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 논설실 부국장
alexlee@ajunews.com
- 아주경제 논설위원
- 前 로이터 통신 선임 특파원, 편집장
- 前 서울외신기자클럽회장
- [이수완의 월드비전] 세계 경제 新 성장 엔진… '인도(India)의 시간' 시작될까 '힌두 민족주의자'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국민당(BJP)은 2019년 인도 총선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승리를 했다. 2014년에 이어 단일 정당이 연속 과반을 초과하는 의석을 차지하면서 재집권에 성공한 모디 총리는 강한 추진력을 얻으며 국정 운영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반(反) 무슬림(이슬람교도)법'이라고 비난받던 시민권법 개정안을 두고 모디 총리의 2기 정부는 출범한 지 몇 달이 안 되어 대규모 반정부 시위와 유혈 충돌이라는 홍역을 치렀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안 돼서 최악의 코로나19 위기가 닥치면서 모디 총리의 지도력은 혹독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2021년 초 코로나 재확산을 막기 위해 주요 도시를 봉쇄하자 생계가 막막해진 지방 출신 빈민 노동자들과 가족 수백만 명이 고향으로 대거 돌아가면서 곳곳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또 사망자 폭증에 화장시설 부족으로 주차장과 공터가 임시 화장터로 변한 처참한 모습까지도 세계 주요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코로나 확산으로 경제가 마비되다시피 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모디 총리는 5개 주에서 지방 선거를 강행하며 집권당 승리를 위해 수십 차례 대규모 유세를 펼치기도 했다. 결과는 BJP의 참패였다. 특히 야권 세력이 강하고 모디의 최대 정적인 마마타 바네르지 주총리가 웨스트벵골주에서 승리해 2024년 재집권의 초석을 다지려던 모디는 큰 좌절을 맛보았다. 방역 낙제생 한때 '방역 낙제생'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썼던 인도가 코로나19 악몽에서 벗어나자마자 세계 경제의 뉴(New) 엔진으로 다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인도는 2021~2022회계연도 9.1%의 경제 성장을 기록했고 2022~2023회계연도 추정치는 7%다. 이에 모디 총리의 친기업 고성장 정책에 세계 유수 기업들은 인도로 몰리고 있다. 올 1분기에는 인도의 명목 GDP 규모가 과거 식민 통치자 영국을 넘어서며 세계 5위가 됐다. 코로나 사태 이후 인구 조사가 중단되어 정확한 수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인도 인구는 올해 상반기 중국을 넘어 세계 1위로 도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같은 인구 대국이지만 인도는 생산가능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중국과 인구구조가 다르다. 과거에 비해 출산율이 크게 감소하고 있다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여성 한 명당 합계출산율도 여전히 2명 수준을 유지하며 1.2명 수준인 중국보다 훨씬 높다. 중위 연령도 중국보다 10살 적은 29세에 불과하다. 현재 9억명 수준인 인도의 경제활동가능인구는 수년 내에 중국을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 S&P와 모건스탠리는 인도가 2030년까지 독일과 일본을 넘어 세계 3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때마침 서방 기업들은 중국 외 지역에서 생산거점을 추구하는 '차이나 플러스원(China+1)'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당장은 베트남이나 대만이 최대 수혜를 입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인도가 그 해답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인구와 노동력, 내수 시장 규모에서 중국과 비교될 수 있는 나라는 인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또 인도의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모디 총리의 친기업 투자 유치 정책도 서방 기업들의 관심을 끄는 요인이다. 특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신냉전 구도가 심화되면서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균형추(counterweight) 역할을 하는 인도의 지정학적 역향력이 높아지고 있다. 젊고 풍부한 노동력 등 인구통계학적 이점, 정부의 친기업·고성장 정책과 소득·자산 증대로 인한 중산층 및 소비시장 확대, 그리고 지정학적 이점 등 세계 기업들이 인도에서 새 성장동력을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모디 총리는 지난 3월 18일 뉴델리 타지 팰리스(Taj Palace) 호텔에서 열린 'India Today Conclave 2023' 행사에서 '인도의 모멘트(India's Moment)', 즉 인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세계가 인도를 주목해야만 하는 몇 가지 사례를 내세웠다. 첫 번째로 인도의 스마트폰 데이터 소비량과 핀테크 도입률이 현재 세계 1위이고 스타트업 생테계는 세계 3위 규모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도로나 철도, 항구 등 인프라 건설이 여러 지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인도의 문화와 소프트파워에 대한 세계의 관심도 유례없이 높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글로벌 위기 속에서 인도의 경제와 금융 시스템이 견고하다"며 인도의 약진은 민주주의 제도의 힘에서 나온다고 했다. 권위주의 체제의 국가들에 비해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가진 인도가 서방 기업의 협력 파트너로 매력적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은 45년 전 개혁·개방의 길로 나섰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이후 젊은 인구와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공장으로 변했다. 중국과 달리 인도는 독립 후 민주주의를 수용했지만 정치적·종교적·지역 갈등으로 중앙집권적 성장 모델 추진이 힘들어 경제 발전 속도는 중국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세계의 많은 기업들은 중국의 인건비 상승과 기술 이전 요구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중국의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인도 경제 규모는 중국의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아시아에서 가장 젊고 풍부한 노동력은 과거 초고속 성장을 주도했던 수십 년 전 중국과 닮은꼴이다. 인도의 현재 실질 임금도 중국이나 베트남에 비해 현저히 낮아 높은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인도 경제의 디지털화 속도는 놀라울 정도다. 그동안 문제로 제기됐던 취약한 인프라 기반과 기술력 부족 문제도 빠르게 개선되고 있어 인도가 중국에 이어 새로운 제조업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만반의 대비와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티핑 포인트(변곡점) 최근 애플이 인도에서 아이폰 생산을 크게 확대하기로 한 결정에는 소비시장으로서 인도의 엄청난 잠재력 때문이다. 인도에는 7억명의 스마트폰 사용자가 있다. 지난 4월 팀 쿡 애플 CEO는 인도를 방문해 모디 총리를 만나고 뭄바이와 뉴델리에 애플 오프라인 매장을 여는 등 적극적으로 현지 공략에 나섰다. 중국 내 매출 둔화를 새로운 성장동력인 인도에서 흡수하려는 시도로, 애플은 올해 1분기에 분기 기준으로 인도에서 최대 매출을 올렸다. 팀 쿡 CEO는 5월 초 애널리스트 콘퍼런스콜에서 인도를 20번이나 언급했다. 또 중산층이 크게 늘어나고 있고 시장도 역동성이 넘쳐 인도가 '티핑 포인트(변곡점)'에 있는 느낌이라는 소감을 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모디 총리를 이달 21~24일 국빈 자격으로 미국에 초대했다. 중국 견제를 위한 양국 간 공조가 핵심 의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인공지능(AI), 군사장비, 반도체 등에서도 인도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올해 들어 뭄바이에서 첫 패션쇼를 개최한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디올(Dior) 등 글로벌 명품 기업들의 인도행도 줄을 잇고 있다. 최근 에어 인디아(Air India)는 미국 보잉과 항공기 220대 구매계약을 체결한 것도 인도를 오가는 항공기 이용객 급증 때문이다. 세계 3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인 인도는 지난해 207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대기 오염과 탈산소 정책으로 인도에서 전기차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일본 자동차 업체 닛산과 프랑스 르노(Renault)는 전기차 등 신차 공동 개발을 위해 인도 공장에 790억엔(약 742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미국의 테슬라도 인도 공장 설립을 저울질하고 있다. 모디 총리의 말처럼 '인도의 모멘트'에 대한 기대는 높아지고 있다. IMF는 올해 인도 GDP가 6% 전후로 성장해 유럽, 미국 등 선진국이나 신흥국들을 압도할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경제가 고물가와 저성장 우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중국도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이후 회복세가 생각보다 미미한 것과 대조적으로 인도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설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낙관론뿐 아니라 회의적인 시각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인도 정부가 보조금 지원, 세금 환급 등 친기업 정책을 늘리고 있다고 하지만 노동법 등 지역마다 복잡하고 제한적인 법령과 과도한 규제들은 최대 진입 장벽으로 꼽히고 있다. 또 다른 걸림돌은 인도의 보호무역주의 관행이다.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 다자간 무역협정에 가입하지 않고 있어 상대적으로 높은 관세는 세계 시장에서 인도에서 생산된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저하시키고 있다. 모디 총리가 부인하고 있지만 국내 대기업과 정부의 정경유착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분식회계 의혹이 제기되어 주가가 폭락한 인도 최고 재벌 '아다니 그룹'의 가우탐 아다니 회장과 모디 총리의 유착 의혹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높은 실업률···인도 경제의 아킬레스건 또 전체 경제 규모에 비해 제조업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점도 인도 경제의 한계로 지목되기도 한다. 고용 창출 효과가 큰 제조업 분야는 인도 경제에서 겨우 15% 미만을 차지하고 있다. 또 인도 기업들이 숙련공을 선호하면서 많은 젊은 대졸 구직자들도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길거리에서 물건을 팔거나 배달원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인상적인 GDP 수치에도 불구하고 7% 넘는 높은 실업률은 인도 경제의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 3기를 노리는 모디 총리에게 실업률 해소는 가장 시급하고 어려운 과제다. 이러한 현실에서 경제학자들은 실업률 개선을 위한 최선책은 더 많은 공장을 짓는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해외 기업들이 인도에 공장을 더 많이 짓게 하기 위해서는 모디 정부가 규제 완화와 보호주의 철폐에 더욱 속도를 내야 하는 시점이다. 또 인도가 지정학적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있다. 먼저 인도의 소수 종교, 반체제 인사와 언론인 탄압에 대한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도와 미국은 같은 민주주의 체제지만 공동의 가치관에 금이 간다면 두 나라 간 파트너십이 깊어지는 데 한계가 있다. 미국과 서방의 우려인 인권문제에 대한 개선에 힘쓰고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대외 무역거래 규모를 크게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친환경·저탄소 경제로 전환하는 데 속도를 내야만 다가오는 글로벌 그린경제 시대에 낙오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모디 총리가 이러한 모든 것을 잘해낸다면 그가 언급한 '인디아 모멘트'는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3-05-31 09:52:58
- [이수완의 월드비전] 5년 만에 확 바뀐 중국.. 여전히 '기회의 땅'일까 '만만디(慢慢地)'와 퀵서비스 지난주 4박 5일의 일정으로 중국을 다녀왔다. 2018년 8월 주한 중국대사관 초청으로 한국 언론인과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로 구성된 방중단의 일원으로 베이징·항저우·상하이·선전을 일주일간 둘러 본 이후 거의 5년 만의 중국 방문이었다. 이번에는 베이징 소재 한국 광고 회사와 베이징 주중한국문화원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 내외의 초청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 일주일 전만 해도 최악의 황사로 뿌옇게 물들었던 베이징의 하늘은 어느새 맑고 푸른 하늘로 변하고 공기도 따뜻해 봄나들이 관광하기에 제격이었다. 이번 달부터 코로나19로 막혔던 단체 관광객들의 중국행 하늘길이 열리기 시작했지만 중국을 오가는 대한항공의 좌석은 여기저기 빈 곳이 많았다. 엄격하고 까다롭다고 소문난 중국 입국 절차는 미리 각오했지만 이중·삼중으로 설치된 베이징 수도공항 보안검색대를 빠져 나오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5년 전 필자가 중국의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이해 중국의 여러 지역을 방문할 때와 달리 이번에는 가족과 함께 베이징 지역만 둘러 보았지만 중국의 눈부신 발전과 변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중국의 수도이자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인 베이징만 해도 서울의 27배로 한국의 경기도보다 크다. 도심의 구석구석을 제대로 답파하려면 적어도 몇 주는 걸릴 듯하다. 아들 내외가 거주하는 왕징(望京)은 베이징 도심이 아닌 외곽지역이지만 마치 서울의 강남 못지않게 고층 오피스 빌딩과 아파트 그리고 각종 쇼핑몰과 음식점들로 가득하다.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오랫동안 한적했던 시내는 차량과 행인들로 넘쳐 나고 활기가 넘쳐 보였다. 마스크를 쓴 사람도 드물었다. 이곳에선 보행자는 물론 승용차와 택시 기사들은 물고기처럼 여기저기에서 몰려오는 오토바이 및 스쿠터를 조심해야 한다. 음식점이나 마트에서 주문한 상품을 배달하는 택배기사들의 분주한 모습은 서울의 여느 거리 풍경과 흡사하다. '만만디(慢慢地)'로 인식되는 중국에서 퀵서비스와 신속함은 이제 일상이 됐다. AI와 빅데이터 슈퍼 파워 늦은 저녁에 아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호남식 중국 요리와 선물용 견과류 과자를 모바일 웹으로 주문했더니 15분정도 있으니 물건이 도착했다. 알리바바가 운영하는 허마선생 유통매장은 전국에서 생산된 신선한 농수산 식품을 패키징해 웹 주문자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정확히 배달한다. 호기심에 매장을 들렀더니 손님보다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는 매장 직원이 더 많은 듯했다. 장바구니는 매장 내 컨베이어 레일로 옮겨지고 배달원은 이를 픽업해 고객의 자택으로 신속히 달린다. 놀라운 것은 지역 내 고객 특징과 다양한 수요를 데이터화해 매장마다 또는 요일에 따라 파는 물건의 종류와 양이 다르다는 것이다. 택시를 잡을 때도 우리나라 카카오택시와 유사한 앱인 DiDi 앱으로 해결된다. 이동 동선이 실시간으로 표기되고 선택할 수 있는 차량 종류와 가격도 다양하다. 택시 운전자에 대한 평점도 데이터로 축적되기 때문에 안전이나 친절함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자율주행 무인택시 서비스도 베이징 교외에서 상용화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다. 중국은 AI와 빅데이터 슈퍼 파워이다. 거의 3년에 걸친 코로나 통제에 지친 중국인들은 여행과 쇼핑 외식을 하기 위해 지갑을 열고 있다. 베이징 시내에서 2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타고 북으로 달리니 만리장성을 품고 있는 관광명소인 고북수진에 도착했다. 평일 오후인데도 중국 곳곳에서 도착한 관광객들로 주변의 크고 작은 많은 호텔은 객실이 거의 찬 듯했다. 어둠이 깔리고 관광단지 내 수로변과 골목길의 음식점과 카페는 화려한 조명 아래 손님들로 가득 찼다. 관광단지 중앙의 광장에선 중국 전통의 경극 공연에 이어 수백개의 드론이 밤하늘에 신기한 형상을 만들어내며 관람객들의 감탄과 환호를 자아냈다. 중국이 4차산업혁명 핵심산업의 하나인 드론 강국임을 실감케 한다. 드론 굴기를 앞세운 중국은 세계 최초로 유인 드론 택시까지 개발해 상용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왕징에서 차량으로 30분 정도 떨어진 베이징 최대 쇼핑단지 싼리툰은 화창한 봄날 주말 쇼핑과 외식을 즐기려는 인파로 가득 찼다. 세계적인 명품 가방과 의류 화장품의 종합 전시장 같은 곳으로 한국에서는 찾기 어려운 해외 브랜드 매장이 가득하다. 트렌디한 부티크 매장은 가는 곳마다 쇼핑객들로 북적였다. 또 이름난 맛집들은 대기 손님들로 줄이 길게 이어져 우리 가족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방역 통제로 아들 내외는 답답한 집안에서 따분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기껏해야 인근 공원을 가끔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전했다. 지난해 11월 말 '제로 코로나' 봉쇄 조치에 반대하는 백지 시위가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중국 전역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자 중국은 2~3일에 한번 시행해왔던 PCR(핵산) 검사를 폐지하는 등 '위드 코로나'로 갑자기 유턴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자신의 최대 치적이라고 자랑하던 '제로 코로나'를 포기한 것은 자신의 3연임을 앞둔 민심 달래기이자 경제회복의 시동을 걸기 위한 조치였다. 지난해 성장률이 목표치에 크게 못 미치는 3.0% 성장에 그친 뒤 올해는 '5.0%" 안팎의 성장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국은 내수확대와 외자유치에 총력을 쏟는 모습이다. 올해 들어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에 맞춰 중국의 소비가 크게 증가하면서 1분기 중국 경제성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4.5% 성장했다. 예상(4.0%)을 뛰어넘는 수치이다. 수출도 3월 들어 14.8% 증가해 시장예상치(-1.3%)를 큰 폭으로 상회했다. 중국 경제가 마침내 정상궤도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경제의 회복은 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고물가와 저성장의 늪에 빠진 세계 경제 회복에 긍정적인 신호가 아닐 수 없다. IMF에 따르면 올해 세계 경제 성장에 대한 중국의 기여율이 3분의 1에 달할 전망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중국의 대규모 경기 부양책은 침체에 빠진 세계 경제의 구세주였다. 올해 들어 중국 정부는 지난해까지 핵심 규제 대상이던 빅테크, 부동산에 대해 각종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각종 정책 지원 속에 '위드 코로나'가 안착한다면 올해 중국의 5% 성장률 회복은 어렵지 않을 전망이다. 비록 올해 중국의 경제 성장이 대외 교역보다 내수를 기반으로 하는 것일지라도 우리 경제에도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최근 양국 관계가 여러가지 이유로 냉각되었지만 경제적으로 한국과 중국은 이젠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중창업 만인창신'(大衆創業 萬人創新) 5년 전 방문 당시 중국은 경제성장률 6%대 후반 수준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도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었다. 또 개혁·개방 노선이 채택된 지 40년이 지나면서 그동안의 양적 팽창에 만족하지 않고 질적 성장을 위해 소매를 걷고 있었다. 특히 '대중창업 만인창신'(大衆創業 萬人創新)이란 기치를 내걸고 창업과 혁신에 힘을 쏟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필자는 중국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베이징 중관촌 과학기술단지에 자리한 바이트댄스 본사를 방문했다. 본사 건물은 비행기 격납고를 여러 층의 사무실로 개조해 만들었는데 방문 당시 수많은 입사 지원자들이 줄지어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문단은 이곳 임원들로부터 이미 중국 내 청소년층으로부터 인기 몰이를 시작한 인공지능(AI) 기반의 동영상 앱 '틱톡'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과연 이 비상장 슈퍼유니콘 '스타트업'이 BAT(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처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게 사실이다. '틱톡'은 지금 유튜브나 페이스북을 뛰어넘어 세계에서 성인들이 가장 오랜 시간 사용하는 앱이다. 중국뿐 아니라 미국 전체 인구 3억4000만명 중 1억5000만명이 틱톡 이용자이다. 최근 미국이 중국으로의 사용자 정보유출을 이유로 '틱톡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 수정헌법 1조를 위반할 소지가 있다는 논란이 확산 중이다. 5년 전 저장성 성도 항저우에 있는 알리바바 본사를 방문할 당시 어렴풋이 들었던 신선식품 유통매장에 대한 설명도 그냥 무심코 흘려 보냈는데 지금은 중국 어디를 가나 고품질의 신선식품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배송하는 시스템은 이제 깊숙이 뿌리 내렸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기업뿐 아니라 나라 경제를 살린다. 중국인들의 식품 구매 패턴을 바꾸고 유통구조를 혁신한 알리바바의 창의적인 발상이 없었다면 지금 중국의 농촌 경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낙후되어 있을 것이다. '가깝지만 먼 나라' 중국은 우리에게 '가깝지만 먼 나라'로 불리기 시작했다. 서울로 귀국하기 전날 밤 필자는 아들과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 기업들의 고충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얼마 전까지도 대규모 흑자를 내던 한국이 왜 지금은 대중무역수지 적자를 고민하고 있나? 왜 많은 우리 기업들이 거대한 기회의 땅인 중국에서 사업을 접고 줄줄이 철수를 하고 있는가?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인의 반한감정과 한국 제품 불매운동 때문인가? 중국의 경기가 과거보다 좋지 않아서? 결론은 무엇보다도 산업 생태계의 구조적 변화가 원인이다. 중국의 기술수준과 제조역량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우리나라는 수출할 물건이 줄어들고 있다. 이제 중국은 우리에게 점점 더 부가가치가 매우 높거나 프리미엄한 이미지의 상품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웬만한 중국 상품은 우리보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품질은 비슷하거나 높아졌다. 대표적으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컴퓨터 그리고 화장품과 자동차 등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배터리도 생산을 하면 할수록 중국재 중간재를 더 수입해야 하는 형편이다. 반도체는 그래도 중국에 비해 아직 경쟁력이 있지만 마냥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세계적인 명품그룹 '루이비통 모에헤네시'의 고가 브랜드 상품과 유럽의 고급 자동차가 중국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유지하는 것은 그들의 경쟁력과 비교우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출구 전략으로 우리나라 수출 시장의 다변화를 이야기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중국 기업은 무섭게 성장하며 우리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변했다. 우리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에 대한 수출 부진이 고착화 된다면 우리 경제는 밝은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중국의 변화된 수요를 잘 파악하고 과거 대한민국 특유의 기업가 정신을 되살려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면 중국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다가올 수 있다. 중국 시장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스케일이 엄청나게 크고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높이가 높아진 중국인 소비층을 공략할 수 있는 초격차의 혁신적 제품이 줄줄이 나올 수 있도록 범국가 차원의 장기적 전략을 논의할 시점이다.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외교적 수사를 자제하고 정부 차원에서 중국과의 경협 강화를 위한 특단의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 대한민국은 거대한 중국의 초라한 주변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3-04-27 09:34:54
- [이수완의 월드비전] 강대국 눈치 안 보는 실리외교 …룰라와 함께 브라질 다시 뛴다 브라질에서 남미 좌파의 대부로 불리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78)의 3기 정부가 출범한 지 석 달 지났다. 그가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리던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임 대통령을 '50.9%대 49.1%'라는 근소한 차이로 결선투표에서 승리하면서 불안한 출발은 예상됐다. 아니나 다를까, 룰라 대통령은 취임 일주일 만에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위기에 봉착했다.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보우소나루 대통령 지지자들이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궁 등에 난입해 군의 구데타를 촉구하며 폭동을 일으킨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2년 전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 난입 사태의 복사판처럼 진행된 이번 사태로 좌우로 극명하게 분열된 브라질 정치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 또 12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한 룰라 대통령에게 민심 통합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임을 일깨워 줬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이 같은 폭거에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지지세력들도 충격을 받거나 실망하면서 이번 사태가 오히려 룰라 대통령의 국가 통합 작업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룰라 대통령은 1·8 폭동 사태와 관련해 군 내부에 공모 세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즉각 군부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한 대대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군부 숙청과 함께 군부 달래기의 양동 작전이다. 2019년 대통령에 취임한 육군 대위 출신 보우소나루는 재임 중 군 출신 인사 6000여 명을 정부기관에 임명해 군부 독재 시대의 향수에 빠진 극우 성향의 정치를 폈다. 룰라는 지금까지 군 출신이 꿰차고 있던 100여 개 정부 요직을 민간인 출신으로 교체했다. 또 군부의 정보기관 통제권을 대통령 비서실장실로 옮겼다. 또 지난해 말 보우소나루가 임명했던 줄리우세자르 지 아루다 육군참모총장이 해임되고 후임으로 토마스 미게후 리베이루 파비아 육군 동남부사령관(62)이 발탁됐다. 파비아 신임 육군총장은 임명 직전까지도 보우소나루의 대선 패배를 한탄했던 인물이었지만 자신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10월 대선 결과를 존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지난 2월 룰라 대통령은 아마존 야노마미 지역에서 불법으로 일하고 있는 광부 2만명을 추방하는 작업에 군부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보우소나루 지지자들로 가득 찬 브라질 군부에 대한 우려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브라질 민정 이양 이후 최대 폭거 브라질에서는 군부가 네 차례 구데타를 통해 집권한 사례가 있다. 가장 최근은 1964년으로 군부는 노동당 출신 주앙 굴라르 대통령을 몰아내고 약 20년에 걸쳐 군정을 실시했다. 군정기 브라질은 인권과 민주주의 탄압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화학 공업화와 고용 확대 등 경제적 성과를 이룩하면서 지금도 상당수의 브라질 국민들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3월 31일을 '위대한 자유의 날'로 정하고 군부 독재정권의 강력한 민족주의와 보수적 가치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새 정부 출범 후 브라질 군부는 보우소나루가 부활한 쿠데타 기념일 행사를 취소했다. 1985년 브라질의 민정 이양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최대 폭거로 기록되고 있는 1·8 폭동과 관련해 현재 일부 군인들이 시위대의 폭력을 방관하거나 동조했다는 주장에 대해 군 당국이 조사를 진행 중이다. 금속 노동자 출신으로 2003년 대통령에 처음 당선되어 2007년 연임에 성공한 룰라 대통령은 1·2기 재임 기간 이념적으로 좌파지만 일견 신자유적인 경제정책으로 진보 노선보다는 중도 노선 정책을 펼치면서 빚더미에 있던 브라질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고 안정적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그는 군부와도 대체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대선에서 보소나루가 근소한 표차로 패배한 후 군의 개입을 통해 대선 결과를 뒤집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우파 지지자들의 집회가 폭동 사태로 까지 이어지면서 룰라 정부는 민주주의 수호와 군부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안전장치 마련을 고심하고 있다. 현재 브라질 의회는 룰라 지지세력들을 중심으로 군부의 권한과 역할을 좀 더 명확히 규정하는 방향으로 연방헌법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브라질 군부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는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확고한 입장은 군부의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룰라에게 힘을 보태주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브라질 대선 과정에서 브라질 군부에 미국에서 무기를 구매하거나 미군의 협력을 바란다면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1·8 폭동 발생 직후 바이든 대통령은 룰라 대통령을 미국으로 전격 초청했다. 룰라와 정상회담을 한 후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과 브라질 모두 민주주의가 이겼다"며 두 나라가 민주적 선거에 따른 평화적 권력 이양을 부정하려는 폭력을 규탄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절친으로 알려진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임기 종료 직전 미국 플로리다로 돌연 출국했다가 3개월 만에 지난주 고국으로 돌아왔다. 브라질 당국은 1·8 폭동의 배후 역할 등 몇 가지 혐의에 대한 수사를 위해 강제 소환을 검토하고 있다. 트럼프처럼 자신의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보우소나루는 귀국 후 현 집권 세력의 뜻대로 국정이 펼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지지자 결집에 나설 전망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브라질 정치권은 다시 격랑을 예고하고 있다. 트럼프와 달리 바이든 행정부는 극우적 성향의 보우소나루 정권과 거리를 두었다. 그리하여 지난 2월 룰라의 미국 방문은 양국 관계 개선의 주요 이정표로 평가되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특히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과 베네수엘라 등 남미의 반미 국가들과 빚고 있는 갈등과 마찰에 룰라 대통령의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룰라 대통령은 보우소나루 집권 시 무너진 글로벌 네트워크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제외교 무대에서 노련한 중재자로서 룰라의 역할이 큰 주목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현재 미국과 브라질은 기후변화 문제를 빼곤 국제적 공조가 필요한 여러 분야에서 서로 궤를 달리하고 있다. 룰라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서방의 바람과 달리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있다. 특히 룰라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의 중재를 위해 인도나 인도네시아 등 참비동맹 국가들이 참여하는 소위 'Peace Club'을 주도해 나갈 것을 제안했다. 룰라는 또 최근 격화되고 있는 미·중 간 갈등에서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있다. 중국은 이미 브라질의 최대 무역 파트너로 양국의 무역 규모는 미국과 브라질의 거의 2배에 이르고 있다. 국제무대 중재자 룰라의 광폭 행보 좀처럼 해외 순방에 나서지 않았던 보우소나루와 달리 룰라 대통령은 취임 후 국제 외교무대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는 지난 1월 첫 방문국으로 이웃 나라인 아르헨타나를 찾아 양국 간 우호협력을 다졌다. 2월 바이든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뒤 두 달 만인 이번 달 11~14일 폐렴 증상으로 방문이 연기되었던 중국을 찾아간다. 룰라는 방중 기간 교역 강화 및 교육·과학기술 교류안 등 20여 건의 협정을 체결할 예정이다. 룰라의 방중을 앞두고 브라질과 중국은 수출입 결제와 금융거래 등에 달러 대신 자국 통화를 사용하기로 합의해 중국의 달러 패권 도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번 방중은 전임자인 보우소나루와 달리 최대 무역 파트너인 중국과 우호 관계를 재개하려는 룰라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또한 시진핑도 자신의 3기 출범 이후 첫 외빈으로 룰라를 초청한 것은 중국이 브라질과 파트너십을 강화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룰라 대통령은 취임 후 보우소나루 정권에서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던 베네수엘라에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했다. 대표단은 미국에 의해 좌파 독재자로 낙인 찍힌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비롯한 야권 인사와도 회동했다. 브라질은 또 2007년부터 니카라과를 철권 통치 중인 다니엘 오르데카 대통령의 야당과 인권 탄압을 규탄하는 유엔의 결의안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룰라 정부는 또 지난달 미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군함이 리우 항에 정박하도록 허용했다. 이란 군함의 정박 시점이 룰라의 미국 방문 직후 이루어진 점을 보면 브라질이 서방과 반서방의 대결 구도에서 어느 한쪽 눈치를 보지 않고 국익을 위해 브라질 독자적으로 실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준 사례다. 룰라 3기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제무대에서 브라질의 활동 반경이 커지고 있지만 미국이나 서방의 바람과 달리 브라질은 전통적인 비동맹 원칙에 충실한 모습이다. 미·중 강대국 눈치를 보지 않는 브라질의 대외정책 배경에는 민족자결, 불간섭, 국제협력과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 브라질의 외교적 원칙을 명시한 1988년 제정된 헌법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외교적 원칙에 입각한 브라질의 행보에 대해 서방 세계는 브라질에 눈쌀을 찌푸리고 있지만 룰라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제질서의 복합적인 경쟁구도에서 실리 외교를 바탕으로 국가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모습이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할 사항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공급망 위기로 달라진 브라질의 높아진 위상이다. 브라질은 주요 광물과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내수 중심 경제라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룰라 대통령이 국제무대에서 꾸준한 활약을 펼치고 국내에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면 브라질의 오랜 희망인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 꿈만은 아닐 듯하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3-04-03 13:44:42
- [이수완의 월드비전] 베이비부머가 바라본 아이를 안 낳는 대한민국 필자와 같이 한국전쟁 직후 태어나고 자란 베이비붐 세대에겐 콩나물 시루 같은 비좁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할 것이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전북 전주시 구도심의 학교는 언제부터인지 입학 인원이 계속해서 늘어나자 오전과 오후 2부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학교 종이 울리고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엔 답답한 교실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로 가득했다. 공놀이, 구슬치기, 술래잡기에 몰두하다 보면 금방 해가 붉은빛으로 변해 서쪽 하늘로 넘어가고 있었고, 흙 묻은 손으로 서둘러 책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하곤 했다. 지난해 추석 명절 때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어릴 적 추억을 더듬어 학교 교정을 둘러볼 때 느꼈던 적막감인지 허탈감인지 딱 표현하기 힘든 묘한 감정은 지금도 내 뇌리에 박혀 있다. 본 칼럼을 쓰기 시작하면서 모교 홈페이지를 보니 교원 10명에 전체 학생 수는 고작 77명이었다. 내가 이곳 학생일 때 한 학년에 10개 반 정도였고 한 반에 60여 명으로 그때와 지금의 전체 학생 수를 비교해 본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 학교 건물엔 2005년 중학교도 들어섰다. 지금 그 중학교는 교원 16명에 학생은 67명에 불과했다. 이번 달부터는 두 학교를 묶어 통합 운영된다는 소식이다. 동일 부지 내에서 초등학교·중학교를 교장 1명이 운영하고 행정실, 급식실, 체육관, 운동장 등 인적·물적 자원을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내가 어릴 때 꿈을 키웠던 모교가 인구 감소가 불러온 '폐교의 쓰나미'에 휩쓸려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변했다. 빗나간 인구 폭발론 영국 고전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1766~1834)는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의 부작용으로 나타난 빈부 격차, 물가 상승, 실업 등 각종 경제와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법을 인구 증가 억제에서 찾으려 했다. 그는 1798년 처음 펴낸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과 1826년까지 이어진 6차례 개정판을 통해 인구가 식량 생산보다 빨리 증가하기 때문에 출산을 강력하게 억제하지 못하면 인류가 영원히 빈곤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경고했다. 그는 결혼은 되도록이면 뒤로 미루고, 하류층 임금을 최저 생계비 수준으로 억제하고, 심지어는 창궐하는 질병에 대한 맞춤형 치료약까지 배척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의 책은 영향력이 대단했다. 1800년엔 영국에서 10년마다 인구 센서스를 실시하는 법이 제정됐고, 인류학자인 찰스 다윈과 앨프리드 러셀 윌리스가 펼친 진화론에서도 언급되었다. 기술 혁신과 농업 혁명으로 생산성이 크게 개선된 오늘날 맬서스의 이론은 신빙성이 없는 구시대 유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내가 지방 도시에서 초·중·고교를 다니던 1960~1970년대, 또 서울로 올라와 직장을 잡고 두 자녀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인구 폭발 종말론은 유행했다. 당시 우리 정부가 내놓은 각종 산아제한 정책 중에서 가장 효과를 본 것은 남성 정관 수술이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1980년대 정관 수술을 받고 예비군 동원훈련을 면제받은 남성이 매년 수만 명에 달했다. 나에겐 올해 다섯 살 된 잘생기고 애교도 넘치는 (외)손주가 있는데 2년 후엔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요즘 내 일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저출산 시대 귀하게 얻은 손주를 돌보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손주가 태어난 2018년은 우리나라의 결혼과 출산 기피 현상이 이미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던 때다. 그해 합계출산율이 0.98로 마침내 1선이 무너졌던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이미 우리나라는 학령인구 급감에 따라 입학생이 '0'인 초·중·고교가 이제 농어촌 읍.면지역 뿐 아니라 대도시에서 크게 늘고 있다. 올해 내 고향 전북 지역에선 27개 초·중·고가 올해 신입생을 단 한 명도 받지 못했다. 폐교나 학교 통폐합은 서울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인구 전문가인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유튜브 강연을 통해 현재 65세 인구가 전체의 30%에 육박하고 있는 일본의 지방 마을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그곳의 폐교된 초등학교는 이미 요양시설로 바뀌었고, 70대 딸이 90대 노모와 함께 옛날의 교실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그 옆방에는 동창생이 거주하고 있다는 전 교수의 설명은 '노인 대국'의 모습을 더욱 실감나게 느끼게 했다. 지방의 소멸, 그리고 텅빈 교실···. '인구절벽'은 이미 우리 귀에 익숙한 단어가 된 지 오래다.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우리 경제는 물론 국방·교육·조세 등 모든 분야에서 거대한 후폭풍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생산가능인구 감소는 물론 당장 국방을 담당할 병력 부족 문제까지 대두되면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 '모병제' 논의도 현실화할 조짐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강압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독려하는 것은 인권과 민주주의에 배치된다. 출산과 육아 지원금이 매년 늘고는 있다지만 효과는 '글쎄요'다. 지금의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자녀를 낳고 가족을 구성해 나름대로 희망찬 미래를 가꾸어 나간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현실은 비정상적이다. 그동안 우리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기성세대가 청년과 미래 세대의 고충에 귀를 기울이며 소통하려고 노력을 다했는지 묻고 싶다. 성년이 된 우리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는 첫 번째로 경제가 저성장의 침체기에 진입하면서 청년들의 안정된 일자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우리 베이비붐 세대들은 고성장 시대를 살았다. 열심히 노력해서 몇 년 저축을 하면 집도 마련하고 훗날 자식들이 대학을 나와 취업하면 팔자도 펼 것이라는 희망의 끈으로 버티며 삶을 지탱했다. 반면 지금 많은 젊은이들의 현실은 그런 희망의 끈이 없는 상황이다. 과도한 경쟁 속에서 생활고와 불안의 늪에 빠진 수많은 청년들에게 우리 세대의 '헝그리 정신' 또는 '애국심' 타령이 귀에 들릴 리는 만무하다. 시대는 이제 크게 변했다. 효(孝)라는 개념을 통하여 남성과 가장에 대한 복종이 요구되던 가부장제 사회는 오래전 이야기다.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워라밸(work-life-balance)' 사회에서 이제 결혼과 출산은 필수라고 생각하는 젊은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요즘 젊은이들이 왜 이리 이기적으로 변했냐고 원망을 하는 분들이 있다면 세상 바뀐 것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 여성은 평균적으로 4명의 아이를 낳았다. 내 아들과 딸이 태어난 1980년대 2명 안팎이던 합계출산율은 1990년대 중반에는 1.5명으로 내려갔다. 2016년(1.16명)을 기점으로 합계출산율은 7년째 하염없이 내리막길을 걷더니 작년에는 0.7명대로 '불명예' 세계 신기록을 다시 갈아 치웠다. 고성장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세계적으로 출산율 하락은 전반적인 추세다. 하지만 한국보다 훨씬 일찍 저출산 문제를 경험했던 선진국들은 출산율 감소가 완만하게 진행되거나 다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감소 속도는 '인구 쇼크' 수준으로 세계 인구 전문가들의 연구 대상까지 된 상황이다. 이는 그동안 정부의 대처가 너무 무책임할 정도로 비효과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단 대책 변곡점에 선 한국·일본 우리나라 고령인구는 급속히 늘어나면서 미래 세대의 부담은 커지고 있다. 현 정부가 추진 중인 연금 개혁, 노동 개혁, 교육 개혁 등 국정의 3대 개혁 모두 그 실마리를 찾으려면 출산율이 다시 반등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국가의 소멸까지 우려하는 지나친 비관론도 문제 해결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우리보다 훨씬 일찍 경험한 다수의 유럽 국가들은 이민 정책을 대폭 완화해 외국인 노동자를 유입하거나 육아 휴직 의무화와 제도적 변혁을 통해 저출산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 사례도 많이 있다. 또 인구 감소가 인구 팽창 이후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으로 시간이 지나면 출산율 증가를 위한 사회적인 환경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인구가 다시 늘어날 것이라며 낙관론을 펼치는 학자도 많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는 일본과 더불어 지금 당장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매우 중차대한 변곡점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현재 세계 최고령 국가인 일본은 지난해 출생아 수가 40년 전의 거의 절반인 80만명 아래로 내려갔다. 또 앞으로 30년 정도 지나면 인구 10명 중 4명은 노인이고 어린이와 청소년은 1명뿐이라는 전망이다. 위기감을 느낀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달 의회 연설에서 일본이 저출산으로 사회적 기능을 유지하지 못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또 오는 4월 1일 아동가정청 출범과 함께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출산율 제고 대책을 논의 중이다. 일본의 합계출산율(2021년 기준 1.3)은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출생아 수는 10년 전에 비해 절반 수준인 25만명 아래로 내려갔다. 통계 당국의 예측이 맞는다면 2050년쯤 대한민국 인구 10명 중 4명 이상이 65세 이상인 노령층으로 OECD 국가 중 일본을 제치고 최고령 국가로 등극한다. 그동안 우리의 백화점식 저출산 대책이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정부와 여야 정치권은 함께 진지하게 종합적으로 점검할 때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달 16일 국정현안관계장관회의에서 기존 저출산 대책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날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아이돌봄 서비스 고도화 방안"을 내놓았다. 긴급 및 단시간 돌봄 등 맞춤형 서비스로 질적 개선을 도모하고, 국가자격제도를 통해 돌봄 인력의 전문성을 높이고, 민간 서비스 제공기관 등록제를 내년부터 도입한다는 내용이다. 아이돌봄 서비스 현재 직장을 가진 젊은 부부들의 최대 고민거리는 매일 같이 어린 자녀를 누군가에게 안심하고 맡기는 일이다.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남녀 직장인들이 일과 양육을 병행하며 어린아이를 키우기 힘든 상황은 우리나라 출산율 급락의 최대 이유다. OECD 국가 중 우리나라 여성은 높은 교육 수준에도 불구하고 취업률(50%대)은 70%대를 넘는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등 다른 회원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 또 육아 휴직 제도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다. 유럽 국가들을 보면 육아에 대한 부담을 크게 줄이자 여성 취업률이 높아지고 출산율도 차츰 회복되는 모습을 보인 사례가 많다. 재원 마련 문제 때문에 저출산 관련 예산을 정부가 큰 폭으로 한번에 늘리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모든 정책과 예산은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정부의 지원책을 최대한 돌봄 서비스 등 육아 친화적 인프라 구축에 우선을 두어야 할 때다. 필요하다면 지난해 민주당이 제안한 '국가 돌봄 책임제' 도입도 진지하게 검토할 때다.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정치권은 물론 민간과 사회단체에서 진지한 토론을 활발하게 전개할 때다.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기후변화처럼 단번에 해결책이 나올 수는 없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미래 세대와 교감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출산율도 상승곡선을 탈 것으로 기대한다. 1990년대 초·중반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하던 X세대인 내 아들과 딸은 20년 정도 지나면 은퇴를 하고 노후 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살다 보니 20년이라는 세월은 금방이다. 20대 중반을 넘긴 우리 손주와 그 또래들은 결혼과 출산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 칼럼을 마무리하면서 나의 모교(완산초등학교) 교훈을 소개하겠다. '큰 꿈을 품고 즐겁게 배우며 씩씩하게 자라는 어린이'. 언젠가 학교 운동장에 어린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다시 가득차길 희망하면서..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3-03-05 11:47:02
- [이수완의 월드비전] 일대일로· 페트로 위안 …중동에 펼쳐진 '차이니스 드림' 1945년 밸런타인 데이(Valentines's Day·2월 14일)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에서 기념비적인 날이다. 크림반도 얄타에서 미·영·소 연합국 정상회의를 마치고 귀국하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그는 수에즈 운하에 정박한 미 해군 ‘USS 퀸시’호 갑판 위에서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 국왕을 만난다. 사흘간 진행된 선상 회담에서 양국 간 지정학적 동맹 관계에 대한 기본 프레임에 합의한다. 당시 대규모 석유 개발과 함께 전제적 군주정치의 기반을 다져가던 이븐 사우드 국왕은 루스벨트에게 왕실의 안위와 군사적 지원 약속을 받는다. 대신 사우디산 원유를 원하는 만큼 ‘합리적 가격’에 미국에 공급해주기로 약속한다. 안보와 경제의 전형적인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이 성사된 것이다. 사우디-중국 밀착에 요동치는 중동 정세 두 사람 간 만남은 지구촌의 '화약고'로 꼽히는 중동에서 80년 가까이 지속된 미·사우디 동맹 관계의 역사적 출발선이다. 최근 미국과 중동의 디커플링, 미국의 빈자리를 파고드는 중국의 행보는 역내 경제는 물론 국가 안보 측면에서 다자간 복합 경쟁을 심화시키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18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 이후 미국과 불편한 외교 관계를 이어가면서 중국·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사우디의 앙숙으로 중동의 패권을 두고 다퉈온 이란은 미국과 체결한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가 무산되고 반정부 시위 탄압에 대한 서방의 비판에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 이에 '미국 견제'라는 목표 아래 공동 전선을 펼쳐왔던 중국이 사우디 등 걸프만 왕정국가들과 에너지 분야 혁신 등 경제 협력뿐 아니라 호르무즈 해엽 3개 섬에 대한 영토 분쟁과 군사·안보 협력 문제까지 논의를 하자 이란은 발끈했다. 이에 당황한 중국은 황급히 이란 달래기에 나서기도 했다. 중동 내 외교 질서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형국이다. 2010년대 셰일(shale) 혁명 이후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변한 미국은 원유 수입이 감소하며 중동과 디커플링이 심화되고 있다. 이를 틈타 세계 최대 에너지 수입국 중국은 한걸음 한걸음 세계 원유시장을 통제하는 힘을 키우고 있다. 수입 원유 중 50%가 중동산인 만큼 중국은 이 지역에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망 확보에 공을 들이면서 다각적 경제 협력과 무역 파트너십도 적극 모색하고 있다. 특히 석유 의존 경제 탈피와 경제 개혁을 위해 산업 다각화와 대규모 국책사업을 추진 중인 사우디, 아랍에미리트(UAE) 등 다수의 중동 국가에서 항만, 산업단지, 배후 도시 건설을 주도하며 현대판 육해상 실크로드인 일대일로(一帶一路)에 불을 댕기고 있다. 사우디와 걸프만 국가들이 중국과 밀착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관심을 돌리자 중동 국가들의 소외감은 커지고 있다고 CNN 등 주요 외신들은 분석하고 있다. 특히 군사력이 미약한 걸프만 국가들로서는 미국이 지역안보에서 손을 뗐을 때 새로운 안보 협력 파트너가 필요한 상황이다. 중국은 일종의 위험 회피 카드인 것이다. 그동안 중국은 미국이나 러시아와 달리 시리아 내전이나 이란의 핵 개발, 아랍과 이스라엘 간 평화 협상 등 중동 지역 주요 골칫거리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었다. 소위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외교원칙이 중동에서는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12월 시진핑 주석의 사우디 방문은 중동에 대한 적극 개입으로 방향 전환을 공식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 주석의 방문은 지난 7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른 글로벌 에너지 위기 타개 차원에서 석유 증산을 요청하기 위해 사우디를 찾았다가 '빈손'으로 돌아간 것과 큰 대조를 보이고 있다. 또 1945년 루스벨트-이븐 사우드의 'USS 퀸시’호 회동과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3박 4일 순방 기간에 시 주석은 제1회 중국·아랍 정상회의와 중국·걸프협력회의(GCC) 콘퍼런스에 참석해 연설하고 최소 17개국 정상과 연쇄 정상회담을 하며 아랍권과 관계를 다졌다. GCC는 사우디, UAE,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오만 등 6개 산유국의 협력기구다. 사실상 수니파 이슬람 국가의 모임으로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중국은 2020년 EU를 제치고 GCC의 최대 무역 거래국이 되었다. 현재 GCC 6개국과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마무리하고 있다. 시 주석이 사우디의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난 후 발표된 4000자에 달하는 공동성명은 에너지 분야 혁신, 우주 개발, 디지털 경제, 인프라 건설, 이란 핵 프로그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우호 협력을 다짐하고 있다. 사우디와 중국의 밀착은 사우디·미국 관계뿐 아니라 글로벌 에너지 질서의 대변화를 의미한다.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사우디 외교장관은 미국과 중국 두 나라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우린 결코 이를 제로섬 게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We don’t see it as a zero-sum game by any means)." 그의 말이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중국과 사우디의 뉴파트너십 구축은 양국에 중동의 복잡한 역학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실익 추구와 새로운 기회 창출을 위한 도전임에 틀림없다. 페트로 위안 시대 올까?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대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글로벌 에너지 시장을 자신들 룰에 따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 손꼽힌다. 미국은 엄청난 군사력으로 중동의 원유 공급을 좌지우지했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은 경제와 화폐의 연결고리였던 금본위제를 일방적으로 폐지한 후 달러는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하지만 1974년 사우디와 손을 잡고 원유 대금을 달러로 지급하는 데 합의하면서 지금의 기축통화국 위치를 공고히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시 주석의 사우디 방문을 계기로 양국이 달러화 대신 위안화를 통한 원유 결제, 즉 '페트로 위안(petro yuan)' 체제 등 세계의 새로운 에너지 질서 구축을 위한 작업에 나섰다고 평가하고 있다. 졸탄 포자르(Zoltan Pozsar) 크레디트스위스은행 애널리스트는 고객들에게 보낸 투자 메모에서 중국이 최근 급변하는 지경학적 변환을 틈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룰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서방이 달러화 외환보유액을 무기화하자 중국은 세계 각지에서 비(非)달러화 원유 결제를 늘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미 산유국 협의체인 오펙플러스(Opec+)의 주요 회원국인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 등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3국은 이미 중국에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원유를 팔고 있다. 중국이 이들 3개국과 맞먹는 원유 매장량을 가진 GCC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한다는 것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지각변동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제재에 시달려온 러시아는 중국과의 무역에서 달러화로 거래하는 스위프트(SWIFT) 국제은행 간 금융서비스 대신 중국 CIPS(Cross-Border Interbank Payment System)로 갈아탔다. 이란,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도 현재 중국과의 일부 거래를 위안화로 결제하고 있다. 미국 달러화 리스크의 위험 분산을 위해 CIPS를 선택하는 국가들이 늘어난다면 오랫동안 에너지와 상품시장을 기반으로 기축통화 자리에 오른 달러화의 지위에도 차츰 영향을 줄 수도 있다. SWIFT 자료에 따르면 위안화는 국제결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 이내지만 최근 엔화를 추월해 달러, 유로, 파운드화에 이어 세계 4대 결제통화로 등극했다. 중국은 최근 일대일로를 명분으로 중동뿐 아니라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등 전 세계 저개발 국가에 통화스와프를 통한 구제금융성 자금을 제공하거나 투자를 늘리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들 국가의 위안화 사용도 크게 늘리면서 궁극적으로 '위안화의 기축통화' 진입을 노리고 있다. 즉, 일대일로와 기축통화 구상은 중국의 글로벌 패권국 도약을 위한 두 개의 큰 기둥이다. 미국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지만 아직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우디가 50년간 이어온 미국과의 '페트로 달러 협정'을 깨고 원유 대금을 달러화 대신 위안화 결제로 전면 변경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직 대외적으로 사우디와 중국은 양국이 '페트로 달러'의 포기와 위안화 표시 원유 계약 문제를 논의했다는 소문을 확인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애널리스트들은 사우디가 중국으로 수출하는 원유 일부에 대해 위안화 결제를 허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페트로 달러 협정이란' 중동의 1차 오일 쇼크 이후 미국과 사우디가 1974년 6월 원유 대금 결제를 달러를 통해서만 하겠다고 합의한 것을 이른다. 석유를 달러로만 사야 하면 세계 각국은 더 많은 달러가 필요할 테고, 달러 가치는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중동 산유국은 원유 판매 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미국 금융기관에 예치하거나 미국 국채에 투자했다. 미국은 다시 이 돈으로 상품을 수입해 세계에 돌려주는 달러 순환 체계가 세계경제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1971년 미국이 금 태환을 중지한 이후 가치가 폭락한 달러가 다시 한번 기축통화로서 지위를 공고히 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달러는 막강한 군사력과 함께 미국의 패권을 지탱하는 든든한 두 개의 기둥이 됐다. 만약 사우디가 중국과 위안화로 원유 거래를 시작하고 다른 국가들도 이에 동참하면 중국의 '페트로 위안화' 시대라는 꿈은 현실로 성큼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 자본시장 자유화 수준이 선진국들에 비해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페트로 위안 시대를 향한 당근책으로 중국은 무역과 금융거래에서 위안화의 금태환을 추진 중이다. 중국의 금융 안전망(financial saftey-net)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다. 중국의 페트로 위안화 드라이브가 성공하려면 금 태환뿐 아니라 투자가들로 하여금 무역 거래는 물론 비무역 분야에서도 위안화를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바로 국내 자본시장 육성이다. 외환 헤지 등 대규모 외자 유출에 필요한 금융 시스템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세계 각국의 정책 입안자와 기업들 그리고 투자가들은 세계 에너지 시장의 혁신과 페트로 위안화를 향한 중국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페트로 달러 유입이 미국에서 금융 사업을 크게 성장시켰듯이 페트로 위안화가 중국의 금융 혁신에도 일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에너지 혁신으로 중국에 값싼 에너지가 충분히 공급된다면 중국으로 이동하는 세계의 기업들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3-02-01 09:58:50
- [이수완의 월드비전] 매서운 경제한파..그래도 올해 희망을 품어야 하는 이유 2023년 새해가 밝았다. 작년 이맘때 대부분 전문가들은 2022년 세계 경제를 팬데믹 이전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회귀점으로 규정했다. 2021년 글로벌 경제는 코로나19 쇼크에서 벗어나기 위한 각국의 무차별적인 경기 부양책 덕분에 5% 넘게 V자 반등을 했다. 지난해는 '위드 코로나'라는 일상 회복과 2021년 남발했던 각종 완화정책의 축소가 공존하는 한 해였다. 세계은행은 지난해 경제가 4.1%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3% 내외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대란, 중국의 '제로 코로나' 봉쇄 조치와 미국 연준의 초강력 긴축과 금리 인상 등 우리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실 3% 정도 성장이라도 아주 절망적인 수치는 아니다. 팬데믹 발생 이전인 2018년·2019년과 엇비슷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2023년도 전망보고서를 보면 대부분 세계 경제가 인플레이션과 힘든 싸움을 계속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작년보다 성장률이 다소 둔화되겠지만 심각한 경기 침체는 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잠재성장률로 추정되는 2%를 밑도는 1.6% 성장에 그칠 것으로 정부는 전망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몇 가지 긍정적인 신호 새해 벽두부터 실물경제에 한파가 몰려오면서 올해에도 가계든 기업이든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야 하는 상황임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와 다른 몇 가지 긍정적인 신호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지난해 그토록 세계 경제를 억눌렀던 고물가와 가파른 금리 인상 속도에 대한 우려가 점점 수그러들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글로벌 인플레이션은 수요 감소와 재고 증가 그리고 주택 가격 하락으로 지난해 4분기 이미 정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13일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7.1%로 아직 높은 수준이지만 하향 안정세가 뚜렷해지고 있다. 올해에도 인플레이션 통제를 위한 중앙은행들의 긴축 강도가 각국 경제정책의 핵심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성장 둔화와 함께 인플레이션도 함께 하락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미국 국채 10년물 수익률은 10월 말(4.23%) 대비 크게 하락한 3.8%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이리하여 달러화 급등세도 주춤한 상태다. 달러화 가치와 미국 국채 수익률 하락은 한국은행을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들에 향후 금리 인상 속도를 완화시킬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있다. JP모건체이스는 최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피크를 3.75%에서 3.5%로, 인도 준비은행의 기준금리 피크를 6.75%에서 6.25%로 하향 조정했다. 세계 3대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의 글로벌 수석 경제분석가 세스 카펜터(Seth B. Carpenter)는 지난해 세계 경제를 짓눌렀던 공급망 차질과 노동시장의 대혼란이 완화되면서 인플레이션도 하락하고, 중앙은행도 긴축의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는 등 각국이 성장률을 회복시키기 위한 정책적 선택지를 늘려갈 수 있다고 최근 전망했다.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전 세계 경제가 감기에 걸린다는 말이 있지만, 지난해 미국 연준의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현재 연방기금(FF) 금리 목표치(4.25~4.5%)는 15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지난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이후 공개된 위원들의 전망을 나타내는 이른바 점도표는 금리 인상이 5.1%(중간값) 수준에서 멈출 것임을 예고했다. 이를 보면 이번 달 31일 개최될 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추가 인상한 뒤 이후 한 차례 더 금리 인상에 나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더 끌어올릴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올해 상반기 중 금리 인상을 일단 멈추고 물가 상승률과 고용 수준을 점검해가며 금리 인하로 피벗(Pivot·정책 전환)을 고려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고금리로 인해 미국 경제 침체가 가시화한다면 조기에 통화정책 완화를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 경제 연착륙(soft landing)을 위해 연준이 이번 달 0.25%포인트 또는 0.5%포인트 추가 인상을 마지막으로 단행한 이후 기준금리를 연말까지 조정하지 않고 유지했다가 내년부터는 지속적으로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월가에서 나오는 이유다. 미국이 금리 인상을 5% 또는 그 아래에서 멈춘다면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미국 금리를 어느 정도 추종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올해 기준금리를 3%대 중·후반에서 안정화시킬 수 있는 호재다.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급격한 내수 경제 침체와 주민 반발에 직면했던 중국 당국이 지난달 방역과 통제를 대폭 완화한 것도 올해 우리에겐 주요 변수다. 일단 입국자 격리 조치 폐지로 인해 한국, 일본, 태국 등 주변국 관광산업이 수년 만에 다시 활기를 찾을 것으로 보인다. 춘제(설) 연휴 귀성 기간 전후로 혼란이 당분간 가중될 수 있지만 올해 1분기를 지나 '위드 코로나' 정책이 정착되면 중국은 소매판매 증가와 함께 경제 회복이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세계 주요 투자은행들은 앞다퉈 중국 성장 전망치를 상향 조정하고 있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는 올해 중국 성장률이 지난해 2.7% 내외에서 4.9%로 회복될 것으로 전망했다. 시진핑 체제 3기 출범과 함께 경제를 안정적 성장 궤도로 올리겠다는 중국 당국의 강력한 의지는 지난달 15~16일 열린 연례 중앙경제공작회의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지난해 시 주석의 핵심 경제 어젠다인 '공동 부유'라는 단어가 거론되지 않은 것도 중국이 규제 대상으로 꼽았던 '빅테크' 기업에 대한 통제를 서서히 풀고 있다는 신호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하의 핵심 정책 중 하나로 대외 개방이 언급된 것은 세계 최대 무역대국인 중국이 폐쇄경제로 회귀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로 수출 대국인 우리에겐 긍정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공급망 혼란과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기록적인 물가 상승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곳은 유럽일 것이다. 유로존 대표 국가인 독일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축소와 경기 침체로 힘든 한 해를 보냈으나 소비자 심리나 기업체감지수가 최근 급락세를 멈추고 바닥을 다지는 모습이다. 모건스탠리는 올해 유로존 경제가 긴축정책과 에너지 위기의 영향으로 0.2%포인트 정도 수축될 것으로 예상했다. 특이한 것은 고물가와 경기 침체 충격에도 불구하고 유로존 실업률이 6.5%대로 꾸준히 하향 안정화됐다는 사실이다. 올해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은 거세질 전망이다. 겨울철 혹한으로 전쟁 수행이 극도로 힘들어지고 중국과 인도까지 서서히 러시아에 대해 '거리두기'를 하는 모습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 평화협상론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무르익고 있다. 연준의 자이언트 스텝 영향으로 유로화와 엔화, 파운드화 등 주요 통화에 대해 크게 올랐던 '킹 달러(King doallr)' 현상이 지난해 말부터 연준의 비둘기파적 피벗 기대감으로 퇴조하고 있는 것도 우리 경제에 청신호다. 지난해 10월 1444원대까지 치솟았던 환율은 현재 1270원 아래로 안정을 찾았다. 지난달 블룸버그 인텔리전스(BI)의 스티븐 추 수석 전략가는 보고서에서 올해 달러 가치가 추가로 하락하면서 원·달러 환율이 1100원대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여하튼 올해에는 긴축에 대한 연준의 속도 조절로 지난해와 같이 국제 외환시장이 급격하게 흔들리지는 않을 전망이다. 아시아 고성장 시대 새해를 맞이하면서 또 하나의 특징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경제 전망이 타 지역에 비해 긍정적이라는 사실이다. 먼저, 앞에서 언급했지만 중국은 '제로 코로나' 정책 폐기로 인한 민간소비 회복에 힘입어 5%가까운 수준으로 성장률이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수십 년간 인구 고령화와 장기 저성장 또는 역성장으로 평균 0.8%대 성장률을 보였던 일본 경제는 올해 1.2% 성장할 것으로 모건스탠리는 전망했다. 일본은행은 오랫동안 일본 경제를 견인해온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제정책)의 한 축인 금융 완화와 초저금리 정책에 대해 궤도 수정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아베노믹스를 지지해온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 임기가 4월 종료되면서 국가 경제에 부메랑이 된 아베노믹스 철회를 공식화할지 여부가 큰 관심사다. 특히 인도는 올해와 내년 6% 이상 고성장을 이어가고 10년 내로 세계 3위 경제대국으로 도약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국제통화기금(IMF) 등 다수 기관들이 전망하고 있다. 인도가 선진국 수준인 디지털 인프라 환경을 기반으로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하는 오프쇼어링(offshoring), 제조업 투자, 에너지 변환이라는 경제 호항의 3가지 메가 트렌드 물결을 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인구로 볼 때 중국, 인도에 이어 셋째로 큰 이머징 마켓인 인도네시아도 경제 개혁과 제조업 육성으로 높은 성장세를 이어가며 경제 규모가 한국을 추월할 날도 머지않았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IMF는 글로벌 공급망 혼란으로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큰 피해를 보았던 개발도상국 경제가 올해에는 선진국에 비해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 아시아 경제가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인다는 것은 세계 경제가 인플레이션 극복과 성장률 회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도록 일조하는 긍정적인 요소다. 아시아 경제의 정상화는 유럽 국가의 수출 수요를 증대시킬 뿐 아니라 세계적인 공급망 위기를 해소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기를 쌓아라 지난해에는 팬데믹 이후 세계 경제가 정상으로 돌아가는 회귀점으로 예상됐지만 세계적인 석학인 애덤 투즈 컬럼비아대 역사학과 교수 말처럼 전쟁과 인플레이션 자연재해 등 '복합 위기(polycrisis)'의 한 해였다. 올해도 경제 한파를 이겨내기 위한 힘든 한 해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 경제는 미래 세대 먹거리 찾기에도 매진할 때다. 또한 투자 활성화를 위한 규제 개혁과 노동시장과 임금체계 개편 등 우리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과감히 제거하면서 힘찬 도약의 기회를 노려야 할 때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축구 스타 손흥민은 오랫동안 아버지의 혹독한 기본기 훈련을 통해 실력과 자신감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자신의 실패를 딛는 힘, 긍정의 에너지 그리고 겸손한 태도까지 모두 아버지의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아버지 손웅정씨는 프로 선수 시절 스피드가 뛰어난 측면 공격수였다. 그의 저서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를 보면 손웅정씨는 자신은 상대 선수 한 명 제칠 발기술이나 개인기를 완성하지 못한 채 그래도 성적을 내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뛰었다가 몸이 금방 망가져 조기 은퇴한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우리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가계는 눈앞의 단기적 이익에만 급급하지 말고 좀 더 멀리 내다보며 기본기를 차곡차곡 쌓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3-01-02 15:11:50
- [이수완의 월드비전] 트럼프는 공화당의 '짐'인가 '자산'인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미국 중간선거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2024년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그가 퇴임 후 1년 10개월 만에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공화당 입장에선 최악의 타이밍이다. 당 내부에서 그의 개입이 없었다면 주요 승부처에서 민주당에 낙승했을 것이라는 '트럼프 책임론'과 함께 다음 대선을 이기기 위해선 이젠 트럼프로는 안 된다는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 그의 조기 출마 선언이 탈세 의혹과 국가 기밀 문서 유출 등 각종 비리 혐의와 관련된 검찰 수사를 염두에 둔 '방패막이'로 인식되는 것도 공화당에는 큰 짐이다. 이젠 유력한 공화당 기부자들까지도 트럼프에 대한 지원을 망설이고 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지 일주일 후인 11월 22일 트럼프가 플로리다 마러라고 자택에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회동한 이후 공화당 터줏대감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까지 당내 비난 대열에 가세했다. 궁지에 몰린 트럼프. 그는 과연 거센 역풍을 뚫고 미국 정치적 역사에 새로운 신화를 쓸 수 있을까? 정치적 경험이 백지였던 '아웃 사이더' 트럼프가 처음 대권 츨사표를 냈던 2016년으로 우리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트럼프는 공화당 경쟁 후보자들을 향해 정제되지 않은 원색적 언어로 비난을 쏟아내면서 곧장 언론과 대중의 시선을 장악한다. TV 방송사에 트럼프는 단기간에 시청률과 수익을 높여주는 흥미진진한 '서커스' 경선의 주인공이었다. 트럼프가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적 거친 발언을 일삼자 주요 언론매체들은 그가 얼마나 품위 없고 분열적이고 위험한 인물인지를 알리는 데 혈안이었다. 이런 식으로 트럼프는 돈 한 푼 안 쓰고 언론에 노출되며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렸다. 놀랍게도 그의 유세장은 매일 열광적 지지자로 가득했다. 그는 12명이 넘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공화당 대권 후보를 거머쥐었다. 민주당은 트럼프와 같은 '괴짜'가 공화당 후보가 된 것을 내심 반기는 분위기였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트럼프 지지자 50%를 '한심한 종자'라고 매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돌풍은 본선 대결까지 이어졌다. 트럼프가 공화당 주류와 언론의 멸시를 조롱하듯 대통령에 당선되자 힐러리 캠프는 언론이 트럼프의 손아귀에 놀아났다며 망연자실했다. 애초 공화당 주류의 눈에는 트럼프가 워싱턴 정가의 질서와 품위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통제불능식 막말과 언행으로 거침없이 상대방을 경멸하며 선거운동을 펼치던 트럼프를 지지자들은 부패한 엘리트 정치를 타파할 적임자로 환호했다. 당시 정치 신인 트럼프 돌풍에 대한 분석은 다양하지만 대체적으로 기존 정치권에 대한 미국인들의 혐오에서 출발한다. 특히 보수 백인 남성 하류층의 울분을 자신의 지지로 성공적으로 전환시킨 트럼프의 선거 전략은 주효했다.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선 인종과 성별, 종교, 성적 지향, 장애, 소수 약자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이 엄격하게 금기시되는 일종의 사회적·문화적 규범이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소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즉 소수자 차별 금지에 대한 미국 보수 백인층의 반감이 트럼프를 통해 일시에 표출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기존 정치인의 틀을 여지없이 깨버린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공화당은 사실상 트럼프의 당으로 빨리 진화했다. 그러나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고배를 마셨다. 이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선거 사기로 당선됐다는 주장을 계속하면서 아직도 상당수 공화당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당선을 도둑맞았다고 맹신하고 있다. 트럼프는 2021년 1월 6일 자신을 지지하는 폭도들의 의회 난입 사건으로 여러 명이 사망한 뒤에야 정권 이양에 착수했다. 앞으로 미국 헌정 사상 가장 어두운 장면으로 꼽히는 의회 폭동 사태에 대한 조사에서 트럼프의 선동 혐의가 입증된다면 그의 정치 인생은 중대한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미국 정치의 분열을 부채질한 소위 '트럼피즘'이라는 극우 포퓰리즘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물론 트럼프는 확고한 고정 지지층과 막강한 자금 동원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가장 유력한 공화당의 대선 후보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난달 치른 중간선거 결과를 보면 공화당에서 트럼프의 영향력과 입지는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통적으로 집권당의 무덤으로 불리는 중간선거에서 그가 지지했던 후보들이 줄줄이 낙선되면서 기대했던 소위 공화당의 '붉은 물결'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 인기가 별로이고 물가 상승률이 8%까지 치솟는 등 경제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도 공화당이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은 트럼프 카드로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공화당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트럼프가 막판에 지원 유세를 다니면서 대통령 재선 도전 가능성을 노골적으로 밝힌 것은 민주당 지지층의 결집을 자극했다는 평가다. 트럼프가 2024년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면서 공화당 내 떠오르는 잠룡들과 주도권 쟁탈전이 벌써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44)는 이번 중간선거의 최대 승자로서 트럼프의 대항마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그는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에서 19.4%포인트 차로 단순히 재선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이 승리했던 지역에서도 전세를 뒤집으면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트럼프의 집중 공략에도 함락에 실패했던 마이애미-데이드 카운티(Miami-Dade County)에서도 득표율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 대선에서 바이든은 라틴계 주민이 절대 다수인 이 지역에서 7%포인트 차이로 승리했는데 디샌티스는 이번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11%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디샌티스 주지사는 라틴계 유권자뿐 아니라 백인 노동자, 농부, 그리고 교외 지역 화이트칼라 등 폭넓은 지지층을 과시한 셈이다. 트럼프의 참모들은 그의 대선 출마를 조지아주 상원의원 결선투표 (12월 6일) 이후까지 미루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부진한 중간선거 성적표로 침체된 당내 분위기를 일신하고 입지가 좁아진 자신의 처지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서둘러서 발표를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러라고 리조트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나는 미국 대통령에 출마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시종일관 청중을 휘어잡던 열정적인 연설과는 거리가 멀었다. 트럼프의 '입'으로 통했던 폭스뉴스는 35분으로 예정됐던 트럼프의 연설이 1시간 이상 지루하게 늘어지자 생방송을 중단하고 다른 뉴스를 이어갔다. 공화당의 거액 기부자들도 현장에 없었다는 점도 그의 영향력이 이전과 같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이든의 민주당은 트럼프의 2024년 대선 출마 선언에 대해 겉으로는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내심 반기고 있다. 둘로 극명하게 갈라진 미국 사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른바 '트나땡(트럼프 나오면 땡큐)'이라는 관점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선전을 이끌면서 자신에 대한 차기 대선 불출마 압박에서 벗어날 발판을 마련했다. 이번 선거를 공화당과 민주당 간 선택으로 프레임을 몰아간 바이든과 민주당의 전략이 먹힌 것이다. 한편으로 실망스러운 이번 선거 결과는 공화당에는 전화위복(blessing in disguise)이 될 수도 있다. 네바다와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애리조나 등 주요 경합 지역 유권자들은 2020년 대선이 사기라는 트럼프의 잘못된 주장을 신봉하는 '충성파' 후보들을 탈락시킴으로써 공화당이 트럼프의 막대한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었다. 중간선거 전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60%가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이 정당하다고 대답한 것을 보면 트럼프가 내세운 후보들이 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이는 유권자들 대부분이 과거 수년간 거친 수사(rhetoric)와 음모론과 혼란의 늪에 빠진 미국의 민주주의가 정상화의 길로 가길 희망한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번 선거가 트럼프에게 거대한 패배로 인식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번 선거가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심판일 뿐 아니라 트럼프의 극단적인 선거 부정과 선동에 대한 강력한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를 대신할 공화당의 '새로운 리더'로 부상하고 있는 디샌티스 주지사는 한때 트럼프의 지지자였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의 지원을 기피한 뒤 큰 표차로 승리했다. 트럼프는 중간선거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디샌티스가 대선에 나서면 "심하게 다칠 수 있다"고 말하는 등 견제에 나서고 있다. 이런 트럼프의 선제 공격을 두고 디샌티스는 '소음(noise)'이라고 일축했지만 아직 정면 대결은 피하고 있다. 나이가 40대인 그가 좀 더 때를 기다릴지 아니면 2024년 공화당 경선 후보에 뛰어들 것인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설혹 그가 다음 대선에 출마를 하기로 이미 결심을 했다 해도 발표를 서두르지 않고 페이스를 조절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트럼프가 처음 대선에 출마한 뒤 경선 후보들이 줄줄이 트럼프와 설전을 벌이다 진흙탕에 빠져 큰 낭패를 보았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동생 젭 부시 플로리다 당시 주지사는 뛰어난 정치적 자산과 배경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젭 부시는 경선 토론 과정에서 트럼프에게 일방적 공격을 받으며 후보를 사퇴했다. 트럼프가 이 순간 가장 걱정해야 할 문제는 당내 자신의 흔들리는 입지나 선거자금 같은 문제가 아닐지 모르겠다. 최악에는 당국의 수사 결과 대선 후보 자격을 박탈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진정한 리더는 자신이 당이나 국가에 큰 짐이나 골칫거리(liability)가 되고 있을 때 이를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또 정치적 무대에서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면 과감히 물러난다. 이는 이번 미국 중간선거에서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보낸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2016년 처음 대선 도전을 선언한 이후 정치적 행보를 보면 이러한 메시지가 강하게 다가올 리가 없다. 아직도 그는 자신만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맹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년 5월 시작되는 공화당의 프라이머리에서 트럼프는 이번에는 방어자의 입장으로 바뀌어 경쟁 후보들과 난타전을 준비해야 할 듯하다. 벌써부터 공화당의 주요 선거자금 후원자들이 트럼프 대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등 다른 후보군으로 관심을 돌리는 움직임이 있다지만 트럼프에 대한 일반 공화당원의 지지는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공화당 경선이 트럼프가 처음 대권 출사표를 냈던 당시와 같은 수준으로 TV나 유권자들의 흥미나 관심을 끌 가능성은 크지 않다. 트럼프가 공화당의 2024년 대선 후보 티켓을 거머쥐려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그가 당에 큰 짐(albatross)이 아니라 소중한 자산(asset)임을 입증해야 한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2-12-05 12:19:48
- [이두수의 절차탁마] 명품 한류의 근원, 홍익인간 정신과 '코리안 드림'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US News & World Report에서 발표한 2022년 세계 10대 강국(the World's most powerful countries)에 한국이 6위로 랭크되었다(1위 미국, 2위 중국, 3위 러시아, 4위 독일, 5위 영국, 6위 한국, 7위 프랑스, 8위 일본, 9위 아랍 에미리트, 10위 이스라엘). 믿기지 않는 순위지만 산출 근거로 대상 국가의 세계 주요 뉴스에 노출되는 빈도, 정책결정권자의 영향력, 세계 경제에 대한 기여도, 외교정책, 군사예산 규모, 국제사회에 주는 신뢰도 등을 주요 고려 대상으로 하여 매긴 순위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꽤 높아 보인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이 밖에도 문화 영향력(Cultural Influence)에서는 세계 7위,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에선 세계 6위를 차지한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진다. 이제는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춘 선진국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외부에선 이렇게 우리나라를 높이 평가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국제적 순위평가에서 높은 평가를 대하면서도 우리 자신은 이런 결과를 잘 믿으려 하지 않으며 우리가 선진국 시민이라는 그런 느낌도 없다. 남들은 우리나라가 세계를 리드할 만한 리더십과 뉴스 생산력 그리고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었다고 보고 있는데도 우리 사회엔 아직도 이 나라가 미국이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남아 있으며 봉건적 형태의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반제·반봉건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노사 문제를 해결해 가는 능력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와 배분 문제, 그리고 정당 간 극한 투쟁을 보면 솔직히 우리는 선진스럽기보다는 후진스럽기 짝이 없다. 그것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룬 나라라는 자부심이 국민적 자부심이 되지 못하고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되었고, 그 국민적 성과에 나라고 하는 개인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늘 우리는 어느 계층에 있든 소외감을 느낀다. 우리라는 우리 우리는 조직 내부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면 ‘내부총질’이라는 거친 용어를 쓴다. 내부 비판을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이다. 이런 시각은 작은 조직이나 큰 조직이나 마찬가지다. 학교에서는 ‘왕따’라는 따돌림으로 나타나고 종교계에서조차 다소 다른 의견을 내거나 의견 일치가 되지 않으면 상대를 ‘이단’으로 몰아세운다. 이렇게 나와 같지 않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조직의 ‘순혈’ 혹은 단일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아무래도 이런 사고를 가지게 된 데에는 우리의 생활환경이 협소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국토라는 공간만이 아니라 외부와 교류가 적어지면서 우리는 작은 우리 안에 갇혔기 때문이다. 국토의 분단은 우리의 의식까지 이렇게 소심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가 ‘우리’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지만 우리라는 말에는 너와 나라고 하는 구분이 있어야 함에도 너와 나는 언제나 같은 시각, 같은 사고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잠재해 있다. 엄연히 너와 나의 생각이나 취향이 다른데도 말이다. 우리라는 말은 너와 나로 분립된 자기 주도적 독립된 자아가 다시 만나 우리가 되는 것이다. 각자의 독립된 자아가 서로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필요가 있어야 하며 인정과 배려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는 해외에서 이주해온 다문화가정, 중국의 조선족, 그리고 북에서 온 탈북민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우리 사회는 다양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이 다양함에서 우리는 우리의 단일주의 의식을 어떻게 극복해낼 것인가가 우리 사회의 가장 긴급한 문제가 되었다. 며칠 전 나는 한 탈북민을 만났다. 1997년에 왔으니까 벌써 25년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산 그이지만 그는 여전히 탈북민이다. 북한처럼 이남에도 출신 성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자신에게 붙은 꼬리표를 뗄 수 없는 사회라면 탈북민을 대하는 남한 사람들의 시각이 변하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바람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정치 이야기를 좋아해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탈북민이 어느 정당이나 정치인을 비난하면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지면서 상대가 엄청 화를 낸다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본인들도 한국 정치와 정치인들을 맹비난하면서도 탈북민이 그들을 비난하면 “너는 뭐 하러 남에 왔니? 그리 싫으면 북으로 돌아가라”며 화를 낸다는 것이다. 자신을 같은 주민이나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방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탈북민을 도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했다. “우린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우릴 ‘먼저 찾아온 통일’이라며 우리를 치켜세우지만 그 말은 우리를 이용해먹으려고만 하지 통일의 동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지 말고 사명감을 주어라. 동정이나 온정을 베풀지 말고 일자리를 주어라. 탈북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무엇을 고민하는지를 들어보려 하지 않고 정부나 교회는 우리에게 교육만 시키려 한다.” 탈북민들이 ‘먼저 온 통일’ 맞다. 통일은 나의 삶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의 삶을 존중해주면서 더불어 사는 삶이다. 지금 북에서 살고 있는 조선 인민들을 생각하면 탈북민들은 자기 삶의 의지와 결정권을 더 강하게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과 하나 못 되는데 어떻게 북한과 통일할 수 있겠는가. 교육은 우리가 받아야 한다. 성장과 삶의 환경이 전혀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교육은 우리가 필요하다. 같이 사과도 따고, 같이 여행도 다니고, 같이 체육대회도 하고, 같이 김치도 담그며 사고의 방식은 다르지만 더 나은 나라와 더 좋은 사회를 만들려는 비전으로 같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민족의 비전, 코리안 드림 우리 민족의 시원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먼 옛날 단군이라는 분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자’는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셨다는 역사 기록으로 우리는 반만년 전 옛 조선을 우리 민족의 시원으로 보고 있다. 반만년 역사를 이어오며 우리 선조들은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이 건국정신을 되새기며 견디고 싸워 이겨 나왔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내외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이때에 우리를 다시 하나 되게 만드는 것은 역시 우리 역사의 첫 출발지인 건국정신을 되새겨보는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하겠다(홍익인간). 그러기 위해 참된 진리로 다스리겠다(제세이화)”며 빛나는 아침의 나라(조선)를 열었다는 이 이야기는 사실 서구 민주주의 기틀이 된 미국 독립선언서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이 한 문장보다 더 미려한 선언문이 아닌가. 이 건국의 비전은 현재 남이나 북이나 같이 배우고 있고 나아가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는 이야기다(단군신화와 홍익인간 정신은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에도 비슷한 이야기로 전해진다). 실제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지 모른다. 한류가 얼마나 세계인들의 가슴을 감동으로 물들이는지 잘 모른다. 멋 옛날 주변국에서 우리 민족을 평할 때 ‘접화군생’ ‘군취가무’를 즐기는 민족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이 그저 집단적으로 음주가무를 좋아했다는 말로 그 의미를 축소 해석해 그동안 우리 스스로를 열등민족으로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접화군생(接化群生)이란 말 속에는 집단 속에 파묻혀 갈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대중 사회에서 창조적 개인으로 어떻게 구제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개인과 집단이 유기적이고 교호적 상호관계를 맺으며 이를 협동적으로 진전시킨다는 화합과 상생의 사상이 깃들어 있으며, 요즘 한류는 이러한 사상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 민족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평했다. 우리는 이집트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거나 로마의 도로와 건축물,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빼어난 유산을 만들거나 거대한 제국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역사의 뜻이 ‘아가페’라고 한다면 우리는 신의 사랑을 제대로 찾아 나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가시 없는 장미를 볼 수 없듯이 아픔 없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만날 수도 없기 때문에 인류역사 자체가 고통의 길이요, 수난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 역사를 타고르의 <기탄잘리>에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 민족의 역사야말로 큰 길가에 앉은 거지 처녀다. 수난의 여왕이다. 선물의 꽃바구니는 다 빼앗겨버리고 분수 없이 왕후를 꿈꾼다고 비웃음을 당하고 애끓는 지친 역사다. 그래도 신랑은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 역사가 고난의 역사라고 말한 것은 우리 건국의 선조들의 건국이념이 실현되지 못한 채 외세에 의해 고조선이 망하고 400년 만에 다시 일어섰으나 삼국으로 쪼개지고, 다시 고려로 쪼그라들고 조선에선 더 왜소해지고 약화돼 끝내는 일본에 국체를 빼앗기고 신음하다가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으나 우리의 꿈과 기상은 일어나지 못하고 다시 분단되는 이 슬픔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뜻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를 관통하는 그 뜻이란 무엇이냐, 바로 홍익인간의 비전을 실현하여 하늘이 곧 사람이라는, 모든 사람들이 하늘의 마음으로 인류를 위해 봉사하여 이 땅에 평화세계를 실현하라는 것이다. 그러한 한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역사를 통해 패망과 죽음과 온갖 실패의 시련을 겪게 하고 견디게 하며 이 민족을 길러왔다는 것이다. 이 민족을 세계적인 선도국으로 만들기 위해 하늘은 어떤 뜻을 한반도에서 진행해 왔는지 최근의 역사를 돌아보자.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유행으로 검역(Quarantine)과 격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쿼런틴의 어원은 40일 분립을 의미하며 그 어원은 성서에서 왔다. 성서에서 40일의 예를 보면 노아 때에 방주(方舟)가 아라랏산에 머문 후 비둘기를 내보낼 때까지 40일 기간, 모세의 바로궁중 40년, 미디안광야 40년, 가나안 복귀의 광야(曠野) 40년, 예수의 광야고난 40일, 부활 후 40일 등 40수는 고난을 통한 분립 혹은 새롭게 나아감의 의미가 있다. 이 40수의 의미를 우리 역사에 대비해 보면 1905년 을사늑약은 실제로 국권이 상실된 것으로 보아 1945년 광복될 때까지 40년간은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기로 민족의 암흑기, 1985년까지 한반도의 분단기, 그리고 2025년까지 통일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보면 2025년까지는 우리는 어떻게 하든 통일의 전기를 마련해야 하는 역사의 뜻이 있다. 선조들이 독립을 위해 많이 애썼지만 우리 힘으로 독립을 맞이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갑자기 찾아온 독립은 광복 후 엄청난 혼란기를 가져왔다. 이 혼란의 와중에 남과 북은 3년 후 정식으로 정부를 출범시키고 전쟁까지 치르게 되어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1985년 남과 북의 이산가족이 처음으로 상봉하고 예술단의 상호 교환 방문으로 남북 화해의 분위기로 전환되면서 3년 후인 1988년엔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 공산과 민주 진영의 냉전 종식의 전기를 마련한다. 이제 3차에 걸친 40년이 지나는 2025년까지 3년 남았다. 지금 상황은 북한이 연일 미사일을 쏘며 핵개발로 세계를 위협하는 매우 불안한 상황이지만 지금 이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갑자기 나타난 코로나 바이러스의 팬데믹 현상 추이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중국의 대만 침공설 등 국제 상황은 어떻게 요동칠지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혼란한 때에 우리는 노자가 말하듯 우리 민족의 근원, 원점으로 돌아가 민족의 비전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옛적의 어느 날, 만주 평원의 거친 풀밭 위에 먼동이 틀 무렵 훤히 밝아오는 그 빛이 흥안령 마루턱을 희망과 장엄으로 물들일 때 몸집이 큼직하고 힘줄이 울툭불툭하고 널따란 이마에는 어진이의 기상이 서려 있고 눈빛에는 날쌤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사람들이 솟아오르는 해를 향해 “홍익인간이다!”라고 외치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진리의 빛으로 하나님 같이 서로를 섬기며 광명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 위대한 함성. 이제 지난했던 고난의 역사를 뚫고 홍익인간이라는 ‘코리안 드림’이 전 세계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때가 된 것이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필자 소개 - 이두수(54)는 5년 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노동 현장의 삶과 애환을 그림과 글씨로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전 시민단체인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8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2022-11-15 06:00:00
- [이수완의 월드비전] 영국이 주는 교훈 .. 시장과 대결하면 곧바로 반격이 몰려온다 지난달 24일 영국의 집권 보수당(conservatives) 대표 겸 새 총리로 선출된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42)은 골드만삭스와 헤지펀드 등에서 근무한 초엘리트 금융인 출신이다. 인도계 이민 3세로 억만장자의 딸과 결혼해 부부의 재산이 1조가 넘는 슈퍼리치인 그가 40대 초반의 나이에, 그것도 비(非)백인이자 힌두교도가 최초로 영국 정치의 수장에 오른 과정을 보면 놀랍기도 하고 매우 이례적이다. 몇주 전 영국은 식민지였던 인도에게 세계 경제 5위의 경제 대국 타이틀을 넘겨주었다. 수낵의 총리 등극은 인도의 부상(浮上)과 영국이 최근 겪고 있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일화이기도 하다. 2015년 35세의 나이에 보수당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수낵은 자신은 완전한 영국인이지만 종교는 힌두교이고 문화유산은 인도에 있다고 강조해왔다. 그는 2020년 보리스 존슨 총리에 의해 내각의 실질적 2인자인 재무장관( Chancellor)에 파격 발탁된다. 언론에서 힌두교도라는 점이 부각되고 경험도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고리타분'한 이미지의 전임 재무장관들과는 달리 솔직하고 절제된 언어와 신선한 외모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그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대규모 부양책을 주도하면서 차기 지도자로 부상한다. 그는 올해 여름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건 도박을 결심한다. 존슨 총리가 각종 추문에 휩싸이자 그의 보수당 대표직 사퇴를 이끌어 냈고 본인은 차기 총리 경선에 도전장을 내민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리즈 트러스 전 총리에 밀리며 고배를 마신다. 패배를 인정하고 잠시 후선에 물러나 있던 그에게 한 달 반 만에 대망의 기회가 저절로 찾아왔다. 새 내각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경기 부양을 한다며 성급히 내놓은 450억 파운드(약 72조원) 규모의 파격적 감세안은 '제2의 마거릿 대처'를 자처하던 트러스의 발목을 잡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로 10일간의 장례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트러스와 그의 정치적 동지인 쿼지 콰텡 재무장관이 준비했던 소위 '미니 예산'은 그 이름과 정반대로 후폭풍이 어마어마했다. 고물가와 부실한 재정에 시달려온 영국에 대규모 감세를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하겠다는 트러스의 의도는 현실을 무시한 헛발질 정책이었다. 대규모 감세와 지출을 위한 정부의 재원 마련은 국채발행뿐인데 금리인상 기조에서 이러한 조치는 물가 상승을 부추길 뿐 아니라 정부 부채만 악화시킬 것이라는 비판과 우려가 국내외에서 동시에 쏟아졌다. 파운드화가 폭락하고 국채시장이 마비되자 트러스는 워싱턴에서 IMF 회의에 참석 중이던 콰텡 재무장관을 급히 불러들여 해임시켰다. 그리고 존슨 총리 후임을 선출하는 당내 경선에서 8위로 조기 탈락한 제레미 헌트 후보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내각에서 보건사회부장관을, 테레사 메이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헌트 후보는 재무장관에 임명되자 문제의 '미니 예산'을 사실상 전면 파기했다. 시장은 비로소 안정을 찾았지만 트러스 총리의 참담한 경제 실책으로 정부와 여당의 신뢰와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의 사임은 시간문제라고 조롱하며 영국의 한 타블로이드는 양상추와 트러스 사진을 놓고 어느 쪽이 오래가는지 유튜브 생중계를 올리기도 했다. 마침내 트러스 총리는 44일 만에 낙마하면서 영국의 최단명 총리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수낵은 지난 여름 당 대표 경선에서 영국의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면서 트러스가 공약한 '감세를 통한 성장' 정책을 '동화 같은 이야기로 경제위기를 몰고 올 것'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보수당원들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결국 그의 말이 옳았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수낵은 차기 총리로의 길로 다가섰다. 그는 보수당 전체의원(357명) 중 200명의 지지를 얻어 유일하게 당 대표 출마요건인 100명 이상의 추천을 받았다. 영국 보수당이 '스피드 경선'으로 트러스의 후임을 선출한 것은 그만큼 영국의 경제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지지율이 폭락으로 위기에 빠진 보수당을 하루속히 재건해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애초 트러스 총리 사임 이후 경선 의지를 보였던 존슨 전 총리가 막판에 물러선 것도 거짓말 의혹으로 의회 조사를 받는 그가 출마할 경우 보수당 이미지가 더 나빠질 것이라는 1922 위원회의 우려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1922 위원회는 보수당 평의원 모임으로 일종의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하는 견제기구로, 트러스 감세안으로 민심 이반을 야기하자 '레드카드'를 꺼내 존재감을 부각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낵은 2016년 6월 진행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이후 5번째 영국의 총리이다. 그가 브렉시트 이후 혼돈에 빠진 보수당을 제대로 이끌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보수당은 정치적 고비 때마다 총리를 압박하고 교체하면서 당내 균열이 생기고, 영국인들의 신뢰도는 뚝 떨어졌다. 올해에는 총리가 2번이나 불명예 퇴진하면서 최근 유고브가 진행한 여론조사 지지율이 19%로 노동당(56%)의 3분의 1 수준에 그치고 있다. 야당은 집권 보수당의 수장이 잇따라 사퇴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했다며 조기 총선 실시를 요구하고 있다. 위기에 빠진 보수당의 '구원투수'로 나선 수낵 총리가 경제난과 당내 분열을 수습하고 다음 총선(2025년 1월 예정)에서 노동당에 승리할 수 있을지 전 세계는 주목하고 있다. 영국 보수당은 1832년 토리당이 이름을 바꾸어 생긴 정당이다. 전신까지 따져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으로 간주된다. 2010년 이후 12년째 장기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당내 경선에선 2차대전 이후 최장수 총리인 '철의 여인' 대처의 열풍이 불었다. 1970년대 후반 케인스주의적 경제정책과 복지국가형 사회보장체제로 경쟁력이 하락하던 영국을 감세와 규제완화 등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으로 국가 경제를 다시 일으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야심가인 트러스 전 총리는 '철의 여인'을 모방하려다 섣부르고 무모한 정책으로 경제에 큰 풍파만 일으키고 퇴진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원조국가이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불황이던 제조업이 몰락하고 금융과 서비스 중심으로 경제가 개편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자 영국 정치권은 유럽연합(EU)과의 연대를 탓하기 시작했다. 보수당은 영국의 EU 탈퇴 논란으로 오랫동안 당내 갈등을 노출하다가 2016년 당시 반대파이던 데이비드 케머런 총리는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투표 결과 브렉시트가 가결되자 케머런 총리와 당 원로들이 물러나고 테레사 메이 총리가 등장했으나 당내 갈등은 더욱 커졌다. 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EU 탈퇴를 결정했다고 해서 브렉시트가 바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역과 관세 체제, 이민, 북아일랜드 국경 문제 등 새로운 무역법 마련을 위한 협상은 험난하기만 했다. EU와 영국 간의 합의서는 영국 의회에서 3번이나 연기되었다가, 2021년 1월 31일 영국의 EU 탈퇴가 공식화 된다. 그후 준비기간을 거쳐 지난해 11월 EU와의 47년 동반자 관계는 끝이 났다. 보리스 전 총리는 그리도 말썽 많던 브렉시트 협상을 완결하겠다는 공약으로 2019년 조기 총선에서 압승을 했다. 현재 영국 경제가 악화일로 상황에 빠진 근본적인 이유를 두고 '브렉시트의 저주'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EU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면 영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가능해지면서 무역대국으로 변할 것이라는 보수당 강경론자들의 주장은 오늘날 날개 없이 추락하는 영국의 모습을 보면 잘못된 판단이었음이 분명하다. 트러스 전 총리는 애초 브렉시트 반대파였다가 강력한 옹호론자로 변신한 인물이다. 존슨 전 총리가 끝없이 불거지는 스캔들로 물러나자 보수당 내 우파들은 트러스 지원에 나섰다. 그러다가 트러스의 경제정책 실패로 시장이 요동치자 보수당 내 우파들도 트러스의 사임을 요구한 중도파들의 주장에 동조했다. 지금의 영국 위기가 근본적으로 브렉시트 갈등에서 출발한 것이 맞다면 이를 밀어붙인 보수당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낵은 10월 25일(현지시간) 오전 버킹엄궁에서 찰스 3세 국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총리로 임명된 뒤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실 앞에서 첫 대국민 연설을 했다. 그는 "성장 추구는 숭고한 목표이지만 리즈 트러스 총리는 몇 가지 잘못을 했고 나는 이를 바로잡으라고 총리로 뽑혔다"며 영국의 "심각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제안정과 신뢰를 정부 핵심 의제로 삼을 것이며, 이는 앞으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에너지 가격 급등에다 소비 위축으로 영국은 이미 트러스 전 총리가 취임했던 9월부터 경기 침체의 길로 들어섰다. 수낵 새 총리에게는 경제 살리기 못지않게 어려운 과제가 앞에 놓여 있다. 정부와 시장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또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부채 문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건전한 재정정책이 필수이다. 문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영국 정부는 오랫동안 긴축재정을 펼쳐온지라 향후 지출을 계속 줄이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생활고에 시달리는 저소득층 가계에 대한 지원 축소는 정치적으로 너무 민감한 사안이다. 헌트 재무장관이 취임 이후 트러스의 감세안 규모 450억 파운드에서 320억 파운드를 철회했지만 여전히 긴축강도를 늦추기는 힘든 상황이다. 결국 사회복지나 국방비 예산을 축소하거나 인기 없는 정책인 증세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수낵에게는 불편한 선택이다. 헌트 재무장관은 이미 법인세가 내년 봄 19%에서 25% 인상될 것이라고 밝혔다. 기업들은 영국이 경기 부양책을 포기하는 것은 더욱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외치며 벌써부터 아우성이다. 1992년 독일이 통일 후유증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자 마르크화가 폭등했다. 이때 대부분 유럽 국가들은 자금 이탈을 막기 위해 금리를 올리며 자국 통화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영국은 시장과 대결을 택했다가 조지 소로스를 필두로 한 세계 헤지펀드의 융단 폭격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30년이 지나 영국은 비슷한 위기를 자초했다. 글로벌 금리인상과 긴축 재정에 역행하며 홀로 확장 재정을 택했다가 시장에 굴복한 것이다. 지금 영국의 위기가 단순히 트러스 전 총리 한 사람의 패착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근본적 원인은 영국의 전반적인 국가 경쟁력 약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세계 금융시장이 극도로 예민할 때는 단 한번의 잘못 던진 '돌팔매'도 거대한 분노의 파도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우리 정책당국자들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한국 경제가 향하는 길목 곳곳은 지뢰밭이기 때문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2-11-06 13:54:02
- [이수완의 월드비전] 팔순에도 건강은 이상무? 바이든, 트럼프와 '운명'의 재대결 선택할까 지난달 18일 CBS 일요 TV쇼 '60 Minutes'에서 스콧 펠리 진행자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재선에 도전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했느냐고 물었다. 바이든 대통령의 답변은 솔직했다. 다시 출마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건 의사일 뿐이다. 그러나 나의 재선 출마가 확고한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한다(But it's just an intention. But is it a firm decision that I run again? That remains to be seen)." 바이든 대통령은 다음 달 20일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팔순을 맞는다. 미국 중간선거가 실시된 후 2주 정도 지날 무렵으로 80세 생일을 계기로 미국 언론은 그의 건강 상태와 재출마 의지를 본격적으로 파헤칠 것으로 보인다. 그는 50년 전인 1972년 29세 나이에 최연소 상원의원 당선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2020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그에겐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 당선인이라는 타이틀이 더해졌다. 역대 대통령과 달리 취임 직후부터 바이든의 재출마는 지대한 관심사였다. 바이든은 지난해 79세 생일을 가족과 함께 델러웨이주 윌밍튼의 고향집에서 조용히 보냈다. 올해는 큰손녀딸 나오미 바이든(28) 결혼식이 백악관에서 80세 생일 바로 전날인 11월 19일 열릴 예정이다. 나오미 결혼식 참석차 이미 워싱턴에 도착한 가족과 친지들을 위해 바이든 대통령의 생일 파티는 백악관에서 치러질 예정인지라 언론의 집중 조명을 피할 수가 없다. 바이든이 자신의 재선 도전 가능성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나이와 건강 논란이 다시 불붙지 않을까 백악관 참모들은 걱정하는 분위기다. 만약 바이든 대통령이 2년 후 대선에 출마해 승리한다면 82세 나이에 2기 임기를 시작하고 그의 후계자가 취임식을 할 때는 86세다. 2020년 대통령 선거운동에 뛰어들기 전부터 그에겐 '실언 제조기(gaffe machine)'라는 별명과 함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대해 의문부호가 따라다녔다. 이를 의식해 선거 운동 기간 자신을 차세대 리더들과 연결고리, 즉 '가교 후보(bridge candidate)'라고 일컫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러닝메이트였던 카멀라 해리스(57) 현 부통령이나 다른 젊은 인물이 2024년에 대선 주자 배턴을 이어받으리라는 분석도 적지 않게 나왔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이후 몸이 더욱 수척해지고 머리도 더 빠졌으며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지난 4월엔 연설 직후 허공에 손을 내밀고 악수하는 듯한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백악관은 대통령의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야당과 일부 보수 언론은 공개석상에서 크고 작은 실수를 할 때마다 건강이상설이나 치매설을 제기하곤 했다. '60 Minutes' 인터뷰에서 바이든은 자신은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문제 없이 대통령 일정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올해 반도체산업 육성법, 인플레리션 감축법(IRA)과 같은 입법 성과에 대해서도 "늙은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나"라고 되묻기도 했다. 그러나 10일 후 사회 각계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최근 교통사고로 사망한 재키 월러스키 하원의원 이름을 부르며 "재키, 여기 있나요"라며 찾는 듯한 모습을 두고 백악관 기자회견실에서 입씨름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선 재출마와 관련해 바이든 발언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오랜 정치적 역정에서 모든 결정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바이든의 성격상 그는 실제로 최종 결심을 미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의 결단은 오는 11월 8일 실시되는 중간선거 결과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그는 '60 Minutes'에서 "내가 할 일을 하다가 다음 선거 뒤에 알맞은 시간에, 내년으로 접어들 때 무엇을 할지 결정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이달 초 'CNN Tonight'의 제이크 테퍼와 인터뷰하면서 만약 자신이 다시 출마한다면 트럼프를 이길 자신이 있다고 했다. 나이보다 능력으로 유권자들이 대통령을 판단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시 말하면 트럼프가 출마한다면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출마해서 '운명'의 재대결을 생각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2024년 대선 전초전인 미국 중간선거 트럼프 전 대통령의 2020년 대선 패배에 대한 불복 운동과 연방수사국(FBI)의 트럼프 자택 압수수색, 낙태권에 대한 대법원 판결 등으로 미국 사회의 분열과 정치적 양극화가 극에 달하고 있는 가운데 치르는 이번 선거는 현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이자 2024년 대선을 위한 '전초전' 성격이 강하다. 결국 선거 이후 정치적 후폭풍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공화당 내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화당의 중간선거 예비선거에 지지 후보를 거듭 발표하면서 지난 대선이 도난당했다는 주장을 이어갔다. 트럼프의 대선 불복 사태와 관련해 공화당 내부에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파 간 갈등이 가라앉지 않고 있지만 트럼프는 현재로선 공화당 대선 후보 1순위로 꼽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현재 1·6 의사당 폭동 사태를 선동했다는 혐의와 탈세 등 각종 수사와 소송에 휘말려 있지만 이번 중간선거를 치른 이후 여론의 향방을 살피며 2024년 대선 출마를 최종 결심할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도 트럼프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중요한 정치적 결심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은 트럼프를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만약 공화당이 이번 선거에서 상·하원 모두 다수당이 된다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차기 대권 출마 구도를 굳힐 가능성이 크다. 의회 권력을 되찾은 공화당은 탈세 논란에 휘말린 바이든 대통령의 아들 헌터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추진해 정국이 소용돌이에 휩싸일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정국 주도권을 빼앗기며 급속히 레임덕에 빠지면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치권의 모든 이목을 차기 민주당 대선 경쟁으로 쏠리게 할 가능성도 있다. 민주당 내에서는 바이든의 불출마를 전제로 해리스 부통령, 피터 부티지지 교통부 장관,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 등 여러 명이 잠재적 후보군으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6년 임기인 상원의원 100석 중 35석, 2년 임기인 하원 435석 전체를 다시 선출한다. 공화당은 하원에서 6석, 상원에서 1석만 더 확보하면 양원에서 다수당이 될 수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공화당 양당 구분 없이 대통령 소속인 정당이 승리한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유권자들이 중간선거를 현직 대통령의 집권당에 대한 웨이크업 콜 (wake-up call)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 시 민주당은 의료보험 개혁에 반발한 공화당의 '티 파티' 세력에 의해 하원에서 63석을 잃는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2018년 트럼프 대통령도 집권 2년 만에 하원을 민주당에 넘겨주기도 했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하원의 공화당 우세는 굳어졌고, 상원을 민주당이 수성할 것인지가 최대 관건이다. 특히 지난 대선에서 바이든과 트럼프가 초박빙 승부를 벌였던 5개 경합주(애리조나, 조지아,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위스콘신)는 이번 선거의 최대 승부처로 공화당과 민주당이 이곳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선거 예측 사이트 '파이브서티에이트'는 이달 9일 기준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을 차지할 가능성을 70%로 예측한 반면 민주당은 상원 다수당을 고수할 가능성을 67%로 보았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이번 봄만 해도 인플레이션 우려와 바이든의 지지율 폭락으로 공화당이 상·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이 되는 '붉은 물결(Red Wave)'을 예상했던 분위기와 크게 달라진 것이다. 올여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과학법 등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법안 통과와 함께 연방 대법원의 낙태법 폐지 후폭풍 영향으로 바이든 지지율이 반등한 결과다. 낙태법 폐지, 학자금 탕금···민주당에 기회 주나 사실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 까지만 해도 민주당은 각종 악재 속에 어떤 문제로 유권자 표심을 자기들에게 끌어올지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올해 6월 24일 연방대법원은 지난 49년간 낙태권을 보장했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었다. 그동안 줄기차게 낙태권 폐지를 주장했던 공화당 손을 들어준 것이다. 현재 연방 대법관 9명 중 6명은 보수 성향이며 이 중 3명은 트럼프 대통령 시절 임명된 인물로 이번 판결이 트럼프 전 대통령 작품이라는 해석도 제기됐다. 연방대법원의 낙태법 판결에 대한 반발에 힘입어 민주당이 결집하고 여성 유권자 투표율은 이번 선거에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이번 선거의 주요 변수 중 또 하나는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발표한 학자금 탕감 조치다. 바이든 대통령은 장고 끝에 1인당 최대 2만 달러(약 2900만원)를 탕감해주는 이 조치를 의회와 협의하거나 승인하는 절차 없이 행정명령 형태로 내놓았다. 미국 내 학생에 수천만 명게 혜택을 주는 이번 조치는 향후 10여 년에 걸쳐 예산이 약 4000억 달러 소요되는 조치로 공화당은 선거를 앞두고 청년층 표심을 잡기 위한 포퓰리즘 행보라고 비난하고 있다. 안 그래도 심한 인플레이션이 더 악화될 것이라는 여론과 함께 이번 조치로 저소득층과 중산층에게 경제적 고통을 크게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여론이 팽팽하다. 민주당은 학자금 탕감 조치 등 각종 포퓰리즘 정책, 낙태법과 트럼프에 대한 논란이 그동안 인기 없는 대통령과 집권당이 패배하던 중간선거의 역사적 전통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공화당은 미국 유권자 마음이 그들에게 쉽게 돌아서지 않을 것으로 자신하는 모습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이든 행정부의 초라한 경제 성적표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금리를 '자이언트 스텝'으로 연속해서 올려도 장바구니 물가가 잡히지 않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유권자 표심은 결정적일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상·하원 모두 공화당에 넘겨주는 참패를 한다면 ‘트럼피즘’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허리케인이 다시 미국을 두 동강 낼 것이 분명하다. 민주당이 만약 상원이나 하원 중 한 곳이라도 승리한다면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의 2024년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 예상을 완전히 깨고 민주당이 상원과 하원을 지킨다면 바이든은 나이는 오직 숫자에 불과하다며 대선 출마를 조기에 공식화할 수도 있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2-10-17 10:2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