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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의 월드비전] 中 따돌리며 공급망 새판짜는 美.. '셈범' 복잡해진 글로벌 반도체 업계
21세기는 반도체의 시대다. 자동차에서부터 인공지능, 최첨단 전투기에 이르기까지 미래 산업과 안보에 필수인 반도체는 제조 과정이 유난히 복잡하고 제품도 다양하다. 그리하여 설계, 공정, 양산, 패키징 등 모든 분야에서 기업 간 끊임없는 협업은 필수다. 반도체 산업의 효율적인 국제 분업과 협업의 생태계는 세계화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시작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계 경제가 공급망 대란을 겪은 이후 국제질서는 '세계화의 쇠퇴'로 요약되는 대변환기에 접어들고 있다. 특히 반도체는 이제 개별 기업의 차원을 넘어 '경제 안보'와 국가전략기술의 중심에 놓여 있다. 미국은 중국의 독자적인 첨단 반도체 생산을 막기 위해 동맹국들을 압박하며 글로벌 공급망 새판 짜기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통과된 520억 달러(약 68조5000억원) 규모의 반도체지원법은 세계 반도체 산업의 판도를 동북아에서 자국으로 중심축을 이동시키겠다는 의도다. 미국에 반도체 시설을 지으면 업체당 최대 30억 달러의 보조금 신청이 가능한데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은 중국에 대한 반도체 시설 투자에 제한을 받을 뿐 아니라 초과 이익을 미국과 공유해야 한다. 특히 반도체 수율, 판매 가격, R&D 계획 등 핵심 기밀의 회계자료까지 요구해 기업 경영의 자율성을 해치고 자칫 핵심 기술의 유출까지 우려되고 있다. 자유시장 개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여러 가지 독소 조항은 보조금 신청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인공지능과 슈퍼컴퓨터 등으로 이어지는 첨단 반도체 기술과 장비의 중국 반입을 사실상 금지하고 핵심 장비의 제조업체가 있는 일본과 네덜란드에 동참을 요구하고 있다. EU와 일본도 반도체 패권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지난 4월 430억 유로(약 62조원)를 투입하는 '유럽반도체법(ECA)'을 승인한 EU는 첨단 반도체 점유율을 2030년까지 현재의 두 배 수준인 2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는 일본 정부의 막대한 지원금을 받으며 내년 말 가동을 목표로 구마모토현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은 반도체 산업을 더 이상 자유시장의 경쟁에 맡기지 않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군사적 안보동맹처럼 칩 동맹을 결성하고 중국을 고립시키는 전략에 나서면서 세계 반도체 지형이 격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2015년 반도체 산업을 10대 전략 산업의 1순위로 선택한 이후 자국의 반도체 자급률을 당시 10% 수준에서 2025년까지 70%로 끌어올리려고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일부 반도체 전문가들은 중국이 3~5년 내에 설계와 조립, 테스팅과 패키징 분야까지 필요한 기술을 모두 확보해 고난도 첨단 칩을 자체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최근 반도체 대중 수출 부진이 한국의 대중 무역적자의 근본 원인으로까지 분석되고 있는 것은 그동안 4차 산업혁명 시대 아킬레스건으로 평가되던 중국의 반도체 기술이 한국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최대 우방국인 미국 내 투자 확대를 지속하는 한편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고민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두 축을 중심으로 첨단 기술산업이 이원화되어 서로 잘 호환하기 힘든 생태계가 공존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반도체도 예외일 수 없다. 문제는 재편 과정에서 미·중 간 초강경 대치로 인해 세계 경제가 극심한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이 초강력 수출 통제나 무역 제재로 중국의 숨통을 죄면 중국은 희토류 수출 금지나 미국 국채 매입 중단과 같은 그동안 아껴둔 치명적인 보복 카드로 대응할 가능성이 있다. 또 반도체 파워인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위협도 큰 변수다.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 미국이 중국과의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현재로선 제조공정 기술과 시설에서 최고 수준인 한국 및 대만과의 협력이 필수다. 특히 전 세계 반도체 칩의 60%를 위탁생산하고 있는 대만의 TSMC는 미국의 주요 기업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중국과 대만의 양안 관계 긴장이 고조되면서 미국으로 볼 때 대만 반도체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는 미국의 국가 안보와 산업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다. 실질적으로 2021년 발생한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로 세계 자동차 생산설비가 멈추고 시장이 일대 혼란에 빠지자 미국 정부와 기업들 사이에 탈아시아 공급망 재편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대만 반도체 산업은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로 불린다. 중국이 대만에 군사작전을 감행하면 대만에서 조달하는 반도체와 전자부픔의 공급이 중단되어 중국 내 공장이 멈추기 때문에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일종의 방패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대만의 반도체 공장과 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은 미국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지난해 12월 TSMC는 총 400억 달러(약 52조원)를 투자해 2026년까지 애리조나에 두 개의 첨단 3나노미터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대만이 중국의 공격을 받아 TSMC 공장이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최첨단 칩의 공급에 큰 문제가 없도록 하겠다는 의도다. 미국과 중국이 대만 문제로 서로 비난의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지난달 초 세스 몰턴 미국 하원의원(민주당·매사추세츠)은 '2023 밀컨 콘퍼런스'에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TSMC를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언급은 복잡한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미국 정치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40여 년 전 반도체 생산을 아웃소싱한 미국은 대만과 제조 기술력에서 비교가 안 된다. 대만의 파운드리 공장은 세계 최첨단 칩의 90%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 미국 인텔의 선단 공정은 7나노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TSMC는 5나노 미만의 최첨단 칩을 양산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애플 등 미국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중국과 대만의 공급망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미·중·대만 트라이앵글 체인 현재 미국 기업들의 반도체 설계 역량은 으뜸이지만 반도체의 최종 조립생산은 아시아, 특히 중국과 대만 기업들에 집중되어 있다. 애플이 지난 15년간 이룩한 아이폰 신화도 아시아의 안정된 공급망에 기반한 것이었다. 최근 파이내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아이폰에 들어가는 부품 1500여 개 중 절반가량이 중국(26%)과 대만(23%)에 소재한 회사들에 의해 공급된다. 특히 5G 모뎀과 와이파이(Wi-Fi) 칩, 인쇄회로기판(printed circuit board), 카메라 렌즈 등 가장 핵심적인 부품은 거의 대만에 의존하고 있다. 아이폰 한 대에서 차지하는 자재비 중 36%가량이 대만 기업들로 흘러간다. 중국은 자국 내에서 아이폰 95%를 조립생산하고 있다. 아이폰 제품 하나만 살펴보아도 현재 미국과 중국 그리고 대만의 트라이앵글 체인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애플의 하청업체로 일하는 대만과 미국 기업들이 중국 본토에 수백 개의 생산시설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만의 폭스콘은 중국 정저우 공장에서 전 세계 아이폰의 80%를 생산하고 있다. 애플은 또 총매출 중 20%가량을 중국 시장에서 창출한다. 미·중·대만의 공급망 트라이 앵글이 미.중 간 갈등이 고조되어도 공고한 이유다. 미국은 정부가 민간기업들을 통제하기 힘들다. 중국은 이점을 이용해 미국 선거에서 주요 돈줄인 미국 대기업들에는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며 그들이 앞장서 대중국 규제 해제를 위한 로비스트 역할을 하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TSMC의 애리조나 반도체 공장 착공식에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국에 제조(manufacturing)가 돌아왔다"고 환호했다. 중국 본토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가 30년 가까운 미국 반도체 엔지니어 생활을 접고 1987년 대만 수도 타이베이 외곽에 TSMC를 설립해 파운드리 시장의 신화를 창조했던 모리스 창(92)도 이날 착공식에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반도체 산업이 "세계의 큰 지정학적 상황 변화를 목격했다"며 "세계화(globalization)와 자유무역이 이젠 '거의 죽었고(almost dead)'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TSMC의 최대 고객인 애플의 팀 쿡 CEO도 자신들이 디자인한 핵심 칩에 'Made in America' 스탬프가 붙게 되어 미국 제조업 역사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뒤인 올해 3월 팀 쿡 회장은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애플과 중국은 같이 성장한 '공생(symbiotic) 관계'라고 했다. 그가 애플스토어에 나타나자 고객들은 그를 박수로 환영했다. 애플은 최근 인도에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를 파견하고 투자를 늘리는 등 시장 다변화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가 중국 시장의 대안이 될지는 미지수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폭스콘 관계자 말을 인용해 인도에서 조립되는 아이폰을 중국보다 싼 비용으로 만들기 힘들다고 보도했다. 신규 공장을 지어야 하고, 수많은 부품을 해외에서 가져와야 하고 또 추가적으로 들어갈 물류비용까지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팀 쿡뿐 아니라 중국이 올봄 코로나 봉쇄 조치를 풀고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에 나선 이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등 미국 기업 CEO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머스크 CEO는 방중 기간에 “미국과 중국의 이익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샴 쌍둥이처럼 얽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중 갈등 구도 속에서도 미국 기업들은 14억 인구의 중국 시장과 최대 생산기지를 포기할 수 없다. 지난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미국과 중국의 무역 규모를 보면 중국을 배제하고 대중 의존도를 줄이며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겠다는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은 현실성이 부족함을 입증해주고 있다. 특히 자국의 실리만을 우선시하고 동맹국들에는 고압적인 자세의 새판 짜기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할 것으로 보인다. 미·중 수위 조절 지난달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에 이어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도 중국을 곧 방문한다. 그동안 강경 일변도 정책을 펼치던 미국이 최근 중국과 오랜만에 고위급 간 소통을 통해 상호 갈등이 충돌로 비화하는 것을 막자고 의견을 모으면서 양국 간 화해 무드가 싹트는 모습은 세계 경제에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다. 이러한 기류 변화는 무엇보다도 미국이 대선 국면에 들어서고 있고 중국이 리오프닝 이후에도 경제 회복이 늦어지면서 양국이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 서로의 이해 관계와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중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비교적 양호한 흐름을 보이는 미국 경제도 대선을 앞두고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경기 둔화를 극복하려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필수다. 미국과 중국이 국내 사정을 이유로 서로 충돌을 피하며 한 발씩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 양국 간 첨예한 전략적 경쟁은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현재 반도체 패권 경쟁에 나선 국가들은 GVC(글로벌 가치사슬)를 통한 생산 효율성 제고보다는 자국 생산 위주의 경제 안보에 역점을 두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 지닌 고유의 특성인 협엽과 분업 체제가 자국 이기주의에 의해 무너질 중대 기로에 처해 있다. 또 자본주의의 엔진인 시장 메커니즘의 쇠퇴는 자칫 미래 세계 경제에 치명적 부메랑이 될 위험이 크다. 특히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한 우리나라는 미·중 간 고래싸움의 유탄을 슬기롭게 피하면서 다른 나라가 따라올 수 없는 기술 격차를 지켜내는 것만이 살 길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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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의 월드비전] 세계 경제 新 성장 엔진… '인도(India)의 시간' 시작될까
'힌두 민족주의자'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국민당(BJP)은 2019년 인도 총선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승리를 했다. 2014년에 이어 단일 정당이 연속 과반을 초과하는 의석을 차지하면서 재집권에 성공한 모디 총리는 강한 추진력을 얻으며 국정 운영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반(反) 무슬림(이슬람교도)법'이라고 비난받던 시민권법 개정안을 두고 모디 총리의 2기 정부는 출범한 지 몇 달이 안 되어 대규모 반정부 시위와 유혈 충돌이라는 홍역을 치렀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안 돼서 최악의 코로나19 위기가 닥치면서 모디 총리의 지도력은 혹독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2021년 초 코로나 재확산을 막기 위해 주요 도시를 봉쇄하자 생계가 막막해진 지방 출신 빈민 노동자들과 가족 수백만 명이 고향으로 대거 돌아가면서 곳곳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또 사망자 폭증에 화장시설 부족으로 주차장과 공터가 임시 화장터로 변한 처참한 모습까지도 세계 주요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코로나 확산으로 경제가 마비되다시피 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모디 총리는 5개 주에서 지방 선거를 강행하며 집권당 승리를 위해 수십 차례 대규모 유세를 펼치기도 했다. 결과는 BJP의 참패였다. 특히 야권 세력이 강하고 모디의 최대 정적인 마마타 바네르지 주총리가 웨스트벵골주에서 승리해 2024년 재집권의 초석을 다지려던 모디는 큰 좌절을 맛보았다. 방역 낙제생 한때 '방역 낙제생'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썼던 인도가 코로나19 악몽에서 벗어나자마자 세계 경제의 뉴(New) 엔진으로 다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인도는 2021~2022회계연도 9.1%의 경제 성장을 기록했고 2022~2023회계연도 추정치는 7%다. 이에 모디 총리의 친기업 고성장 정책에 세계 유수 기업들은 인도로 몰리고 있다. 올 1분기에는 인도의 명목 GDP 규모가 과거 식민 통치자 영국을 넘어서며 세계 5위가 됐다. 코로나 사태 이후 인구 조사가 중단되어 정확한 수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인도 인구는 올해 상반기 중국을 넘어 세계 1위로 도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같은 인구 대국이지만 인도는 생산가능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중국과 인구구조가 다르다. 과거에 비해 출산율이 크게 감소하고 있다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여성 한 명당 합계출산율도 여전히 2명 수준을 유지하며 1.2명 수준인 중국보다 훨씬 높다. 중위 연령도 중국보다 10살 적은 29세에 불과하다. 현재 9억명 수준인 인도의 경제활동가능인구는 수년 내에 중국을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 S&P와 모건스탠리는 인도가 2030년까지 독일과 일본을 넘어 세계 3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때마침 서방 기업들은 중국 외 지역에서 생산거점을 추구하는 '차이나 플러스원(China+1)'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당장은 베트남이나 대만이 최대 수혜를 입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인도가 그 해답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인구와 노동력, 내수 시장 규모에서 중국과 비교될 수 있는 나라는 인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또 인도의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모디 총리의 친기업 투자 유치 정책도 서방 기업들의 관심을 끄는 요인이다. 특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신냉전 구도가 심화되면서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균형추(counterweight) 역할을 하는 인도의 지정학적 역향력이 높아지고 있다. 젊고 풍부한 노동력 등 인구통계학적 이점, 정부의 친기업·고성장 정책과 소득·자산 증대로 인한 중산층 및 소비시장 확대, 그리고 지정학적 이점 등 세계 기업들이 인도에서 새 성장동력을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모디 총리는 지난 3월 18일 뉴델리 타지 팰리스(Taj Palace) 호텔에서 열린 'India Today Conclave 2023' 행사에서 '인도의 모멘트(India's Moment)', 즉 인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세계가 인도를 주목해야만 하는 몇 가지 사례를 내세웠다. 첫 번째로 인도의 스마트폰 데이터 소비량과 핀테크 도입률이 현재 세계 1위이고 스타트업 생테계는 세계 3위 규모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도로나 철도, 항구 등 인프라 건설이 여러 지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인도의 문화와 소프트파워에 대한 세계의 관심도 유례없이 높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글로벌 위기 속에서 인도의 경제와 금융 시스템이 견고하다"며 인도의 약진은 민주주의 제도의 힘에서 나온다고 했다. 권위주의 체제의 국가들에 비해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가진 인도가 서방 기업의 협력 파트너로 매력적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은 45년 전 개혁·개방의 길로 나섰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이후 젊은 인구와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공장으로 변했다. 중국과 달리 인도는 독립 후 민주주의를 수용했지만 정치적·종교적·지역 갈등으로 중앙집권적 성장 모델 추진이 힘들어 경제 발전 속도는 중국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세계의 많은 기업들은 중국의 인건비 상승과 기술 이전 요구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중국의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인도 경제 규모는 중국의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아시아에서 가장 젊고 풍부한 노동력은 과거 초고속 성장을 주도했던 수십 년 전 중국과 닮은꼴이다. 인도의 현재 실질 임금도 중국이나 베트남에 비해 현저히 낮아 높은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인도 경제의 디지털화 속도는 놀라울 정도다. 그동안 문제로 제기됐던 취약한 인프라 기반과 기술력 부족 문제도 빠르게 개선되고 있어 인도가 중국에 이어 새로운 제조업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만반의 대비와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티핑 포인트(변곡점) 최근 애플이 인도에서 아이폰 생산을 크게 확대하기로 한 결정에는 소비시장으로서 인도의 엄청난 잠재력 때문이다. 인도에는 7억명의 스마트폰 사용자가 있다. 지난 4월 팀 쿡 애플 CEO는 인도를 방문해 모디 총리를 만나고 뭄바이와 뉴델리에 애플 오프라인 매장을 여는 등 적극적으로 현지 공략에 나섰다. 중국 내 매출 둔화를 새로운 성장동력인 인도에서 흡수하려는 시도로, 애플은 올해 1분기에 분기 기준으로 인도에서 최대 매출을 올렸다. 팀 쿡 CEO는 5월 초 애널리스트 콘퍼런스콜에서 인도를 20번이나 언급했다. 또 중산층이 크게 늘어나고 있고 시장도 역동성이 넘쳐 인도가 '티핑 포인트(변곡점)'에 있는 느낌이라는 소감을 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모디 총리를 이달 21~24일 국빈 자격으로 미국에 초대했다. 중국 견제를 위한 양국 간 공조가 핵심 의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인공지능(AI), 군사장비, 반도체 등에서도 인도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올해 들어 뭄바이에서 첫 패션쇼를 개최한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디올(Dior) 등 글로벌 명품 기업들의 인도행도 줄을 잇고 있다. 최근 에어 인디아(Air India)는 미국 보잉과 항공기 220대 구매계약을 체결한 것도 인도를 오가는 항공기 이용객 급증 때문이다. 세계 3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인 인도는 지난해 207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대기 오염과 탈산소 정책으로 인도에서 전기차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일본 자동차 업체 닛산과 프랑스 르노(Renault)는 전기차 등 신차 공동 개발을 위해 인도 공장에 790억엔(약 742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미국의 테슬라도 인도 공장 설립을 저울질하고 있다. 모디 총리의 말처럼 '인도의 모멘트'에 대한 기대는 높아지고 있다. IMF는 올해 인도 GDP가 6% 전후로 성장해 유럽, 미국 등 선진국이나 신흥국들을 압도할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경제가 고물가와 저성장 우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중국도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이후 회복세가 생각보다 미미한 것과 대조적으로 인도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설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낙관론뿐 아니라 회의적인 시각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인도 정부가 보조금 지원, 세금 환급 등 친기업 정책을 늘리고 있다고 하지만 노동법 등 지역마다 복잡하고 제한적인 법령과 과도한 규제들은 최대 진입 장벽으로 꼽히고 있다. 또 다른 걸림돌은 인도의 보호무역주의 관행이다.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 다자간 무역협정에 가입하지 않고 있어 상대적으로 높은 관세는 세계 시장에서 인도에서 생산된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저하시키고 있다. 모디 총리가 부인하고 있지만 국내 대기업과 정부의 정경유착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분식회계 의혹이 제기되어 주가가 폭락한 인도 최고 재벌 '아다니 그룹'의 가우탐 아다니 회장과 모디 총리의 유착 의혹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높은 실업률···인도 경제의 아킬레스건 또 전체 경제 규모에 비해 제조업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점도 인도 경제의 한계로 지목되기도 한다. 고용 창출 효과가 큰 제조업 분야는 인도 경제에서 겨우 15% 미만을 차지하고 있다. 또 인도 기업들이 숙련공을 선호하면서 많은 젊은 대졸 구직자들도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길거리에서 물건을 팔거나 배달원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인상적인 GDP 수치에도 불구하고 7% 넘는 높은 실업률은 인도 경제의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 3기를 노리는 모디 총리에게 실업률 해소는 가장 시급하고 어려운 과제다. 이러한 현실에서 경제학자들은 실업률 개선을 위한 최선책은 더 많은 공장을 짓는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해외 기업들이 인도에 공장을 더 많이 짓게 하기 위해서는 모디 정부가 규제 완화와 보호주의 철폐에 더욱 속도를 내야 하는 시점이다. 또 인도가 지정학적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있다. 먼저 인도의 소수 종교, 반체제 인사와 언론인 탄압에 대한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도와 미국은 같은 민주주의 체제지만 공동의 가치관에 금이 간다면 두 나라 간 파트너십이 깊어지는 데 한계가 있다. 미국과 서방의 우려인 인권문제에 대한 개선에 힘쓰고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대외 무역거래 규모를 크게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친환경·저탄소 경제로 전환하는 데 속도를 내야만 다가오는 글로벌 그린경제 시대에 낙오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모디 총리가 이러한 모든 것을 잘해낸다면 그가 언급한 '인디아 모멘트'는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