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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7 FRI
브랜드칼럼
황승연 교수
황승연 교수 lion@khu.ac.kr
  • -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 전 경희대학교 (주)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 굳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 [황승연의 타임캡슐] 서울에 묶인 권한, 지방의 시간을 빼았다

    대한민국은 흔히 일본의 뒤를 따라간다고 말한다. 부동산 가격도, 저성장도, 고령화도. 그러나 인구 문제만큼은 단순한 '추격'이 아니다.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소멸 사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일본이 40여 년에 걸쳐 겪은 변화를 우리는 불과 10~20년 사이에 압축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인구 감소 현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경제와 산업, 교육과 국방, 지방 공동체와 복지 재정, 그리고 기업의 지속 가능성까지 국가를 지탱하는 모든 기반이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일본이 먼저 경험한 소멸 사회의 현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국가다. 1990년대 이후 출산율이 장기간 1.3명 안팎에 머물고 평균수명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늘어나면서 2007년에 이미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1%를 넘어섰다. 현재는 약 30%에 이른다.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1995년 약 8700만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꾸준히 감소하여 현재는 7300만명 수준까지 줄었다. 인구 감소는 지방부터 무너뜨렸다. 일본 총무성 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국의 빈집은 약 900만호에 달한다. 전체 주택의 13.8%, 다시 말해 집 7~8채 가운데 한 채가 비어 있는 셈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집을 무료로 주거나 1엔에 매물로 내놓는 사례까지 등장하였다. 사람이 떠난 마을에는 상점이 문을 닫고 병원이 사라지며 버스와 철도 노선이 폐지되었다. 학생 수가 급감하면서 학교는 통·폐합되었고 산부인과와 소아과가 없는 지역도 늘어났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65세를 넘어 공동체를 유지할 최소한의 노동력과 소비가 사라진 마을도 크게 늘었다. 이미 2014년 일본 민간연구기관인 일본창성회의는 전국 1799개 기초 지방자치단체 중 49.8%인 896개 지방자치단체가 장기적으로 소멸할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하여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지방 소멸이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청년들의 삶도 달라졌다. '초식남', '사토리 세대', '비혼 문화'라는 말이 사회현상이 되었다. 경쟁과 출세보다 최소한의 삶을 선택하는 청년들이 늘어났다. 물질적 욕망을 버려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었기 때문이다. 성장 사회가 축소 사회로 바뀌면서 인간의 가치관까지 변했다. 일본의 대응과 한계, 그리고 한국이 더 위험한 이유 일본 정부도 이러한 위기를 방관하지는 않았다. 1994년 '엔젤플랜'을 시작으로 '신엔젤플랜', '저출산사회대책기본법', '어린이·육아지원법' 등을 차례로 시행하였다. 아동수당 확대, 무상보육, 육아휴직 확대, 보육시설 확충 등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였다. 최근에는 '차원이 다른 저출산 대책'이라며 연간 약 3조엔 규모의 추가 재정을 편성하고 있다.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2024년 일본에서 일하는 외국인은 230만명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정년을 65세 이상으로 연장하고 일부 기업은 70세까지 계속고용을 실시하고 있다. 제조업과 물류업은 자동화와 인공지능을 적극 도입하고 있으며, 편의점과 음식점에서는 노인 종업원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수십년 동안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음에도 출산율은 여전히 1.15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인구 감소를 막지 못했고 다만 감소 속도를 조금 늦추었을 뿐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이다. 한번 시작된 인구 감소는 그만큼 되돌리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보다 더욱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3년 0.72명, 2024년 0.75명, 2025년에도 약 0.8명 수준으로 OECD 국가 가운데 1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일한 국가다. 현재의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대체출산율 2.1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일본이 '감소 사회'라면 한국은 이미 '소멸 사회'의 문턱을 넘어섰다. 고령화 속도 또한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한국은 2025년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1%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진입하였다. 2050년에는 약 40%가 65세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생산가능인구가 노인 한 명을 부양하는 비율은 현재 약 3.4명에서 2035년에는 2명 안팎, 2050년에는 1.3명 수준까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장기요양보험 모두 지금의 제도로는 지속 가능성을 장담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에 남은 마지막 골든타임 인구 감소는 단순히 아이 숫자가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다. 노동력이 줄고 소비가 감소하며 창업이 위축된다. 대학은 신입생을 채우지 못하고 군은 병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중소기업은 후계자를 찾지 못해 문을 닫고 지역 경제는 활력을 잃는다. 세금을 내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연금과 의료비는 계속 늘어난다. 결국 남아 있는 생산가능인구에게 더 많은 세금과 부담이 집중된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면 국가는 성장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현금 지원이나 일회성 출산장려금만으로는 부족하다. 청년들이 미래를 믿고 결혼과 출산을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양질의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업의 성장 환경을 조성하고, 과도한 주거비 부담을 완화하며, 지방에도 독자적인 교육과 문화, 산업이 함께 살아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수십년에 걸쳐 축적된 기업이 세대를 넘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기업 승계를 가로막는 제도적 장벽도 함께 제거해야 한다.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생기고, 일자리가 있어야 청년은 결혼과 출산을 계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 모두 이 문제를 국가의 생존 문제로 인식하는 일이다. 지금의 저출산과 고령화는 어느 한 부처나 한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정책 과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존립과 직결된 문명적 과제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늙어가면서 값비싼 대가를 치렀고 지금도 치르고 있다. 우리는 아직 선택할 시간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다.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일본보다 훨씬 빠르고 출산율은 일본보다 훨씬 낮다. 다시 말해 일본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일본보다 더 빠르게 소멸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일본은 잃어버린 40년을 경험했지만, 한국은 지금과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잃어버린 한 세대'를 넘어 국가의 지속 가능성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인구는 경제지표가 아니라 국가의 생명력이다. 인구가 사라지면 시장도, 기업도, 복지도, 국방도 함께 무너진다. 소멸 사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지금의 선택이 만들어 내는 미래이다. 지금이 대한민국의 마지막 골든타임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지방의 자율과 책임이다 지금까지 소멸 사회를 막겠다며 중앙정부가 내놓은 수많은 정책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백조원의 예산을 투입했지만 수도권 집중은 더욱 심해졌고 지방 소멸은 오히려 빨라지고 있다. 정책이 실패했는데도 정책을 만드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돈도 권한도 중앙정부가 쥐고 있고, 지방은 중앙정부의 예산과 허가를 기다리는 처지에 놓여 있다. 서울에 있는 중앙정부와 국회가 지방의 현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한계에 이른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9년 지방분권 개혁을 단행하였다.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하면서 각 지방이 스스로 살 길을 찾도록 했다. 그 결과 모든 지역이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의미 있는 사례들이 나타났다. 후쿠오카시는 규제 완화와 창업 지원을 통해 일본 최고의 스타트업 도시로 성장했고, 도야마시는 '콤팩트 시티' 정책으로 고령사회에서도 도시 기능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인구 5천명 남짓한 도쿠시마현 가미야마정은 정보통신 기업을 적극 유치하여 젊은 인구가 다시 찾아오는 마을로 변모하였다. 중앙정부가 만든 성공이 아니라 지방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진 결과였다. 대한민국도 이제 지방을 중앙정부의 지원 대상이 아니라 국가 발전의 주체로 바라보아야 한다. 지방정부에 징세권과 예산권과 재정운영권과 규제 완화 권한, 산업 유치 권한을 과감하게 넘겨주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지도록 해야 한다. 모든 지방이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몇몇 지역이 성공하면 그것이 다른 지방의 혁신을 이끄는 경쟁이 된다. 지금처럼 모두를 똑같이 관리하는 중앙집권 체제로는 모두가 함께 쇠퇴할 가능성이 더 크다. 소멸 사회는 인구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 운영 방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같은 방법을 반복한다면 소멸 사회는 더 이상 예측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더 유능한 중앙정부가 아니라 더 강한 지방이다. 지방이 살아야 기업이 살고, 기업이 살아야 청년이 남으며, 청년이 남아야 아이가 태어난다. 지방분권은 지방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국가 개혁의 출발점이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황승연의 타임캡슐]  서울에 묶인 권한, 지방의 시간을 빼았다
  • [황승연의 타임캡슐] 노인과 바다 …빈집과 절벽

    소멸 사회로 가는 길목에 서다 (2) 한국 사회에서 언젠가부터 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있다. 산부인과 간판이 내려지고, 신생아실은 텅 비었다. 초등학교는 문을 닫고, 중고등학교는 합병하고, 대학은 신입생을 채우지 못한다. 군부대가 사라지고, 3교대 하던 군인들은 2교대를 한다. 과거에는 '인구 감소'를 말하면 먼 미래의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지금 단순한 저출산 국가가 아니라 사회 자체의 재생산 기능이 무너지는 ‘소멸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결혼이 먼저 무너졌다 출산 감소 이전에 결혼 감소가 먼저 있었다. 한국 사회는 유럽과 달리 혼외 출산 비율이 극히 낮다. 대부분의 출산은 결혼 안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결혼 감소는 바로 출산 붕괴로 이어진다. 그런데 청년들이 왜 결혼을 포기하는가? 집값, 과도한 교육비, 고용 불안, 계층 이동 불가능, 세금 부담, 미래 자산 형성 불가능 등이 원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경제 문제가 아니라 ‘삶의 전망 붕괴’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회’보다 심각한 것은 ‘아이를 낳아도 미래가 없다고 느끼는 사회’다. 결혼 감소뿐 아니라 초혼 연령도 상승했다. 서른 중반에 결혼하는 여성들을 보는 것이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여성 취업 인구의 증가는 결혼 감소와 결혼 연령 상승으로 이어졌다. 해결책으로 청년들에게 현금을 지급하거나 복지 예산을 늘리는 것으로는 출산율을 높이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2006년 이후 지금까지 저출산 대응 예산 누계가 300조원을 넘었다. 그러나 출산율은 1.12에서 0.72까지 하락했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이 먼저 겪었다. 일반적으로 65세 이상인 인구가 21%를 넘어서면 초고령사회라 말한다. 일본은 2007년에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하였다. 한국은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 통계분석에 따르면 2025년 말 기준 65세 이상 인구가 약 1084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21.21%를 차지한다.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2036년에는 30.9%, 2050년에는 40%를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단순한 생산 가능 인구 감소뿐 아니라 지역 소멸과 연금 재정 압박이 동시에 진행되어 아무런 대책도 통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될 때 실제로 벌어진 일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지방이 무너지고, 빈집이 급증하고, 상점가가 폐쇄되고, 학교가 통폐합되고, 지방 병원이 폐업한다. 일본에는 '한계집락(限界集落)'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65세 이상 고령자가 절반을 넘어 공동체 유지가 불가능한 마을을 뜻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일본 청년들 사이에는 초식남, 사토리 세대, 비혼 증가, 미래 포기 현상 등이 나타났다. ‘사토리 세대’란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희망과 의욕이 없어서 돈도 명예도 출세도 유흥에도 관심을 끊은, 마치 득도한 것처럼 보이는 청년들을 뜻한다. ‘성장 사회의 인간형’이 아니라 ‘축소 사회의 인간형’이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 청년들이 표현하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보다 더 위험하고 더 빠르게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출산이 무너지다 한국 출산율은 일본보다 훨씬 낮다. 일본은 약 1.2~1.3 수준의 기대 출산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0.8이 채 되지 않는다. 세계 최저 수준이다. 일부 지역은 0.5 이하이다. 일본이 ‘감소 사회’라면 한국은 ‘소멸 사회’에 가깝다. 수도권 집중도 일본보다 심하다. 일본은 도쿄 집중이 심하지만 오사카·나고야·후쿠오카 등 거점이 유지되고 있다. 한국은 서울 집중이 압도적이다. 수도권에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지방 청년 유출도 극심하여 지방 소멸 속도가 일본보다 빠르다. 인구 감소가 가져올 실제 결과는 우선 노동력 부족이다. 제조업 인력이 줄어들고 군 병력은 감소하고, 지방 공무원과 돌봄 인력도 부족해진다. 생산인구 부족으로 세수가 줄면 세금을 낼 능력이 되는 계층에 대한 세금 폭증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의 상속세, 증여세, 부동산 관련 세금을 더 올리자는 주장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젊은 세대 감소는 부양해야 하는 노인 비율의 증가로 나타난다. 연금 부담이 증가하고 건강보험 부담도 증가하며, 증세 압력도 증가한다. 부동산은 장기적으로 청년이 떠난 지방 부동산의 가치 하락으로 이어지며 일본처럼 ‘집이 남아도는 시대’가 올 수 있다. 젊은 세대가 줄면 창업 감소, 소비 감소, 모험 감소로 나타나고 사회 전체가 ‘현상 유지 사회’로 변한다. 노인과 바다 전국 광역시 중에서 부산이 고령화가 심각하다. 2025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약 24.5~25.3%로 가장 높다. ‘노인과 바다’라는 말이 부산을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고령화 비율보다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출생아 수 감소, 청년층 수도권 유출, 취업시장 구조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은 초고령 대도시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선행 사례가 되고 있다. 부산의 원도심으로 불리는 중구·동구·서구·영도구가 있다. 고령화 지수가 가장 높은 곳이다. 고령의 거주자들이 사망하거나 요양시설로 입소하면서 주택이 비는 경우가 많다. 청년과 3040 인구는 교육, 일자리,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찾아 외곽 신도시로 대거 이주한다. 원도심 일대는 6·25전쟁 때 피난민들이 바다가 보이는 산비탈에 정착하면서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주거 밀집 지역이다. 이 4개 구에 부산 전체 빈집 가운데 약 3분의 2가 집중되어 있으며 빈집 비율이 11.5%에서 15.4%에 달한다. 예전에는 부산의 중심이었던 이곳이 지금은 점점 비어가고 있다. 방치된 폐가를 철거해 주차장이나 텃밭, 주민 쉼터 등 공공시설로 조성하려는 사업들이 있지만 막대한 철거 비용, 소유자 연락 두절, 복잡하게 얽힌 법적인 문제 등으로 진전이 없다. 부산보다 더 심각한 지자체 지역은 전라남북도, 경상북도, 강원도 등이다. 지방자치 단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예산권이 없기 때문이다. 도지사나 시장이 지역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예산을 짤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란 중앙정부의 예산을 더 많이 확보하는 일인데 지역 간 형평을 이유로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기업은 노동력을 찾아 수도권으로 모여든다. 서울과 수도권의 아파트 가격이 지방의 5배에서 10배에 이른다. 지방이 소멸하면 서울도 무너지고 결국 나라가 거덜 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지방 살리기에 투자되어야 할 돈은 긴급재난지원금, 상생국민지원금, 민생회복지원금 등 현금 살포로 뿌려지고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어 서민들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든다. 노인이 많아진다는 것은 현재의 연금, 건강보험, 장기요양보험 구조 자체가 큰 압박을 받게 된다는 의미다. 한국은 2025년 현재 노인 1명을 생산가능인구 3.4명이 부담하는 구조이다. 2023년의 4명에서 불과 2년 만에 이렇게 줄어든 것이다. 2035년에는 약 2.1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 속도가 무섭다. 2050년에는 노동인구 1.3명이 노인 1명을 부담해야 한다. 연금 수급자 비율이 급증하고 가입자 수는 급감한다. 2041년에 연금은 적자로 전환되고 2055년에는 기금이 소진될 것으로 예상된다. 소멸 사회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문명 문제다 인구 감소는 단순히 아이 숫자가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가 미래를 믿지 않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을 포기한다. 기업은 장기 투자를 멈추고, 지역 공동체는 해체된다. 사회는 경제보다 먼저 심리적으로 붕괴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 길목에 서 있다. ‘아이가 사라진 사회’ ‘미래 세대 없는 국가’ ‘재생산 기능 붕괴’ ‘청년의 탈출’ ‘기업 승계 붕괴’ ‘중소기업 소멸’ ‘산업 공동화’로 이어진다. 경제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문명이 사라질 위기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3년 0.72에서 2024년 0.75, 2025년에 0.80으로 소폭 상승했다. 그러나 OECD 국가 중 출산율이 1 이하인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은 1.15, 독일은 1.39, 영국은 1.44, 프랑스는 1.66, 미국은 1.6이다. 한국의 출산율이 미국의 절반에 불과하다. 현재 인구를 장기적으로 유지하려면 출산율 2.1명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는 아직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반도체 착시가 만들어낸 지금의 일시적 호황을 미래 파국을 막기 위한 골든타임으로 써야 하는데, 눈앞의 분배에 매몰되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자해적 우를 범하고 있다. 정치지도자뿐 아니라 근로자와 주부들까지 공짜라는 환상에 취해 자멸을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사태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고 대책이 없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소멸 사회라는 낭떠러지로 가는 길목에 이미 들어섰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황승연의 타임캡슐]  노인과 바다 …빈집과 절벽
  • [황승연의 타임캡슐] 소멸 사회로 가는 길목에 서다  (1)

    어느 사회든 아이를 출산하고 기업을 이어가고 지역공동체를 유지하는 구조가 무너지면 그 국가는 경제보다 먼저 사회적으로 소멸한다. 대한민국은 단순한 인구 감소 사회를 넘어, 지방 소멸과 사회 재생산 기능 약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소멸 사회’의 초기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부동산, 교육, 노동 구조가 출산 억제 방향으로 작동하고, 높은 상속세와 주거 비용이 세대 재생산의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방의 회복 가능성이 낮아지고 기업 승계와 중소기업 지속성 문제로 국가 전체가 장기 저성장 구조로 진입했다. 특히 주거 비용이 지나치게 높아 청년 세대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있다. 이는 결혼과 출산까지 영향을 미치며 소멸 사회를 부추기고 있다. 한때 청년들 사이에서 ‘이생망’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이다. 청년들은 고질적인 취업난, 높은 집값, 결혼과 출산 포기, 계층이동 불가능, 노후 불안 등의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상실했다. ‘이생망’은 구조적 패배감을 드러내는 이 시대의 자화상인 셈이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부는 과거의 좌파 정부가 실패한 정책들을 되풀이해 내놓고 있다. 최근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대한민국을 소멸 사회로 재촉하고 있다. 사유재산을 폐지하는 정책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하고 있는 사유재산 제도가 흔들리고 있다. 몇 가지를 살펴보자. 오늘부터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세가 부활한다. 조정대상지역에서 주택을 매도할 때 양도차익에 대한 세금이 대폭 늘어난다. 현재 양도세 기본세율은 6∼45%다. 고가 주택의 경우 45%의 양도세에서 지방세 10%를 추가하면 49.5%가 된다. 주택이 조정대상지역에서 2주택자에게는 20%포인트 가산되어 65%에서 지방세 10% 추가하면 71.5%이다. 3주택 이상 소유자에게는 30%가 가산되어 75%에서 지방세 10%를 추가하면 82.5%가 된다. 그런데 토지나 건물 등의 보유 시 보유기간에 따른 공제제도가 있다. 3년 이상이면 6%에서 매년 2%씩 늘어 15년 이상이면 30%를 공제해 주는 제도이다. 1가구 1주택의 경우 보유기간에 따라 12~40%, 거주 기간에 따라 8~40%를 양도세에서 깎아 준다. 주택 양도소득세 장기보유특별공제(이하 장특공) 제도라 한다. 이 장특공 등 부동산 세제 개편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즉 비거주 주택에 대해서는 최대 40%를 공제하는 현행 제도를 없앨 예정이라 한다. 이와 함께 보유세도 오를 것이라 한다. 부동산 양도 차액의 대부분을 세금으로 회수하겠다는 정책이다. 이 일련의 세금 개편에 어떤 의미가 있나? 장특공을 폐지하면 인플레이션 즉, 물가 상승분이 포함된 이익에 과세하는 것이 된다. 미국에도 보유세가 있지만 주택 매입 가격에 대해 고정된 보유세를 납부한다. 보유세를 예측할 수 있다. 오래 보유한 집은 세금이 매우 낮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반 국민이 인플레를 예측하거나 영향을 끼칠 수 없음에도 인플레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주택을 팔고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 문제를 헌법이 보장하는 거주이전의 자유와 연계해 비판하는 의견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주택 매각을 유도하기 위해 보유세를 높인다고 한다. 이 경우 임대 수입보다 많은 세금으로 자산의 본질적인 가치를 잠식하게 된다. 결국 재산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모든 부동산은 국가의 소유가 될 것이다. 왜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해 주택 보유자가 오롯이 책임져야 하나? 부동산, 특히 주택에 대해서만 장특공을 적용하고 주식이나 다른 금융자산에 대해서는 장기보유특별공제가 없다. 자산 간 형평성 문제가 제기된다. 부동산을 매각하고 주식에 투자하라는 정부의 정책은 자칫 경제 위기 상황에서 주식 투자자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정책이다. 장기보유특별공제 폐지 법안 지난 4월 진보당 소속의 윤종오 의원은 장기 보유 특별공제를 폐지하고 1인당 평생 받을 수 있는 세금 감면 한도를 2억원으로 하는 내용의 소득세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재 법에 의하면 1가구 1주택이면서 양도가액이 12억원 이하의 경우에는 양도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서울의 경우 아파트 평균 매매가가 12억원이 넘은 것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하여간 12억원 초과 주택에 대해서는 10년간 거주하면 양도 차액을 일부 공제해 주는 장기보유특별공제 제도를 두고 있다. 이를 폐지하자는 법안이다. 그는 “주택을 사고팔 때마다 양도 차액의 일정 비율에 세금 감면 혜택을 주기 때문에 고가 주택으로 계속 바꿔가면서 큰 차익을 낼 수록 더 많은 혜택을 보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주택 가격 상승을 모두 소유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 주택을 팔 때 많은 양도소득세를 부과하여 주택을 팔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사회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자유로운 이동을 억제한다. 이 법안의 제출에 이름을 올린 국회의원들은 사회주의 주택 정책을 꿈꾸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원래 장기보유특별공제는 부동산 투자자들을 위해서 만든 제도가 아니다. 헌법이 보장한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살다 보면 부득이하게 이사를 해야 할 경우가 있다. 이때 집을 팔고 새로운 집을 구입할 때 취득세, 이사비용 등을 제외하고도 너무 많은 양도소득세를 납부해야 한다면 비슷한 수준의 주택으로 이사할 수 없다. 결국 이사를 포기하거나 불가피하게 살던 집은 세를 주고 다른 지역에서 세를 살아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비거주 주택에 장특공을 폐지하면 세를 준 집은 매각이 더 어려워진다. 주거하지 않는 집에 대해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벌하는 제도이다. 미국은 주택을 팔고 매각한 주택보다 더 비싼 주택으로 이사하는 경우 매각한 주택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유예해 주고 있다. 조금씩 더 큰 집으로 이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지방 사는 국민 서울 진입 금지법 무소속 최혁진 의원도 ‘소득세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현행 보유기간 기준 공제를 전면 폐지하고, 실제 거주 기간에 따라 공제율을 차등 적용하는 구조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다. 현행 최대 40%인 보유기간 공제를 폐지하고 거주 기간 2년부터 16% 공제를 적용하고 장기 거주 시 최대 80%까지 확대하는 법안이다. 반면 실거주하지 않는 주택이나 토지, 상가 등 비주택 자산은 장특공 적용 대상에서 사라진다. 단순 보유만으로는 더 이상 공제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지방 거주자가 자식들을 위해 서울에 집을 마련하는 길을 막는 것이다. 앞으로 지방에서 태어난 청년들이 서울에 집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무주택자가 계층 상승의 꿈을 꿀 수 있는 갭투자도 막아 놓고 부동산 담보 대출도 막아버렸다. 앞으로 주택을 갖고 서울에 사는 직장인이 지방에 발령 나면 지방 발령을 거부하고 직장을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할 것이다. 반대로 지방에 사는 사람은 서울로 이주하는 것이 훨씬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살던 집에서 한번 떠나 비거주 보유자가 되면 주택을 더 이상 보유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국외 거주자가 국내 부동산을 양도하는 경우도 장특공을 배제하도록 했다. 해외에 오래 거주해야 하는 사람이 국내로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서울에 집을 마련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다. 살지 않는 집에 대해서는 매각할 때 상상 못할 양도소득세를 내야 한다면 거주 이전의 자유가 사라지게 된다.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도 함께 사라진다. 상속세와 누진 소득세로 사유재산을 폐지하자는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는 1848년 발표한 ‘공산당 선언’에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략을 소개한다. 이는 모든 자본과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단계적으로 폐지해 국가 소유로 하는 방법이다. 사유재산을 폐지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1. 높은 상속세와 누진 소득세를 부과한다. 2. 토지 소유를 폐지한다. 3. 모든 공장을 국유화한다. 세계 최고의 상속세율과 함께 이번에 추진된다는 주택과 토지에 대한 양도소득세와 보유세 인상은 사유재산의 폐지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이다. 사회주의로 성큼 다가간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미 이 길로 들어선 것을 아는 정치인이 얼마나 될까? 희망과 각오와 노력으로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는 청년들은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이 사회주의 길목에 들어섰다는 것을, 이번 부동산 정책이 소멸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란 것을 아는 국민은 또 얼마나 될까?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황승연의 타임캡슐]  소멸 사회로 가는 길목에 서다  (1)
  • [황승연의 타임캡슐] 강단 앞에 선 수도사 …지적혁명의 불씨 당기다

    마르틴 루터는 교황과 싸운 ‘사제’라기보다는 옳지 않은 것을 거부하고 논쟁을 피하지 않는 ‘대학교수’였다. 그는 사제였지만 ‘교구 사목 중심의 신부’는 아니었다. 그는 “나는 박사이고 교수다. 성서를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았다”라고 했다. 자신이 신학박사라는 직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신학 교수로서의 사명 의식을 가졌다. 특히 그는 종교개혁 이후 그의 정체성을 사제에서 교수로 점차 이동시켰다. 수도원 제도를 비판할 때도 자신의 역할을 ‘성서를 가르치는 교수’로 규정했다. 교수를 직업이 아닌 소명으로 여겼다. 교수로서 진리를 밝혀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고 이를 하나님께 받은 의무로 이해했다.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어원이 라틴어인 많은 단어를 일반인이 사용하는 독일어로 바꾸었다. 우리나라에서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바꾸는 작업과 유사한 것이었다. 루터는 라틴어로 ‘vocatio’를 독일어 ‘Beruf(베루프)’로 번역했다. 이는 원래 ‘소명’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에 ‘직업’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이 루터였다. ‘Beruf’는 원래 수도사, 사제, 성직자들에 대해서만 사용되었다. 즉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종교적인 직업에만 해당하는 단어였으나 루터는 농부, 상인, 장인 또는 단순한 생계 수단을 영위하는 일반 직업에 대해서도 적용했다. 이때부터 모든 직업은 하나님이 부여한 소명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는 태도가 생겼다. 루터는 하나님께 받은 소명 즉 자신의 직업은 대학교수라고 믿었다. 16세기의 이탈리아 볼로냐대학교, 독일 쾰른대학교, 프랑스 파리대학교 등 중세 대학들은 철저히 교회에 종속된 기관이었다. 모든 교육은 교회 중심으로 이뤄졌다. 교수 대부분은 성직자나 수도사였다. 당시의 교회와 대학은 서로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결합된 형태였다. 1517년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교회 문에 붙인 것도 사실은 예전에도 종종 그랬듯이 그가 대학교수로서 대학 내 토론을 위한 학문적 논제를 걸어놓은 것이었다. 즉 종교개혁의 출발점은 교회가 아니라 대학이었다. 대자보는 토론을 위해 당시 대학에서 사용되던 라틴어로 작성한 것인데, 이 문서의 독일어 번역본이 인쇄되어 퍼져나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종교개혁이 폭발한 이유는 루터의 신학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에 의해 대량으로 인쇄되어 전 유럽에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작가 마르틴 루터 당시 이미 금속활자로 인쇄된 많은 종류의 서적들이 있었다. 하지만 루터의 글만큼 폭발적으로 퍼져나가지는 않았다. 루터는 일반인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독일어로 된 8~16쪽의 팸플릿 형태의 짧은 인쇄물을 많이 만들어 보급하였다. 이 외에도 설교집, 성경 번역 등으로 루터는 전 유럽에서 인류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이것이 시장에서 빠르게 퍼져나가 전 유럽에 흡수되었다. 1517년 대자보 사건 이후 거의 10년 동안 독일 인쇄물의 대부분은 루터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출판물이었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이를 브랜드 루터(Brand Luther) 현상이라 설명했다. 출판업자들은 책 표지에 ‘MARTIN LUTHER’라고 이름을 크게 써넣었다. 이름만으로도 책이 팔렸기 때문이었다. 루터의 저술을 찾는 독자들이 생긴 것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책의 판매는 내용 중심보다는 저자 중심으로 바뀌었다. 루터는 책을 썼다기보다는 루터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이것은 공론장 형성에도 기여했다. 그의 저술과 출판에 대한 기여는 대학교수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루터가 대학에서 했던 강의들은 나중에 출판된 책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강의 내용에 대해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는 것이 대학교수의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지는 것은 루터의 영향이다. 토론과 논쟁의 대학 강의실 루터는 수업에서 논쟁을 통한 학생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장려했다고 한다. 루터는 수업에서 매우 열정적으로 강의했다. 감정적 표현이 많았고, 현실 사례를 사용했고, 논쟁적인 방식으로 강의했다. 그의 동료 교수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은 “그의 말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 교수나 학생이 논제를 제시하고 반박과 재반박을 주고받으며 논쟁하는 세미나 방식은 당시 대학 교육의 핵심 방식이었고 지금까지 독일 대학의 수업방식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루터의 혁명은 강의실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강의는 토론과 논쟁이 끊이지 않는 지적 전투 공간이었다. 사상이 충돌하는 공개 토론장이었다. 종교개혁은 교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논쟁이 가득 찬 대학 강의실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강의실에서 나온 논쟁의 내용은 인쇄된 책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종교개혁은 변방 도시의 무명 대학교수와 인쇄술이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루터는 교황을 무너뜨림으로써 대학교수의 힘을 증명한 사람이었다. 그 시대 신설 대학인 비텐베르크 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교수 브랜드를 보유한 대학이었고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지적 영향력을 지닌 곳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1512년 교수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34년 동안 대학교수였다. 그는 교수 초기에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를 강의했다. 그의 강의는 매우 인기가 있어서 항상 강의실이 만원이었다. 또 그는 학생들과 공개토론을 자주 진행했다. 라틴어 강의였지만 설명이 매우 명확하고 성서 해석이 혁신적이고 논쟁적이었다. 그에게 종교개혁은 교수로서 성경을 해석하다 발생한 결과였다. 루터 이후에 교수의 역할이 바뀌었다. 마르틴 루터는 수도사로 출발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유럽을 바꾼 대학교수’였다. 비텐베르크 대학교 신학 교수 마르틴 루터 루터의 강의에 외국에서 온 유학생 수강생들이 많았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 1564~1616)의 4대 비극에 속하는 드라마 햄릿은 무대가 덴마크인데 고뇌하는 인간 주인공 햄릿 왕자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교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그려졌다. 이렇게 비텐베르크 대학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신학대학이었다. 특히 스웨덴, 덴마크,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 루터의 강의를 듣기 위해 찾아왔다. 루터는 유럽 최초의 ‘스타 교수’였다. 그의 교수로서 고민은 오늘날 교수의 고민과 같았다. “요즘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말만 많고 이해는 부족하다”며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을 비판했다. 그가 학생들에게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은 “성서를 직접 읽어라. 언어를 배워라. 깊이 이해하라”였다. 루터는 종교개혁가가 아니라 학생을 걱정하고 강의를 고민하는 전형적인 대학교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대학을 망쳤다”며 공허한 논쟁을 비판했다.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다”고 말한 기록도 남아있다. 루터 이후에 유럽에서 교수의 역할은 크게 바뀌었다. 루터 이전의 교수는 교회 학자였으나 종교개혁 이후의 교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공적, 사회적 지식인이라는 새로운 모델로 등장했다. 루터 이후 교수들은 대학개혁을 주도했다. 그들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와 성서 원문 연구를 중심으로 대학의 커리큘럼을 개편했다. 대학은 성직자를 교육하고 행정 관료를 교육했다. 또 제후들은 국가를 운영할 때 필요한 인재들을 키워낼 목적으로 대학을 세웠고 대학의 역할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1502년에 작센의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der Weise, 1463~1525)’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신설 대학은 루터의 대자보 사건 이후 불과 수년 만에 유럽 지성의 중심지로 변했다. 변화는 단순히 명성이 높아졌다는 것이 아니었다. 대학의 기능과 구조와 역할 자체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학생 수도 급증했고 외국 유학생도 많아졌다. 유럽 신학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루터의 강의는 더 이상 대학 강의가 아니라 유럽 전역의 관심사가 되었다. 강의에서 다룬 논쟁거리가 즉시 인쇄되어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 강의실이 곧 출판 콘텐츠의 생산지였다. 여기에 돈을 벌려는 목적의 출판업자들이 뛰어들어 책을 더 빨리, 저렴하게, 예쁘게, 가볍게 만들어 유통시켰다. 교수는 이제 대학 내 학자 혹은 라틴어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공적 지식인이자 사회를 움직이는 인물이 되었다. 대학은 교회에 속한 단순한 교육기관에서 정치와 종교 정책의 중심 기관이 되었다. 국가 시스템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비텐베르크 대학은 유럽 신학의 중심으로 변하면서 지식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단순히 학생을 가르치고 지식을 저장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기관이 되었다. 작센주 작은 시골 마을 신설 대학의 강의실에서 시작된 논쟁이 인쇄물을 통해 유럽 전체를 흔들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개인의 시대, 즉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내세우는 전 세계의 모든 대학은 지금도 마르틴 루터가 만들어 놓은 토대 위에서 발전하고 있다. * 이 열 번째 칼럼을 끝으로 ‘마르틴 루터의 위대한 여정’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마르틴 루터의 여정에 함께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황승연의 타임캡슐]  강단 앞에 선 수도사 …지적혁명의 불씨 당기다
  • [황승연의 타임캡슐] 질문하는 인간· 사유하는 문장 ·노래하는 신도 …'개인의 시대' 열리다

    “비텐베르크로 돌아가지 말고 덴마크 궁정에 머물라.” 셰익스피어(1564~1616)의 유명한 희곡 ‘햄릿’에 나오는 구절이다. 햄릿은 비텐베르크 학생이었다.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려 했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당시에 마르틴 루터가 교수로 활동했던 대단히 특별한 곳이었다. 해외 유학생들도 많았다. 특히 북유럽 출신들이 많았는데 햄릿도 이런 유학생 중 한 명이었다. 셰익스피어가 그린 ‘비텐베르크 학생’은 중세 가톨릭적 질서에서 벗어나서 왕과 교회의 권위를 의심하고, 권위보다 양심을 중시하는 지성을 갖고, 행동보다 성찰을 먼저 하는 인간으로 설정했다. 햄릿이 원치 않지만 갇혀 있게 된 정치 공간이 덴마크 궁정이고, 비텐베르크는 그가 속해야 할 정신적인 공간으로 설정했다. 셰익스피어는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비텐베르크라는 지명 하나로 햄릿의 인간형을 관객들에게 즉시 각인시켰다. 옳고 그름을 내면의 판단으로 결정하려는 고민 많은 인간을 뜻한다. 루터 이후 모든 판단의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되었다. 삶의 의미를 개인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하나님의 존재도 자유의지로 스스로 찾아야 했다. 그래서 얻은 것이 우울이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라는 우울한 인간형을 그렸다. 자유를 얻은 근대적 인간이 치른 대가였다. 햄릿은 묻는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질문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존재와 죽음에 대해 인간이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명령을 받고 행동하는 중세적 인간에서 질문하고 의심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근대적 인간이 되었다. 현실은 여전히 폭력과 권력과 음모로 움직이는데 인간은 그 위에 윤리와 양심과 성찰을 얹기 시작했다. 중세 인간은 편안했다. 세계의 의미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은 절대적이고 선과 악은 교회가 규정했다. 그러나 루터 이후에 상황은 바뀌었다. 구원의 확신은 교회가 아니라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문제가 되었다. 신은 존재하지만 침묵하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드디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햄릿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하나님 앞에 서서 루터가 외쳤던 “주여, 여기 제가 서 있나이다”라며 죽음을 무릅쓴 루터의 결단은 세상을 바꾸었지만 인간 모두가 루터가 될 수는 없었다. 바뀐 세상에서도 결단할 수 없는 대다수 인간은 불안과 우울에 빠졌다. 근대 지식인의 초상이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그린 인간의 모습이다. 작곡가 마르틴 루터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찬송가 585장은 루터가 작사·작곡한 유명한 곡이다. 이 곡은 1527년에서 1529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시편 46편을 바탕으로 가사를 썼다. 당시 루터는 가톨릭교회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압박과 동료들의 배신 그리고 유럽을 휩쓸던 페스트의 공포 속에 있었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 신앙적 결단과 보호를 간구하며 이 곡을 지었다. 이 곡의 선율을 바흐(Johan Sebastian Bach, 1685~1750)가 자신의 칸타타 80번(BWV 80)에서 화려하게 편곡하였다. 장엄한 합창곡이다. 원래 이 곡은 종교개혁 기념 주일인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에 또 교회가 핍박받거나 성도들이 영적으로 위축된 시기에 힘을 얻기 위해 연주되었다. 가사 중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라는 구절처럼 악의 세력에 맞서는 용기를 북돋울 때 사용된다. 특히 독일의 국가적인 행사나 위기 극복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루터 이전, 가톨릭 교회법에 따르면 예배의 모든 순서는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신도는 라틴어를 알아듣지 못했기에 음악은 사제와 훈련된 성가대만 부를 수 있었다. 루터는 “하나님 말씀은 사람들의 모국어로 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찬송가에 독일어를 도입했다. 이는 교회로부터 지식과 구원의 독점권을 빼앗아 신도에게 돌려준 큰 사건이었다. 또 당시 찬송가는 고도의 대위법으로 작곡된 곡들로 전문 성가대원이 아니면 부를 수가 없었다. 음악은 신앙의 도구가 아닌 ‘교회의 위엄을 과시하는 장식’이었다. 가톨릭 예배에서 신도는 침묵해야 했다. 찬양은 제단 근처의 성직자와 성가대석에서만 울려 퍼졌다. 음악적 행위 자체가 권위의 과시였다. 루터는 이를 바꾸고자 하였다. 찬양을 예배의 핵심 요소로 격상시켰다. “성가대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노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단순하고 명확한 리듬으로 많은 신도들이 함께 부를 수 있도록 작곡했다. 이는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는 ‘만인사제설’을 청각적으로 증명한 것이었다. 가톨릭은 민요와 같은 세속 음악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거룩한 음악’의 형식을 교회가 규정하고 예술적 표현을 제한했다. 루터는 ‘마귀가 모든 아름다운 선율을 독점하게 둘 수 없다’며 당시 유행하던 민요나 세속적인 곡조에 거룩한 가사를 붙이는 방식을 적극 활용했다. 종교적 권위를 깨고 신앙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결단이었다. 루터는 “음악은 신학 다음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다. 음악은 영혼을 평온하게 하고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였다. 현재 루터가 작곡한 찬송가가 36곡이 전해 내려온다. 그럼에도 루터가 작곡가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림은 눈으로 읽는 복음이다 루터는 그림을 글을 모르는 서민에게 성경의 내용을 전달하는 교육적 수단으로 보았다. 성경 이야기를 상기시킬 목적으로 미술을 적극 권장했다. 그림 자체에 신성한 힘이 있다고 믿는 ‘숭배’는 금지했다. 교황권의 부패를 폭로하고 개신교 신학의 정당성을 알리는 ‘팸플릿’과 ‘삽화’를 대량 생산하게 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궁정 화가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는 화가이자 비텐베르크 시장을 지낸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루터가 이단자로 몰려 처형되지 않도록 그를 ‘경건한 학자’이자 ‘강인한 개혁가’로 각인시키는 초상화 수십 점을 그려 배포하였다. 루터의 변천사가 크라나흐의 붓으로 완성되었다. 이후 루터와 크라나흐의 협업은 종교개혁의 판을 바꾸었다. 두 사람이 공동 기획한 대표적인 작품은 ‘율법과 복음’이다. 화면을 반으로 나누어 왼쪽에는 율법에 얽매여 지옥으로 떨어지는 인간을, 오른쪽에는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 인간을 대조적으로 배치했다. 복잡한 신학적 논쟁을 한 장의 그림으로 완벽하게 정리하여 글을 모르는 서민이 루터의 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했다. 또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에 크라나흐는 수많은 목판화 삽화를 그려 넣었다. 이는 성경을 대중화하는 데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냈다. 미술이 귀족의 전유물에서 대중의 매체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크라나흐는 인쇄소와 서점을 운영하면서 루터의 저작을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가장 친밀한 동지이자 가족 같은 친구였다. 루터는 크라나흐의 자녀에게 세례를 베풀고 크라나흐는 루터의 결혼을 주선하고 증인이 되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목소리였다면 크라나흐는 그 목소리에 형체를 부여한 인물이었다. 그의 그림이 없었다면 루터의 사상은 그렇게 빠르게 전 유럽으로 확산되기 어려웠다. 괴테가 본 마르틴 루터 루터는 칸트와 헤겔 같은 철학자들도 탄생시켰다. 칸트, 괴테, 헤겔 등은 각기 다른 길을 갔지만 사용한 핵심 어휘의 뿌리는 공통적으로 루터였다. 괴테는 루터를 가리켜 현대 독일어를 만든 인물이고, 독일어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든 인물이고, 독일 민족정신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라 하였다. 괴테가 중요하게 본 것은 그의 신학이 아니라 언어였다. 루터는 독일인의 종교에 영향을 끼친 것보다 독일인의 사고방식을 바꾼 사람이라 하였다.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면서 수많은 라틴어 개념을 독일어로 바꾸어 정착시켰기 때문에 그 단어들로 자연을 설명하고, 예술을 논하고, 인간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괴테는 루터를 읽으며 신앙보다는 문장이 어떻게 숨 쉬는지 배웠다고 했다. 루터가 신 앞에 선 개인의 양심과 책임에 대해 말했다면 괴테는 루터가 말한 개인의 내면적 갈등을 그의 ‘파우스트’에서 그렸다. 괴테는 루터를 독일 역사에서 독일다움을 만든 가장 결정적인 인물로 보았다. 루터는 독일인의 영혼을 깨웠고 괴테는 그 영혼을 문화로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텐베르크에 가면 맥주 애호가 루터가 단골이었다는 ‘독수리 주막’이 있다. 이 주막과 함께 있는 Brauhaus Hotel(양조장 호텔) 정문 위에 안내판이 하나 걸려 있다. '볼프강 폰 괴테, 1778년 5월 23일에 다녀감.' 괴테는 루터의 흔적을 찾아 비텐베르크를 순례했다. 루터가 떠난 지 232년이 지난 후였다. 괴테에게 루터는 단순히 종교개혁가가 아니라 독일 문화와 정신의 원천이었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황승연의 타임캡슐]  질문하는 인간· 사유하는 문장 ·노래하는 신도 …개인의 시대 열리다
  • [황승연의 타임캡슐] 무장한 농민들 광기 어린 불길 속 이성의 근대를 깨우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훗날 종교개혁이라 불렸던 일종의 사건들을 주도한 이후 중세 종교 중심 사회의 부조리가 제거되고 핍박받는 사람들이 평안을 찾고 그 사회에 평화가 찾아왔는가? 정반대였다. 변화는 고통을 동반한다. 사람들이 모순에 눈뜨게 되면서 그들이 처한 상황을 거칠게 거부했다. 농기구로 무장해서 저항했다. 처음에는 그 대상이 교회였으나 이내 그들을 지배하던 영주와 제후들에게 창끝을 겨누었다. 인류사에 보기 드문 참혹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신의 이름으로 치른 전쟁은 잔인했다. 130년이나 계속된 전쟁은 1648년 30년 전쟁과 함께 끝났다. 싸울 기력을 소진했을 때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세상은 달라졌다. 가장 혹독하게 전쟁을 치른 독일은 수백년간 대가를 치르며 유럽 최빈국이 되었다. 루터의 귀환과 칼슈타트의 급진 개혁 1521년 보름스(Worms)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그의 주장 철회를 거부했다. 루터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추방령이 내려졌으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그를 납치해서 1년 가까이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겼다. 루터의 부재중, 동료 교수이자 동지인 칼슈타트(Andreas Karlstadt, 1486~1541)가 과격한 개혁을 주도했다. 성상 철거, 미사 형식 파괴 등으로 혼란이 커졌다. 프리드리히 3세는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우려했고 루터가 돌아와서 상황을 수습해 주기를 원했다. 당시 제후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바치는 세금을 줄이고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개혁을 지지했다. ‘독일인의 돈은 독일 교회를 위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농민들도 평등과 개혁의 희망을 품고 점차 과격해지는 운동에 동참했다. 루터는 개혁이 질서 속에서 폭력이 아닌 말씀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급진적 개혁 흐름을 성경 중심, 비폭력 방식으로 돌렸다. 칼슈타트는 ‘개혁은 즉시 실행되어야 할 성경의 명령’이라며 농민들을 선동했다. 루터는 ‘종교개혁은 말씀으로 사람을 바꾸는 일’이라 맞섰다. 뮌처와 농민전쟁의 폭발 칼슈타트의 급진적 논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평등하다’거나 ‘불의한 권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정치적인 주장으로 발전했다. 종교개혁의 언어가 계급 전복의 논리로 바뀌었다. 종교개혁에 동조했던 루터의 동지들과 농민들은 면죄부를 팔던 교회를 넘어 영주의 권위를 의심하고 봉건적 억압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누적된 농민들의 불만을 자극한 사람은 뮌처(Thomas Müntzer 1489~1525)였다. 그는 농민들의 봉기를 부추기고 신학적으로 정당화하였다. 뮌처는 루터의 초기 제자였으나 결별하고 가난한 농민의 편에 서서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였다. 부패한 교회뿐 아니라 봉건 체제 자체를 부정했다. 농민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억압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농민전쟁이 폭력화되자 루터는 '살인적이고 약탈적인 농민 무리에 반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질서 파괴는 신의 뜻에 반한다며 제후들에게 진압을 촉구했다. 루터는 영적인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구분했다.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운 제후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이 열어준 ‘성경, 자유, 평등’이라는 단어가 급진적 해석을 통해 사회혁명으로 전이되었다. 1524년에 뮌처는 농민군을 이끌며 정신적, 군사적 지주 역할을 했다. 뮌처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권위는 타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의 불평등한 세상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보았다. “칼을 들어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라”며 무장 투쟁을 선동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자유로운 주인이므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고 했다. 뮌처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이며, 불의한 통치자들은 몰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사상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나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등과 같은 사회주의 사상가들로 이어지고 해방신학의 뿌리가 되었다. 농민전쟁은 처음에는 세금 문제나 부역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되었다. 남부 독일 슈바벤 지역의 농민들은 12개 조항을 발표했다. ‘목사를 선택할 권리’, ‘빈민 구제에 십일조 사용’, ‘공유지 사용 자유’, ‘농노제 폐지’, ‘노동에 대한 대가 지불’, ‘성문법에 의한 재판’, ‘사망세 폐지’ 등을 내세웠다. 이 12개 조항은 수만 부가 넘게 인쇄되어 전 독일에 유포되었다. 봉기는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퍼졌다. 뮌처는 튀링겐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모든 재산은 공유되어야 하며, 불의한 통치자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농민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라는 확신을 심었다. 전쟁 초기에 루터는 농민들의 처지와 주장에 공감하며 제후들에게 양보와 타협을 권했다. 하지만 농민들이 성과 수도원을 점령하여 파괴하고 영주들과 귀족들을 살해하자 태도를 바꿨다. 1525년 5월, 프랑켄하우젠(Frankenhausen)에서 8천 명의 농민군과 제후연합군이 맞붙었다. 전투 직전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뮌처는 “하나님이 승리를 약속하신 증거”라고 외쳤다. 하지만 평야에 포위된 농민군은 제후연합군의 대포 공격에 거의 전멸했다. 뮌처는 도망쳤으나 체포되어 참수됐다. 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들 약 30만 명 중 약 10만 명이 학살되었다. 농민전쟁의 피해는 농민들만이 아니었다. 전 독일의 1천여 개 성이 파괴되었고, 300여 개의 수도원들이 불에 탔다. 전쟁 후 농민의 처지는 더 악화됐고, 봉건적 압박은 더 심해졌다. 루터의 선택과 새로운 질서 전쟁의 결과 종교개혁의 주도권은 제후들에게 넘어갔다. 독일 개신교는 국가 교회 체제가 됐다. 루터는 민중의 급진성을 경계하며 교회 질서 확립에 집중했다. 각 교회를 방문해 실태를 조사한 후 ‘소교리문답’을 만들어 보급했다.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를 가르칠 수 있도록 쉽고 간결한 문답 형식이었다. 자유로웠던 예배 형식을 정비하고 목회자의 권위를 강조했다. 뮌처의 ‘성령 직접 계시’는 배제됐다. 종교개혁은 점차 정치 전쟁으로 확대됐다. 가톨릭 황제와 개신교 제후 연합이 충돌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됐다. 이때 “지역을 통치하는 자가 종교를 결정한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뮌처의 정신은 재세례파(Anabaptists) 운동으로 이어졌다. ‘국가와 교회의 완전 분리’를 주장한 이들은 가톨릭과 루터교 모두에게 박해 받았지만 훗날 침례교의 뿌리가 됐다. 루터는 제후들 편에 서서 온건한 노선을 택했다. 오늘날 좌파 신학자들은 루터가 뮌처와 함께 급진 개혁에 앞장서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현자 프리드리히 3세가 보호한 ‘대학과 설교 중심의 개혁’이 루터에 의해 유지되지 않았다면 종교개혁은 농민전쟁과 함께 폭력혁명으로 취급받아 붕괴됐을 것이다. 대포를 가진 훈련된 정규군과 농기구로 무장한 농민군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농민군이 이긴다는 것은 억지 논리이다. 프리드리히의 현명함과 루터의 온건 노선 덕분에 종교개혁과 농민전쟁이 분리됐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은 제후들에 의해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억압은 파괴해야 하므로 칼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자”는 뮌처의 주장에 맞서, “질서 붕괴는 더 큰 악이고, 복음은 폭력으로 실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루터가 뮌처와 결별함으로써 종교개혁은 반란 아닌 교회개혁으로 살아남았다. 종교개혁 이전, 교회는 진리·교육·도덕의 최종 권위였다. 국가와 대학은 자율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교회에 종속됐다. 종교개혁 이후 국가·대학·교회가 역할을 나눴다. 국가는 질서와 법을 담당하고 신앙을 강제하지 않았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국가와 구원을 주는 교회가 분리되었다. 교회는 정치권력과 결별하고 양심과 신앙의 공동체로 재정의됐다. 대학은 교회의 하위기관이나 국가 선전기관의 역할에서 벗어나 학문적 진리 탐구의 장으로 거듭났다. 세상은 이렇게 ‘근대’로 나아갔다. 다가오는 거대한 전쟁 독일 농민전쟁 이후, 황제와 제후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다가왔다. 프랑스 위그노 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 그리고 유럽 전체를 전쟁터로 만든 ‘30년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은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는 데 필수적인가? 지금의 유럽 지도는 30년 전쟁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그 전쟁으로 만들어진 질서 속에서 아직도 살고 있다.(끝)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황승연의 타임캡슐] 무장한 농민들 광기 어린 불길 속 이성의 근대를 깨우다
  • [황승연의 타임캡슐] 종교개혁 만난 '인쇄 혁명' …유럽이 잠에서 깨어났다

    마르틴 루터 이전에도 체코의 얀 후스(Jan Hus, 1369 ~ 1415)나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 1320 ~ 1384)와 같은 선지자들이 교회와 교황청의 부패를 뼈아프게 비판했다. 이들은 화형당하거나 훗날 부관참시를 당할 정도로 제도권을 흔들었다. 그러나 전 유럽에 광범위한 운동으로 확산되지 않았다. 인쇄술이 없었던 그 시대에는 그들의 생각이 필사, 구전, 지역 설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널리 퍼지지 않았다. 만약 인쇄술이 없었다면 루터의 95개 반박문도, 로마의 부패상에 대한 그의 목격담도 겨우 비텐베르크 인근 지역에 알려지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다행히 루터 시절에는 이미 인쇄술이 있었다. 그는 이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의 저작물들은 독일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갔다. 인쇄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루터는 인쇄술이 만들어 낸 최초의 대중 운동 지도자였다. 말하자면 인쇄술은 오늘날 인터넷과 유튜브나 페이스북 같은 ‘근대 정보혁명’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은 그 결과물이었다. 먀샬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 ~ 1980)은 1964년 ‘매체가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매체가 어떤 내용을 전달하는가’하는 문제보다 ‘매체 그 자체가 이미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사건이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루터가 교회를 비판하는 95개 항 반박문을 성당 대문에 붙였을 때 즉시 주목받은 것은 아니었다. 루터의 반박문은 교수와 성직자를 대상으로 한 논쟁 주제였다. 따라서 라틴어로 작성된 것이었다. 이것이 독일어로 번역되어 인쇄되었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량으로 인쇄되어 2주 만에 전 독일에 퍼졌다.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까지 두 달이면 충분했다. 이는 루터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돈 냄새를 맡은 인쇄업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들고 복제한 뒤 유통시켰다. 루터도 인쇄물이라는 매체의 효과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루터는 종교 개혁가인 동시에 출판 혁명가였다. 루터는 출판물의 대중시장을 처음으로 연 장본인이었다. 세계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루터라는 이름 자체가 브랜드였다. 출판업자들은 경쟁적으로 루터의 글을 찍어내면서 엄청난 수익을 챙겼다. 종교개혁은 출판 혁명이기도 했다. 루터는 출판업계에서 금광과 비유되었다. 당시 인세라는 것이 없어서 루터에게 그 수익이 돌아가지 않았다. 또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 돈을 번다는 것에 거부감을 가져 자신의 신학 저작에 대해 금전적 요구를 하지 않았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도했지만 개혁 운동이 전 유럽으로 확산된 것은 오로지 뉴 미디어인 인쇄술 덕분이었다. 인쇄술이라는 도구가 없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 정도의 규모와 속도로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쇄술이 없었다면 루터는 그저 변방의 반체제 인사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 ~ 1468)가 금속활자를 발명하기 전 모든 책은 손으로 베껴 쓰거나 문제 많고 비효율적인 목판인쇄를 썼다. 15세기 들어서면서 수도원이나 대학 또는 귀족 가문에서 책의 수요가 많았다. 필사본 책 하나의 제작에 수개월에서 1년씩 걸렸다. 제작 비용이 높게 발생했다. 구텐베르크는 대대로 금속 세공업자인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기술을 배웠다. 그가 활동하던 라인강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상업 중심지였다. 법률 문서, 상업 장부, 대학 교재 등의 수요가 많았다. 구텐베르크는 이 구조적 수요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의 기술과 사업 감각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벤처 창업가였다. 금속활자는 초기 제작 비용은 많이 들지만 표준화된 문서의 대량생산에는 크게 유리했다. 개별 글자를 조합해서 다양한 문서를 제작할 수 있고 오타 수정도 가능했다. 활자 하나하나가 선명하고 쉽게 마모되지 않아 수만 번까지 인쇄가 가능했다.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 인쇄기 발명의 목적을 처음부터 상업화에 두었다. 그러나 인쇄기를 만든 후 거의 70년 동안 신기술을 활용할 적당한 콘텐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인쇄 사업을 위해 자본을 조달하느라 빚을 졌는데 이 빚을 갚지 못해 소송에 시달렸다. 결국 자신의 기술을 투자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당시는 특허제도가 없어서 발명에 대해 보호받을 수가 없었다. 유럽 전역에 모방 인쇄소가 많이 등장해서 수익 창출이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인쇄 기술을 사업화한 인쇄업자들에게 경제적 성공을 넘겨줘야 했다. 그는 빚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다가 생을 마감한 비운의 혁신가였다. 루터의 출판에 대한 열정 루터는 인쇄를 전략적 무기로 사용했다. 그가 쓴 쉽고 강렬하고 설득력 있는 독일어로 된 짧은 소책자들은 값이 쌌다. 휴대가 가능해 농민, 노동자, 장인, 상인들까지 읽고 돌려볼 수 있었다. 루터는 책자들이 인쇄될 때 매번 일일이 지켜보며 표지디자인, 판형, 삽화, 활자체까지 개입했다. 인쇄물이 더 예쁘게 나올 수 있도록 세심하게 잔소리했다고 한다. 루터는 인쇄술을 통해 여론전, 정치전, 사상전을 벌인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쇄 기술은 종교개혁의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핵심 동력이었다. 교황청이 루터의 저술을 금서로 지정했다. 그러나 인쇄물의 확산 속도가 빨라 이미 독일 전역에 수천, 수만 부가 팔린 뒤였다. 인쇄업자들은 돈이 되니 복제판을 찍어 유럽 전역에 유통했다. 인쇄술은 교황청과 제국 권력의 정보 통제 능력을 붕괴시켰다. 종교개혁은 인쇄 혁명이 만든 첫 번째 대중 운동이었다. 종교가 성직자 중심 구조에서 평신도의 신앙과 대중 운동으로 바뀌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종교개혁이라는 메시지보다 그 운동을 유럽적 현상으로 만든 인쇄술이다. 루터는 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루터가 인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인쇄가 루터를 만들었다’는 의미는 미디어 형식 자체가 역사적 변화를 이끈다는 뜻이다. 종교개혁의 본질은 ‘미디어 혁명’이었다. 금속활자 인쇄술로 근대가 시작되었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유럽인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었다.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재구성되었다. 인쇄술 이후 동일한 내용의 책이 수천, 수만 권 동시에 존재했다. 정확성과 더불어 재현, 검증, 비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근대 과학 혁명의 본질적인 조건이었다. 인쇄술 이전의 지식은 설교나 강론 등과 같이 단체 속에서 받아들여졌다. 인쇄된 책은 ‘사적 독서’라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했다. 이것으로 인해 개인의 판단, 개인의 양심, 개인의 신앙, 자기 정체성의 형성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근대적 개인주의의 출발점이며 루터의 ‘만인 사제설’과도 직결된다. 또 인쇄술은 국가별 표준화된 언어를 만들어 내면서 국민국가의 문화적 기반이 되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 지내면서 번역한 독일어 성경이 인쇄되어 전 독일에 확산되었다. 방언들이 사라지고 표준 독일어가 만들어졌다. 이후에는 영어 성경과 프랑스어 성경 등이 출현하였다. 이를 통해 근대 민족국가와 국민 정체성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중세에는 여론이 존재할 수 없었다. 대부분 라틴어로 쓰인 문서를 대중은 읽을 수가 없었다. 정보는 성직자와 귀족이 독점하게 되고 권력은 메시지를 쉽게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쇄술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차츰 대중의 의견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다. 책이 동일한 형태로 유럽 전역에 뿌려지면서 신학, 과학 등에서 동일한 정보를 공유하게 되었다. 논쟁이 가능하게 되었다. 비로소 학문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었다. 사고의 지평이 지역을 넘어 유럽 전체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근대적 유럽 문명의 탄생 조건이 되었다. 책이 많아지면서 문해율이 상승하고 학교가 증가했다. 논리적, 추상적 사고가 발달하고 법, 정치, 경제에서 합리적 개념이 정착하게 되었다. 문자 문화가 강화되면서 더 논리적인 토론이 가능하게 되었다. 법은 문서화되며 더욱 명확해졌다. 계약, 금융, 회계 시스템이 정교해졌다. 이 모든 근대 경제, 근대 국가의 기술적 기반이 인쇄 문화에서 출발한다. 인쇄술은 유럽 사회의 사고 구조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 결과 근대를 실질적으로 출범시켰다. 이것을 시작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다. 그는 개신교의 탄생뿐 아니라 근대를 연 개혁가였다. 마르틴 루터 이후에 인간은 비로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게 되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마르틴 루터에게 빚을 지고 있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황승연의 타임캡슐] 종교개혁 만난 인쇄 혁명 …유럽이 잠에서 깨어났다
  • (황승연의 타임캡슐) 교황청이 무너진 날 루터는 역사가 되었다

    루터의 운인가 하나님의 섭리인가 황승연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종교개혁 당시 교황은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였다. 그는 유럽 최고의 금융 가문인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가문 출신이었지만 파산 위기에 몰려 푸거(Fugger) 가문에 큰 빚을 졌다. 푸거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으로 직물과 향신료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은광과 구리광 개발에 투자하여 구리 유통망을 장악한 후 금융업에 진출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은행가이자 자본가로 성장하여 전성기 때의 메디치 가문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푸거 은행은 신성로마제국 황실을 비롯해 여러 왕국에 돈을 빌려주고 이자로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으며 교황청과도 거래했다. 레오 10세는 교황 취임 후 전쟁,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예술 후원, 뇌물, 연회, 궁정 운영 등으로 파산 직전이었다. 그는 푸거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 했고, 은행은 담보를 요구했다. 교황청은 이를 수락했는데, 담보는 면죄부 판매 수익이었다. 교황은 13세에 이미 추기경이 되었다. 1513년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가 죽자, 새로운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Conclave)가 열렸는데, 이 과정에서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과 돈이 활용되었다. 추기경들은 돈을 받고 성직 자리와 교황청 관직을 약속받았는데 이때 뿌려진 돈 역시 푸거 가문에서 빌린 것이었다. 독일에서 면죄부 판매로 종교개혁을 촉발한 알브레히트(Albrecht von Brandenburg 1490~ 1545) 대주교는 자리를 사기 위해 교황청에 줄 돈을 푸거 은행에서 빌렸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대대적인 면죄부 판매에 나섰다. 판매 수익의 절반은 교황청으로 갔고 나머지는 푸거 은행 대출금 상환에 사용되었다. 푸거 가문은 교황과 황제, 주교 선출 과정까지 금융으로 개입하여 종교와 정치를 쥐고 흔들었다. 종교개혁의 원인이 된 면죄부 판매 논쟁 뒤에는 푸거 가문의 금융 네트워크가 있었다. 루터는 훗날 "성직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돈으로 사고파는 물건이었으며, 교황청과 황제조차 그의 주머니에 의존했다"고 말했다. 교황과 은행 교황은 이탈리아와 유럽 전체에서 막강한 정치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메디치 가문은 교황청의 공식 은행 역할을 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가문에서 왕이나 황제보다 더 막강한 권위를 가진 교황을 배출함으로써 가문을 '신의 선택을 받은 집안'으로 만들고자 했다. 또한 교황직을 차지하면 금융업에서 영향력을 회복하고 사업도 더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치밀한 계획과 노력으로 메디치 가문은 레오 10세(Leo X, 1513~1521),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1523~1534), 피우스 4세(Pius IV, 1559~1565), 레오 11세(Leo XI, 1605)까지 4명의 교황을 배출했다. 교황이 푸거 가문의 귀중한 고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자와 원금을 제때 갚았기 때문이다. 푸거 은행은 70년 전에 시작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에 교황이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을 우려했다. 빚의 상환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 전역에 면죄부를 대량으로 판매한다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걱정을 조금 덜었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막데부르크 대주교뿐 아니라 마인츠 대주교도 겸임하게 되었는데, 교황청은 겸임 금지에 대한 막대한 특별 사면료를 요구했다. 푸거 은행은 대주교에게 사면료 전액을 대출해 주었다. 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면죄부 판매 수익금을 나눠 가지게 되면, 모두에게 이로운 거래가 될 것이라 믿었다. 거래가 순조롭게 이루어져, 신자들은 구원을 받고,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빚 걱정에서 벗어나며, 도미니코회 수도사들도 이익을 얻고, 교황은 재정 걱정을 덜며, 성 베드로 대성당도 계획대로 지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비텐베르크의 고집 세고 비협조적이며 비세속적인 촌뜨기 수도사 마르틴 루터의 방해로 교황과 대주교와 은행의 전략에 제동이 걸렸다. 그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가 방해했을 때도 교황청과 교회는 여전히 "그를 조만간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터가 고립된 환경에서 혼자 행동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는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패한 수도원의 성직자들이 만든 위조 문서들을 분석하고 가짜를 가려내는 방법들을 개발했다. 교회 문서와 책들을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면죄부 판매가 거대한 사기극임을 밝혀냈다.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것은 단순한 신학적 문제를 넘어 교황청과 금융가의 부패구조에 대한 도전이었다. 시골 변방의 수도사 한 사람이 전 세계를 돈과 권력으로 지배하던 구조에 돌을 던져 금이 가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것이 일파만파 번져서 전 유럽이 변화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푸거 가문은 큰 타격을 받았다. 교황청뿐 아니라 제국의 전쟁과 외교를 돈으로 뒷받침했던 가문이었지만, 루터의 문제 제기 후 면죄부 판매 사업이 부실해지자 급격히 몰락했다. 로마의 약탈과 교황의 몰락 종교개혁과 교황청 관련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1527년 메디치 가문에서 배출한 또 다른 교황 클레멘스 7세 시절에 일어난 '로마의 약탈(Sacco di Roma)'이 그것으로, 교황청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이탈리아 반도 지배권을 두고 전쟁 중이었는데, 클레멘스 7세는 외교적 줄타기를 하며 프랑스 편에 섰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와 갈등을 빚었다. 황제는 로마와 교황청을 압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용병들로 구성된 신성로마제국 군대는 용병료 미지급에 불만을 품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되면서 로마를 침공해 도시를 함락시켰다. 용병들은 로마에서 1만2000명의 시민을 학살하고 수도원, 성당, 귀족 저택을 강탈하고 처참하게 파괴하였다. 수도사와 수녀들이 능욕당했고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약탈당했다. 교황은 목숨 걸고 싸워준 스위스 근위대 덕분에 체포당하지 않고 산탄젤로성으로 도망쳐 7개월이나 감금당한 채 지냈다. 용병들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마굿간으로 사용하고 겨울에는 문짝을 뜯어내어 땔감으로 사용했다. 시내의 거리에는 시신이 방치되어 나뒹굴었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제국군은 교황의 몸값으로 교황청 1년 수입을 훨씬 초과하는 금액을 요구했다. 빚에 쫓겼던 교황은 교황청의 보석, 금괴, 교회 장식품들을 비롯한 수도원 자산과 교황령의 일부 도시들을 넘겨주면서 풀려났다. 교황청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 사건으로 교황은 외교적 독립을 완전히 상실했다. 로마는 '거룩한 도시'가 아니라 유럽 군대의 전리품으로 전락했고 로마 시민 대부분이 피난을 떠났다. 르네상스의 중심지 로마가 유린당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금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교황청의 치욕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교회 권위가 완전히 무너졌고, 유럽은 교황을 더 이상 절대 권위로 보지 않게 되었다. 루터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교황청의 교만을 심판하신 것"으로 해석했다. 이 사건으로 루터의 신학적 주장이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루터가 경고해 온 교황청의 부패와 심판이 실제 사건으로 드러나면서 그는 ‘교황의 타락을 가장 먼저 경고한 선지자'라는 이미지로 위상이 높아졌다. 루터파 개혁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비텐베르크는 개혁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때부터 루터는 비텐베르크를 넘어 유럽 교회의 대안적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 사건은 가톨릭교회의 쇠퇴, 르네상스의 종말, 종교개혁의 가속화라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루터의 운인가 하나님의 계획인가 루터는 운이 좋았다. 종교개혁 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그를 납치하여 숨겨준 덕분이었고, 종교개혁의 이론적 저술에 집중할 때는 부인 카타리나의 내조가 큰 역할을 했다. 그의 비판으로 면죄부 판매가 부실해지면서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교황청, 황제, 은행 사이에 균열이 생겨 시골 변방의 수도사 루터를 제거할 때를 놓쳤다. 제국의 무식한 용병들이 통제되지 않아 로마와 교황청을 습격하고 약탈했으며, 교황이 담을 넘어 피신하는 사건이 일어나 교황의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졌을 때 루터는 유럽 전체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로마의 약탈’ 사건 후 교황이 수난에 빠졌을 때 마침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 1세가 제국을 확장하고자 발칸반도와 헝가리를 점령하며 신성로마제국의 동부 국경을 위협했다. 1529년 비엔나(빈)가 무슬림의 공격을 받자, 칼 5세는 종교적 갈등 해결에 집중할 수 없어서 루터파에 대한 강경 대응을 유보했다. 이 틈을 이용해 루터는 동료 멜란히톤 교수가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라는 개신교의 신학적 입장을 제후들과 황제 앞에서 공식화하게 된다. 28개 조항의 이 신앙고백은 루터교 신학의 기초가 되었고 이 사건은 종교개혁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렇게 적절한 시기마다 적절하게 터져준 사건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전 유럽에 확산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을 어찌 루터의 운으로만 평가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황승연의 타임캡슐) 교황청이 무너진 날 루터는 역사가 되었다
  • [황승연의 타임캡슐] 루터의 운인가 하나님의 섭리인가

    · 마르틴 루터의 위대한 여정(6) 종교개혁 당시 교황은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였다. 그는 유럽 최고의 금융 가문인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가문 출신이었지만 파산 위기에 몰려 푸거(Fugger) 가문에 큰 빚을 졌다. 푸거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으로 직물과 향신료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은광과 구리광 개발에 투자하여 구리 유통망을 장악한 후 금융업에 진출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은행가이자 자본가로 성장하여 전성기 때의 메디치 가문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푸거 은행은 신성로마제국 황실을 비롯해 여러 왕국에 돈을 빌려주고 이자로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으며 교황청과도 거래했다. 레오 10세는 교황 취임 후 전쟁,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예술 후원, 뇌물, 연회, 궁정 운영 등으로 파산 직전이었다. 그는 푸거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 했고, 은행은 담보를 요구했다. 교황청은 이를 수락했는데, 담보는 면죄부 판매 수익이었다. 교황은 13세에 이미 추기경이 되었다. 1513년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가 죽자, 새로운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Conclave)가 열렸는데, 이 과정에서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과 돈이 활용되었다. 추기경들은 돈을 받고 성직 자리와 교황청 관직을 약속받았는데 이때 뿌려진 돈 역시 푸거 가문에서 빌린 것이었다. 독일에서 면죄부 판매로 종교개혁을 촉발한 알브레히트(Albrecht von Brandenburg 1490~1545) 대주교는 자리를 사기 위해 교황청에 줄 돈을 푸거 은행에서 빌렸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대대적인 면죄부 판매에 나섰다. 판매 수익의 절반은 교황청으로 갔고 나머지는 푸거 은행 대출금 상환에 사용되었다. 푸거 가문은 교황과 황제, 주교 선출 과정까지 금융으로 개입하여 종교와 정치를 쥐고 흔들었다. 종교개혁의 원인이 된 면죄부 판매 논쟁 뒤에는 푸거 가문의 금융 네트워크가 있었다. 루터는 훗날 "성직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돈으로 사고파는 물건이었으며, 교황청과 황제조차 그의 주머니에 의존했다"고 말했다. 교황과 은행 교황은 이탈리아와 유럽 전체에서 막강한 정치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메디치 가문은 교황청의 공식 은행 역할을 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가문에서 왕이나 황제보다 더 막강한 권위를 가진 교황을 배출함으로써 가문을 '신의 선택을 받은 집안'으로 만들고자 했다. 또한 교황직을 차지하면 금융업에서 영향력을 회복하고 사업도 더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치밀한 계획과 노력으로 메디치 가문은 레오 10세(Leo X, 1513~1521),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1523~1534), 피우스 4세(Pius IV, 1559~1565), 레오 11세(Leo XI, 1605)까지 4명의 교황을 배출했다. 교황이 푸거 가문의 귀중한 고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자와 원금을 제때 갚았기 때문이다. 푸거 은행은 70년 전에 시작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에 교황이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을 우려했다. 빚의 상환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 전역에 면죄부를 대량으로 판매한다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걱정을 조금 덜었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막데부르크 대주교뿐 아니라 마인츠 대주교도 겸임하게 되었는데, 교황청은 겸임 금지에 대한 막대한 특별 사면료를 요구했다. 푸거 은행은 대주교에게 사면료 전액을 대출해 주었다. 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면죄부 판매 수익금을 나눠 가지게 되면, 모두에게 이로운 거래가 될 것이라 믿었다. 거래가 순조롭게 이루어져, 신자들은 구원을 받고, 알브레히트는 빚 걱정에서 벗어나며, 도미니코회 수도사들도 이익을 얻고, 교황은 재정 걱정을 덜며, 성 베드로 대성당도 계획대로 지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비텐베르크의 고집 세고 비협조적이며 비세속적인 촌뜨기 수도사 마르틴 루터의 방해로 교황과 대주교와 은행의 전략에 제동이 걸렸다. 그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가 방해했을 때도 교황청과 교회는 여전히 "그를 조만간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터가 고립된 환경에서 혼자 행동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는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패한 수도원의 성직자들이 만든 위조 문서들을 분석하고 가짜를 가려내는 방법들을 개발했다. 교회 문서와 책들을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면죄부 판매가 거대한 사기극임을 밝혀냈다.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것은 단순한 신학적 문제를 넘어 교황청과 금융가의 부패구조에 대한 도전이었다. 시골 변방의 수도사 한 사람이 전 세계를 돈과 권력으로 지배하던 구조에 돌을 던져 금이 가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것이 일파만파 번져서 전 유럽이 변화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푸거 가문은 큰 타격을 받았다. 교황청뿐 아니라 제국의 전쟁과 외교를 돈으로 뒷받침했던 가문이었지만, 루터의 문제 제기 후 면죄부 판매 사업이 부실해지자 급격히 몰락했다. 로마의 약탈과 교황의 몰락 종교개혁과 교황청 관련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1527년 메디치 가문에서 배출한 또 다른 교황 클레멘스 7세 시절에 일어난 '로마의 약탈(Sacco di Roma)'이 그것으로, 교황청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이탈리아 반도 지배권을 두고 전쟁 중이었는데, 클레멘스 7세는 외교적 줄타기를 하며 프랑스 편에 섰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와 갈등을 빚었다. 황제는 로마와 교황청을 압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용병들로 구성된 신성로마제국 군대는 용병료 미지급에 불만을 품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되면서 로마를 침공해 도시를 함락시켰다. 용병들은 로마에서 1만 2천 명의 시민을 학살하고 수도원, 성당, 귀족 저택을 강탈하고 처참하게 파괴하였다. 수도사와 수녀들이 능욕당했고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약탈당했다. 교황은 목숨 걸고 싸워준 스위스 근위대 덕분에 체포당하지 않고 산탄젤로성으로 도망쳐 7개월이나 감금당한 채 지냈다. 용병들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마구간으로 사용하고 겨울에는 문짝을 뜯어내어 땔감으로 사용했다. 시내의 거리에는 시신이 방치되어 나뒹굴었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제국군은 교황의 몸값으로 교황청 1년 수입을 훨씬 초과하는 금액을 요구했다. 돈이 없었던 교황은 교황청의 보석, 금괴, 교회 장식품들을 비롯한 수도원 자산과 교황령의 일부 도시들을 넘겨주면서 풀려났다. 교황청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 사건으로 교황은 외교적 독립을 완전히 상실했다. 로마는 '거룩한 도시'가 아니라 유럽 군대의 전리품으로 전락했고 로마 시민 대부분이 피난을 떠났다. 르네상스의 중심지 로마가 유린당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금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교황청의 치욕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교회 권위가 완전히 무너졌고, 유럽은 교황을 더 이상 절대 권위로 보지 않게 되었다. 루터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교황청의 교만을 심판하신 것"으로 해석했다. 이 사건으로 루터의 신학적 주장이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루터가 경고해 온 교황청의 부패와 심판이 실제 사건으로 드러나면서 그는 ‘교황의 타락을 가장 먼저 경고한 선지자'라는 이미지로 위상이 높아졌다. 루터파 개혁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비텐베르크는 개혁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때부터 루터는 비텐베르크를 넘어 유럽 교회의 대안적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 사건은 가톨릭교회의 쇠퇴, 르네상스의 종말, 종교개혁의 가속화라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루터의 운인가 하나님의 계획인가 루터는 운이 좋았다. 종교개혁 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결정적인 도움 덕분이었고, 종교개혁의 이론적 저술에 집중할 때는 부인 카타리나의 내조가 큰 역할을 했다. 그의 비판으로 면죄부 판매가 부실해지면서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교황청, 황제, 은행 사이에 균열이 생겨 시골 변방의 수도사 루터를 제거할 때를 놓쳤다. 제국의 무식한 용병들이 통제되지 않아 로마와 교황청을 습격하고 약탈했으며, 교황이 담을 넘어 피신하는 사건이 일어나 교황의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졌을 때 루터는 유럽 전체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로마의 약탈’ 사건 후 교황이 수난에 빠졌을 때 마침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 1세가 제국을 확장하고자 발칸반도와 헝가리를 점령하며 신성로마제국의 동부 국경을 위협했다. 1529년 비엔나가 무슬림의 공격을 받자, 칼 5세는 종교적 갈등 해결에 집중할 수 없어서 루터파에 대한 강경 대응을 유보했다. 이 틈을 이용해 루터는 동료 멜란히톤 교수가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라는 개신교의 신학적 입장을 제후들과 황제 앞에서 공식화하게 된다. 28개 조항의 이 신앙고백은 루터교 신학의 기초가 되었고 이 사건은 종교개혁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렇게 적절한 시기마다 적절하게 터져준 사건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전 유럽에 확산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을 어찌 루터의 운으로만 평가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황승연의 타임캡슐] 루터의 운인가 하나님의 섭리인가
  • [황승연의 타임캡슐] 종교개혁의 불씨가 된 루터의 로마 여행

    · 마르틴 루터의 위대한 여정 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피게 된 것은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방문했을 때 경험 때문이었다. 청년 마르틴 루터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도사로 활동하고 있을 때 수도회는 수도 생활의 규율과 원칙 문제로 갈등이 심했다. 수도원은 이 분쟁의 해결과 수도원의 자율성 확대를 청원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으로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루터는 학문적 성실성과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대표단에 뽑혔는데 그의 나이 27~28세였고 1510~1511년경의 일이었다. 루터의 이 로마 여행은 가톨릭에 맞서는 기독교 탄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로마 성지 순례의 은혜가 아니라 그가 경험한 실망과 절망 때문에. 루터는 일행과 함께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출발하여 독일 남부와 스위스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밀라노, 볼로냐, 피렌체 등을 거쳐 걸어서 로마로 갔다. 두 달 이상이 걸린 여행은 로마까지 1200㎞ 넘는 거리였고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겪었다. 루터 일행은 험난한 산맥을 넘으며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기도와 찬송으로 두려움을 이겨냈다. 가는 길에 성당이나 수도원을 만나면 그곳에서 숙박하고, 가끔은 순례자 숙소에서 지냈으며, 때로는 구걸하거나 수도회의 추천서를 보여주면서 민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루터는 추위와 배고픔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단련 과정으로 보았다. 로마에 가면 큰 영적 은혜와 공로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어려움을 견디며 경건한 마음을 잃지 않고 로마에 도착했다. 도착 후 로마에 4주 정도 머물렀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로마에서 4주 동안 그는 예상하지 못했던 온갖 인간 사회의 추악한 꼴들을 다 보게 된다. 이때의 경험은 루터가 결정적으로 교회에 대해 또 교황에 관해 갖고 있던 생각을 바꾸게 했다. 그는 로마에서 무엇을 경험했나?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며 루터는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성지 순례자이자 수도사로서 여러 예배 의식들을 체험했다. 대개 순례자들은 로마에 가면 화려한 성당들을 순례하고 성인들의 유골이나 십자가 파편 혹은 성물을 참배한다. 이를 통해 은총을 얻는다고 믿었다. 또 대성당 미사에 참석하고 특정 성당을 순례하거나 그곳에서 기도하면 연옥의 형벌이 감해진다고 믿는 면벌 행위를 하기도 했다. 루터도 이러한 전례를 체험했다. 그러나 로마에 머물면서 그는 깊은 회의와 공허함에 빠졌다. 로마를 방문하면 당시 순례자들은 으레 ‘성 스칼라 산타(Scala Sancta·거룩한 계단)’를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기도하면서 면죄의 축복을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그 계단을, 사람들은 예수가 빌라도 법정에 끌려갈 때 오르내렸던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믿었다. 그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며 기도하면 연옥의 형벌을 단축하는 은총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많은 순례자가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했다. 루터도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조부모의 영혼이 연옥에서 구원받기를 기도했다. 루터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것이 진정 영혼을 구하는 일인가?’ “나는 로마의 성스러운 계단을 무릎으로 오를 때 아무런 평안을 얻지 못했다.” “로마는 나의 신앙을 강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믿음이 아닌 어떤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심한 회의에 빠졌다. 그 순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이 경험은 후에 형식적인 의식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진정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깨달음을 얻는 시작점이 되었다. 루터는 로마 교황청과 성직자들의 부패, 타락, 세속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성직자들의 사치와 돈으로 공로를 사는 관행을 목격하고 “로마는 거룩한 곳이라기보다 바벨론 같다”고 했다. 경건한 체험을 기대하고 갔던 로마에서 본 타락한 도시의 모습은 루터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로마 여행 6년 후인 1517년, 루터는 교황청과 신앙에 관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써서 세상을 바꿔 놓을 논쟁을 시작했다. 교황청과 위험하고도 긴 싸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면죄부와 교황권을 비판하면서 루터는 ‘로마의 타락’을 증거로 들었다.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1520)’에서 로마를 바벨론에 비유하며 부패한 교황청을 비판하였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로마 위에 세워져 있을 것이다.” “당시 로마는 죄와 부끄러움과 타락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곳에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을 찾기 어려웠다.” 타락한 로마 당시 로마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도시 중 하나였고 성직자, 순례자 그리고 관료들이 몰려드는 중심지였다. 성스럽고 화려하고 거대한 도시의 뒷골목에는 더러운 시궁창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로마에는 수천 명의 매춘부가 있었고, 성직자들도 그들의 단골 고객이었다. 루터는 “로마에서 나는 사제들이 술과 여자에 빠져 타락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미사를 장난처럼 집전했고, 밤에는 매춘부들과 어울렸다”며 ‘성직자들의 방탕’에 큰 충격을 받았다. 루터는 결국 힘들게 간 로마에서 교황청이 타락한 정치 권력기관이라는 인상만 받고 성과 없이 돌아왔다. 교황은 전쟁 준비와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공사 문제로 바빠서 루터 일행을 만나줄 시간이 없었다. 교황청의 행정 관료들을 만났으나 그들을 통해 무관심, 부패한 관료주의를 경험했다. 청원 문제 해결에 신앙과 경건함보다는 권력과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을 체험하고 좌절했다. 모든 청원서에 각종 수수료가 붙었고 추기경, 서기관, 대리인에게 주는 선물과 봉사료가 필수적이었다. 금전적 헌납 없이는 문서 열람도 되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처리되었다. “나는 로마에 갈 때 천국을 기대했으나 돌아올 때는 지옥을 본 느낌이었다”고 했다. 루터는 말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로마에 가는 길에 경건을 배웠고, 로마에 있는 동안에 의심을 배웠으며, 돌아오는 길에 절망을 배웠다.” 이 절망과 신앙적 상처는 훗날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되었다. 면죄부와 종교개혁 루터가 로마를 방문할 무렵,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이 막 떠오르고 있었다. 로마는 당시 인구 5만명으로 다른 대도시 베네치아나 밀라노보다 훨씬 작았지만 교회 덕분에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고 유럽 권력의 중심이었다. 성당, 그림, 조각, 공원 분수 등으로 도시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루터는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은 순례지에서의 불쾌한 상업 활동이었다. 후에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몰아내신 예수님처럼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당시 황제는 교황을 적들로부터 보호하는 대가로 교황은 황제를 신성하게 임명된 세속군주로 합법화하며 모든 신민이 황제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로마는 교황이었고 교황은 곧 교회였다. 추기경과 주교들은 모든 특권을 누리며 부귀와 사치 속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는 여러분은 죄인이고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도록 정죄받았지만 회개하고 기부하고 순례를 가고 선행을 하고 계속해서 돈을 내야 한다고 겁을 주었다. 임종을 앞두고 사제에게 임종 의식을 청한다면 사제는 재산의 상당 부분을 교회나 수도원에 담보로 남겨두라고 권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에 대가가 따랐다. 주교나 추기경이 되고자 하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작위 매각은 교황에게는 수입원이고 구매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투자였다. 중세 교회는 한때 독일 땅의 약 절반을 소유했다. 주교직을 얻는 데 신학 공부가 필요치 않았고 성직 안수도 필요 없었다. 돈만 있으면 그것만큼 안전하고 수익성 있는 투자처가 없었다. 왜냐하면 착취할 수 있는 노동인구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성직을 사는 것은 경건함이나 신을 섬기는 진지한 열망이 아니라 안정되고 높은 사회적 지위, 풍요로운 삶 그리고 권력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루터 이전에도 교회의 이러한 세속화와 상업화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으나 모든 선한 의도와 개혁 노력은 늘 실패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바꿀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편리한 포장재에 담아 고가에 팔았다. 돈벌이에 혁신적 발명이 넘쳐났다. 그중 하나가 1476년에 신학자 레이몽드 페로디(Raymond Peraudi·1435~1505)가 발명한 ‘죽은자를 위한 면죄부’였다. 이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돈을 내면 연옥에서 체류하는 기간을 상당히 단축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은 이 발명품에 기꺼이 그리고 신속하게 축복했다. 교황과 추기경, 주교들의 재정적 필요성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교개혁은 부조리에서 시작되었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황승연의 타임캡슐] 종교개혁의 불씨가 된 루터의 로마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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