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 논설실 부국장
alexlee@ajunews.com
- 아주경제 논설위원
- 前 로이터 통신 선임 특파원, 편집장
- 前 서울외신기자클럽회장
- [이수완의 월드비전] 판 바뀌는 우크라 전쟁 …푸틴의 선택은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 지 벌써 7개월째로 접어든다. 지금까지 이번 전쟁은 예상된 시나리오와 전혀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올해 초 미국이 러시아의 침략이 임박했다고 경고할 때만 해도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의 분석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러시아가 압도적인 군사력과 장비로 우크라이나군(軍)을 제압하고 수도 키이우를 곧장 함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과 민은 세계를 감동시킨 강력한 저항으로 수도를 지켜냈다. 미국 등 서방 주요국은 푸틴이 이번 전쟁을 수행하는 데 최대 걸림돌을 러시아의 취약한 경제라고 꼽았다. 서방의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를 주도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전쟁이 시작되면 러시아 화폐 '루블(ruble)'이 'rubble(잔해)'로 변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루블화 가치는 원유 수출 증가에 힘입어 올해 들어 20% 이상이나 상승했다. 지난 2월 24일 시작된 전쟁은 여름을 지나 어느새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그 종착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번 달엔 우크라이나군이 총공세를 펼쳐 러시아 군대가 6개월 전 점령했던 동부와 남부 주요 마을과 거점을 탈환했다. 키이우 함락 실패에 이어 이번의 굴욕적 패퇴는 푸틴 대통령에게 정치적·군사적으로 큰 위기감을 안겨주고 있다. 요충지에서 무기와 장비를 남겨둔 채 퇴각한 러시아 군인들은 전쟁 장기화에 따른 전투 피로와 물자 보급 차질로 사기가 크게 저하됐다. 내부적으로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불만과 압박이 분출되고 있는 모습이다. 확전이냐 회담이냐 CNN 등 주요 서방 언론은 수세에 몰린 푸틴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나는 '총동원령'을 통한 확전이다. 또 하나는 협상을 통한 종전이다. 그러나 둘 다 현실적인 대응책은 아닌 듯하다. 총동원 명령을 내리자니 자신이 '특수 군사작전'으로 명명한 우크라이나 침공이 전쟁임을 사실상 시인하는 셈이 된다. 우크라이나에서 '나치' 정권을 몰아낼 것이라는 전쟁의 명분이 사라지고 같은 슬라브계 국가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는 셈이 된다. '협상' 카드도 현재로선 유용하지 못하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금까지 러시아에 점령당한 영토를 모두 수복하지 않으면 협상에 나설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푸틴과 통화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는 종전과 멀리 떨어져 있다(we are far away from the end of the war)고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푸틴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반격 카드는 '에너지'다. 러시아가 올겨울 유럽에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한다면 '에너지 대란'은 불 보듯 뻔하다. 현재 우크라이나 동남부에 위치한 유럽 최대 규모의 자포리자 원전은 러시아군이 점령 중이다. 러시아는 서방과 전장 밖에서 사활을 걸고 '에너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유럽연합(EU) 27개국은 에너지 수요가 많아지는 겨울철인 오는 12월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엠바고(금수조치)에 들어간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7개국(G7)은 이 시기에 맞춰 러시아산 원유와 석유제품에 대한 가격상한제 도입을 예고하며 다른 국가들의 동참을 촉구하고 있다. 러시아 경제의 최대 버팀목인 원유 수익을 억제해 전쟁비용을 포함한 푸틴 정권의 주 수입원을 차단하고 고유가에도 대응하겠다는 의도다. 에너지가 전쟁의 최대 변수 서방 측 바람대로 유가 상한제가 제대로 가동된다면 러시아에는 큰 위협이다. 이에 푸틴은 초강경 카드를 꺼내 들었다. 러시아 국영가스 회사 가스프롬은 애초 이번 달 3일 재개하려 했던 유럽행 가스관 노르트스트림-1을 틀어막았다. 푸틴은 유가 상한제에 참여하는 국가를 향해 "가스도 원유도 석탄도 휘발유도 아무것도 없다"고 경고했다. 그의 협박에 서방 측도 즉각 반격을 가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EU 회원국에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해서도 가격상한제 도입을 경고했다. 서로 물러설 수 없는 한판 대결은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악화일로인 에너지 전쟁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변수라 할 수 있다. 예상을 뒤엎고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경제는 서방의 가혹한 경제 제재를 잘 견뎌내며 '선전'했다. 지난 3월 러시아 중앙은행이 보유한 외환과 금 가운데 절반가량인 3000억 달러가 동결됐다. 또 달러를 기반으로 하는 글로벌 결제시스템 스위프트(SWIFT)에서 축출되었다. 하지만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서방 측 제재의 충격파는 미미했다. 특히 인도와 중국 등 제재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들이 러시아산 에너지를 적극 사들이면서 미국과 유럽 등 러시아산 원유 수출 차단 노력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중·러 협력의 한계 지난 2월 시진핑 주석은 베이징 동계올림픽 현장에서 푸틴과 얼굴을 맞댄 뒤 미국과 서방이 지배하는 세계 질서에 맞서 중·러 간 '무제한 협력'을 골자로 한 5000자 분량의 긴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올림픽 직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푸틴의 기대와는 달리 중국 측 지원은 소극적이었다. 중국은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무기 지원은 물론 러시아에 첨단 기술 수출을 금지하는 서방의 제재에 위반되는 행위는 피했다. 대신 교역과 경제 협력을 확대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 구축을 위한 파트너가 서방의 제재 여파로 경제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올해 1~8월 양국 간 교역은 1172억 달러로 지난해 동기 대비 31% 증가했다. 원자재 시장 데이터 서비스인 Kpler에 따르면 중국은 해상을 통해 올해 1~7월 러시아 우랄산 원유 수입을 지난해 동기 대비 40% 늘렸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파이프라인을 통한 대중국 가스 수출도 크게 늘렸다. 중국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조심스러운 길을 가는 이유는 러시아 침공에 대한 공개적 지지로 인한 서방과 관계 파탄은 결국 중국의 이익과 배치되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달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을 결정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미국의 경제 제재나 유럽과 무역 마찰을 빚으면 중국의 경제적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 경제 침체도 러시아를 적극적으로 돕기엔 무리한 상황이다. 지난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개막한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 나란히 참석한 시진핑과 푸틴은 다시 한번 미국을 겨냥한 양국 간 연대를 다짐했다. 두 정상은 대만해협 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 상대 측 핵심 이익을 지지하고 에너지를 포함한 양국 간 교역을 강화하는 데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군사·안보 분야 협력에 대해서는 직접적 언급을 아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와 중국의 전면적 전략협력 관계는 산처럼 견고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 회담은 양국 간 '무제한 협력'을 강조했던 지난 2월의 만남과 비교해 크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특히 푸틴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중국의 '의문과 우려(questions and concerns)'를 이해한다고 말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중국의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서방 측 제재로 인한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을 준비해온 듯하다. 세계 신용카드시장의 양대 산맥인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전쟁 발발 직후 모두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중앙은행이 개발한 '미르(Mir) 신용카드 결제시스템' 덕분에 국내 결제시장에는 큰 혼란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 또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중국과 경제 협력이나 교역을 대폭 확대하고 국제 결제수단으로 위안화 사용도 크게 늘렸다. 중국 기업들은 서방 기업이 떠난 자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러시아로 몰려들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중국산 샤오미 스마트폰은 7월에 42% 시장점유율을 보였다. 한때 마켓 리더였던 삼성전자는 8.5%, 미국 애플은 7% 점유율에 불과했다. 삼성전자와 애플 점유율은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 50%에 육박했다. 러시아의 자동차 시장 분석기관인 오토스탯에 따르면 중국산 자동차의 러시아 시장 점유울이 사상 최고치인 26%를 기록했다. 보이지 않는 종착점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 서방의 강력한 제재로 인해 러시아 경제가 붕괴하고 그 결과 불만에 찬 국민들이 푸틴 축출에 나설 것으로 기대했다. 이달 초 언론 브리핑에서 드미트리 페스코브 크렘린 대변인은 올해 러시아 GDP 감소가 2%를 조금 웃돌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는 서방이 기대했던 재앙적 수준의 경제 몰락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오히려 러시아 경제는 유가와 생필품 폭등에 경기 침체 늪에 빠진 다수의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탄탄한 편이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 외환준비금 압류 등 자신이 주도한 강력한 서방 측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큰 악재다. 푸틴은 러시아가 과거 자랑하던 강력한 탱크부대와 공격형 헬기를 앞세워 단숨에 우크라이나 심장부를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번 전쟁은 러시아의 재래식 전쟁 수행 역량에 대한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면서 20년 넘게 러시아를 철권통치 중인 푸틴의 자존심에 커다란 흠집을 냈다. 특히 미국이 지원한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하이마스) 등 최첨단 무기는 러시아군 후방 라인의 무기창고 등 병참 기지를 공격하면서 위력을 발휘했다. 러시아는 최근 북한과 이란에서 로켓과 포탄 등 무기를 구매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서방의 수출 통제로 무기 보급과 전투 지속 역량에 차질을 겪고 있음을 시사한다. 개전 후 7개월에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끝나고,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로 남을지 아직은 종잡을 수 없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도 9·11 테러 이후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했다가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데 20년이나 더 걸렸다. 궁지에 몰린 푸틴이 전쟁의 국면을 바꿔 놓기 위해 화학무기나 전술핵 무기를 사용한다면 우크라이나 사태는 3차 대전으로 확전될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1953년 종전 이후 초장기 대치 상태인 한반도와 유사한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미니 박스] 지정학적 지진대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 할수록 전란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와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로 강대국 패권다툼의 희생양이 된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와 한국처럼 열강 다툼에 '끼인 국가"에 살고 있는 나라들은 조그마한 외교적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지정학적 지진대에 살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교훈 삼아 한·미 관계, 한·중 관계, 남북 관계, 한·일 관계, 한·러 관계에 대한 종합적이고 빈틈없는 외교 전략 마련이 중요한 시점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2-09-19 10:06:56
- [이수완의 월드비전] 막내린 글로벌 돈잔치 … 아찔한 '脫인플레' 청구서 지난 26일 밤 11시(한국시간) 전 세계 이목은 미국 와이오밍주 그랜드 티턴 산맥 인근 한적한 시골마을 휴양지 잭슨 홀(Jackson Hole)에 쏠렸다. 매년 8월이면 전 세계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들과 경제학자, 투자가들이 모여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곳이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으로 진행됐다. 지난해에는 원래 대면 회의를 계획했지만 델타변이 확산을 이유로 막판에 비대면으로 전환되고 일정도 3일에서 하루로 축소됐다. 당시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 재임명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던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기조 연설문에서 시장이 우려하던 인플레이션 압력을 '일시적(transitory)'이라고 잘못 진단했다. 당시 5%를 약간 웃돈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달 8.5%로 올라갔다. 유로존 믈가는 8.9%로 더욱 심각하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무역장벽이 높아지며 수입 비용이 껑충 뛴 영국은 무려 10.1%다. 씨티그룹은 내년 1월 영국의 인플레이션이 영란은행 목표치(2%) 대비 9배인 18.6%로 전망했다. 물가고는 부동산 거품 붕괴로 수십 년 동안 저성장·저물가에 빠져 있던 일본에까지 상륙했다. 지난 1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물가 상승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면서 증앙은행들이 금리를 급격하게 올리자 R(Recession·경기 침체)의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2019년 이후 처음 대면으로 열린 이번 잭슨 홀 미팅에서 파월 의장이 연준의 기준금리 정책 경로에 대해 어떤 단서를 내놓을지 투자가들은 긴장감 속에 귀를 기울였다. 파월은 이날 세계를 향해 작심한 듯 "물가 안정 없이는 경제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이 가계와 기업에 일부 고통을 가져 올 것이지만 "이는 인플레이션을 낮추기 위한 불행한 비용"이라며 금리 인상이 "멈추거나 쉬어갈 지점이 아니다(no place to stop or pause)"고 쐐기를 박았다. 예상보다 매파적인 파월의 발언이 쏟아지자 뉴욕 3대 지수는 이날 3% 넘게 덜썩 주저앉았다. 포스트 팬데믹 글로벌 경제가 고강도 금리 인상 카드로 물가와 씨름을 하게 된 이유는 우선적으로 코로나 사태 극복과 경기 부양을 위해 풀린 과잉 유동성 때문이다. 특히 기축달러인 달러화를 마구 찍어댄 미국은 2년 동안 5조 달러 상당을 풀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보다 7배 정도 많은 규모다. 미국 GDP 성장률은 2020년 -3.4%에서 2021년 5.1%로 급반등했다. 세계 경제에 청신호가 켜진 듯했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말 생산과 물류 차질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병목은 물가 상승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에너지·식량 대란 까지 더해졌다. 세게 경제사에서 팬데믹과 전쟁이라는 초대형 악재가 동시에 터진 것은 2차 대전 이후 처음이다. 지금은 사상 최대 빚잔치는 끝났고 인플레이션이라는 값비싼 청구서가 날아온 상황이다. 연준을 비롯 각국 중앙은행은 풀었던 돈줄을 죄기 시작했다. 부동산, 주식, 가상화폐, NFT(대체불가능토큰) 등 자산 시장은 '버블'이 꺼지면서 2000년 초 '닷컴버블' 붕괴 당시처럼 투자가들은 패닉 상태다.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며 최근 원유와 곡물 가격이 진정되고 있지만 인플레이션이 '피크(정점)'를 통과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아직 유보 상태다. 설혹 피크아웃이더라도 금리 인상이 필요하지 않은 수준까지 인플레이션이 완화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지금 상황을 1·2차 세계 오일쇼크로 오랫동안 물가는 마구 치솟는데 성장은 내리막길이었던 1970년대 상황과 불편할 정도로 유사하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고 있다. 과연 그럴까? 고강도 금리 인상 언제까지? 신시내티 소재 포트워싱턴 투자자문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닉 사르겐은 최근 포브스 기고를 통해 과거 세계 경제는 각종 외부 쇼크에 의해 흔들렸지만 현재 상황은 매우 특이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팬데믹과 전쟁, 두 가지 '더블 쇼크' 이후 나타난 살인적인 물가 폭등 문제는 각국의 폴리시메이커(policymaker)들이 매우 풀기 힘든 난제라고 했다. 지금 상황이 1970년대와 어느 정도 유사한 면도 있지만 매우 다른 면도 있다고 했다. 첫 번째로 기대 인플레이션이 아직은 1970년대와 비교해 매우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기대 인플레이션은 물가 상승률에 대한 가계와 기업의 주관적인 전망치로 고용지표와 함께 연준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참고자료다. 또 다른 차이점은 다른 통화에 비해 초강세를 보이고 있는 달러화의 움직임이다. 결론적으로 금융 시장이 아직까지는 성장과 물가 사이에서 최적의 해법 마련에 고심 중인 연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그는 분석했다. 연준은 올해 3월 열린 FOMC 회의에서 3년 3개월 동안이나 유지되던 제로 금리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다. 한때 2023년 말까지 제로 금리 유지 방침을 시사했던 연준이 다급해진 이유는 지난해 말 공급망 대란과 올해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물가가 요동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연준은 지난 5월 빅 스텝(한번에 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에 이어 6월과 7월엔 2연속 자이언트 스텝(한번에 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까지 매처럼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과연 연준은 언제까지 강도 높은 금리 인상을 지속할까? 지난 7월 열린 FOMC 회의 의사록을 보면 연준의 향후 기준금리 인상 보폭과 속도를 가늠하긴 쉽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계속해서 금리를 올리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한편으로는 금리 인상 속도 조절 가능성과 함께 과도한 긴축에 따른 우려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지금 시장의 주요 관심사는 현재 2.25~2.5% 수준인 기준금리가 올해 말까지 3%를 약간 웃도는 수준으로 완만하게 상승하느냐, 아니면 거의 4.00%까지 급속도로 올라갈 것이냐다. 이날 파월의 잭슨 홀 발언을 보면 연준이 후자의 길을 택할 것으로 보이고 9월 FOMC 회의에서 또다시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할 가능성이 커졌다. 내년 상반기 기준금리 인하 전환을 기대하던 투자가들은 파월 의장의 "조기 정책 완화는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확인하면서 일제히 투매에 나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고해 '닥터둠'으로 불리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15일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을 연준 목표 2%까지 낮추려면 금리가 4.5~5%는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금리가 그렇게 오르지 않으면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는 불안해질 것"이라며 미국 경제가 경착륙 또는 통제 불능인 인플레이션에 직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앞서 그는 마켓워치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S) 기고 칼럼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성장과 물가가 온건한 모습이었던 '대(大) 모더레이션(great moderation)' 시대가 전복(overturned)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 경제가 막대한 돈 풀기로 부채비율이 너무 높아져 '스태그플레이션적 채무위기(stagflationary debt crisis)'를 걱정할 때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안보와 전략적인 차원에서 미국이 달러를 '무기화'하고 있지만 달러화 위상이 향후 흔들릴 가능성이 있고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거세질 것으로 내다봤다. '스톱 앤드 고 폴리시(stop-and-go policy)' 최근 미국의 주요 경제지표를 보면 루비니 교수와 같은 비관론자들이 전망하는 대로 미국이 과연 스태그플레이션 늪으로 빠지고 있는지 단정하긴 힘들다. 지난 10일 발표된 미국의 7월 소비자물가(CPI) 상승률은 8.5%로 전월(9.1%)에 비해 소폭 둔화되었다. 파월 의장은 26일 "단 한 번의 물가지표 개선으로 물가 상승률이 내려갔다고 확신하기에는 한참 모자란다"고 인플레이션 완화에 대한 시장의 과대한 기대를 식혔다. 미국의 올해 2분기 GDP 증가율은 -0.9%로 1분기(-1.6%)에 이어 2분기 연속 하락했다. 통상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은 기술적인 경기 침체 진입으로 보지만 현재 미국 당국은 노동시장이 의외로 탄탄한 모습인지라 공식적으로 경기 침체 국면은 아니라는 의견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발표된 실업률은 완전고용 수준인 3.5% 전후다. 연준의 공격적 기준금리 인상과 마이너스 성장에도 고용과 소비가 위축되지 않는 현상은 참으로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의 경기 부양 노력 과정에서 나타났던 '고용 없는 성장'과도 정반대 현상이다. 노동경제학자들은 경기 침체 중에도 실업률이 낮고 기업들의 인력난까지 겹치는 이유를 주로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자발적 퇴직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생긴 수요와 공급의 심각한 '미스 매치'에서 찾는다. 또한 미국 인구 고령화로 인한 청년층 노동참여율 감소나 이민자 단속 등도 원인으로 분석된다. 펜데믹을 거치면서 미국에선 '대퇴직 시대'라고 불릴 만큼 직장을 그만두는 근로자가 크게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각종 경제적 제한 조치가 풀리자 중소기업·대기업 할 것 없이 일할 사람이 부족하고 '구인난'에 임금도 크게 상승하는 등 지난 수십 년간 볼 수 없었던 기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구직난'에서 '구인난'으로 판이 바뀐 모습은 미국이나 유럽뿐 아니라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관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용 있는 침체(Jobful Recession)' 현상이 장기간 지속될 전망은 희박하다. 이미 기업들이 줄줄이 영업 전망을 하향 조정하고 인력 감원 또는 신규 채용 감소를 계획하면서 노동시장 분위기가 다시 냉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는 13년에 걸친 '비정상적' 양적 완화와 초저금리 시대를 살았다. 지금은 이러한 초장기 유동성 파티를 뒤로하고 고물가의 높은 파고를 정부와 경제주체 모두가 힘을 합쳐 극복해 나가야만 하는 고난의 항해가 시작됐다. 파월 의장은 "역사는 (통화) 정책을 조기 완화하면 안 된다고 강력히 경고한다"고 언급했다. 연준이 물가 상승 리스크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고 늦었지만 3월부터 기준금리 인상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은 1970년대의 정책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 싶어서 일 것이다. 즉, 인플레이션이 좀 수그러들면 긴축을 풀었다가 다시 오르면 긴축을 강화하는 '스톱 앤드 고 폴리시(stop-and-go policy)'를 되풀이하면서 결국 인플레이션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결과를 초래한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다. 그 의지가 약해진다면 인플레이션 시대는 그만큼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다. [미니박스]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 통상적으로 경기가 나쁘지 않으면서 물가가 적당히 오르면 근로자 임금도 오르고 소비까지 연결되면서 경제가 성장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물가가 너무 급격히 오르면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가 커진다. 또 기업들의 늘어난 인건비 지출은 제품 가격 인상으로 어어져 또다시 물가를 자극하는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wage-price spiral)이 시작된다. 세계 경제에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지금 고금리와 물가고로 인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속출하고 저소득층은 한계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올해 인재 영입 경쟁이 치열했던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큰 폭의 임금 인상 소식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대기업들은 아무리 호실적이라도 임직원들 월급잔치를 벌일 때가 아니다. 임금 인상을 최대한 자제하고 제품 가격을 내려 물가 안정에 앞장서야 한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2-08-27 11:14:15
- [이수완의 월드비전] 핑크빛 짙어지는 美 '텃밭' 중남미... 중국 탓인가? 지난달 8∼10일 로스앤젤레스(LA)에서 미주 정상회의(the Summit of Americas)가 열렸다. 아메리카 대륙 35개국 대표들이 모여 경제 협력, 무역, 이민, 기후변화 등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로 약 3년마다 개최된다. 이 회의를 미국이 본토에서 개최한 건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1994년 1차 회의 이후 처음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미국과 감정의 골이 깊어진 중남미 국가들을 달래고 미국의 '텃밭'으로 불리는 이 지역을 숨가쁘게 잠식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번 회의는 최근 중남미의 복잡한 지정학적 변화에 따른 미국의 리더십 공백,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의 중남미 외교에 대한 심각한 난맥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성급한 미군 철수와 더불어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적 낭패 사례로 꼽힐 정도이다. 미국이 1차 미주 정상회담을 개최한 28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 이후 지구상에 사실상 미국의 패권경쟁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중남미도 정치적 대전환기를 겪으며, 거의 모든 국가에서 군사독재자가 사라졌고 각국의 민주 정부는 미국에 우호적인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1차 회의에 참석했던 각국의 정상들은 클린턴 대통령과 같은 테이블에 자리하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당시 미 행정부는 거의 1년 동안 멕시코와 브라질 등 주요 중남미 국가들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회의 준비에 완벽을 기했다. 그러나 올해 회의는 바이든 행정부의 준비 부족으로 개막식 전부터 파열음이 요란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독재국가인 쿠바·베네수엘라·니카라과 정상들의 초청을 저울질하다 민주당 내 강경파를 의식해 회의 개최 수 일을 앞두고서야 공식적으로 초청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에 멕시코의 좌파 정권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AMLO) 대통령은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 국가들의 연대와 결속이라는 원칙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며 회의를 보이콧 했다. 미국이 여러 차례 그의 입장을 바꾸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불참 대열에 과테말라·온두라스·엘살바도르·볼리비아 정상도 동조했다. 현재 브라질은 멕시코와 달리 극우파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다. 그는 정상회담 개최 직전 바이든 후보가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에 승리한 것에 대해 공정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가 이번 정상회의를 보이콧 할 것이라는 보도에 미국이 당황해 황급히 보좌관을 급파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사태를 겨우 마무리했다. 미국이 중미 최대 교역국인 멕시코에 이어 남미 최대 국가인 브라질 정상까지 이번 회의에 불참한다면 주최국 미국의 체면은 더욱 망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국은 브라질에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연출해야만 했다. 바이든과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양자 회담을 개최했지만 서로 불편한 듯 멀리 떨어져서 악수도 하지 않는 등 분위기는 냉랭했다. 지난해 12월 보수우파 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한 칠레의 좌파 대통령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은 LA에 도착하면서 "미국이 특정국가를 배제한다면, 긍극적으로 해당 국가 지도자들의 행동만 강화시킬 뿐"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이번 회의는 1994년과 비교해 중남미에서 미국의 패권이 크게 쇠퇴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브라질은 오는 10월 대선이 예정되어 있다. 이번 대선에서 '중남미 좌파'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76) 전 대통령이 각종 여론 조사에서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크게 앞서고 있다. 룰라 전 대통령이 당선된다면 '세계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 우림의 산림 파괴 문제에 대해서는 바이든 행정부와 협력을 강화시켜 나갈 전망이지만 전반적으로 미국에 비우호적인 정권이 탄생될 전망이다. 룰라 전 대통령은 2004년 7명의 각료와 450여 명의 비즈니스맨을 대거 동원, 중국을 방문해 양국간 무역과 경제협력의 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친미파인 보우소나르 대통령은 집권 전에는 "브라질이 중국의 손아귀에 있다"며 중국을 경계했지만 2019년 10월 중국을 방문, 시진핑 주석을 만나 양국간 우호협력을 다지는 등 양국간 관계가 최근 실용적 접근방식으로 크게 개선된 모습이다. 현실적으로 중국은 브라질의 원자재와 농산물 최대 수입국이자 최대 투자자로 브라질은 중국과 전략적 동반자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2차 핑크 타이드(Pink Tide) 미국이라는 초강대국 이웃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중남미 국가들은 원자재나 농축산물 수출에 의존하는 불안한 경제 탓에 극단적 좌파·우파 정치 실험을 반복해왔다. 지난 1999년 베네수엘라에 반미(反美) 차베스 정권이 들어선 이후 남미 12국 중 10국에 좌파정권이 등장하는 소위 '1차 핑크 타이드(pink tide)'가 나타났다. 그러나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인한 재정파탄으로 신자유주의 물결이 거세지며 2015년쯤부터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 등에 우파정권이 속속 들어섰다. 최근에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민생난과 경제적 불평등 심화 등으로 중남미에 다시 좌파정권이 득세하고 있다. 더군다나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과 자국우선주의를 앞세운 남미 홀대 정책으로 미국과의 중남미 관계는 균열이 커졌다. 멕시코 (2018), 아르헨티나(2019), 볼리비아(2020). 페루(2021) 칠레(2021), 콜롬비아(2022)에 이어 올해 10월 브라질에서 정권이 바뀐다면 '2차 핑크타이드'의 위력은 더욱 커진다. 과거 미국의 든든한 우방으로 핑크 타이드 물결에서 비켜 서 있던 콜롬비아에서 최초로 좌파 후보인 구스타보 페트로(62)가 승리한 것은 의미 심장하다. 이번 미주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2023~2024년 회계연도에 중남미 난민 2만명을 자국에 정착 시킬 것이라는 '과감한 액션'을 제시했다지만 매달 미국 남부 국경을 넘어오는 20만명을 감안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공식 출범시킨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와 성격이 유사한 ‘경제적 번영을 위한 미주 파트너십’(APEP) 구상을 내놨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의에서 관세인하·시장접근 확대 등 실효성 있는 조치는 논의가 안돼 중남미 국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결국 미국의 '텃밭' 외교는 체면만 구긴 셈이다. 미국에 대한 중남미 국가들의 불만이 노골화 되면서 중국은 그 틈새를 잘 공략했다. 2015~2021년 유엔 무역데이터를 분석한 로이터 통신은 중국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미국의 '텃밭'인 남미를 더욱 효과적으로 공략하면서 미국을 제치고 남미의 최대 무역파트너가 됐다고 보도했다. 2021년 멕시코를 제외한 중남미지역과의 무역규모는 2470억 달러에 달해 미국(1740억 달러)을 크게 앞섰다. 특히 중국은 중남미 20여 개국에서 글로벌 경제영토 확장구상인 ‘일대일로’ 사업을 벌이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경제적 지원과 인센티브에 '하나의 중국'을 지지한다며 대만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중남미 국가도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국영 기업들은 남미 지역에서 에너지, 인프라 건설, 우주 산업 분야에서 주요 투자자로 나서면서 외교와 문화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중국은 이 지역에서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백신과 의료장비 지원에도 적극적이었다. 세계는 미국이 아태지역과 중동에 초점을 맞추는 사이에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 여타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지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은 중남미에서 베네수엘라 등 반미 독재 국가에 제재를 가하거나 자금지원을 축소하면서 이들 정부가 중국에 더욱 밀착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은 중국이 쿠바나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등 중남미의 독재국가에서 "포퓰리즘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일대일로가 중국식 권위주의를 세계 각국에 퍼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며 우려를 표명한다. 바이든 행정부가 민주주의, 기후변화 대응 등의 어젠다를 내세워 중남미국가들과 관계강화를 시도하지만 향후 중남미에서 급부상하는 중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먼로 독트린 미국이 중남미 국가들을 자신의 영향력 안에 있다고 여기고 중국의 서반구(Western Hemisphere) 대진격을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는 것은 미국의 전통적 외교정책인 '먼로 독트린'과 맥이 닿아있다. 미국의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1758~1831)는 독립전쟁 시대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1823년 연두교서에서 "미국은 남북미주 대륙의 주인이니, 유럽이나 다른 나라는 간섭하지 말아라. 우리도 역시 다른 대륙의 일에는 참견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고립주의 외교 원칙, 소위 '먼로 독트린'을 천명했다. 먼로 독트린은 오랫동안 중남미 국가에 대한 미국의 배타적인 영향력 행사와 각종 내정 간섭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됐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이 더 이상 세계의 경찰국가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라틴 아메리카 이슈만큼은 '이웃집' 논리를 들이대며 사사건건 협박하며 자기 일처럼 간섭한 것은 이러한 '먼로 독트린' 전통 때문이다. 2차 대전 이후 수십년 동안 미국은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영토에서 소련과 냉전을 치렀다. 이제는 '차이나 머니'가 몰려오는 그곳에서 소련 대신 중국과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바이든 대통령이 라틴 아메리카의 중국 쏠림을 견제하기 위해 지난달 준비 없이 성급하게 개최한 미주정상회담은 미국 외교의 '자책골'이 되었다. 미국이 이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먼로 독트린' 논리대로라면, 동아시아는 중국의 '텃밭'이다. 그리하여 미국이 동북아에서 군사력과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중국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2-07-20 10:56:47
- [이수완의 월드비전] 대통령 생사를 가른 그날의 2초 .. 응급실 뒤집은 '로니'의 유머 1981년 3월 30일 오후 2시 27분. 워싱턴 힐튼 호텔 인터내셔널 볼룸(International Ballroom)에서 오찬 연설을 마치고 대통령 전용 출입구를 통해 나와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리무진으로 향하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기 위해 잠시 멈췄다. 경찰의 로프 라인(rope line) 맨 앞에 서 있던 마이크 푸첼 AP통신 기자가 "Mr President"라며 질문을 시작하려는 순간 바로 근처에서 풍선이 갑자기 터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펑! 펑! 펑! 펑! 펑! 펑! 울렸다. 단지 2초 만에 총알 6발이 날아왔다. 비밀요원 제리 파(Jerry Parr)는 첫 번째 총성이 울린 것과 거의 동시에 대통령을 방탄 리무진 차 안으로 밀쳐 넣었다. 동시에 다른 비밀요원 팀 매카시(Tim McCarthy)는 총알받이가 되어 리무진 앞을 가로막았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6번째 탄환은 리무진 차체에 맞고 튀어나와 대통령의 왼쪽 겨드랑이를 뚫고 들어갔다. 탄환은 폐를 살짝 건드리며 심장에서 겨우 1인치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당시 취임한 지 두 달을 갓 넘긴 70세 고령의 레이건 대통령은 이날 암살당하는 5번째 미국 대통령이 되는 걸 가까스로 모면했다. 그는 인근 병원에서 1시간 넘게 총탄 제거 수술을 받았다. 로하이드 다운(Rawhide Down: The Near Assassination of Ronald Reagan) (2011)의 저자이며 LA타임스 안보 전문 에디터인 델 퀜틴 윌버(Del Quentin Wilber)는 총격 순간 레이건 대통령 위치와 앵글을 보면 제리 파 요원이 몇 분의 1초만 늦었더라도 탄환은 대통령의 머리에 명중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레이건 대통령이 부상에서 회복되어 다음 달 11일 백악관에 복귀하면서 전 세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이 암살 미수 사건은 레이건 대통령의 인기와 지지율을 치솟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 덕분에 그가 공약으로 내세웠던 '힘에 의한 위대한 미국의 재건'과 각종 국가 개혁 프로그램은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베트남전 이후 경제난과 히피 문화 그리고 패배주의에 빠졌던 미국은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할리우드 배우 시절 그리 대단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백악관의 주인이 된 이후 어느 역대 대통령들보다 높은 인기와 존재감을 뽐냈다. 그는 미국 근대사에서 '공화당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장에서 체포된 저격범은 정신병력이 있는 대학 중퇴자 존 힝클리 주니어였다. 영화 ‘택시운전사’(1976)를 15번 이상 보며 10대 창녀로 출연했던 여배우 조디 포스터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던 힝클리는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영화의 주인공 트레비스 비클(로버트 드니로)처럼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다. 힝클리는 이후 재판에서 심신 상실 상태를 인정받아 형사 처벌 대신 워싱턴에 있는 정신병원에 수감돼 치료를 받았다. 2016년부터는 당국의 보호관찰 아래 버지니아주 자택에서 노모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허용됐다. 현재 67세인 힝클리는 지난달 자택 보호관찰에서도 풀려나 41년 만에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됐다. 그는 보호관찰 중 유튜브 채널과 트위트 등을 통해 기타 연주와 노래 등 예술적 재능을 뽐내며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이번 달 8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콘서트를 열 예정이었다. 표가 매진되었지만 주최 측은 안전을 이유로 공연을 취소했다. 브래디 총기 규제법 힝클리가 발사한 독일제 22구경 리볼버 탄환 중 첫 발은 제임스 브래디 당시 백악관 대변인의 왼쪽 눈 위 이마를 뚫고 들어갔다. 뇌 손상이 너무 심해 의사들도 고개를 흔들었고, 당시 주요 방송사는 초기에 브래디가 사망한 것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그는 수술과 재활을 거듭한 결과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말을 심하게 더듬는 반신불수가 됐고 휠체어에 의지해 여생을 보내야 했다. 18개월에 걸친 치료와 재활 후 그는 레이건 대통령이 퇴임한 1989년 1월까지 대변인이라는 타이틀 유지했지만 상징적인 백악관 복귀에 불과했다. 레이건 대통령 취임 후 유머 만점인 명대변인으로 기자단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브래디는 아내 새라의 도움으로 불행과 좌절을 극복하며 새로운 소명을 찾아냈다. 새라 브래디는 남편을 휠체어에 태워 전국을 돌며 총기 규제 운동에 앞장섰다. 총격범 힝클리는 댈러스의 한 전당포에서 위조신분증을 제시해 29달러를 주고 권총을 구입했다. 그는 사건 6개월 전 지미 카터 대통령 암살 목적으로 총을 갖고 비행기에 타려다 체포된 적이 있었다. 브래디 부부는 제대로 된 신원조회를 의무화하는 총기규제법 추진을 위한 여론 형성에 앞장섰다. 평생 총기협회 회원이었던 레이건 대통령도 브래디 부부의 총기 폭력 방지를 위한 켐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의회는 총기 구입자에 대한 전과 조회를 위해 대기 기간을 의무화한 '브래디 총기 통제법'을 탄생시켰다. 1993년 11월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휠체어에 앉은 브래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법안에 서명했다. 2000년에는 백악관 서관(웨스트윙)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브래디 프레스 브리핑룸'이 신설되기도 했다. 그는 2014년 8월 73세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아내도 8개월 후 그의 곁으로 떠났다. 그러나 '브래디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상당 부분이 미국 총기협회 로비와 압력에 의해 유명무실해졌다. 지난 5월 뉴욕주 버펄로 식료품점에서 10명, 텍사스주 유밸디 초등학교에서 어린이 19명과 교사 2명이 사망한 총기 난사 사건 이후 미국에서 총기 규제 강화 요구가 거세졌다. 마침내 지난달 미국 의회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초당적 합의로 18~21세 젊은이들이 총기 구매 시 신원조회를 강화하고, 당국이 위험한 인물로 판단되는 사람에 대해 총기를 일시 압류하는 '레드 플래그'법을 도입하려는 주(州)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법안을 의회 표결로 통과시켰다. 헌법에 의해 개인에게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매년 수만 명이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고 있다. '브래디법' 탄생 이후 거의 30년 만에 미국에서 총기 규제에 의미 있는 진전을 보인 것이다. 힝클리가 쏜 두 번째 탄환은 경찰관 토머스 델라한티 (Thomas Delahanty)의 척추를 관통했고 그는 왼팔 마비로 경찰을 결국 은퇴해야만 했다. 레이건 대통령을 가로막는 총알받이가 된 매카시 비밀 경호 요원은 하복부에 총상을 입었으나 심각한 후유증 없이 건강을 회복했다. 제리 파 요원과 더불어 대통령을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매카시 요원은 경찰 간부로 오래 일하다가 2020년 은퇴했다. 원래 매카시는 레이건 대통령 암살 기도 사건 당일 자기 근무 일이 아니었으나 워싱턴 힐튼 호텔 대통령 오찬 행사 직전에 요원 한 명을 추가 배치하라는 상부 지시에 비번이던 다른 동료 요원과 '동전 던지기 게임'에서 진 벌(?)로 호텔에 긴급 배치됐다. 레이건의 응급실 유머 레이건 대통령은 총상을 입은 직후 4분 만에 인근 워싱턴 대학병원으로 이송됐다. 병원으로 이송된 후 미국 언론에 보도된 소위 레이건의 '응급실 유머'는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미 내부 대량 출혈로 약 40%에 달하는 혈액을 잃은 심각한 상태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수술을 담당한 의사 조셉 지오다노에게 물었다. "당신은 공화당원입니까?" "오늘, 우린 모두 공화당원입니다." 간호사들이 지혈을 하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 몸에 손을 대자 "우리 낸시(아내)에게 허락을 받았나?"라고 농담을 했다. 병원 의료진은 1㎝도 되지 않는 총알 자국을 발견했고, 1시간 10분 만에 총알은 제거됐다. 수술 직후 아내 낸시 여사에게 "여보, 고개를 수그려야 하는데 총을 피한다는 것을 깜빡했어(Honey, I forgot to duck)"라고 다독인 일화도 너무나 유명하다. 레이건 대통령은 응급실에 모인 침통한 표정의 보좌관들과 경호원들에게 "할리우드 배우 시절 내 인기가 이렇게 폭발적이었다면 배우를 때려치우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해 응급실을 뒤집어 놓기도 했다. 이렇게 생사를 다투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대통령의 재치 있는 유머와 용기는 연일 미국 언론의 주목과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남긴 일기장에는 낸시 여사에 대한 깊은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일기장에 "난 눈을 뜨자 낸시를 발견했다. 그녀가 내 앞에 보이지 않는 날이 절대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녀를 나에게 준 것은 신이 내게 내린 축복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적었다. 1994년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이 알츠하이머병 확진 판정을 받은 사실을 대중에게 솔직히 알려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10년간 투병한 끝에 2004년 6월 5일 향년 93세로 작고했다. 낸시 여사는 전국을 돌며 남편이 앓던 알츠하이머병 퇴치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2016년 3월 누구보다도 헌신적인 아내였던 마미(낸시 여사 애칭)는 12년 먼저 숨진 '로니'(레이건 대통령 애칭) 무덤이 있는 캘리포니아 시미밸리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서관 뜰에 함께 묻혔다. 힝클리의 총격 사건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크게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오랜 배우 생활로 갈고닦은 그의 원숙하고 위트 있는 이미지는 정치적으로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한테서도 호감을 얻게 만들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번뜩이는 유머로 국민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집권 8년간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고 미·소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최대 무기는 그의 뛰어난 대외 소통 능력이었다. 레이건 혁명 레이건 대통령 취임 전후 미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동반한 경기 침체)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허덕이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고질적인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벌이면서 세금 인하와 과도한 규제 철폐, 작은 정부를 내세운 소위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미국을 친시장 경제로 복귀시키고 경제 회복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경제정책에 있어서 정치적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은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그를 무척 높게 평가하는 경제학자들이 많다. 레이건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 시절 임명된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폴 볼커의 '인기 없는' 고금리 정책을 끝까지 지지했다. 볼커 의장은 무려 3년 동안 진행된 무자비한 금리 인상과 경기 후퇴(recession)을 택하면서 미국은 1983년부터 비로소 물가를 통제할 수 있게 됐다. 1981년 8월 경제 불황 시 미국 항공 관제사들이 대규모 불법 파업에 나서자 단호한 대처로 노동개혁과 법치주의 수호의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뼛속까지 반공주의자였던 레이건 대통령은 강력한 압박과 끈질긴 대화로 소련의 붕괴를 유도하며 명실공히 미국의 패권을 공고히 했다. 무엇보다도 빼놓지 못할 레이건 대통령의 최대 치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반규제·친시장·친기업정책일 것이다. 1980년대 '레이건 혁명'으로 미국 스타트업과 민간기업들은 새로운 '창조적 파괴'를 향한 힘찬 행진을 시작했다. 현재 세계 최고 기업으로 우뚝선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 등이 이때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권 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미국에서 사라졌던 낙관주의, 역동성, 기업가 정신이 되살아난 것은 분명하다. 레이건 대통령 퇴임 시 지지율은 63%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높았다. 힝클리가 정신질환을 앓지 않았고, 1981년 그날 독일제 22구경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면 지금의 미국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많은 미국 전문가들이 지금도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2-07-04 14:47:35
- [이수완의 월드비전] 고삐 풀린 인플레.. 美연준 '빅스텝'도 안 먹힌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에서 벌어졌던 '유동성 잔치'가 끝나면서 주식, 가상화폐, 부동산 등에서 거품이 빠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플레이션이라는 세계 경제의 불청객은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정도로 치솟고 있다. 미국에서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40여 년 만에 최악인 8%대로 올라선 이후 3개월 연속 고공 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연준(Fed)은 이번 주(14~15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지난달에 이어 0.5%포인트 금리 인상(빅 스텝)을 단행할 것이 유력하다. 이번에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까지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까지 밟을 수 있다는 예상까지 고개를 들면서 지난주 뉴욕 3대 지수는 폭락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유로존(유럽연합에서 유로화를 사용하는 19개 회원국) 5월 소비자 물가도 역대 최대치인 8.1%를 기록했다. 2016년 3월 이후 6년 넘게 제로 금리를 이어온 유럽중앙은행(ECB)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ECB는 지난주 통화정책 회의에서 7월과 9월 금리 인상을 예고했다. 영국도 지난해 12월부터 4회 연속 금리를 인상했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금리 인상 강도를 높이는 가운데 한국은행도 오는 7~8월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연속 인상할 가능성이 크다. 물가를 잡기 위한 각국 중앙은행들의 발 빠른 움직임은 향후 전 세계 금융시장에 불안전성을 증폭시킬 전망이다. 특히 공격적인 금리 인상과 양적 긴축 정책이 뛰는 물가를 인정시킬지 모르겠지만 결국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전 세계는 물가와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데, 과연 어떤 방법이 최선일지 딜레마에 빠진 모습이다. 탄탄한 美고용 시장 …금리인상 안전판? 미국에서는 가솔린과 식료품 가격 급등으로 소비자들 지갑 사정에 비상이 걸렸다고 하지만 고용시장은 의외로 탄탄한 모습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인플레이션 문제가 아직도 심각한 상태지만 경제가 금리 인상과 통회 긴축 충격에도 급격한 침체에 빠지지 않고 순항할 것이라고 믿는 구석이다. 노동부 통계를 보면 올해 5월 미국 실업률은 역사적 저점에 가까운 3.6%에 불과하다. 연방정부의 대규모 보조금 지급과 기업의 임금 인상 덕택에 2020년 3월 이후 증가한 미국 가계의 총 초과 저축액은 2조5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러한 막대한 규모의 가계 저축은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 성장의 메인 축인 개인소비지출을 끌어올렸다. 지난 2년간 미국 경제가 예상보다 견고했던 주된 이유는 소비자들이 기업들이 파는 제품을 적극적으로 구매했기 때문이다. 소비 증가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인플레이션이 현재와 같이 고공 행진을 계속한다면 가계의 초과 저축액은 곧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실제 고물가는 미국인들의 실질 수입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상무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4월 개인저축률은 14년 만에 최저치인 4.4%로 하락했다. 이는 지난해 12월에 비해 2분의 1, 1년 전에 비해 3분의 1 수준이다. 저소득층 가계는 이미 저축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그들은 이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선 저축한 예금을 인출해야 하는 형편인 것이다. 현재 미국 가계 총 초과 저축액 규모를 볼 때 미국이 당분간은 급격한 소비 위축을 걱정할 단계도 아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조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생필품 가격 급등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 위기를 극복하고 급격한 경기 후퇴 없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며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에겐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축 없이 경제를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경제 침체가 현실화하면 대량 실업이 발생하고 증시가 추가로 폭락할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학계와 재계는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물가 상승을 동반한 경기 침체) 재발 가능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국면에 들면서 비관론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인플레이션 우려로 미국 경제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 증가하는 가운데 이제 주요 관심사는 미국 소비자들에게 다가올 고통의 시간일 것이다.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인베스터 콘퍼런스에서 막대한 규모의 코로나 경기 부양책으로 주머니가 두툼해진 미국 소비자들의 지출은 아직도 강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는 정상적인 형태의 경기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인플레이션과 저축률 하락으로 인해 소비자들은 앞으로 6개월에서 9개월 정도 버틸 수 있는 소비력(spending power)이 남았다고 경고했다. 마켓 리서치 전문인 NDP 그룹이 최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 10명 중 8명이 향후 3~6개월 동안 소비를 줄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소비 감소는 월마트(Wallmart)나 타겟(Target) 등 대형 유통기업들의 수익 전망뿐 아니라 미국 경제에 전반에 먹구름을 몰고 올 것이 분명하다. 소비 감소 전망과 더불어 연준의 돈줄 죄기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등 악재가 겹치면서 미국 경제의 둔화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국 경제가 침체의 문턱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이먼 CEO는 "알다시피 지난주에 내가 경제에 먹구름이 끼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바꾸려 한다. 그건 헤리케인"이라고 말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최근 미국 경제에 대해 느낌이 "몹시 나쁘다(super bad)"면서 채용을 전면 중단하고 직원을 약 10% 감축해야 한다고 밝혔다가 바이든 대통령의 비판에 직원 수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태도를 바꾸기도 했다. 연준의 '빅스텝' 물가 우려 잠재울까?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물가 상승세가 코로나19 대유행에서 경제가 회복됨에 따라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치부하다가 에너지와 식품 가격이 치솟고 공급망 병목현상까지 겹치는 등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자 인플레이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을 시인했다. 지난달 31일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제롬 파월 연준 의장과 회동해 인플레이션 대처 문제를 논의한 것은 미국에서 물가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5월에 이어 6월 그리고 7월까지 3연속 '빅 스텝'을 예고한 연준 일각에서는 물가 안정을 전제로 오는 9월 금리 인상을 쉬어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지난 10일 발표된 5월 미국소비자물가지수(CPI)가 예상보다 높게 나타나면서 9월 이후에 고강도 통화 긴축이 지속될 가능성이 커졌다. 공격적인 금리 인상과 더불어 연준은 보유 채권과 국채저당증권(MBS) 등 자산을 매각해 시중에 풀린 돈을 회수하는 대차대조표 축소 작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연준(Fed)은 앞으로 매달 국채와 MBS를 475억 달러씩 축소하고 오는 9월부터는 두 배인 950억 달러씩 자산을 줄일 계획이다 아마도 현재 월가의 투자가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시나리오는 연준이 금리를 빅 스텝으로 연달아 올려도 성장만 더욱 둔화될 뿐 물가는 잡히지 않는 경우일 것이다. 한국도 1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물가와 금리 인상으로 인한 경제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한 민생 안정 대책으로 저소득층 현금 지원과 일부 품목에 대한 수입관세 면제 등 각종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물가 잡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특히 외부 환경에 취약한 구조인 한국 경제는 가계부채 문제 악화와 기업 실적 악화, 금융위기 등 최악 상황에 대비해야 할 때다. 현재 전 세계 경제의 최우선 과제는 두말할 필요 없는 물가 잡기다. 나라마다 고용과 성장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물가를 잡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분주하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다. 또 고물가 시대 탈출 전망과 해법에 대한 세계 유수의 경제학자들과 분석가들의 의견도 서로 엇갈리고 있다. 전통적으로 '비둘기파' 학자들은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경기 침체를 굳이 유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임금이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해 소비자들의 실질소득은 이미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고물가를 잡기 위해 일부러 경기를 둔화시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대표적으로 전 영국은행 통화정책위원회 위원을 지낸 경제학자 대니 브랜치플라워(Danny Blanchflower)는 세계 경제가 이미 침체의 길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은행은 추가적인 금리 인상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비둘기파' 학자와 달리 고물가를 잡기 위해선 고금리와 경기 불황은 반드시 겪어야 할 고통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각국이 근로자에 대한 임금 인상이나 대출 증가 또는 저축 감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고통의 순간을 잠시 뒤로 미루게 할 뿐이며 결국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더 높은 인플레이션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특히 기업들이 숙련 노동자와 원자재 부족으로 늘어난 수요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서 제품 가격 인상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재현? 현재 세계 경제를 살펴보면 여러모로 1970년대와 유사하다.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한 긴축 정책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인플레이션 문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시대다. 애덤 포즌(Adam Posen) 피터슨연구소(Peterson Institute) 소장은 한때 월가에서 '최고의 비둘기(uber-dovish)' 경제학자로 꼽힌 인물이다. 그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기고한 칼럼에서 지금처럼 물가가 강하고 광범위하고 오를 때에는 중앙은행이 의도적으로 불황을 유도해야만 할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노동시장의 조건이 개선되지 않는 한 실질소득 감소가 인플레이션을 완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 IMF 수석분석가인 켄 로그오프 하버드대 교수는 세계 경제의 소프트 랜딩(soft landing) 전망이 갈수록 요원하다고 분석했다. 스티브 로치 미국 예일대 경영대 석좌교수도 연준이 금리 인상에 속도를 내면서 미국 경제가 내년까지 이어지는 깊은 침체가 유발될 것으로 경고했다. 현재 미국 고용시장이 의외로 탄탄해 인플레이션 극복과 연착륙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1970년대 상황을 보면 타당성이 희박하다. 당시 'wage price spiral(임금·물가 순환 상승)'은 미국 기업의 생산성만 후퇴시킬 뿐이며 근본적인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책이 될 수 없었다. 미국의 고질병인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1979년 '슈퍼 매파'로 이름을 떨친 폴 볼커 연준 의장이 등장한 이후다. 그가 무려 3년 동안 진행된 무자비한 금리 인상과 수백만 노동자들의 해고 사태까지 감수하는 경기 후퇴(recession)를 택하면서 비로소 물가 통제가 가능했다. 현재의 고물가 현상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커지는 가운데 포즌이나 로그오프, 로치 등 유명 경제학자들의 분석은 우리 앞에 매우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모든 책임은 우선적으로 코로나 사태로 너무나도 많이 풀려버린 돈일 것이다. 그 돈이 초인플레이션이라는 유령으로 변해 세계 경제를 혼쭐내고 있다. (미니 박스) 세계 경제 10년간 더딘 성장? 지난 10일(현지시간) 노동부가 발표한 미국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8.6% 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CPI 상승률이 3월(8.5%)에 정점을 찍고 4월(8.3%)에 이어 5월에도 어느 정도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완전히 빗나가면서 지난해 말부터 고공 행진하는 물가를 잡고 안정된 경제성장의 기반을 구축하려던 백악관과 연준(Fed)에 비상이 걸렸다. 조 바이든 행정부 경제팀은 최근 연준의 금리 인상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손상된 글로벌 공급망의 회복세에 힘입어 인플레이션 유령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낙관론을 펼쳤지만 예상 밖으로 고물가 시대 장기화를 시사하는 이번 5월의 물가지표에 적지 않게 실망하고 당혹스러운 모습이다. 이번 발표로 인해 글로벌 경제가 1970년대 두 차례 오일 쇼크와 더불어 장기간 나타났던 물가 급등과 경기 둔화, 즉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향하고 있다는 세계은행의 경고는 더욱 현실적으로 실감나게 다가온다. 세계은행은 올해 글로벌 경제성장 전망치를 4.1%에서 2.9%로 하향 조정하면서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위축된 투자로 인해 10년간 더딘 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subdued growth will likely persist throughout the decade because of weak investment in most of the world)"고 전망했다. 이번에 발표된 5월 CPI 수치는 40여 년 만에 최대 폭 상승치로 연준의 금리 인상과 통화 긴축은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바이든 대통령에게 물가 안정은 최우선 과제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인한 에너지·식량 등 원자재 부족 사태로 물가 급등세를 통화정책으로 잠재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2-06-12 13:5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