 내는가가 아니라, 누가 엔트로피를 관리하고 낮출 수 있는가를.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정치는, 결국 세계로부터 외면받게 될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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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국운을 건 싸움 …전장은 '주기율표'
세계는 지금 전쟁 중이다. 다만 이 전쟁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전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총성이 울리지 않고, 병력이 이동하지 않으며, 뉴스 화면에 전선이 표시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결과는 각국의 산업 경쟁력과 국가의 장기 생존 능력을 가를 것이다. 이 전쟁의 본질은 영토도, 이념도, 통화도 아니다. 필자는 이 현상에 ‘주기율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주기율 전쟁이란 화학 교과서에서 배웠던 주기율표에 등장하는 원소들, 그중에서도 산업과 기술, 에너지 체계의 핵심을 이루는 원소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가 간 경쟁을 의미한다. 구리, 리튬, 니켈, 코발트, 망간, 흑연, 희토류, 갈륨, 게르마늄, 은, 알루미늄, 그리고 우라늄까지. 이 원소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인공지능, 전기차, 에너지 전환, 탄소 감축, 방위산업 어느 하나에서도 빠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원소는 더 이상 단순한 원자재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기초 단위가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이들 원소의 가격은 거의 예외 없이 상승했다. 그러나 가격 자체는 현상의 표면일 뿐이다. 더 중요한 변화는 각국 정부와 글로벌 기업이 이 원소들을 바라보는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이제 원소는 비용 항목이 아니라 산업 전략의 출발점이자 외교 협상의 카드, 안보 자산으로 취급된다. 이 변화의 결과, 주기율표는 더 이상 실험실의 참고표가 아니라 21세기 산업 전략 지도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 현상을 단순한 원자재 슈퍼사이클이나 투기적 가격 급등으로 이해한다면 결정적인 오판에 빠질 수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변화는 인공지능 붐, 전기차 전환, 탄소제로 사회 지향, ESG 경영의 제도화, 그리고 지정학적 안보 경쟁이라는 다섯 개의 거대한 흐름이 동시에, 그리고 상호 증폭적으로 작용하며 만들어낸 문명 전환기의 구조적 변화다. 이 다섯 흐름의 교차점에 놓인 것이 바로 주기율표다. 20세기 산업 질서를 지배한 것은 석유였다.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한 국가가 성장했고, 금융과 군사력, 외교력이 그 위에 쌓였다. 석유는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세계 질서를 규정하는 전략 자산이었다. 그러나 21세기는 분명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지금 태워서 움직이는 경제에서, 전기를 만들고 저장하고 계산하는 경제로 이동하고 있다. 이 전환은 단일 자원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 수많은 원소가 동시에 필요하고, 그 조합과 통제 능력이 곧 산업 경쟁력이 된다. 인공지능은 이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AI는 흔히 알고리즘과 데이터, 소프트웨어 경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현실의 AI 산업은 철저히 물리적이다. 초대형 데이터센터는 소규모 도시 하나에 맞먹는 전력을 소비한다. 이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발전소, 송전망, 변압기, 배전 설비, 냉각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금속과 원소의 집합체다. 구리는 송전과 배전의 핵심 원소다. 알루미늄은 장거리 송전에 필수적이다. 니켈과 흑연은 에너지저장장치의 기본 재료다. 은은 고효율 전력과 태양광 설비에 사용된다. 여기에 원자력 발전을 구성하는 우라늄이 결합된다. 우라늄은 더 이상 특수한 에너지원이 아니다. AI 시대의 안정적인 기저 전력을 떠받치는 주기율표 속 전력 원소로 재정의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전력 수요는 폭증한다. 재생에너지만으로 이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은 원자력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으며, 이는 우라늄과 핵연료 전주기, 즉 전환·농축·연료 제조 능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우라늄 가격 상승은 투기적 현상이 아니라 전력 구조 변화가 주기율표에 투영된 결과다. 전기차 전환은 주기율 전쟁을 또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내연기관차는 철강과 알루미늄 중심의 산업이었다. 반면 전기차는 주기율표의 결정판이다. 리튬, 니켈, 코발트, 망간, 흑연, 희토류 없이 전기차는 단 한 대도 움직일 수 없다. 전기차 한 대에 들어가는 광물의 양은 내연기관차보다 훨씬 많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더 중요한 점은 전기차 확산이 단순한 차량 교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교통 시스템 전체를 거대한 전기 저장망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수백만 대의 전기차는 동시에 이동 수단이자 배터리이며, 전력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 이 구조가 정착될수록 원소 수요는 단기간에 줄어들 수 없고, 오히려 누적적으로 증가한다. 전기차 전환이 주기율 전쟁을 구조적·장기적 경쟁으로 만드는 이유다. 탄소제로 사회 지향 역시 이 흐름을 강화한다.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저장장치, 수소 경제는 모두 금속 집약적 산업이다. 태양광에는 은과 알루미늄이 필요하고, 풍력에는 희토류와 대형 철강 구조물이 들어간다. 수소 경제에는 니켈과 백금족 금속이 필수적이다. 탄소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역설적으로 더 많은 금속을 소비한다. 탄소중립은 자원을 덜 쓰는 사회가 아니라 주기율표를 더 깊이 파는 사회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는 이미 매우 구체적인 현장에서 확인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다룬 구리 특집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025년 12월 3일자에서 ‘AI 붐을 연결하는 구리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특집을 통해, 인공지능 확산이 구리 수요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고 진단했다. AI 데이터센터는 기존 데이터센터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고, 이를 연결하는 송전망과 배전 설비에는 대량의 구리가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이 때문에 구리는 더 이상 단순한 산업 금속이 아니라, 디지털 경제의 혈관 역할을 하는 전략 자원으로 격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특집은 국제에너지기구 분석을 인용해, 현재 계획된 광산 생산만으로는 2030년대 중반 예상되는 글로벌 구리 수요의 상당 부분을 충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수요 급증보다 공급 제약이 더 심각하다는 점이다. 신규 구리 광산 개발은 환경 규제와 지역사회 갈등, 인허가 지연으로 수년씩 늦어지고 있고, 정련·가공 능력은 특정 국가에 편중돼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로 인해 구리 시장이 이미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물량을 확보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반도체 설계도나 알고리즘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그것을 연결할 구리를 누가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경고다. 이 같은 흐름은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도 그대로 관찰된다. LME는 오랫동안 산업 금속의 기준 가격이 형성되는 중립적 시장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최근 LME는 단순한 가격 발견의 장을 넘어, 각국과 글로벌 기업들이 실물 물량을 놓고 경쟁하는 전략 무대로 변모했다. 특정 금속의 재고가 급감하거나, 특정 국적의 기업이 인도 가능한 물량을 선점하는 순간 가격은 급등한다. 이는 투기가 아니라 공급망을 먼저 쥔 쪽이 가격 결정권까지 가져가는 구조가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22년 3월 LME 니켈 시장에서 벌어진 ‘니켈 쇼크’는 주기율 전쟁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거래 중단과 계약 무효화라는 초유의 사태는 단순한 시장 혼란이 아니었다. 니켈이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소로 격상된 상황에서, 특정 국가가 정련과 가공을 통제하기 시작하자 시장의 취약성이 한꺼번에 노출됐다. 이 사건 이후 시장은 분명한 교훈을 얻었다. 주기율표의 핵심 원소는 더 이상 금융상품이 아니라 국가 전략 자산이라는 사실이다. 중국이 갈륨, 게르마늄, 흑연 등 특정 원소에 대해 수출 통제와 허가제를 강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가격을 올리기 위한 조치가 아니다. 목적은 글로벌 첨단 산업이 중국의 정책 결정에 구조적으로 민감해지도록 만드는 데 있다. 이 원소들은 개별 산업에서는 조연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반도체와 AI, 통신, 방위산업에서는 대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공급이 잠시만 막혀도 생산 라인이 멈춘다. 이로 인해 시장은 가격보다 공급 가능성과 정치적 안정성에 훨씬 더 큰 프리미엄을 매기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의 산업 정책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과 유럽연합의 핵심원자재법은 겉으로는 산업 지원 정책처럼 보이지만, 그 출발점은 언제나 동일하다. 주기율표에 있는 어떤 원소를, 어느 동맹권 안에서 확보할 것인가다. 이들 정책은 시장에 맡기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기율 전쟁에 국가가 직접 개입하겠다는 선언이다. 이제 한국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은 자원 빈국이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자원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주기율 전쟁을 여전히 개별 기업의 원가 문제나 일시적 가격 변동으로 인식하는 태도다. AI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를 이야기하면서 그 기반이 되는 원소와 공급망 전략을 부차적 문제로 취급하는 순간, 우리는 산업의 심장부를 외부에 맡기게 된다. 한국의 생존 전략은 분명하다. 광산 소유 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대신 우리는 정련과 소재, 가공과 재활용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 원소는 캐낼 수 없더라도, 원소를 산업화하는 능력은 만들 수 있다. 고순도 정련 기술, 차세대 소재 설계, 도시광산과 재활용 기술은 ESG와도 맞고, 한국 제조업의 강점과도 맞닿아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축은 금융과 외교다. 장기 오프테이크(공급자와 구매자의 사전합의) 계약을 국가 신용과 결합해 패키지로 설계해야 한다.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환율 리스크를 국가 차원에서 분산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주기율 전쟁은 기업 혼자 싸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이는 국가 운영 능력의 시험대다. 수요 관리 역시 자원 전략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AI 데이터센터의 에너지 효율, 전기차 배터리의 원소 대체, 소프트웨어를 통한 금속 사용량 절감은 모두 보이지 않는 자원 정책이다. 주기율 전쟁에서 승리하는 국가는 더 많이 쓰는 나라가 아니라, 덜 쓰고도 더 많은 가치를 만드는 나라다. 주기율표는 이제 시험 문제의 표가 아니다. 그것은 산업 전략의 지도이자, 외교 전략의 참고서이며, 국가 생존 전략의 설계도다. 앞으로의 경쟁은 이렇게 묻게 될 것이다. “당신의 나라는 주기율표의 어느 칸을 책임지고 있는가-.” 세계는 이미 주기율 전쟁에 들어섰다. 자원 빈국 한국의 선택지는 분명하다. 주기율표를 새로운 산업 전략 지도로 삼아 생존의 길을 설계하는 길이다. 시간이 촉박하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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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엔비디아와 비트코인의 '新자본주의' …국가 설계력이 승부
요즘 세계 금융시장을 살펴보면 이상한 광경이 반복된다. 엔비디아의 주가가 뛰면 뉴욕증시뿐 아니라 도쿄와 서울, 런던과 프랑크푸르트까지 일제히 들썩이고, 반대로 엔비디아 실적이 기대에 못 미치면 글로벌 증시는 동시다발적으로 흔들린다. 마치 세계 경제의 체온을 재는 온도계가 GDP(국내총생산)나 금리가 아니라 단 한 기업의 주가가 된 듯한 묘한 느낌마저 준다. 비트코인도 다르지 않다. 규제나 ETF(상장지수펀드) 관련 뉴스 한 줄이면 전 세계 자금이 순식간에 출렁이고,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의 축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뀐다. 이런 현상은 일부 투자자들의 과장된 반응이나 일시적 유행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엔비디아 하나에, 비트코인 하나에 세계 시장이 급등락하는 이 장면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예고한다. 과거처럼 산업별·국가별·기업별로 리스크가 분산된 자본주의가 아니라, 특정 기업과 특정 자산에 경제적 중력이 몰려드는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리고 이 현상은 비정상일까, 아니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정상일까. 오늘의 시장에서 엔비디아가 차지하는 위치는 단순한 반도체 회사의 범주를 넘어선다. 엔비디아는 GPU(그래픽 처리장치) 라는 새로운 엔진을 통해 AI 시대의 속도를 결정하는 기업이 되었고, 기술 생태계의 중심에서 사실상 새로운 기술 표준을 만들고 있다. 데이터센터, 자율주행, 로봇, 국방, 사이버 보안까지 AI가 들어가는 거의 모든 산업의 중요한 연결점에 엔비디아의 기술이 걸려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한 기업의 실적과 방향성이 단순한 ‘기업 뉴스’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기술·산업의 방향성을 상징하는 지표가 된다. 월가 애널리스트들은 엔비디아의 주가 변동을 ‘AI 투자의 감속과 가속’을 읽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엔비디아가 흔들린다는 것은 AI 생태계 전체가 흔들린다는 뜻이고, 엔비디아가 다시 치고 올라간다는 것은 AI 시대의 속도가 예정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엔비디아는 더 이상 기업이 아니라 ‘스토리( narrative; 일련의 사건을 체계적으로 정리)’로 작동하고 있다. 시장은 숫자와 실적을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거래하고, 이야기가 곧 자산 가격을 결정하는 시대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실러가 말한 ‘내러티브 경제학’이 현실이 된 셈이다. 비트코인 역시 마찬가지다. 비트코인은 전통적 금융 논리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변동성을 지니고 있지만,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위치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24시간 거래가 가능하고, 국경을 뛰어넘어 자본이 이동하며, 글로벌 규제·정책 변화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다는 점에서 비트코인은 세계 금융시장의 ‘실시간 체온계’ 역할을 하고 있다. 금리 인상기에도, 지정학 위기 상황에서도, 비트코인은 자금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속도가 가장 빠른 지표였다. 시장의 심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고 싶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자산이 이제는 비트코인이 된 것이다. 비트코인이 안전자산인지 위험자산인지 묻는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비트코인이 글로벌 자산 배분의 리듬을 결정하는 ‘감정의 바로미터’가 되었다는 점이다. 월가의 알고리즘 트레이딩 시스템은 이미 비트코인을 주요 매크로 지표로 사용하고 있고, 각국의 금융당국조차 비트코인의 변동이 파생시장·원자재시장·신흥국 외환시장에 어떤 영향을 줄지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 경제의 중력이 특정 기업과 특정 자산에 쏠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원인은 기술경제의 구조 변화다. AI·반도체·플랫폼 경제는 승자독식이 아니라 ‘승자전부독식’ 구조로 움직인다. GPU 생태계는 초기 승자가 이후 시장 전체의 성장 과실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텍스트나 사진을 처리하던 과거의 소프트웨어 플랫폼과 달리, AI와 GPU는 수십조원의 데이터센터·전력·반도체 투자를 필요로 한다. 돈이 돈을 부르는 구조에서 앞선 기업은 더 빠르게 앞서가고, 뒤처진 기업은 완전히 밀려나기 쉽다. AI 시대의 경쟁은 ‘초기 역량’이 미래 전체를 결정하는 경주에 가깝다. 둘째 원인은 패시브 ETF의 급격한 확산이다. 시가총액 비중을 기준으로 자동 매입하는 구조는 이미 잘나가는 기업에 더 많은 자금을 몰아넣는 가속기 역할을 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주가가 오르면 시총이 커지고, 시총이 커지면 ETF는 엔비디아를 더 사야 하고, 이 과정이 다시 주가를 올린다. 시장의 자율적 조정 기능이 약해지고, 특정 종목의 상승이 전체 시장을 끌어올리는 ‘구조적 쏠림’이 고착화된다. 셋째 원인은 스토리 중심의 금융, 즉 ‘내러티브 시장’의 확장이다. AI, 로봇, 자율주행, 디지털 화폐 같은 거대한 기술 스토리는 투자자들에게 미래를 상징하는 단일 자산을 찾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시장은 몇 개의 슈퍼스타 자산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엔비디아는 AI 스토리의 대표, 비트코인은 새로운 화폐 스토리의 대표가 되었다. 미래를 상징하는 자산이 만들어지면 그 자산은 단순한 금융상품이 아니라 시대의 상징이 된다. 넷째 원인은 플랫폼 잠김 효과, 즉 네트워크 외부성이다. CUDA(엔비디아가 GPU를 프로그래밍하기 위해 개발한 플랫폼) 생태계처럼 한 기업의 기술이 산업 전체의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 후발주자는 그 생태계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 엔비디아는 GPU 기술 기업이 아니라 사실상 글로벌 AI 플랫폼 기업이 되었고, 그 결과 전 세계 AI 투자의 흐름이 엔비디아라는 한 점에 집중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 현상이 비정상적인가? 엄밀히 말하면, 전통적 시장 이론 기준에서는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세계 경제가 단일 기업과 단일 자산의 변동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시스템 리스크를 키우는 불안 요소이며, 분산 투자와 균형 성장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에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버블이 아니라 기술·자본·정책이 맞물려 형성한 구조적 변화의 결과이다. 과거의 정상은 이미 사라졌고, 우리는 새로운 정상(뉴 노멀) 속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각국은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미국은 엔비디아 중심의 AI·GPU 생태계를 사실상 국가안보 자산으로 규정하고 있다.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규제 움직임은 있지만, 동시에 AI 산업의 전략적 우위를 미국이 유지하기 위해 엔비디아에 상당한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일본은 엔비디아와 같은 슈퍼스타 자산을 성장의 시발점으로 삼아 NISA(소액투자비과세 제도) 확대, 디지털 인프라 투자, 클러스터 육성 정책 등을 총동원해 자본시장 재활성화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은 GPU 조달 경쟁에 뛰어들며 추격을 선택했지만, 시장 쏠림 리스크에 대한 거버넌스는 아직 초기 단계다. 이 구조 변화는 중간 규모 국가일수록 더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몇 개의 글로벌 기업이 기술·자본·인재의 흐름을 독점하게 되면, 대부분의 국가는 기술 종속의 가능성을 피하기 어렵다. AI 시대의 플랫폼 경쟁에서 패하면 국가 경쟁력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한국이 AI 반도체, 데이터센터 정책, GPU 조달 전략, AI 제조혁신 클러스터 등에서 속도를 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우리가 목격하는 이 특이한 시장 동학은 비정상의 연속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 질서의 초입에 불과하다. 기술이 산업을 넘어 경제 전체의 구조를 재편하고, 금융시장은 스토리와 알고리즘 중심으로 움직이며, 자본은 그 스토리를 대표하는 몇 개의 ‘중력원(重力源)’으로 빠르게 수렴하고 있다. 그 중심에 엔비디아와 비트코인이 있다. 과거의 자본주의가 넓게 퍼져 있는 모델이었다면, 오늘의 자본주의는 깊게 집중되는 모델이다. 넓어지는 대신 깊어지고, 분산되는 대신 특정 지점에 중력을 모으는 형태로 변하고 있다. 이것이 시장을 취약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산업과 국가 전략을 설계하게 만드는 현실이다. 앞으로 세계는 이런 집중의 경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리고 한국은 이 변화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이 질문은 단지 금융시장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술, 산업, 국가 전략의 핵심에 관한 질문이다. 슈퍼스타 자산이 흔드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챗GPT가 등장한 지난 3년은 AI가 인간의 일상과 산업 전반을 재편하는 속도의 시대였다. 그러나 앞으로의 5년은 그보다 훨씬 더 큰 변화가 몰려올 시기다. AI 모델의 고도화, 데이터센터 경쟁, GPU·전력 인프라 문제, 제조업의 대전환까지 모든 산업과 국가 전략이 다시 설계돼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국가의 ‘설계력’이다. 더 큰 파도가 다가오는 만큼, 한국은 AI·제조·자본을 통합하는 방대한 국가전략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박스) 김정호 KAIST 교수가 제시한 ‘한국의 5대 전략’ (전기 및 전자공학부) 1. AI 인프라의 국가전략화; GPU 조달을 넘어 AI 개발–데이터센터–산업 적용을 연결하는 국가 AI 인프라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2. 제조업의 AI 클러스터 대전환; 포항·광양·울산 등 기존 제조 거점을 AI 기반 제조혁신 클러스터로 재편해 경쟁력을 재건해야 한다. 3. 기술 중심 자본시장 업그레이드; K-ETF 경쟁력 강화, 기술가치평가 혁신, 연기금의 전략산업 투자 확대를 통해 자본시장을 기술 혁신의 동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4. 미·일·중 ‘능동적 다중연결 전략’; 미국(AI·GPU)–일본(제조·인프라)–중국(시장·플랫폼)과의 분야별 선택적 협력 체계를 설계해 위험을 분산해야 한다. 5. 국가전략의 ‘설계자’로 전환; 한국은 더 이상 추격자일 수 없다. AI–제조–자본을 통합 설계하는 국가 아키텍처 전략이 필요하다. 슈퍼스타 자산 시대에 결정적인 것은 속도가 아니라 설계력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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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메이드 바이 AI …日 '3核 클러스터'로 中에 맞불
중국심서(中國心書) 2025 ⑥ ‘공장전쟁(Factory War)’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국제경제의 전면에 떠올랐다. <칩워(Chip War)>의 저자 크리스 밀러는 최근 발표에서 “반도체 전쟁의 다음 무대는 공장전쟁이 될 것”이라 경고했다. 그가 말하는 공장은 단순히 물건을 찍어내는 장소가 아니다. 국가의 기술력, 자동화 역량, 인공지능 통합능력이 집중된 전략 거점이라는 뜻이다. 생산설비를 가진 나라가 아니라, ‘지능화된 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 나라가 패권의 중심에 선다는 그의 주장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미 중국이 제조업 강국으로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한 상황에서, 공장전쟁이 시작된다면 일본은 기술력의 우위를 유지하더라도 스케일(규모)과 속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일본 정부와 산업계는 국가 차원의 대응전략을 서두르고 있다. 중국은 2015년 시진핑 정부가 내놓은 ‘중국제조 2025(Made in China 2025)’ 이후 10년 가까운 시간을 거치며 사실상 포스트 제조 2025 체제로 진입했다. 초기 계획은 10대 전략산업(로봇, 항공기, 첨단철도, 전기차, 반도체 등)의 국산화를 목표로 했다면, 지금의 포스트 제조2025는 단순한 제조 국산화를 넘어 ‘AI-로봇 융합 제조체계’로 전환되고 있다. 중국 산업정책의 최근 키워드는 세 가지다. 첫째는 AI+산업, 둘째는 디지털 트윈과 클라우드 제조, 셋째는 지역별 스마트공장 클러스터이다. 2024년부터는 각 성(省) 단위로 ‘AI 제조 고지대(高地)’ 구축이 본격화되었고, 상하이·선전·우한·항저우 등 주요 도시에는 생산라인의 70% 이상이 자동화·무인화된 공장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노동비 절감이나 효율화 차원을 넘어, 인공지능으로 생산·공급·물류를 통합 제어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하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에 두 가지 압박을 준다. 하나는 속도의 압박이다. 중국은 중앙정부의 지시 아래 지방정부와 국유기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일본처럼 조정형 경제체제가 아니라, 명령형 산업국가이기 때문에 실행 속도가 매우 빠르다. 또 하나는 스케일의 압박이다. 반도체와 배터리, 로봇 산업에서 일본이 기술적으로 앞서 있더라도, 중국의 투자규모와 내수 시장의 크기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일본의 고민은 기술의 정밀도보다 ‘생산체계의 민첩성’으로 옮겨가고 있다. 공장을 얼마나 빨리 설계하고, 얼마나 유연하게 운영하며, 얼마나 똑똑하게 자동화할 수 있는가. 이것이 공장전쟁 시대의 승부처라고 일본은 진단하고 있다. 이런 위기의식 아래 일본은 ‘팩토리 워(Factory War)’에 대응하는 세 단계 전략을 구상했다. 첫째는 공장입지의 다핵화, 둘째는 기술연계의 네트워크화, 셋째는 생산능력의 동맹화이다. 일본이 지금 추진 중인 이른바 ‘3핵(三核) 클러스터 전략’은 그 상징적 시도다. 북쪽의 홋카이도, 남쪽의 구마모토, 동쪽의 도호쿠 세 지역을 축으로 하여 국가 전체의 제조력을 한데 엮겠다는 구상이다. 홋카이도에는 미 IBM과 벨기에 반도체 연구기관 아이멕(Imec)이 공동 참여한 라피더스(Rapidus)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다. 2나노미터급 첨단공정 기술을 개발해 2027년까지 양산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이미 3조엔 이상을 투입했고, 홋카이도 신치토세 인근 지역을 ‘AI 반도체 기술연구특구’로 지정했다. 구마모토에는 세계적 파운드리 기업 TSMC의 제1공장에 이어 제2공장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소니, 덴소, 도요타 등이 투자자로 참여해 일본형 ‘자동차·산업용 반도체 허브’로 육성 중이다. 도호쿠는 대만 PSMC와 일본의 로봇·FA(Factory Automation) 기업들이 모여 ‘메모리-패키징-로봇융합 클러스터’로 발전하고 있다. 이 세 지역이 일본 제조업의 새로운 3핵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이 구상은 일본 경제산업성(METI)과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NEDO)가 직접 관리하는 국가 프로젝트로 성장했다. 이른바 ‘3핵 클러스터’는 단순히 생산거점을 분산하는 수준이 아니다. 데이터·전력·인력·기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디지털트윈 기반 공장네트워크를 지향한다. 일본은 이를 ‘Nippon Factory Network 3.0’이라 부른다. 홋카이도의 연구개발이 구마모토의 생산라인으로 실시간 전송되고, 구마모토의 생산데이터는 도호쿠의 로봇·FA 라인에서 피드백되어 다시 공정개선을 유도하는 구조다. 세 지역은 전력망(전력구매계약·에너지 저장장치 백업)으로도 연결되고, 산·학·연 인재교류 시스템(Factory Academy)으로 묶인다. 각 지역별로 AI전력관리센터를 운영해 생산·에너지·탄소배출을 동시 관리하는 스마트공장 운영체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단순한 제조혁신이 아니라, 에너지·환경·노동·데이터를 통합하는 ‘국가적 공장생태계’로의 진화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이런 시도는 1980년대 제조산업의 황금기 이후 처음으로 등장한 전면적 산업재편이다. 과거에는 도쿄권 중심의 본사·연구소, 나고야·오사카권 중심의 생산체계라는 이원구조였다면, 이제는 지역 균형형 다핵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홋카이도, 구마모토, 도호쿠라는 선택은 지리적·전략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홋카이도는 러시아와 가까워 북방 안보·기술거점의 상징이고, 구마모토는 대만·아시아 공급망과의 연결성이 탁월하다. 도호쿠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부흥정책의 중심지로, 지역경제 회복과 기술집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지역이다. 세 곳 모두 일본의 신(新)지정학적 제조지도에 핵심으로 찍히고 있다. 일본이 공장전쟁에서 내세우는 또 다른 전략 키워드는 ‘질(質)의 동맹’이다. 일본이 스스로 공장규모를 중국 수준으로 확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미국·대만·EU 등 동맹국과의 ‘공급망 동맹’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올해 5월 미국 상무부와 함께 ‘공장기반 공급망 협력위원회’를 신설했다. 반도체·배터리·희토류·첨단소재 등의 생산거점을 공동으로 배분하고, 생산·조달·재고·물류 데이터를 공유하는 시스템을 설계하기로 합의했다. 이른바 ‘얼라이언스 서플라이체인 이니셔티브’로 불리는 이 정책은 사실상 공장전쟁의 군사동맹 버전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이를 ‘경제판 미일안보조약’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보조금 정책의 방향도 전면적으로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생산량이나 고용규모에 비례해 지원금을 지급했지만, 이제는 기술성숙도, 생산성, 에너지효율, 데이터 연동 수준 등에 따라 성과연동형으로 전환했다. 단순한 공장설립 지원이 아니라, 공장을 얼마나 지능화하고, 얼마나 탄소중립적으로 운영하느냐가 보조금의 핵심 조건이 된다. 또한 경제안보전략회의는 2027년까지 산업데이터 스페이스를 제도화하기로 했다. 반도체·배터리·자동차·로봇 산업별로 생산데이터를 표준화하고, 데이터권리·보안·수익배분 규칙을 명시한 것이다. 이는 한국이나 유럽이 추진 중인 산업데이터 스페이스 모델과 유사하지만, 일본식 특징은 ‘정부·기업 공동의 권리 공유’에 있다. 공장전쟁 시대의 자산은 데이터라는 사실을 일본은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질의 동맹’ 전략은 중국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기술·인재·데이터·공급망을 동맹국 중심으로 재배치하는 효과를 낸다. 일본의 경제안보 전략가들은 “중국이 공장을 양으로 늘린다면 일본은 공장을 네트워크로 엮어 질로 맞선다”고 요약한다. 실제로 2024년 일본의 제조산업 생산지수는 2년 연속 하락세지만, 반도체 장비·정밀부품·로봇 분야의 생산성 지수는 오히려 상승세를 기록했다. 이는 단순히 경기회복이라기보다, 공장자동화·데이터화가 일정한 성과를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대응이 이렇게 빠른 것은 중국의 ‘포스트 제조 2025’ 정책이 이미 공장전쟁의 실질적 1라운드를 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현재 ‘신형공업화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2035년까지 제조 강국에서 ‘지능제조 강국’으로 도약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 핵심은 'AI가 통제하는 초대형 스마트팩토리' '지역별 산업 클러스터의 AI화' '산업데이터를 국가통합플랫폼에서 관리하는 체계다. 예컨대 광둥성의 ‘스마트공장 1000 프로젝트’는 2025년까지 1000개의 AI·로봇 융합공장을 가동하는 목표를 세웠고, 저장성은 ‘AI 제조 시티’를 조성해 전력·물류·공정 데이터가 한 플랫폼에서 통제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속도를 일본은 두려워하고 있다. 일본의 한 경제학자는 “중국의 공장은 이미 AI가 지배한다. 일본이 아무리 정밀해도 속도가 늦으면 공장전쟁에서 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우선 일본은 ‘질적 동맹’과 ‘국가 클러스터화’를 더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기술·데이터·전력·인력·자본을 하나로 엮는 구조를 완성하지 못하면, 일본의 공장은 결국 섬처럼 고립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5년부터 ‘Nippon Factory Network 법안’을 추진 중이다. 이 법은 반도체·배터리·로봇 등 전략산업의 공장 간 데이터교환과 인력파견, 전력공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산업정책이 아닌 인프라법 형태로 상정되어, 제조업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디지털생태계로 재편하려는 시도다. 또 일본은 ‘경제안보 기술연구센터(ESTI)’를 신설해 AI공정·로봇공정·소재 데이터 연구를 통합 관리할 계획이다. 이는 미국의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독일의 프라운호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수행하는 역할과 유사하지만, 방위·산업·외교를 모두 엮는 형태다. 궁극적으로 일본은 공장전쟁을 단순한 산업경쟁이 아니라, ‘문명적 생존전략’으로 본다. 20세기 일본의 산업 기적이 인구·노동·기계의 결합이었다면, 21세기 일본의 재도약은 AI·데이터·공장의 결합에서 온다. 일본은 이미 늦었지만 방향을 잃지는 않았다. 다핵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한 산업재편, 동맹형 공급망, 데이터중심의 제조혁신은 공장전쟁 시대의 필수 조건이다. 중국의 포스트 제조2025가 압도적 규모와 속도로 세계 제조지형을 바꾸고 있다면, 일본은 고밀도·고지능·고신뢰의 체계로 맞서는 것이다. 세계는 이제 칩워에서 팩토리워로 이동하고 있다. 반도체가 산업의 심장이었다면, 공장은 산업의 신경망이다. 누가 더 많은 칩을 만드는가보다, 누가 더 똑똑하게 공장을 돌릴 수 있는가가 국가경쟁력을 결정짓는다. 중국이 속도와 규모를 앞세운다면, 일본은 지능과 연대, 그리고 품질로 맞서야 한다는 전략이다. 그 전략의 성패는 홋카이도, 구마모토, 도호쿠—이 세 지역에서 결정될 것이다. 일본의 ‘3핵 클러스터 전략’은 공장 지능화·네트워크화·동맹화로 국가 경쟁력을 재편하는 프로젝트다. 한국도 AI 3대 강국 비전을 실현하려면 기술·인재·데이터·공장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클러스터 단위 제조혁신·AI 테스트베드 구축·동맹형 공급망·현장 인재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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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AI 강국위한 100조 베팅 …'올인'인가 '올킬'인가
미국 뉴욕타임스는 최근 데이터센터를 두고 흥미로운 비유를 들었다. 그것은 오늘날 테크 산업의 건강도를 재는 체온계이자, 동시에 AI 버블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찬사와 불안이 동시에 덧씌워진 이 정의는 지금 전 세계가 마주한 인공지능 시대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나의 데이터센터를 짓는 데에는 수천억~수조원의 자금이 들어간다. GPU(그래픽 처리 장치)와 서버를 조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식히기 위한 냉각 기술, 막대한 전력망, 그리고 안정적 부지와 규제가 따라붙는다. 그럼에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앞다투어 투자를 늘리고 있다. 일본, 싱가포르, 대만 등도 국가 차원에서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투자자들에게 데이터센터는 AI 붐의 살아있는 지표이자, 동시에 거품 논란의 불씨다. 바로 이런 시점에 한국은 새 정부 출범과 함께 ‘AI 3대 강국’을 향한 국가적 올인 전략을 선언했다. GPU 5만장 확보, 100조원 투자, 데이터센터 확충 등. 이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 자원 배분이 뒤따르는 전례 없는 결단이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이 전략은 과연 한국의 새로운 도약의 사다리가 될까, 아니면 버블 붕괴의 추락 사다리가 될까. 정부가 이처럼 과감하게 AI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는 배경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무엇보다 성장 동력의 고갈이 크다. 반도체와 자동차는 여전히 한국 경제의 기둥이지만, 더 이상 과거처럼 두 자릿수 성장을 견인하지 못한다. 고령화와 저성장이라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 AI는 거의 유일하게 남은 미래 성장 후보로 비친다. 둘째는 산업 경쟁력의 위기감이다. 미국과 중국은 이미 AI를 국가안보와 패권 경쟁의 핵심에 올려놓았다. 미국은 반도체와 GPU 공급망을 동맹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한국을 강하게 끌어들이고 있다. 중국은 국가 주도로 ‘제조 2025’ 이후의 전략을 AI로 옮겨가고 있다. 이 속에서 한국이 주저한다면 곧바로 종속국가로 전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되어 있다. 셋째는 정치적 동력이다. 이재명 정부는 포스트 탄핵 정국에서 출범했다. 사회를 통합하고 국정의 동력을 확보할 분명한 비전이 필요했다. ‘AI 강국’은 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국제 환경과, 미래 성장이라는 국내 과제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간명한 구호였다. 과감한 올인은 분명 기회가 된다. 먼저 한국을 단숨에 글로벌 AI 경쟁의 전선에 올려놓는다. GPU와 데이터센터 같은 인프라는 속도전에서 후발주자가 따라가기 힘들다. 한국이 선제적으로 투자하면, 반도체 신화를 재현할 가능성이 생긴다. AI가 만들어낼 산업 생산성 혁신도 크다. 의료 진단, 행정 간소화, 금융 리스크 관리, 제조 자동화, 교육 플랫폼 혁신 등 국민이 체감할 성과가 빠르게 쌓일 수 있다. 대기업만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이 국가 인프라를 값싸게 활용할 수 있다면, ‘작은 기업의 큰 도약’이 가능하다. 한국 경제가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대기업 의존도를 낮추는 계기도 될 수 있다. 또한 GPU와 데이터센터는 단순한 경제 인프라가 아니라 전략 자산이다. 이를 보유한 국가는 기술 패권의 협상 테이블에서 발언권을 갖게 된다. 미국과 일본, EU와의 협력에서 영향력을 높일 수 있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전략적 완충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올인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뒤따른다. 첫째는 재정의 지속성이다. 100조원이라는 숫자는 명분은 크지만, 한국의 재정 현실을 고려하면 지속 가능성에 의문이 따른다. 고령화와 복지 지출은 늘고, 세수는 경기 둔화로 줄어들고 있다. AI 투자가 정치적 비판의 표적이 될 위험도 있다. 훗날 정권이 교체된다면 중도에 무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둘째는 민관 파트너십의 불확실성이다. 삼성, SK, 네이버, 카카오 같은 대기업은 AI 국가전략의 실제 주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재벌개혁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협력을 요청한다면 기업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AI만큼은 민관이 일체가 된다”는 특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셋째는 에너지 문제다. 데이터센터는 안정적인 전력이 없으면 가동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부는 탈원전의 가능성을 내비치며 태양광과 풍력 중심의 재생에너지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이상적 목표와 현실 수요 사이의 간극은 너무 크다. 과도기적 대안 없이 신재생만으로 AI 인프라를 감당하는 것은 위험하다. 넷째는 대외 리스크다. 미국은 동맹망을 통해 GPU·반도체 공급망을 장악하려 하고,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곧바로 외교적 부담으로 돌아온다. 유럽의 AI 규제 확산도 한국 기업에 새로운 장벽이 될 수 있다. 이런 불안 속에서 지난 9월 22일, 뉴욕에서 열린 한 만남은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주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글로벌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을 만난 것이다. AI와 에너지 전환을 포함한 다양한 협력 방안이 논의됐다. 블랙록은 단순한 투자회사가 아니다. 10조 달러가 넘는 자산을 굴리며 세계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거대 플레이어다. ESG와 기후 전환 투자의 선두주자로서, 그들의 관심은 단순한 수익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과 리스크 관리다. 블랙록은 한국 시장에서도 주요한 투자자로 자리 잡았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하이닉스 등 한국 대표 기업들의 지분을 일정 부분 보유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해 왔다. 단일 기업 지분율은 2~5% 수준이지만, 글로벌 자산운용사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특히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 가운데 블랙록 계열 펀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아, 경영 감시와 지배구조 개선 요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외국인 투자자 신뢰의 척도로 여겨진다. 카카오·네이버 같은 플랫폼 기업에도 참여해 한국 신산업 성장 가능성에 베팅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따라서 이 대통령과 래리 핑크 회장의 만남은 한국의 AI 전략이 국내 재정사업에 머무르지 않고, 국제 자본과 연결된 글로벌 프로젝트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데이터센터 전력난, 탄소배출 문제는 한국 혼자 해결하기 어렵다. 그러나 블랙록 같은 글로벌 자본과 파트너십을 맺는다면 자금과 기술, 신뢰를 함께 끌어들일 수 있다. 무엇보다 블랙록의 리스크 관리 철학은 한국의 올인 전략이 버블 논란을 넘어서 국제적 신뢰를 확보하는 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이재명 정권은 진보정권답게 큰 정부를 지향한다. 복지 확대와 AI 투자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 정책이 뒤집힐 위험도 크다. 따라서 민간 매칭과 정책금융, 연금기금까지 포함하는 AI 전용 펀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정권이 바뀌어도 지속할 수 있다. 이재명 정부는 물론 대규모 국민성장펀드를 조성, 첨단산업에 투자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대기업과의 관계도 쉽지 않다. 진보정권은 전통적으로 재벌개혁을 강조하지만, AI는 대기업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AI만큼은 예외적으로 민관 동맹’이라는 정치적 합의 없이는 동력이 부족하다. 에너지 정책도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재생에너지 확대는 옳지만,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 전력이 필요하다. 원자력, 가스 같은 전통 전원과의 믹스 없이는 AI 올인은 버블의 위험을 키울 수밖에 없다. 대외관계 역시 시험대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한국이 “AI=미국 편”으로만 보인다면 중국과의 경제 충돌은 불가피하다. 일본과의 협력을 글로벌 공공재로 포장하고, ASEAN·인도·중동 같은 제3시장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블랙록과의 접점은 이런 국제 확산 전략의 실질적 발판이 될 수 있다. AI 국가 올인 전략은 한국의 미래를 건 초고속 엘리베이터와 같다. 성공하면 한국은 새로운 성장 신화를 쓸 수 있다. 실패하면 추락의 충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모든 것은 한국의 자세에 달려 있다.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고, 민관의 신뢰를 구축하며, 에너지의 현실적 전환을 이루고, 외교에서 균형과 확장성을 확보해야 한다. 블랙록 회동이 보여준 것처럼, 글로벌 자본과 손잡는 시도가 이어지고 국민이 체감할 작은 성공이 쌓여간다면, 한국의 올인은 위험한 도박이 아니라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될 것이다. (박스) 블랙록이 한국에 기대하는 4대 포인트 ① AI·디지털 전환 잠재력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AI 3대강국’ 전략과 대기업의 GPU 대규모 투자, 반도체·디지털 인프라 강점은 글로벌 자본이 주목하는 미래 성장축이다. ② 에너지 전환 가속화 재생에너지 확대, 수소·원전 병행 전략 등은 블랙록의 ESG·그린 인프라 투자 철학과 맞닿는다. 한국은 동북아 에너지 허브로 성장할 기회를 가진다. ③ 혁신적 대기업 생태계 삼성·SK·현대차·포스코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국가 챔피언 기업’들이 존재한다. 블랙록은 이들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수익을 기대한다. ④ 민관 협력의 제도화 가능성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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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반대'는 그만, 대안으로 말하라
대한민국 보수가 가야 할 길 ⑥ 한국 정치는 언제나 극적이다. 정권이 교체되면 정치 구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경제 철학도 크게 달라진다. 지금은 진보 정권이 들어서 복지와 분배 중심의 정책을 강화하는 국면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 야당이 어떤 전략으로 국민 지지를 확보하고 경제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을까.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미래 비전을 보여주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처럼 기업이 경제성장의 핵심 엔진인 나라에서 보수의 경제 전략은 기업과 국민을 어떻게 연결 짓느냐가 핵심이 된다. 보수 정당은 전통적으로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내세워 왔다. 그러나 이를 직접적으로 강조할 경우 재벌 편향이나 대기업 중심 이미지가 강화될 위험이 크다. 진보 진영은 늘 ‘재벌 특혜’라는 프레임을 덧씌우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가 내세워야 할 프레임은 이를 뛰어넘어야 한다. 기업의 성장이 곧 국민소득 향상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로 이어진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는 일본의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추진한 아베노믹스를 사례로 들었다. 아베 전 총리는 기업 세제 감면을 단순한 기업 혜택이 아니라 ‘임금 인상을 조건부’로 연계했다. 그 덕분에 정책은 기업 지원이 아니라 국민소득 증대로 이어졌고, 보수 집권당이면서도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권 이사는 “한국 보수 야당도 이런 전략적 설계가 필요하다. ‘기업이 잘돼야 국민이 잘산다’는 단순한 등식에서 더 나아가 ‘기업의 성과를 국민에게 환원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통적 논리라면 진보 정권이 분배와 복지에 집중할 때 보수는 미래 성장과 기술 투자를 앞세워야 한다. 한국이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보유한 분야, 다시 말해 반도체·AI·그린수소·바이오헬스 등 신산업을 중심으로 한국형 메가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이재명 정부가 야당보다 훨씬 미래지향적이고 망라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어 보수 야당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따라서 야당은 이런 정책의 핵심이 국가 주도가 아니라 민간 주도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뿐 아니라 스타트업과 중견기업이 중심이 되고, 정부는 규제 완화와 인프라 제공을 통해 뒷받침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보수의 경제 전략은 단순히 기업 편향이 아니라 ‘민간이 이끄는 국가 성장 프로젝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는 곧 '기업=국가 성장 파트너'라는 명확한 구도로 연결된다. 보수가 규제 완화를 외치면 곧바로 기득권 대기업의 편익으로 귀결될 수 있다. 무분별한 규제 완화는 국민적 지지를 얻기 어렵다. 대안은 명확하다. 규제혁신의 수혜를 스타트업과 지방 중소기업에 우선 배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규제 샌드박스’ 모델을 확산시켜야 한다. 혁신 기업이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수 있도록 일정 기간 규제를 유예하거나 실험적으로 풀어주는 방식이다. 이 모델은 단순히 경제정책 차원을 넘어 지역균형발전과도 연결된다. 지방의 중소기업과 청년 창업자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보수의 규제혁신은 '국민을 위한 혁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정치에서 숫자는 강력한 무기다. '성장률을 높이겠다'는 막연한 구호는 설득력이 약하다. 대신 보수 야당은 경제정책의 구체적인 성과지표를 제시해야 한다. 예컨대 청년 고용률 몇 % 달성, 가계 실질소득 몇 % 증가, 지역별 신산업 투자액 확대 등 이런 지표를 통해 정권 비판을 넘어 '우리가 집권하면 이렇게 달라진다'를 수치로 보여줄 수 있다. 경제정책이 국민 생활과 직접 연결된다는 확신을 줄 때 보수는 미래의 집권 세력으로서 신뢰를 쌓을 수 있다. 보수의 경제전략은 국민과의 소통 방식에서도 달라져야 한다. 단순히 정책 자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기업·정부·국민의 3자 동맹을 강조하며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온·오프라인 타운홀 미팅, 유튜브 경제 브리핑, SNS 경제 캠페인 등 국민과 직접 연결되는 플랫폼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도 현 정권이 야당보다 압도적인 강세를 보인다. 대만 국민당이 진행했던 ‘경제 현장 간담회’는 좋은 벤치마킹 사례다. 기업을 방문한 뒤 근로자, 지역 상인과 함께 공개 토론을 열어 경제 정책을 생활 현장에 맞춰 설명했다. 한국 보수 야당도 기업 방문과 지역 민생 현장을 결합한 ‘국민경제 소통 캠페인’을 통해 경제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다. 결국 보수 야당이 국민에게 각인시켜야 할 메시지는 단순하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가 곧 국민이 잘사는 나라'라는 공식이다. 단기 분배 정책은 당장의 만족을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투자와 성장, 기회의 확대가 필요하다. 보수는 기술혁신과 투자 주도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성장은 곧 복지'라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진보가 복지를 앞세운다면 보수는 성장을 내세워야 한다. 국민에게는 선택지가 필요하다. 복지냐 성장이냐, 단기냐 장기냐, 재분배냐 투자냐. 이 구도가 분명해질 때 보수의 존재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렇듯 보수 야당이 국민에게 던질 수 있는 메시지는 예를 들어 '우리는 기업을 살려 국민을 살립니다. 성장은 곧 복지입니다' '기술혁신으로 내일의 일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지방에도, 청년에게도, 중소기업에도 기회가 돌아가는 경제를 만들겠습니다' 등이 있을 수 있겠다. 이 메시지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전략과 정책으로 뒷받침될 때 국민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 진보정권 시대일수록 보수 야당의 경제 리더십은 단순한 견제가 아니라 대안과 혁신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 보수가 국민의 선택을 다시 얻는 길이다. 최근 오피니언 리더들이 모이는 한 포럼에서 ‘AI 강국 건설, 보수 야당이 취해야 할 길’이란 주제로 논의가 있었다. 이재명 정권이 내세우고 있는 최중요 경제 전략은 단연 ‘AI 강국 건설’이다. 정부는 인공지능을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규정하며 대규모 재정 투입과 국가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선두를 추격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국민 여론 역시 총론에서는 대체로 동의한다. AI는 시대적 대세이고, 한국 경제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반드시 매달려야 할 분야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다. 문제는 각론이다.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재정과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수 야당의 역할이 중요하다.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은 국민적 호응을 얻기 어렵다. 그렇다고 무조건 동조한다면 존재감이 사라진다. AI 강국이라는 국가적 비전에는 동의하되 실행 방식과 정책 수단에서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향후 수권정당으로서 입지를 다지는 길이다. AI 강국은 특정 정권의 과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과제다. 지금 세계는 미국, 중국, 유럽이 치열한 AI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이 뒤처지면 경제와 안보 모두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보수 야당이 이 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국민 눈높이에도 맞지 않고 장래의 전략적 선택지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보수 야당이 취해야 할 기본 태도는 ‘조건부 동의’다. 즉, AI 강국이라는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식에 대해서는 철저히 검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길은 맞지만 방법은 더 정교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이 포럼에서는 진보정권 방식의 문제점이 지적됐다. 현 정권의 AI 전략은 크게 세 가지 문제점을 노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재정 의존적 성격이다. 대규모 예산을 앞세운 국가 프로젝트는 단기간 효과는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재정 건전성을 훼손한다. 특히 고령화와 복지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AI 분야까지 막대한 지출을 감당하는 것은 미래 세대의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 둘째, 생태계 불균형이다. 정부 주도의 지원은 대기업 위주로 집중될 위험이 크다. 이 경우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혁신 역량은 위축되고, 오히려 산업 다이내믹스가 줄어드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셋째, 제도적 불투명성이다. AI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신뢰성이 핵심이다. 그런데 정책 과정에서 특정 기업·집단과 유착되거나 불투명한 지원 구조가 발생하면 사회적 반발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단순한 정치적 반대를 넘어 국민들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우려이기도 하다. 따라서 보수 야당은 이를 ‘건설적 비판’의 지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와 함께 보수 야당도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다. 비판만으로는 정치적 존재감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수 야당은 ‘보수식 AI 국가 전략’을 분명하게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시행 저스트 이코노믹스 논설실장은 다음과 같이 대안을 제시했다. 첫째, 민간 주도-정부 촉진자 모델이다. 정부는 인프라 제공, 제도 정비, 규제 완화 등 큰 그림에 집중하고 실제 투자와 혁신은 민간이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는 길을 닦고, 기업은 달린다'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둘째, AI와 일자리의 조화를 강조해야 한다. 국민의 가장 큰 불안은 AI가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보수 야당은 'AI로 새로운 고급 일자리를 창출하고, 전 국민 재교육(Reskilling) 체계를 구축한다'는 메시지를 내세움으로써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셋째, 지역 균형 발전형 AI 전략을 내야 한다. 지금처럼 수도권 중심으로만 자원이 집중된다면 지방 소멸은 더 빨라진다. 지방 대학과 기업을 연계한 지역별 AI 허브를 육성함으로써 전국적 파급효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넷째, 글로벌 연계 전략이다. 한국의 AI 전략이 미국이나 중국의 기술 종속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유럽·동남아 등 다양한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 반도체에서 ‘K-칩 동맹’을 만들었듯이 AI에서도 ‘K-AI 글로벌 네트워크’를 추진하는 것이 보수식 비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무조건 찬성만 해서는 야당의 존재감이 없다. 무조건 반대만 해서는 국민의 호응을 얻기 어렵다. 따라서 보수 야당은 ‘찬성+감시+대안 제시’라는 삼중 전략으로 접근해야 한다. 즉 'AI 강국은 우리 모두의 목표다. 그러나 무분별한 재정 낭비와 불투명한 정책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더 효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길을 제시하겠다'는 식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은 국민에게는 책임 있는 대안세력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정치권 내부에서는 향후 수권정당으로서 신뢰를 다지는 데 기여할 것이다. AI는 시대정신이다. 한국이 AI 강국으로 도약하지 못하면 제조업·서비스업 전반에서 국제 경쟁력을 상실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비전 자체는 초당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는 각 정치세력의 철학과 역량이 시험대에 오르는 무대다. 보수 야당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AI 강국이라는 국가적 대의에는 함께하되 집권 여당의 정책 추진 방식에 대해서는 철저히 검증하고 더 나은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보수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낡은 이미지를 벗고, 국민이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책임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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