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 유럽 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 카이스트, 케임브리지대, 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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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천의 디지털 산책] 18일간 멈춘 클로드, 국산 AI 허상을 묻다
미국 정부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자국 인공지능(AI) 기업 앤트로픽의 최신 AI 최상위 모델인 클로드 2종(페이블5, 미토스5)에 대한 해외 접속을 상당 기간 (2026년 6월 12일부터 30일까지) 전면 해외접속 차단했다(로이터 2026년 6월 13일자). 미국 정부의 자국 안보 및 수출 통제 관점에서 촉발된 외부 접속 전면 차단 행정명령이 내려진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세계 각국의 기업이 사용하던 AI 서비스는 일제히 멈춰 섰다. AI를 활용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던 스타트업은 물론이고 금융기관 의료기관 제조업체에 이르는 산업 전체 영역에 예상치 못한 혼란이 야기됐다. 그동안 AI는 아무때나 사용할 수 있는 공공재처럼 여겨졌지만 이번 사태는 그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 단숨에 드러냈다. 국가안보라는 명분 앞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AI 서비스조차 하루아침에 차단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이는 IT 산업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각성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가장 큰 교훈은 AI가 단순한 민간 서비스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인터넷처럼 국가 기반 핵심시설들을 구동시키는 새로운 사회 운영체계로서 AI를 인식하게 해 준 결정타가 됐다. 냉전 시대에는 핵무기가 그런 역할을 했지만 이를 계기로 AI가 디지털 핵무기란 말까지 프랑스 국가안전기획부로부터 나왔다(르몽드 2026년 7월 1일자). AI를 통제당하는 국가는 AI 원천 기술 보유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해줬다. 핵무기는 하드웨어지만 AI는 소프트웨어다. 소프트웨어가 국가핵심 자산으로서 핵무기 보유만큼 중요한 뜻도 담겨있다. 소위 소버린 AI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에는 너무나도 허약한 존재다. 그것은 데이터 주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데이터를 구동하는 하부구조를 완전히 도외시하는 까닭이다. AI도 소프트웨어다. 사실 소프트웨어에 정치권에서나 사용 가능할 소버린이란 말이 붙은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발상에 가깝다. 즉 정부와 기업이 독자적인 거대 언어모델을 개발하고 자체 데이터센터와 GPU 인프라를 확충하는 정도만으로는 어림없다는 뜻이다. AI란 거대한 소프트웨어 종합 기술 생태계의 꼭지점 맨 마지막 산출물이다. 가장 밑단에는 하드웨어 반도체가 있고 그 위에서 운영체계(OS)가 그 반도체 하드웨어를 제어한다. 운영체계 바로 윗단에는 데이터베이스엔진(DB)이 자리 잡고 있어 방대한 데이터를 저장하고 관리한다. 그리고 그 윗단에 우리가 사용하는 생성형 AI 모델이 비로소 구동된다. 다시 말해 AI는 거대한 기술 스택의 최상위 첨탑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뛰어난 AI 모델을 자체 개발해 놓았을지라도 그 아래를 떠받치는 OS와 DB 그리고 더 나아가서 클라우드까지 포함하여 그 어느 하나라도 다른 나라 기술에 의존한다면 진정한 국가 자체 AI 기술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 미국의 18일간 AI 셧다운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직시하게 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많은 나라들이 우리도 자체 AI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AI 모델 자체 개발력이 전부가 아니다. 거기까지만 보인다면 컴맹급 근시안적 견해다. AI 모델을 움직이는 기반 기술까지 우리 손에 있는가를 따져 보기 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즉 OS, DB, 클라우드가 모두 해외 기업의 기술과 정책에 종속되어 있다면 국가의 디지털 주권은 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를 들면 건물의 설계도는 우리 것이라도 토지와 전기 수도 출입구 열쇠를 모두 남이 쥐고 있는 상황을 연상해보라.그렇듯 주권이 맨 위가 아니라 가장 아랫단에서 시작되는 건 만고불변의 이치다. 이걸 보면 AI 시대에도 OS와 DB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국가로 말하면 OS는 컴퓨터와 서버의 모든 자원을 통제하는 정부 조직과 같은 존재다. AI 모델이 아무리 뛰어난 추론 능력을 갖추고 있다한들 OS가 메모리와 저장장치, GPU, 네트워크를 효율적으로 해주지 않는다면 AI는 어떤 성능도 발휘할 수 없다. DB 역시 마찬가지다. AI의 먹이인 데이터를 다루는 기술이 중차대한 것은 당연하다. 결국 AI는 OS와 DB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단순응용서비스에 지나지 않는 존재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AI뿐 아니라 OS와 DB, 반도체 설계도구 및 클라우드로 구성되는 층층구조를 하나의 수직형 통합 생태계로 지난 30년간 줄기차게 관리해 오고 있다. 중국 역시 미국의 경제적 견제가 기술 봉쇄로 이어지자 하모니OS라는 자체 OS를 개발했으며 오션베이스라는 중국 국산 DB까지 개발해놨다. AI 모델만 국산이라고 해서 기술 주권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중국은 알고 지난 10여년간에 걸쳐 집요하게 대처한 결과다. 딥시크 같은 것 하나 가지려는 자세로 따라 하려고 들면 큰 오산이다. 하지만 어느 다른 나라도 이런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 우리 한국 또한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메모리 반도체를 자체 생산하고 초고속 통신망을 갖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AI가 돌아가는 핵심 소프트웨어 계층에서는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 철저히 100% 해외 기술에 의존한다. 이에 관련된 매우 부끄러운 수치 하나가 있다. 한국의 소프트웨어 글로벌 점유율이 단 0.8%다. 1%도 채 안된다. 이러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넘어가는 게 우리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도 AI 셧다운으로부터 배우는 게 하나도 없단 뜻이 된다. 평상시에는 이러한 구조가 문제 되지 않을 수 있다. 세계 최고의 기술을 들여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게 AI 3대 강국이란 구호의 실체였고 현재도 여전히 그렇다. 그러나 전쟁 등 국제 정세가 급변하거나 국가 간 기술 갈등이 심화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이번 AI 사태는 이런 극심한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의존 구조를 당연시 받아들여 왔다는 행태다. 무려 지난 30년간 고질병처럼 그래 왔다. AI 시대에는 이런 전근대적 사고방식 자체를 완전히 뜯어 고쳐야 한다. AI 밑단의 핵심인 OS와 DB가 국가 전체의 디지털 안전망의 핵심 중 핵심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고는 국가를 매우 방만하게 경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물론 독자적인 운영체계와 데이터베이스를 개발하자는 주장이 모든 것을 국산으로 대체하자는 폐쇄적 기술 민족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디지털 산업은 글로벌 협력과 개방형 생태계를 기반으로 성장해왔다. 따라서 외국 기술을 배척하거나 세계 시장과 단절하자는 접근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기초 기반 기술 특히 하부 소프트웨어는 우리 것을 반드시 토종 기술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의 존립과 직결되는 핵심 분야에서는 언제든 기술의 수직체계를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대체 역량을 보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에너지 안보를 위해 해외에서 원유를 수입하면서도 전략비축유를 상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산업정책도 마땅히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는 AI 강국 운운하는 구호뿐이었으나 예를 들면 운영체계 강국 식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노력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렵고 민간 기업이 독자적으로 감당하기에도 부담이 크다. 그래서 중국처럼 국가가 최소한 10년 앞을 내다보는 관점에서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야 민간 기업이 이를 기반으로 경쟁력을 키우는 선순환 구조가 설계될 수 있다. 뭐든지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15년 동안 정부 산업 대학(특히 카이스트를 통한 국가산업 고급인재 적시 공급) 3박자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듯이 말이다. 개도국들이 한강의 기적을 재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3박자 중 한둘이 어디선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부는 미국 국방부처럼 이러한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AI 시대의 산업정책은 국가의 디지털 생존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인식 대전환이 필요하다. AI는 흔히 제4차 산업혁명의 엔진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차대한 엔진은 따로 있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AI는 실은 트랜스미션이나 바퀴 정도에 머문다고 봐야 맞다. AI 거대 언어모델은 겉으로 눈에 잘 띄는 존재지만 그 아래 깊숙한 암실에서는 OS와 DB라는 기반기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돌아가지 않으면 AI도 순식간에 사상누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중대한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이번 AI 셧다운은 국제 질서체계 개편의 서막을 알리는 심각한 경고장으로 봐야 한다. 이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한국형 챗GPT 하나를 잘 만드는 AI 강국 구호 경쟁이 아니다. 반도체에서 그로부터 수직상향으로 OS DB 더 나아가서 클라우드를 거쳐 종국에는 AI 모델 꼭대기에 이르는 컴퓨팅 스택 전체를 단계적으로 자립시키는 국가 전략이 절실하다. 다시 밝히지만 중국은 미국 견제 탓에 또한 그 덕에 지난 10여 년간 그리 해왔다. 모든 것을 단숨에 국산화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게 우리가 부품 기술 강국을 넘어 소프트웨어 주권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현명한 길이다. 국가AI 기술 자립 전략에는 무엇보다 이게 핵심이다. 따라서 이런 기술 자립이 혹시라도 국가 균형 발전 같은 외부 요인에 영향을 받아 크게 흔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치적 요소가 물론 시급하고 중요할지라도 기술 자립부터 완성하고 난 후에 시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기술이 뒤지면 모든 게 끝장이기 때문이다. 경기 끝나고 집에 갈 시간에 무슨 다른 전략 도모하려 든다면 때늦은 것이다. AI 시대의 독립은 AI 모델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OS와 DB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점을 깨닫고 앤트로픽 차단을 계기로 누구보다도 국가가 먼저 정신 바짝 차리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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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천의 디지털 산책] 철벽수비의 역설 …메모리 지키다 SW 미래 내줄라
위대한 승리는 상대가 실수하여 무너지기만을 요행으로 바라는 비겁한 수비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 흐름을 꿰뚫어 보고 보이지 않는 공간의 빈틈을 먼저 선점하는 전향적이고 진취적인 용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손자병법 허실편에 나오는 攻其無備 出其不意(공기무비출기불의), 즉 적이 대비하지 않은 곳을 공격하고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 나타나라는 뜻이다. 변화의 흐름을 읽고 새로운 기회를 선점하라는 말과 같다. 축구 경기에서도 단 한 골의 리드를 지키기 위해 모든 선수를 골문 앞에 촘촘히 쌓아 올리는 극단적인 수비 전술은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2026년 월드컵 준결승전(4강전)에서 영국 축구가 보여준 전술은 한마디로 수비 위주 요행을 바라는 안일한 태도가 어떤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는지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후반 초반 선제골을 터뜨리며 기세를 올렸던 영국은 감독 지시로 핵심 공격수를 성급하게 빼고 수비벽을 늘렸으나 경기장의 소유권을 상대에게 넘겨준 상황에서 1대 0이라는 눈앞의 스코어를 지키는 데만 급급했다. 이는 경기를 지배하는 메시라는 불세출의 천재에게 패스할 공간과 전술을 설계할 시간을 넉넉하게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경기 종료 불과 3분을 남긴 상태에서 1대 2 역전패라는 참혹한 대가로 돌아왔다. 방어적 태도가 자초한 이 역전패는 오늘날 한국 정보기술(IT) 산업이 마주한 거대한 위기 국면과 소름 돋을 정도로 닮아 있다. 글로벌 기술 전쟁의 중심축이 하드웨어 제조에서 무형의 인공지능(AI)과 역시 무형의 소프트웨어 생태계로 완벽하게 재편되는 문명사적 격변기 속에서 한국 IT 산업은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라는 단 하나의 영화에 집착하며 지극히 방어적이고 관행적인 태도를 고수해 오고 있다. 가트너의 시장 분석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소프트웨어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수십년째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며 이제는 단 1.2%라는 초라한 수치에 머물러 있다. 그 대부분이 아래 한글 덕이라는 기가 막힌 사실을 안다면 더욱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부해 온 IT 강국이라는 호칭이 얼마나 허망한 모래성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원천기술과 인프라를 아우르는 자생적 토양이 자라나지 못한 탓에 AI 성숙도 평가(글로벌보스턴컨설팅그룹 발표)에서조차 한국은 상위권밖 제2군으로 밀려나는 수치를 당했다. 25% 내에 겨우 턱을 걸었을 뿐이다. 하드웨어라는 가시적인 껍데기 뒤에 숨어 원천 기술 개발을 기피하는 사이에 글로벌 시장의 지배력은 무형의 지적 자산이자 미래 플랫폼을 장악한 소프트웨어 강국들 쪽으로 완전히 이동해 버렸다. 우리가 이처럼 과거의 성공 공식에 취해 메모리 반도체라는 낡은 방어막을 보수하는 동안 경쟁국인 중국은 뼈를 깎는 체질 개선을 통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아우르는 완벽한 독자 생태계를 구축했다. 중국은 일찍이 2014년부터 제조업 중심에서 소프트웨어 중심 국가로의 전환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 결과 화웨이는 독자 운영체계(OS)인 하모니와 AP·AI 반도체를 국산 기술로 결합해 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여기에 더해 자국 거대 플랫폼 기업의 전폭적인 학습 인프라와 칭화대 출신 최고 인재가 결합하여 세계적 수준의 AI 서비스인 딥시크를 내놓았다. 중국이 기초가 되는 OS와 데이터베이스엔진(DB) 등 뿌리 깊은 하부 기술 생태계를 자체 조성해 놓은 것이다. 그 덕에 중국은 AI 성숙도 평가에서 미국 영국과 더불어 당당 제1군에 속해 있다. 우리가 소프트웨어를 필두로 하는 두뇌산업에 도전하지 못하는 관행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오랜 세월 지병처럼 이어져 온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이번에도 국가 7대 씨앗이란 이름으로 미래성장동력산업이 어김없이 지정됐으나 소프트웨어란 단어는 전혀 찾아볼 길 없고 전부 예외 없이 오로지 바이오 양자 에너지 소부장 공급망 등 하드웨어 일변도에 그쳤다. 정권이 수없이 바뀔 동안 소프트웨어는 보이지 않았고 이번에도 여전히 그랬다. 7개 모두 제조업에 해당하는 것이라 제조에 능한 우리로서는 그럴싸하게 잡혔다고 볼 수도 있으나 소프트웨어가 사실상 제조업의 극치로서 두뇌산업형 제조업이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이는 유감 중의 대유감이다. 지난 20년간 재계 시가총액 순위를 보면 10대 기업 내에 무려 9개가 변함없이 마이크로소프트를 위시한 순수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왜 거기에 도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따로 필요 없으리라 본다. 소프트웨어란 정체가 과연 뮈길래 우리가 영 못하는 것일까. 소프트웨어는 100% 코딩이다. 요새는 코딩도 AI가 많이 도와준다고는 하나 그게 잘 안되는 분야가 소프트웨어다. 코딩은 순전히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소재 부품 장비 같이 실물로 보여주기는 곤란한 것이다. 설령 보여준다고 해도 그걸 원 제작자가 아닌 남이 이해하는 건 불가능이다. 이렇듯 소프트웨어 근본에 대한 깊은 불신과 경직성이 한국을 지배하게 된 역사는 길다. 최근 한국을 떠나 스위스 소재 인공지능연구소 교수로 자리를 옮긴 한 AI 학자의 고백은 한국 IT 산업이 직면한 인재 및 인프라의 잔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교육과 산업 현장은 근본 이론을 탐구하기보다 당장 프로그램에 기능을 덧붙여보는 얄팍한 응용에만 관심이 있다는 지적이다. 인사도 학벌 선호에 머물러 고급 기술자를 선별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니 국내 최고 엘리트라는 인재들조차 새로운 기술을 스스로 창조해 내는 역량 면에서 글로벌 중위권과 비교해도 격차가 크다. A급 소프트웨어 인재들을 모아놓았던 기업들도 단발성 흥행에만 의존했고 지속 가능 생태계를 만드는 데 실패했던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이러다보니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글로벌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저단가 외주 개발 시장은 베트남 폴란드 발칸반도 등이 이미 휩쓸고 있으며 가격이나 인력 역량 측면에서 인도라는 나라 수준을 넘어서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고단가 플랫폼 시장으로 눈을 돌려봐도 상황은 역시 절망적이다. 게임 산업의 주도권이 중국에 이미 넘어간 상태고 세계 최대 시장인 영어권 문화·및 언어 장벽을 극복할 토대 부족으로 인해 커뮤니티 기반 빅테크 기업을 탄생시키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이상은 그가 본 견해다. 그의 견해에 덧붙인다면 인력 구조에서도 문제가 많다. A급 인재들이 소프트웨어 시장으로 유입될 유인조차 제공하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무슨 AI 3대 강국 구호 같은 거대 구상은 사실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국내 산업 생태계 전반에 깊게 뿌리내린 극단적인 관성에너지와 위험 회피주의다. 기업의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고위직은 도전을 거부하는 고인물이 되어버렸고 한창 일할 청년들은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만 몰두한다. 결국 혁신을 가로막는 경직성이 수십년간 쌓아 올린 국가의 산업 주도권을 타국에 그대로 순순히 넘겨주는 방향으로 가는 비극적인 결말을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미래 기술 경쟁력을 짊어질 최고급 인재들의 이탈을 불러일으켜 영구적인 인재 빈곤이라는 파국적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OECD 조사에서 세계 최고 수준 엘리트 AI 연구자 중 거의 절반이 중국 출신인 반면 한국은 국내 인재들이 고국을 등지고 해외로 탈출하는 대표적 인재 유출국으로 분류된다. 이렇듯 단기 하드웨어 프로젝트에 집중하며 위험을 회피하는 정부 및 기업 투자 환경 속에서 젊은 연구자가 원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싶어도 딥시크 같은 혁신을 믿고 과감하게 밀어줄 투자자나 사회적 인프라도 부족하다. 스위스로 떠난 교수의 말처럼 한국에서 날개가 꺾인 채 살아가던 A급 인재들은 이제 한국 대학이나 기업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유럽과 미국 등 해외로 탈출하여 날개를 펼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우수 소장 인재는 미국과 유럽으로, 우수 노장 퇴직 인재는 중국으로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 오늘의 한국 현주소다. 그럼에도 한국은 진취적인 모험 대신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처분만을 갈구하는 소프트웨어 패배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 독자적인 소프트웨어 엔진을 빌드하겠다는 담대한 기업가 정신은 자취를 감추었고 오로지 엔비디아나 오픈AI 같은 미국 빅테크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는 홍보성 기사에 주식 시장이 요동을 거듭하는 기형적 풍경이 일상이 되었다. 국가 재정 또한 독자 기술 생태계 자생적 구축보다는 엔비디아 GPU를 수입해 오는 데 상당 부분 소비되며 실질적인 기술 종속을 심화시키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머리(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생각 없이 남이 만든 머리를 돈 주고 사다 쓰기만 하는 수구적 방어 전술로는 반도체 제조업 시장마저 중국에게 넘겨주고 글로벌 시장의 낙오자로 주저앉게 될 가능성이 크다. 영국 축구팀 주장 선수는 패배 후 "우리가 너무 일찍 내려앉은 게 패인"이라며 감독의 수비적 전술을 강하게 비판했다. 한 골의 리드에 취해 후반 30분 남긴 상황에서 수비 카드를 너무 일찍 꺼냈다가 메시라는 천재의 기습적 파상공세에 무너진 영국 축구의 비극은 오늘날 한국 IT 산업과 정부에 엄중한 경고를 던져 주고 있다. 한국 IT 역시 메모리 반도체라는 착시와 과거의 성공에 자족한 채 안주하다간 영국 축구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학교 강단과 기업 현장에서 인재가 모이고 수익을 내는 선순환이 깨진 지금 국가 IT 생태계 전반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위한 소프트웨어 대전환 수술에 당장 착수해야 한다. 단순 응용 기술이나 외산 장비 확보라는 단기 성과 지표에서 벗어나 기초 수학 및 원천 소프트웨어(OS, DB) 기술을 착실히 다지는 장기적 연구 개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영국의 패배는 전적으로 전략을 잘못 짠 감독의 책임이었다. 한국에게 주어진 소프트웨어의 골든타임은 결코 많지 않다. 우리 정부와 산업계가 메시 같은 지혜롭고 담대한 해결사가 되어 소프트웨어라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도체라는 단 하나의 가시적 성과를 지키는 데 급급한 나머지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모두 내주고, 결국 역사에 뼈아픈 패배자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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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천의 디지털 산책] 엔비디아 선물 보따리 속의 은밀한 함정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수장이 서울을 방문하여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새로이 시도하는 CPU 플랫폼 AI 노트북 제품군 및 물체적AI 플랫폼이 주요 내용이다. 서울에 AI기술센터를 설립하고 국내 우수 인재를 적극 채용하겠다는 계획도 포함돼있다. 이 중 CPU와 노트북은 인텔과 레노버를 비롯한 기존 강자들을 위협하는 엔비디아의 도전에 해당한다. 국내 언론과 산업계는 이를 긍정적 신호로 해석하며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 일색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흘러갈 수 있을까. 기술 패권 경쟁의 교훈을 돌이켜 분석해보면 단순히 호재로만 해석하는 것은 매우 순진하고도 위험한 생각이다. 세계 산업사에서 강대국은 자체 생태계를 구축하고 세계 표준으로 퍼뜨리어 다른 국가들을 자신들이 만든 플랫폼 안으로 끌어들이는 교묘한 장악력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이런 생태계 구축 과정에서 누가 실질적 통제권을 확보하게 될지 세심히 따져봐야 한다. 진정한 선물은 과연 누구 몫으로 귀속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정교한 글로벌 생태계의 구성원으로 편입되는 것으로 그치는 일방적 결과가 예상된다면 그리 좋아할만한 거리는 아닌 까닭이다. 한국의 정보기술 산업은 지난 반세기 동안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메모리 반도체를 세계 최고로 만들었고 통신망 역시 세계 최고다.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도 주도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 들여다보면 부품 제조 기술에서는 자립했지만 산업 질서 플랫폼에 대한 결정력을 가져본 적이 한번도 없다. 이런 결정력 상실 패턴은 고착화되다시피 했다. PC 시대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체계를 지배했고 인텔이 프로세서 생태계를 장악했다. 인터넷 시대에는 구글과 아마존이 시장 질서를 주도했다. 스마트폰 시대에 이르러서는 애플과 구글이 모바일 플랫폼을 통제하고 있다. 클라우드 시대로 돌입해서는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세계 데이터 인프라를 거의 다 장악해버렸다. 이렇듯 우리는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주체가 돼 본적이 한번도 없다. 마치 주체되기를 기피한 듯 추종자 처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답답한 행보를 펼쳐왔다. 이를 놓고 패권 포기 주의라고 보는 시각이 생긴지 오래다. 지금 AI 시대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지금 AI 패권은 엔비디아에 아예 맡겨 둔 채 과거와 동일한 흐름이 재현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본다. 엔비디아와 정면 승부를 펼쳐야 마땅할 삼성도 이번에도 또 주도권을 허용하고 그런 처지에 자족할 것인가. 플랫폼을 가진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의 차이는 현격하다. 부품 공급의 수준에 머물면 하청업체간 경쟁이 매우 심하다. 대체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쟁자 등장으로 가격이 하락하여 공장이 문닫게 되고 살아남더라도 수익성 면에서 압박 요인이 크다. 반면 플랫폼은 시장의 지배자로서 독점력이 강할 뿐 아니라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수익 효과가 강화된다. 이른바 네트워크 효과는 수의 크기에 단순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수의 제곱에 비례할 정도로 수직 상승한다는 사실이다. 40년전 나온 이론이다. 운영체계 데이터베이스 클라우드 검색엔진 등이 모두 그런 특수 효과를 누리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이 플랫폼 지배자가 부가가치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생태계 현실이다. AI 시대에도 이는 여전히 통하는 진리다. 엔비디아를 반도체 기업으로 볼 수도 하지만 실제 핵심 경쟁력은 GPU자체에 있지 않다. 오히려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GPU 개발 생태계가 자산 목록 1호다. 생태계란 다른 말로 운동장이다. 세계 연구자와 개발자가 대부분이 거기서 뛰어놀며 제품이 개발되고 서비스가 구축된다. 따라서 플랫폼 보유자의 위상은 막강하다. 그가 설정한 기술 발전의 방향과 시장의 표준에 따라 모든 참여 선수들의 활동 영역은 제한된다. 한국이 많은 메모리를 공급할수록 그들의 열매는 제곱 세제곱 네제곱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현상을 결국 도와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좁게 보면 윈원으로 보는 이도 있겠으나 실상은 착각에 해당할 뿐이다. 오늘날 AI 산업을 움직이는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엔비디아가 20년전부터 조성해온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생태계다. 그게 삼성을 비롯한 남을 흡인하는 기술 종속 구조의 핵이다. 워낙 잘 돼있어 대학과 연구소가 아무 저항없이 세계 표준처럼 받아들이며 사용하고 있다. 수많은 반도체 연구 논문과 AI 모델(딥시크같은)이 CUDA라는 설계 핵심 소프트웨어를 전제로 개발되고 있으며 스타트업에서는 처음부터 CUDA를 기반으로 서비스를 설계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다. 그래야만 그들로서 3년내에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빅테크 또한 스타트업과 처지가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도 CUDA 최적화가 역시 사활의 최대 관건이다. 삼성도 예외 없이 갖다 쓴다. 이래서 엔비디아가 생태계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절대반지 격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젠슨 황이 여러 최고경영자들을 데리고 회동하는 장면을 연상해보변 이해가 될 것이다. 마치 빅테크 세계의 황제 같지 않은가.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심화될수록 엔비디아 의존도가 높아진다는 점이다. 의존도가 심화될수록 생태계 참여자들의 독자 기술 개발의 동기는 자연 실종된다. 연구 방향도 플랫폼 제공자의 전략 범위 내에만 결정하면 되는 까닭이다. 마치 과거 영연방 시대에 56개국으로 구성된 그 연방 조직이 돌아갔던 거버넌스와 비슷하다. 최근 우리 산업계는 HBM 수요 급증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엔비디아의 AI 플랫폼이 확대될수록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매출도 증가되고 있어 그렇다. 그러나 국가 전략의 성패는 수십 년 후의 경쟁력을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분기 실적과 같은 근시안적 관점에서 판단하는 게 아니다. 과거에도 우리는 메모리 시장의 호황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플랫폼 경쟁력으로 이어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경시하면 아니 된다. 초격차로 불리는 부품 제조 경쟁에 몰두한 결과 플랫폼의 기반인 소프트웨어에 대한 자립 의지와 걸맞은 투자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도 같은 상황이라는 사실이다. HBM 호황이 생태계 조성의 중요성을 외면하게 만드는 위험한 착시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엔비디아 플랫폼의 성공에 우리 산업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퇴로 불가의 영역으로 더욱 깊숙이 끌려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가 AI기술센터를 서울에 설립하고 제시하는 인재 채용 계획 역시 양날의 칼이다. 한편으로는 국내 연구자들에게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환경을 제공할 수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다르게 봐야 한다. 오랜 기간 노력을 통해 우리가 양성한 인재들이 결국 해외 플랫폼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주는 역할만 하고 끝난다면 이게 무슨 꼴인가. 그냥 남에게 봉사하는 희생 아닌가. 인재는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핵심 자산이다. 국내 기업들은 이미 AI 인재 부족을 호소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 경우 국내 생태계 성장 가능성은 약화 정도가 아니라 전면 실종될 수 있다. 따라서 기술센터 유치를 성공으로 평가하기 전에 어떤 가치를 창출하고 그 가치가 어디에 귀속되는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지금 AI는 국방 금융 의료 교통 에너지 행정 등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인프라로서 그 적용 무대가 날로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AI 플랫폼에 대한 의존은 단순히 기업 경쟁력만의 문제로 봐서는 곤란하다. 크게는 국가 존폐를 다루는 안보 영역과도 직결되는 중대 사안이다. 최근 이란 전쟁을 보라. 만약 특정 국가나 특정 기업이 엔트로픽 같은 핵심 AI 인프라를 통제하게 된다면 다른 국가들은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갑자기 을의 위치에 처하는 구조적 상황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데이터흐름 알고리즘방향 시스템표준이 모두 외부에서 결정되는 까닭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반도체 수익만으로 미래 경쟁력을 판단하는 것은 큰 숲을 애써 외면하고 지엽적으로 나무 한 그루에만 신경 쓰는 격이다. AI 전환 및 응용에 능한 처세술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척도가 돼서는 안된다. 기업은 기초 기술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지라도 국가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AI 기술의 향방에 대한 기술적 주도권과 영향력을 얼마나 행사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생태계 영향력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처지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 엔비디아를 상대로 이런 생태계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기업이 미국에는 인텔을 비롯하여 여러 기업이 있다. 플랫폼 주권에 대한 욕심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그런 기업이 하나도 없다. 삼성도 인텔처럼 엔비디아를 꺾어 보겠다는 의지와 도전 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흔적을 전혀 찾아볼 길 없이 그저 협력만 하려고 든다. 플랫폼 주권 확보에는 운영체계 데이터베이스 클라우드 같은 기반 기술이 긴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각각이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기 10년씩은 투자해야 성공할까 말까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를 포기한다면 다른 국가가 만든 운동장에서 용병 선수로서 뛰는 신세를 영영 면할 길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운동장 만드는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으니 포기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를 놓고 한국의 소프트웨어 패배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경비즈니스 2025년 2월 10일자). 엔비디아 같은 유망한 기업과 협력 자체를 부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협력을 초월한 절대적 의존은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한다. 지금 AI 혁명은 역사적 분기점을 또다시 만들고 있으며 이번 분기점은 과거와 다르게 선진국과 후진국간의 거리를 훨씬 더 벌려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프트웨어에 관한 한 한참 후진국이다. 우리가 어떤 수를 언제 어떻게 둠으로써 앞으로 어떤 위치에 서게 될 것인지도 냉정하게 고민해야 한다. 선진국처럼 늘 20년 앞을 내다보는 자세로 말이다. 엔비디아 선물 뒤에 숨겨진 얽히고 설킨 구조를 슬기롭게 읽어내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반도체 수익 극대화에 자축할 시점이 아니다. AI생태계 수장이 방한하여 소맥잔을 들고 “Go, Korea”를 외치는 진의가 과연 어디에 있을지 지혜롭게 분석해봐야 할 것이다.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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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천의 디지털 산책] 선관위 '환골탈태' …구태 선거시스템 혁신부터
선거 부실이 곪을대로 곪더니(조선일보 2025년 3월 12일자) 급기야 이번 6·3 지선에서 큰 게 터졌다. 고의성 여하에 따라 ‘부정 선거’ 행태 수준으로 볼 수도 있는 상황이다. 무려 140여 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하게 된 사상 초유의 불상사다. 투표용지 인쇄량이 유권자 수의 50%도 안 된 경우가 1300여 곳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조선일보 2026년 6월 10일자). 용지 인쇄량을 중앙선관위가 임의로 50%로 낮춘 것이 부족 사태의 근원인 가운데 어처구니없는 이런 자의적 기준에도 미달된 투표소가 10곳 중 1곳꼴로 드러났다. 총체적 부실의 실체가 과연 어디까지 드러날지 예측 불허의 사태를 연일 국가조직이 국민들 앞에 연출하고 있는 중이다. 선관위에서 개표 결과를 잘못 입력한 수작업 실수로 이번에 여러 군데서 벌어진 일은(동아일보 2026년 6월 11일자) 매우 불길한 전조를 던져주는 무거운 사건이다. 따라서 앞으로 예견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선거 개표 결과 무결성과 정확성이다. 선관위가 디지털 사각지대라는 증거가 명백히 드러났다. 그간 선관위가 선거정보시스템 자문단(교수 4인, 업계전문가 3인)을 구성해 선거 투명성을 검증받았다고 주장했었는데(중앙선관위 2024년 3월 11일자 보도자료) 거기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던 전문가들은 지금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있겠는가. 감사 사각지대 수혜 대상인 기관을 특별 자격으로 걸쳐 자문했다면 일종의 특별감사관답게 시스템 결함 요인과 그로 인한 부작용에 대해서도 지적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선거정보화 노력 없이 또 그냥 넘어간다면 국민 앞에 중죄를 짓는 일이다. 지체없이 그간 끊임없이 제기돼 온 개표결과 실시간 고도 보안 데이터베이스(DB)화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런 시스템 구축에는 2년 정도 걸리므로 지금 착수하면 차기 대선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DB전문가 없이는 불가능한 영역의 고도 작업이므로 이번엔 선관위 대표에 반드시 DB전문가를 등용하여 국가 명운을 위해 진중하게 풀어 나가야 할 일이다. 이번 사태는 절대 공정하지 못한 것으로서 선관위가 국민투표권을 훔친 결과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신뢰에 달려 있고 신뢰는 투명성과 검증 가능성에서 나온다. 그의 토대가 되는 선거는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야를 떠나 모든 국민이 결과를 수용할 수 있는 선거 시스템을 만드는 일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국가적 책무다. 그런데 최근 치러진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 그리고 그 이전의 서울시장 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를 돌아보면 민주 절차상 중대하게 우려되는 바가 반복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어느 정당이 승리하든 일부에서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음모론으로 규정하며 맞선다. 문제의 핵심은 의혹의 진위 여부를 떠나 국민 신뢰가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현상이 증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로만 유지되지 않는 것이다. 선거 결과를 국민이 믿고 수용할 때 비로소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결과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선거는 통합의 기능을 상실하고 갈등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번 선거도 그랬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 여전히 반복됐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국민 전체가 신뢰할 수 있는 선거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지금 고치지 않으면 어떤 거센 후폭풍이 밀어닥칠지 매우 염려된다.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를 갖추고도 선거만큼은 수십년 전 방식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냉정하게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나라를 짊어질 미래 세대가 민주주의 과정 자체에 망연자실하게 회의를 표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투표 현장에서 투표용지 부족, 장시간 대기, 지역별 투표 환경 격차 등은 젊은 유권자들에게 크나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어렵게 시간을 내어 투표소를 찾았는데 기본적인 준비 부족으로 중대한 불편과 고난을 겪는다면 국가가 참정권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게 되는 일은 당연하다. 젊은 세대는 공정성과 투명성에 특히 민감하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절차가 공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국가가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 기초인 선거조차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운영하지 못한다면 과연 어떤 미래 비전을 그들에게 제시할 수 있겠는가. 국가 시스템 전반에 대한 신뢰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반복되는 논란을 줄이고 신뢰 회복을 위해 차세대 선진형 디지털 선거 시스템 구축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청년층만이 아니다. 국민의 바람은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디지털 기술은 바로 이러한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젊은 세대가 국가를 신뢰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도 선거 혁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끊임없이 반복되는 부정선거 논란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전 자동화 기반 차세대 선거정보시스템 구축을 심각하게 검토해야 한다. 왜 디지털이어야 하는가. 현재 선거는 투표, 보관, 이송, 개표, 집계라는 다수의 단계를 거친다. 절차가 많아질수록 오류 가능성에 이은 관련 부정 의혹 제기 가능성 역시 증가한다. 부정 행태 실제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국민이 의심할 허점들이 산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뢰 형성에 금이 가게 하는 원인제공자이자 부담이다. 디지털의 본질은 절차를 단순화하고 검증력을 높이는 데 있다. 투표 종료 즉시 암호화된 데이터가 자동 집계되고 실시간으로 동일 결과를 검증할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논란은 대부분 해소될 수 있다. 금융권에서는 매일 수억 건의 거래가 초 단위로 처리되고 있으며 국가 안보 시스템 역시 실시간으로 운영된다. 선거만 예외일 이유는 없다. 기술을 통해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고신뢰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과정을 검증하는 기술 기반 신뢰 체계에 달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이 없는 행정을 지향하는 디지털 시대에 종이 투표를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정부 행정망 역시 대부분 전자결재 시스템 위에서 운영된다. 은행 업무를 스마트폰으로 처리하고 부동산 계약도 전자서명으로 체결한다. 세무신고 건강보험업무 민원신청 주민등록등본 처리도 모두 그렇게 디지털로 한다. 그러나 유독 선거만은 종이 투표와 수작업 중심 절차를 유지하고 있다. 디지털전환을 적용 안 하겠다면 대만처럼 전 과정을 투표 현장에서 투표함 이동 없이 여야 입회 하에 수개표로 즉각 하면 된다. 디지털 전환의 핵심은 단순히 종이를 컴퓨터 화면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더 편리 더 정확 더 안전, 이 셋을 기치로 국가 사회 시스템을 질적으로 격상시키는 데 있다. 디지털 키오스크가 생활 속 대세를 이룬 가운데 선거 역시 시대 변화에 맞게 디지털로 진화해야 한다. 지금은 시대에 맞는 DB 중심 선거정보시스템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한 까닭이다. DB만 도입해도 신뢰를 급격히 향상시킬 수 있다. 이에 에스토니아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세계 최초로 국가 단위 인터넷 투표를 정착시켰다. 총선은 물론 대통령선거에 대해서도 전자투표를 전면 실시하고 있다. 온라인이라 투표장이 따로 없다. 블록체인 기술 기반 시스템으로 집이나 직장에서 또한 격지에서도 투표 가능하다. 편리 정확 안전에서 세계 최첨단이다. 부정선거 논란이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모습은 거기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블록체인 기술은 위·변조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국제적 기술이며 금융 물류 의료 예술 분야에서도 이미 널리 활용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 절차인 선거에 이러한 기술을 적용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따라서 우리도 충분히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정치권이 많은 혁신을 부르짖지만 유독 선거혁신만은 들어 본 적은 없다. 국가 운영의 모든 영역을 디지털화 대상으로 하겠노라는 선언을 하면서 선거만 예외로 남겨두는 것은 설득력이 대단히 부족하다. 공공정책의 시작점 역할을 하는 국가 선거에 대한 신뢰가 확보되지 않으면 어떤 정책도 국민적 동의를 얻기 어렵다. 국방혁신 교육혁신 연금혁신 의료혁신 노동혁신이라는 구호는 선거철마다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고정 메뉴다. 디지털 전환 더 나아가 인공지능 전환 역시 거의 모든 정책 공약에 등장한다. 그러나 정작 민주주의의 첫 시작점이자 출발지점인 선거 시스템 혁신에 대한 단초조차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점은 유감 중 유감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 자체가 디지털 혁신의 제1 대상이 되어야 할 시점이다. 따라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조직 개편이 요구된다.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조직으로 전면 개편될 필요가 있고도 남는다. 전통적 관행적 조직 구조로 21세기형 선거를 관리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됐다. 지금까지 운영돼 온 선관위는 근본적으로 법률과 행정 중심 조직이다. 이제는 그를 초월하여 투개표 데이터 관리 및 보안 기반의 선거 시스템 아키텍처 설계를 중시하는 조직으로 바꿔야 한다. 선거 시스템 보안과 데이터 관리 역량을 둘러싼 논란이 반복되는 이유도 이러한 관행적 구조 한계에서 기인한다. 선거는 정보기술 전문가가 책임져야 하는 국가 핵심 인프라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정보화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가능하다. 데이터베이스 보안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는 지적(한국경제 2025년 1월 18일자)도 제기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 전자정부 평가에서 늘 3위 내에 들 정도의 디지털 최강국이다. 인공지능 양자컴퓨팅을 논하는 국가에서 선거 관리가 구태의연한 방식에 머문다면 국가혁신은 말로 만이지 실제 없는 것 아닌가. 대한민국이 과연 진정한 디지털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가장 먼저 혁신해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선거 데이터 시스템 고도화 그 자체다. 그래서 K-선거를 세계 만방에 자랑스럽게 보여야 한다. 데이터 처리에 의혹 한 점 없이 공정한 첨단 선거정보시스템으로 만들어 대대로 사용하게끔 말이다.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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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천의 디지털 산책] 5년 뒤, AI는 스스로 작동한다
인터넷이 나온 지는 벌써 60년 가까이 됐고 웹이 등장한 지도 근 40년에 이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세상을 바꾼 것은 인터넷 자체가 아니었다. 지금은 누구나 쉽게 쓰지만 초기 인터넷은 접속 자체가 어려웠고 명령어와 복잡한 설정을 구사해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전문가들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었기에 일반인 입장에서는 존재 자체를 체감하기 어려운 고난도 기술이었다. 1980년 후반까지도 그랬다. 여기에 관한 일화가 있다. 필자가 30대 초반 카이스트 교수 생활을 막 시작할 때 일이다. 30분 정도는 코딩을 해야 인터넷에 접속 가능했던 시절이다. 코딩에 한 군데라도 실수가 있을 경우에는 접속에만 한 시간 걸렸다. 점심 시간 임박해서 접속 시도하다 보면 가끔 12시를 넘길 수 있는데 12시 5분쯤 교수식당에 도착하면 이구동성으로 오늘은 왜 늦었냐는 인사를 듣곤 했다. 그래서 접속 지연으로 그랬다고 설명하면 교수들은 “인터넷이 도대체 뭐야”, “내 생전엔 그거 쓸 일은 전혀 없을 거야”는 식으로 대했다. 그러다 그후로 딱 5년이 흐르자 그들 모두 인터넷 사용자가 됐다. 다름 아닌 웹 덕분이다. 아직도 인터넷과 웹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지만 이때부터 IT 세계에서는 5년 앞을 내다보는 게 불가능하다는 일종의 격언이 생겼다. 지금은 상황이 불투명하지만 해오던 일을 꾸준히 계속 해나가면 5년 뒤에는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단 뜻도 된다. 10년이면 변하던 강산이 기술주도 시대에 와선 5년으로 바뀌었다. 한때 재계 100위 내지 200위권 밖으로 하향 길을 걷던 삼성과 인텔이 최근 20위권 내로 급부상하는 배경도 이와 같다.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빅테크들은 지금도 벤처 기업으로 자처한다. 그들조차도 언제 어느 때 한순간에 추락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불현듯 눈앞에 닥칠 수 있는 게 IT 분야다. 작금의 상황 또한 그렇다. 철천지원수로 잘 알려진 애플과 삼성의 지난날 대립과 법정 분쟁을 회상해보라. 애플은 인텔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놀라운 일은 지금 와서는 애플이 삼성과 인텔에 먼저 손 내밀며 언제 그랬냐는듯 두 회사에 반도체 생산을 전격 부탁할 줄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나. 이런 예기치도 않았던 일이 순식간에 벌어지는 분야가 바로 IT다. 살아 남기 위해선 적과 동지 구분 않는 세상이 그곳이다. 인터넷의 복잡성을 인간에게서 감추고 클릭이라는 간단한 행위로 일상의 도구처럼 인터넷을 탈바꿈해 놓은 게 바로 웹이다. 인터넷이 30분 코딩이라면 웹은 단 1초 클릭이다. 혁신의 본질은 기술을 끌어내려 인간 눈높이 수준으로 맞춰주는 접점까지 오게 만드는 데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 셈이다. 인간이 기계에 적응해야 하는 수준에서는 혁신이 없던 뜻이다. 기계가 인간에게 적응하는 쪽으로 방향을 역전시켜야 세상이 비로소 바뀔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게 혁신의 본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관찰해보면 지금 AI 산업은 인터넷의 초창기 출범 단계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오늘날 생성 AI는 엄청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전문가 중심 기술에 가깝다. 프롬프트를 잘 써야 하고 AI 도구마다 특성이 다르며 응답 결과의 신뢰성 또한 완전하지도 않고 천차만별이다. 설상가상으로 사용자가 AI 도구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 사용자들은 어느 도구에 의존해야 할지 큰 혼란을 겪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AI는 아직 웹 이전의 인터넷과 유사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의 복잡성이 일거에 감춰졌듯이 AI 존재가 감추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급의 기술이 1990년대 초 웹처럼 제2의 팀 버너스리와 같은 이에 의해 공개적으로 등장하여 일상 유틸리티 수준에서 거의 무상 제공돼야 한다는 뜻이다. 말로 업무가 처리되고 정보가 자동 요약되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보라. 이러한 혁신의 특징은 늘 기존 강자를 무너뜨리며 나타났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과거 메인프레임 기업들은 PC 혁명을 과소평가했고 전통적 휴대전화 강자들은 스마트폰 혁명에 늦게 대응함으로써 퇴출을 자초했다. 이런 변화의 공통점은 무척 단순하다. 인간 경험 자체를 우선시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사용자로 하여금 기술을 가장 쉽게 체감하게 만든 기업이 시장을 지배한다는 원리다. 소비자는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얼마나 자연스럽고 편리하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온갖 관심을 쏟는 까닭이다. 이는 AI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빅테크들 역시 유사한 환경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한다. AI 산업이 거대한 데이터센터와 고가 GPU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정작 대대적 전환점은 인간 경험의 단순화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는 AI 경쟁을 칩 성능 위주로 보고 있어 GPU 가속력, 메모리 차선 수, 초미세 공정이 산업의 핵심처럼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사용자 경험을 장악해낸 기업에게 시장 주도권은 넘어갈 것이라는 중대한 원리를 망각해서는 도태되고 만다. 이는 삼성과 인텔과 같은 관행적 사용자 접점 경시 기업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누구든지 노키아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는 까닭이다. 지난 5년간 이 두 기업의 부진 역시 이런 맥락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은 세계 최고의 메모리칩 제조 역량을 갖고 있고 인텔 역시 CPU칩 시장을 수십년 지배해왔다. 그러나 AI 시대에 칩을 잘 만드는 기업에게 돌아갈 몫은 인간-AI 접점에 초점을 두는 기업들에 비해 작을 수밖에 없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처럼 사용자가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방식이 과연 얼마 동안이나 유지되겠는가 한번 생각해보라. 앞으로는 AI를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등장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인간의 언어와 행동을 AI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며 뒤에서 조용히 작동하는 형태로 발전하는 날 프롬프트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출 것으로 본다. 지금으로부터 5년쯤 뒤로 보고 있다. 그런 날이 온다고 가정해보면 전통적 기업은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과거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AI 시대의 웹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라는 중대한 프롬프트에 응답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용자 프롬프트가 없어진단 말은 AI 존재를 사용자들로 하여금 의식하지 않게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AI 플랫폼들이 AI 존재 자체를 감추게 만드는 기술의 첫 단추는 과연 어디일까. 그들이 AI란 존재를 사용자들로부터 숨길 수 있는 비장의 무기는 그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코 AI의 먹이인 데이터에 있을 것으로 본다. 고객은 자신에게 유익한 데이터를 어느 기업이 제공하느냐에 관심이 집중돼 있을 뿐 그걸 제공하는 AI 도구 간 특징이나 차이점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어느 도구가 코딩용이고 또 어느 도구는 군사용이라는 말에는 관심이 없다. 고객이 만족하는 지점은 응답 결과지 다른 화려한 기술이 아니다. 이는 고객에게 데이터 만족도를 높여주는 기업에게 미래가 있단 말과 같다. 그러면 지금의 데이터 기업은 어딜 가리키겠는가. 그것은 단연 구글과 아마존이다. 구글의 기존서적 온라인화 또는 아마존이 온라인 책방으로 1990년대 중반에 각기 출범했으나 오늘날 그들은 데이터 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완전히 성공한 기업이 됐다. 구글은 이름 그대로 10의 100승, 즉 세상에 노출된 데이터의 대부분을 현재 장악하고 있고 아마존은 클라우드 서비스를 통해 세계 주요 기관 데이터 격납고 역할을 도맡고 있다. 전 세계 각국 정부 데이터의 대부분이 아마존 클라우드를 이용한다. 그러나 데이터 장악력이 강한 구글과 아마존에게도 데이터 만족도 면에서 허점이 없을까. 많다. 그래서 AI 시대에는 여기가 혁신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도 일반적 데이터에 관한 장악력이 강할 뿐이지 아직 고객에 특화된 데이터, 즉 범주별 분화된 데이터에 강점을 갖고 있지는 않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까닭이다. 특정 분야, 즉 예를 들면 스포츠 분야에 특화된 데이터 기업은 아니란 말이다. 고객의 기대치가 그런 특화 데이터 기업에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뜬다면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수 있을까 하는 숙제가 심지어 구글에게도 남아 있는 것이다. 삼성도 그런 숙제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 이게 삼성에게 위기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기회가 될 수 있는 특이한 지점이다. 데이터가 저장되는 곳은 결국 메모리칩인 까닭이다. 그 최강자가 바로 삼성이 아니던가. 메모리에 대한 수요가 당분간 증대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심지어 인텔 애플 AMD 퀄컴 구글 엔비디아와 같은 전통적 계산장치칩 강호들과 오라클 화웨이 알리바바 같은 데이터센터 중점 기업들까지도 자체 메모리칩 설계 및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남의 칩을 갖다 쓰는 대신 자체 사업에 효율성이 특화된 메모리칩을 직접 독자 설계하겠다는 원대한 의도다. 그러면 설계는 혼자 하더라도 생산은 어디서 할까. 막대한 생산 시설이 필요한데 그걸 과연 어느 공장에서 제작하겠는가. 그러니 삼성에게 기회가 되는 것이다. 삼성 외에도 TSMC 마이크론 창신(중국) 난야(중국) 등 메모리칩 생산 대규모 공장 보유 기업들이 AI 붐이 지속된다면 향후 2~3년간 직접적 수혜자가 될 것은 분명하다. 그와 더불어 데이터센터가 증설될수록 그런 특수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자족함이 없이 삼성이 미래를 보고 더 진취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데이터 특화 시대에 대비하겠노라는 특유의 큰 꿈을 가져야 한다. 그런 비전에 상응하는 전략을 갖춤과 동시에 금상첨화격으로 늘 강조하는 메모리 윗단 연결 소프트웨어 역량까지 강화된 면모까지도 갖출 수 있다면 그 미래는 창대할 것이다. 그러면 데이터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비저너리 현자를 삼성이 과연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데이터 안목은 수십년간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서 내부 인력에 의해 저절로 확보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IT 종합 기업으로서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엔비디아 애플을 넘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적 IT 강자 자리를 넘보겠다면 새 시대를 맞을 데이터 비전이 무엇보다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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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천의 디지털 산책] 테라팹의 반도체 승부수 …삼성, 칩만으론 못버틴다
일론 머스크가 다소 무모해 보이는 선택을 다시 한번 꺼내 들었다. 반도체 공장을 직접 짓겠다는 테라팹 구상이 바로 그것이다(로이터 2026년 3월 23일자). 그가 미국 텍사스에 짓겠다는 이 반도체 공장은 기존 범용 칩으로는 그의 비전을 담을 수 없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그 실체는 스스로 반도체를 포함한 생태계 조성자로 변신을 꾀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엔비디아를 위협하는 전략에 가깝다. 삼성과 TSMC라는 최고 수준의 파운드리 기업이 이미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굳이 막대한 자본과 시간을 들여 생산 시설을 내재화하겠다는 발상은 과연 무엇인가. 반도체 산업은 특히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공정 기술이 매우 중요한 분야다. 다른 기업 같으면 막대한 초기 투자와 수율 문제 등 기술적 불확실성 때문에 외주 생산을 택하는 게 타당하다. 후발 주자로서 실패할 확률도 높다. 또한 반도체 산업 특성상 실패가 단기간에 교정되지 않는 특성도 있다. 테라팹이 계획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가 나오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가 구상하는 거대 산업 생태계 전반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반도체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구글, 아마존, 메타 이들 3개 기업이 머스크보다 앞서서 각기 독자적으로 자체 AI 칩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내재화 역량 강화가 반도체 수요 주체 전반의 흐름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테라팹의 공장 규모가 파격적으로 크다는 점은 다르다. 부지 면적이 뉴욕 센트럴파크의 3배에 달하며 연간 1테라와트 규모의 초대형으로서 무려 전 세계 AI 칩 생산량의 50배로 되어 있다. 왜 그렇게 큰 규모를 생각하고 있을까. 전기차, 자율주행, 휴머노이드 로봇, 우주 위성,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에 이르기까지 머스크의 사업은 모두 막대한 저장 능력과 연산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게 공통점이자 특징이다. 이런 수요가 기하급수로 폭증할 경우를 생각하면 기존 엔비디아나 삼성 등 외부 의존 반도체 공급망으로는 속도와 에너지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좀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연산 총 소요 시간과 에너지 소모량을 결정짓는 고대역메모리칩(HBM)과 계산 칩(GPU) 간 데이터 이동 횟수를 현 구조보다 줄이지 않으면 병목현상을 피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잦은 이동이 과열의 원인도 된다. 따라서 데이터 이동을 현행 대비 수천~수만 분의 1로 대폭 줄여 보겠다는 뜻이다. 메모리 창고에서 조립용 공장으로 보내기 전에 미리 조립하여 보내면 물류비용을 일정 부분 줄이는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그가 남다르게 선제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휴머노이드 로봇과 우주 산업은 선점 효과가 특히 절대적인 분야다. 먼저 대규모 연산 능력을 확보하고 데이터를 축적한 쪽이 시장을 지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산업 전반을 장악하는 통제권이 관건이다. 그러려면 연산 속도와 에너지 효율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해야 한다. 결국 머스크식 산업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는 언제나 병목 현상을 일으킬 부분에 대해서는 외부에 맡기지 않고 내부로 끌어들여 왔다. 자동차에서는 배터리와 소프트웨어를 우주에서는 로켓과 엔진을 직접 만들었고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초기의 비효율을 감수해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일정 시간이 지나 그 선택이 경쟁력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되는 것을 여러 기회에 성공적으로 실증해왔다. 테라팹 비전이 성공한다면 하드웨어란 이제 소프트웨어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과거에는 하드웨어가 먼저였고 소프트웨어는 그 위에서 돌아가는 부속물에 가까웠다. 하지만 인공지능 (AI)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 둘 간의 주종관계 상황이 정반대로 펼쳐지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소프트웨어 중심이듯이 소프트웨어가 판을 짜는 주역이 되고 나머지는 그를 위한 존재로 변신하는 것이다. 즉 어떤 소프트웨어를 돌릴 것인지가 먼저 결정되고 그 소프트웨어를 가장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하드웨어가 뒤따라 설계되는 구조다. 결국 경쟁력의 원천이 칩 자체로부터 메모리칩 윗단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 쪽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변화에 매우 더디게 반응해왔던 삼성에는 위기일 수 있다. 나노미터 줄이기 경쟁으로 대변되듯 더 작게, 더 빠르게, 더 안정적으로 만드는 능력이 곧 삼성과 인텔 같은 전통적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태가 달라지고 있다. ‘소프트웨어가 정의하는 하드웨어’라는 거대한 흐름이 조성된 것이다. 이런 추세에 삼성이 대응하지 못한다면 산업의 주도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삼성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일까. 단 하나다. 메모리 상단에 연산 로직이라는 새로운 소프트웨어 축을 잘 얹음으로써 과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반도체 성능을 만들어내는 길밖에 없다. 그걸 못해낸다면 삼성에는 주요 고객의 이탈 가능성이라는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다만 삼성의 경우 단기적으로 고객 이탈이 급격히 발생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HBM과 같은 고난도 메모리는 여전히 소수 기업만이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영역이며 테라팹 역시 초기에는 외부 생태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이런 세태 변화 속에서도 계속해서 고객을 유인하려면 초기 아키텍처 설계 단계부터 공정 최적화와 패키징까지 통합적으로 해 내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면 고객은 완전한 내재화 노선 대신 삼성을 중간 선택지 파트너로 삼을 기회가 커질 수도 있다. 대세를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부단히 노력하다 보면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간선택지 전략조차 만만치 않다. 삼성은 물론 애플 휴대전화의 계산칩을 평정하고 있는 칩설계전문 기업 ARM이 자사 브랜드를 감추던 시절에서 이제는 자체 칩 판매를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로이터 2026년 3월 25일자). AI 시대를 맞아 자체 저전력 고성능 기술 기반을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뜻으로 빅테크들의 내재화 대체재로서 중간선택지 강자가 되겠다는 전략이다. 따라서 삼성에는 또 다른 진퇴양난인 곤경이 닥쳐올 수도 있다. 여기가 삼성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우리는 여전히 제품을 만드는 기업인가 아니면 기술을 작동시키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기업인가. 후자의 방향으로 전환하겠다면 플랫폼에 참여하는 다양한 개발자로 하여금 쉽게 접근하고 빠르게 실험하며 지속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고도의 개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려면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처럼 업데이트 가능케 해야 한다. 말 그대로 소프트, 즉 유연해져야 하는 것이다. 한 번 만들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도 다운로드식 업데이트를 통해 계속 진화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는 제조 중심 기업에 매우 낯선 영역이다. 안정성과 완성도를 중시하던 굴뚝산업 전통적 문화를 벗어나 실패를 허용하는 개발 문화로 이동해야 가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으로서는 감당해내기 어려운 주문일 수 있다. 기업의 운영 철학을 바꾸는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삼성은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한 범용 GPU 생태계에 합류되면서 HBM 수요 증가에서 오는 수혜를 만끽하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테라팹 시도가 현실화되어 핵심 고객들이 범용 GPU 대신 각기 자체 설계한 고성능 AI 칩을 사용하는 순간 삼성의 위치가 재정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방향성이다. 규모가 극단적으로 워낙 큰 테라팹 실험이 만일 성공한다면 반도체 산업 전반의 방향을 가늠하는 기준점이 될 수도 있다. 그에 영향을 받아 삼성 현 고객들마저 각기 독자적으로 내재화 영역을 확장할 경우까지도 예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삼성은 장기적으로는 어느 빅테크와도 협상력 면에서 약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재화 추세에 삼성이 적극 대응하려면 삼성 자신 역시 고객이 요구하는 시스템 성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안 그러면 점차 가치 사슬의 하단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가치 사슬 최상단을 달리고 있는 기업이 바로 엔비디아다. 부품별로 협력업체를 잘 끌어들여 최적화된 시스템을 가장 잘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아우르는 시스템 설계에서는 단연 반도체 업계 세계 선두다. 따라서 머스크가 자체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경쟁자는 다름 아닌 바로 엔비디아다. 이는 엔비디아 협력업체인 삼성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엔비디아 그늘을 벗어나서 삼성 또한 엔비디아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삼성이 과연 어느 길을 선택할지 주의 깊게 지켜볼 대목이다. 1952년 발표된 공상과학 소설 ‘화성 프로젝트’ 속에서 화성 정착지 지도자를 칭했던 일론이란 기이한 이름을 가진 머스크. 대세 추종을 거부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가치만을 선택하여 그에 맞춰 추진하는 자기결정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의 무모에 가까운 이런 도전은 흥미롭게 지켜볼 대목이다.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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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천의 디지털 산책] 데이터 0.001%의 함정 …'확률 기계' AI는 진실을 모른다
인공지능(AI)은 우리 일상과 산업 전반에 스며들어 오고 있다. 사회 여러 분야에서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AI는 인간의 수작업 영역을 지동화하고 있다. 어떤 이는 산업혁명 이후 가장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으로 평가한다. 아폴로 11호 달 착륙에 이은 제3의 창세기에 비견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관심이 클수록 질문은 더 냉정해야 한다. AI는 과연 혁신의 본질인가, 아니면 기존 기술 체계 위에 세워진 하나의 첨탑에 불과한가. 우리는 어디까지를 혁신 가능성 영역으로 봐야 합리적일까. 컴퓨터 기술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이에 대한 답의 실마리가 보인다. 컴퓨터 생태계는 흔히 양파 구조에 비유된다. 이는 기계공학을 비롯한 다른 분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컴퓨터 분야만 갖고 있는 고유한 특징이다. 맨밑에 하드웨어가 있다. 메모리 반도체와 계산 반도체, 이 둘이 하드웨어를 이룬다. 그 위에 소프트웨어(SW)인 운영체제(OS)가 자리한다. OS는 하드웨어를 지휘 통제하는 육법전서다. 이는 메모리 반도체와 계산 반도체 각각의 활용도를 최대화하기 위해 작업처리 병렬화에 능하며 OS 자신 상단에 위치할 각종 소프트웨어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컴퓨터의 엔진으로 일컬어진다. OS 위에 또 다른 SW인 데이터베이스(DB)가 존재한다. OS가 데이터를 파일 단위로 처리하는 반면 DB는 그보다 작은 테이블 단위로 섬세하게 처리한다. 그 위로 각종 응용 SW가 다층 구조로 얹히고 그 최상층 옥상에 AI가 얹힌다. 따라서 AI는 이런 OS와 DB라는 SW엔진이 받쳐주지 않으면 단독으론 작동 불가능하다. AI도 SW다. 그래서 SW는 기초와 응용이 어우러지는 팀 플레이적 특징을 지닌다. 즉 기초 엔진이 없으면 AI는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기초 엔진 기술을 빼고 AI 중요성만을 외치는 일은 건축에서 지하층을 비워둔 채 고층 빌딩의 꼭대기부터 짓겠다는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컴퓨터의 또 다른 두 엔진(OS와 DB 바로 상층)은 인터넷과 인터넷 기반의 클라우드다. 클라우드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슈퍼컴퓨터가 자리 잡은 저장공간으로 연상하는데 그 본질은 그게 아니라 단일 컴퓨터용 OS가 아닌 인터넷판 거대 OS라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하면 OS, DB, 인터넷, 클라우드 등 네 가지 하부 구조 중 어느 하나만 빠져도 AI는 돌아가질 못한다. 업데이트도 전혀 못하고 학습할 데이터도, 검색할 길도 전혀 없으며 결과적으로 학습할 방법을 잃어버린다. 오늘날 생성형 AI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으나 그 폭발적 성장은 GPU 성능이나 알고리즘의 진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대량의 데이터를 학습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무려 10년간(지난해로 오픈AI가 창업 10주년을 맞이함)에 걸쳐 진행된 일로, 데이터 학습에 개도국 인력을 제국주의적으로 착취한 비도덕적 행태가 최근 고발된 일도 있다(로이터 2025년 7월 3일자). 게임에 비유하면 AI란 게임 구성원의 하나로서 5인 6각 경기를 펼친 것으로 복합 기술의 결정체다. AI 단독 드리블의 결과가 아니다. 이렇듯 하부 구조가 최적으로 주어진 상태에서만 AI가 정상 작동 가능한데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한번 알아보자. GPT와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은 세상의 텍스트를 학습한 뒤 주어진 문맥에서 다음에 올 단어를 확률적으로 예측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끝말잇기의 고도화 버전이다. 그런데 이 끝말잇기는 인간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기계가 자발적으로 수많은 시행착오 과정을 거쳐 찾아낸 결과다. 이 자발적 중간계(마치 반지의 제왕 영화 속에서처럼) 과정이 AI의 백미로서 인간(사용자)에게는 철저히 블랙박스다. 이 과정은 기계 단독으로 철저히 비밀리에 수행되는 관계로 인간은 세부 내용을 전혀 예측할 수도 없다. 이렇듯 기계 스스로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정답이라는 값과 기계 자신이 예측한 값 사이의 간극을 좁히도록 하는 수치가 계산되는데 이를 보정용 매개변수(파라미터)라고 부른다. 한 문제를 푸는데 때로는 수십억 개에 달할 정도로 많은 매개변수가 사용되기도 한다. 정답에 가까운 방향으로 자발적으로 끊임없이 오차를 미세하게 역추적하여 간극을 좁히도록 조율해 나가는 과정의 핵심인 T, 즉 트랜스포머라고 불리는 것이다. 딥러닝은 다층(밑으로 깊숙이) 학습 과정을 지칭하는 말로 인간의 뇌가 사물을 인식할 때 여러 층을 통과하듯이 중간계 여러 층을 통과하며 사물(혹은 문장)의 다음 패턴을 추출해내는 일련의 여정이다. 마치 거대한 원석을 차츰차츰 수백 번(수백 층) 다듬어 조각상을 만들어내듯 결과를 형상화한다. 이런 블랙박스적 여정은 인간이 오차를 줄여 나가는 보정방법만 초기 조건으로 주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오차 보정 과정 자체를 기계 스스로 직접 설계하며 학습한다고 해서 머신러닝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처음부터 정답을 구하는 마지막까지 확률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많은 불확실성을 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바로 여기가 환각 문제가 등장하는 지점이다. AI는 단순히 가장 그럴듯한 문장을 확률적으로 찾아 끝말 자동 잇기 식으로 생성하는 존재다. 말하자면 ‘밤 하늘의’ 다음에는 ‘별’이 오듯 맞추는 기계다. 통계적으로 개연성이 높은 표현을 선택할 뿐 그것의 진실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지는 못한다. AI에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끝말잇기 정보가 불분명할 때는 AI는 사람인 양 나름대로 그럴듯한 단어를 어떤 식으로든 신속히 동원해 답을 준다. 그런데 사람이 보기에는 엉뚱한 허구로 드러날 가능성도 있는데 바로 이럴 때 환각 현상이 발생했다고 부르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이에게는 틀린 건 분명한데도 다른 누구에게는 그 문장이 지나치게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오답임에도 진실로 둔갑할 수 있는 것이다. 확률 기반 처리 외에도 AI가 환각을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현재 디지털 공간에 축적된 데이터의 상당 부분은 부정확하거나 불필요하게 중복되어 있다. 데이터를 애초에 설계할 때 설계 이론에 따라 적법하게 중복시킨 것, 즉 불가피한 중복에 대해서는 시스템이 알아서 원본 데이터와 사본 데이터 간의 값이 항상 일치하도록 값 정확성을 보장해주지만 부적법하게 일종의 불법으로 중복시킨 것에 대해서는 시스템은 아무 조치를 하지 않는다. 이런 중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다수 중복 사본 간에 서로 다른 값이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디는 지난달 값이, 또 어디는 지난주 값이, 그리고 또 어디는 현재 값(이것이 정확한 값)이 들어 있을 수 있단 뜻이다. 그리되면 최신 값과는 다른 과거 값이 검색되어 사용자에게 제공되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오류(환각)에 해당하는 경우다. 데이터 값의 정확성이 흔들리면 그 흔들린 만큼 AI 결과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데이터 값 관점의 데이터 품질이 AI 정확도의 결정적 변수라는 점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흔히 AI 경쟁을 모델 크기 경쟁이나 연산 속도 경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진정한 경쟁은 데이터 품질 경쟁이라는 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정확하고 정제되어 있으며, 맥락이 살아 있는 데이터를 AI 모델이 확보하고 있는지가 핵심이다. 그러나 AI에는 이런 정제 기능 자체가 없다. AI 시대에도 정제는 사람 몫이다. 만일 정제해주지 않으면 AI는 편향의 증폭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조직이든 데이터 정제사(감별사)가 필요하다. 이는 데이터 분석가 이전의 개념이다. 데이터의 품질을 관리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다. AI는 스스로 데이터 값의 진위를 판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AI는 데이터를 먹고사는 생명체다. 결국 AI의 미래는 데이터를 어떻게 선별하고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전 세계 데이터를 방대하게 학습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AI 학습에 지금까지 활용된 데이터 양은 전 세계 데이터의 극히 일부다. 정확히 밝히면 세상 데이터의 0.001%에 불과할 따름이다. 왜 그런가. 나머지 99.999%의 데이터는 대외비로 분류되어 있어 AI는 거기에 접근하지 못한다. AI가 학습한 한정된 데이터 자체에도 왜곡이 존재한다. 그러니 AI의 판단 또한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AI 전문가들은 데이터 품질보다는 오로지 확률에만 관심을 쏟는다. 그들이 세상의 데이터가 거의 다 정확할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인류 미래를 예견하다 보니 다소 과장되게 포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 멸종을 이야기하는 AI 전문가도 많은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알아야 할 중대한 사실은 AI 전문가와 데이터 전문가는 서로 딴 세계에서 동떨어져 살고 있다는 점이다. 학문의 영역이 완전히 다르다 보니 힘을 합해 같이 일해 볼 겨를이 과거에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렇게 따로 갈 것이 유력하다. 이러한 협업 가능성 부재는 AI 환각 현상이 영원히 사라지기 힘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아무거나 데이터가 아니라는 점이다. 데이터 품질이 떨어지면 그것은 데이터 잉여 쓰레기에 불과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이런 쓰레기 데이터가 부정확한 답을 유발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입으로는 데이터 시대라고 하면서 대학에 정통 데이터학과 하나 없다. 반면 빅데이터 분석에만 열심인 데이터 사이언스라는 그럴싸한 이름의 신종 학과는 우후죽순처럼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는 데이터의 품격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거나 있기만 하면 무조건 데이터로 간주하고 곧바로 분석하려 든다. 소위 빅데이터 전문가의 한계는 데이터 품질에 정통하지 못하다는 데 있다. 그사이 기업에서는 데이터 품질 감별사 한 명도 없이 AI경영이란 기치 아래 데이터 시대를 맞이하려 들고 있다. AI 시대가 아니라 착각과 혼돈의 시대다. 원칙이 무너지는 사회에서 AI를 통한 조직 혁신, 국가 혁신, 인류 혁신, 이런 말들이 과연 설 자리가 있을까. AI의 작동 기반 필수 불가결 여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사상누각적 한계, 더 나아가 데이터 품질 진단에 이은 품질 격상 노력 없이는AI를 통한 인류 사회 혁신은 한낱 지나친 수사에 불과할 뿐이다.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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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천의 디지털 산책] '열려라 13자리' …마스터키의 덫
쿠팡 개인정보 유출 파장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 확산일로다. 쿠팡이 미국 기업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내에서 정보 유출이 발생했고 유출 사태에 대한 쿠팡의 대응이 매우 미온적이라 한국 정부는 강도 높은 제재를 가하려 들고 있는데 미국은 이에 대한 반기를 노골적으로 들고 나왔다. 자국 기업 보호 차원이다. 영업은 전부 한국에서 하면서 기업은 미국 가업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의 발단이기도 하지만 이런 국가 간 갈등 사태의 발단은 기업이 어느 나라 소속이냐를 떠나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양국 간 현저한 시각 차이에 기인한다. 미국이 개인 정보 유출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이유는 유출로 인한 피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2차 피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없다. 1차 피해에 대한 조치로서 고작해야 신용카드 재발급으로 모든 사태가 마무리되지만 한국에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 큰 차이다. 2차, 3차 또는 그 이상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어 두고두고 불씨가 거의 영구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보 유출에 대한 국가적 대응과 처벌 수위의 차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 관점에서 볼 때는 쿠팡 투자자들이 미국 무역대표부에 제기한 한국 정부에 대한 조사 청원은 합리적이며 정당한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보질 않는다. 그렇다면 개인 정보 유출로 인한 피해의 파장과 규모가 왜 국가 간에 다를 수 있는 것일까. 그 차이점은 각종 개인정보 전체를 아우르는 ‘절대반지’ 격 정보 일상 활용 여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한국에는 그 강력한 절대반지가 바로 생활 속 주민번호다. 반면 미국에서 사용하는 사회보장번호는 절대반지라고 볼 수 없는 존재다. 왜냐하면 그 번호는 일상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세금, 고용, 사회보장에만 국한하여 사용될 뿐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번호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한국 주민번호는 은행, 증권, 의료, 고용, 국방, 교육, 게임, 게시판, 기부, 교통 모든 대금결제에 이르기까지 일상 모든 구석구석에서 사용된다. 우리가 눈뜨고 일어나서 눈 감고 잘 때까지 모든 행동 동선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따라다닌다. 그래서 영화 속 절대반지다운 위용을 해커들이 유감없이 사용하기에 이른다. 한국을 놀이터처럼 사냥하는 해커들의 공통점은 평균 연봉이 1억원이라는 점이다. 이런 나라는 오직 한국뿐이다. 단지 13자리 번호 하나로 말이다. 하지만 미국의 사회보장번호는 해커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게다가 한국 주민번호 뒤쪽 7자리 중 여섯 자리는 성별, 출생지 등 매우 중대한 뜻이 담겨 있는 정보들이다. 반면 사회보장번호 9자리 전체는 무작위 번호로 무의미형이라 해커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고 만일 문제가 생기면 전화번호처럼 아무 때나 변경 가능하다. 하지만 주민번호는 바꿀 수 없는 평생 번호다. 한국의 절대번호는 한마디로 양날의 칼이다. 어느 주체(국가)에게는 극단적으로 편리한 번호일 수도 있으나 어느 다른 주체(개인)에게는 평생 족쇄 번호로도 작용한다는 뜻이다. 쿠팡 개인정보 유출 파장이 계속 확신일로에 놓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쿠팡이 피의자로서 범행 규모를 스스로 은폐하려는 시도가 다분했다는 데 있다. 피의자 입장에서 범행 일체를 자백할 수는 있어도 범행 사실에 대한 자체 조사와 그런 조사 결과를 피의자 입장에서 대외에 발표한다는 일은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기괴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시간 벌기 차원에서 이뤄졌을 것이라는 정황이 파악된 것은 최근이다. 경찰이 쿠팡 자체 조사 결과를 반박하면서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쿠팡 자체 조사가 실제 유출 규모를 1만분의 1로 줄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쿠팡 셀프조사 결과는 오직 3000건이었으나 경찰이 발표한 유출 규모는 그의 무려 1만배, 즉 3000만건 이상이었다. 이것이 한국 정부가 쿠팡에 대해 벌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하면 영업정지까지 검토하게 된 주요 배경이다. 미국에서는 대략 수억 원 벌금으로 그치는 게 전부다. 그렇다면 주민번호 같은 절대 식별자 존재 유무의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파장의 차이는 얼마나 다를까. 절대식별자가 없을 때에는 데이터 유출의 영향은 일반적으로 1차 사고 범위 내에서 억제된다. 반면 한국에서는 단 한 번의 유출이 2차, 3차, 나아가 4차 피해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고리를 제공하는 일이 가능하다. 한국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근거는 아래 3가지다. 첫째, 해커들은 유출된 주민번호를 중심축으로 활용하여 새롭게 취득한 데이터와 기존에 확보하여 저장해 둔 데이터 간에 데이터 퍼즐 합성에 들어간다. 둘째, 이런 데이터 집적을 통해 새로운 퍼즐이 형성되면 해커는 이를 통해 후속 공격에 사용할 정교한 해킹 미끼를 제작할 수 있다. 셋째, 다른 곳에서 다른 이유로 개인정보 추가 유출이 발생할 때마다 해커들은 그런 추가 정보까지 암암리에 입수하여 새로운 정보를 종전보다 더 큰 퍼즐에 통합하며 향후 공격을 위한 표적을 지속적으로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에 들어간다. 해커 먹잇감 제조 과정을 간단한 예로 들면 이렇다. 1차 피해의 결과로 해커가 이름과 이메일을 입수한다. 그다음 이름과 해커가 보유하고 있던 자료에서 이름을 대조하여 주민번호를 찾아낸다. 그 주민번호를 중심축으로 해서 다른 유출 데이터 중에서 잠재 피해자의 금융 기록이나 의료 기록을 찾아낸다. 그다음 정교한 사회공학적 기법에 사용할 해킹 미끼를 생성해낸다. 그다음 피해자를 표적 공격하거나 피해자와 연결되는 신원정보들을 활용하여 피해자 지인을 표적으로 하는 피싱에 들어간다. 한국은 이처럼 동시다발적이고 순차적인 피해를 겪는다는 점에서 유례가 없다. 왜냐하면 한국처럼 민간 부문에서 일상적으로 절대식별자를 사용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속 피해를 없애기 위해 정부는 민간 부문의 주민번호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켜야 마땅하지만 이게 쉽지 않은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정부 스스로 주민번호가 순차적 피해의 핵심 촉매제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사실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점은 또 다른 걸림돌이다. 정보 유출이 발생할 때마다 과학기술부,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국정원 등이 나서지만 정작 주민번호의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주민번호를 관리하는 행정안전부와 유출 사후 구제를 담당하는 과학기술부 같은 부처 간에 단절이 존재하는 한 연쇄 피해를 막을 장치는 없다는 사실을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 공직 사회 전반에 팽배한 과거 자기 부정 거부 문화로 인해 과거의 시스템적 부작용과 실패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과거 박근혜 대통령이 개인정보 유출 사고 이후 주민번호 폐지를 포함한 전면적인 검토를 국무위원들에게 직접 지시했을 때조차 이 추진력은 지속되지 못했다. 당시 국무총리와 행정자치부 장관은 책임을 회피했고 결국 개혁 시도는 간단히 무산되었다. 그 이후로도 대규모 해킹 사고가 일상처럼 터지고 또 터졌으나 50년 넘게 유지된 주민번호 체계에 대해 그 근본적 결함을 개선하거나 책임지는 조직이 전무한 실정이다. 상기한 점들은 대한민국 개인정보 관리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왜 지구촌 어느 나라는 이 문제를 경미하게 보고 또 다른 나라는 매우 심각하게 보는지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미국과 국제 이해관계자들도 이러한 한국의 독특한 구조적 결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데이터 유출 처리에 관한 국제적 마찰은 불행히도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번 쿠팡 사태가 반면교사로 한국의 개인 식별 국가 체계 개혁에 시동을 거는 계기가 된다면 불행 중 천만다행일 것이다. 주민번호 제도 개선이 이루어지려면 다른 나라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부터 검토에 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사회보장번호와 같이 선진국 제도는 국가가 부여한 번호가 개인 식별 데이터와는 용처가 다르게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즉 사회보장번호는 본인 인증 실명제의 근간이 되질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 번호가 개인을 식별하는 키로 사용될 리도 절대 없다. 반면 한국 주민번호는 실명제의 근간이자 본인 인증을 위한 키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주민번호를 없애지 못할 바에는 그 번호가 다시는 만능 키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렇게 하려면 각 분야, 즉 금융, 의료, 통신 등에서 각기 서로 연결되지 않는 고유 식별자를 각기 따로 만들어 쓰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한 번호를 중심축으로 해서 데이터가 총집적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민간 부문에서는 주민번호 사용을 법적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주민번호는 공공 부문에서만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은행ID는 의료ID와 완전히 다른 식이다. 이렇게 한 다음 기존에 수집된 민간 기업 내 주민번호 데이터는 강제 파기토록 의무화해야 한다. 이 모든 개선에 대한 시도는 주민번호가 연쇄 데이터 유출의 핵심이자 촉매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비로소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적 실패 인정이 없는 한 개선에 들어갈 리 없다. 집행권자(대통령)의 의지 재확인도 필요하다. 과거 주민번호 체계를 전면 개편하는 걸 포함해서 검토하라는 대통령 지시를 존중하고 국무위원들이 과거처럼 책임을 회피하는 관행이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엄중 조치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만일 된다면 개인 식별이 정부 감시 ‘데이터 통제’ 방식에서 프라이버시 ‘개인 주권’ 방식으로 선진화되는 큰 계기가 될 것이다. 기계가 세상을 휘저어 놓는 시대에 인본주의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킨다.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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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천의 디지털 산책] 스테이블이란 착시 …K-코인이 마주한 시험대
비트코인 논문은 2008년 10월에 나왔다. 스테이블 코인이란 개념은 6년 뒤 2014년에 나왔다. 암호화폐가 세간에서 뜨기 시작한 것은 2017년 말이다. 암호화폐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기축 통화인 비트코인과 거래소 내에서 거래할 때 달러 대신 사용될 유동성 공급 수단으로서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S코인 업계 1위는 테더다. 말 그대로 코인 가치를 미 달러와 1:1 형태 밧줄로 묶어 둔다(peg)는 취지다. 담보 자산을 외부 기관에 예치하고 이를 기반으로 코인 발행에 들어가는 안정성을 갖는다. 겉으로는 '1코인=1미화 달러'라는 단순 형태지만 실제로는 다층적인 기술인프라와 금융구조가 얽혀 있다. 그런 연유로 해킹 오작동 제어실패 같은 전산 오류가 발생하면 곧바로 금융 위험으로 발전할 수 있는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실물 담보 혹은 실물 자산(국채)만으로도 스테이블 코인은 결코 스테이블(안정적인)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 그 유명한 사례가 테라라는 미화 기반 S코인이다. 미국에서 형사 재판을 받는 권도형 테라폼랩스 설립자에게 2025년 12월 법원은 자금 세탁 혐의를 추가하면서 15년형을 선고했다. 2022년 사기 사태 직후 해외로 도피한 권 대표는 11개월 만인 이날 몬테네그로에서 위조 여권에 꼬리를 잡히며 체포됐었다. 현재까지 미화 기반 스테이블 코인의 발행 및 구조 자체에 대한 희대의 코인 사기 사건이다. 알고리즘 조작 및 허위홍보의 혐의를 받았다. 2020년부터 테라를 발행하면서 테라 프로토콜이라는 알고리즘을 통해 미화 1달러에 연동하도록 설계했다고 권씨는 주장해왔다. 이 말을 믿은 투자자들 덕분에 테라는 창업 후 1년반에 걸쳐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테더와 USD코인 뒤를 이어 세계 3위로 등극했다. 그러나 그 주장과는 달리 달러화 연동에 균열이 생겼다. 2021년 5월 테라 가치가 기준치인 1달러 밑으로 떨어지자 권씨는 테라 프로토콜을 통해 가치가 자동으로 회복됐다고 말했으나 실상은 테라폼랩스와 계약한 투자회사가 테라를 몰래 사들이도록 해 인위적으로 가격을 부양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결과 대규모 투자자 피해로 이어진 것이다. 테라 사태가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이렇다. 무엇보다 미화나 국채와 같은 실제 담보 없이 컴퓨터 알고리즘(루나라는 자매 코인과의 연동 메커니즘)만으로 1달러 (peg) 방식을 추구한 알고리즘형 코인으로서 출발부터 위험이 상존했다. 즉 처음부터 아무런 실물 담보도 없이 테라 알고리즘 (무담보)과 루나 알고리즘 (역시 무담보) 간 상호 관계에만 의존하여 작동되는 희한한 구조를 지녔던 것이다. 그러므로 암호화폐 담보형도 아니었다. 기존 암호화폐(예: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를 담보로 잡고 발행되는 구조였다면 그랬겠지만 테라는 이 요건과도 거리가 멀었다. 코인의 설계 구조 자체에 내재된 알고리즘 상의 결함을 투자자나 이용자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초장부터 투명성을 잃었다. 투자자들에게 관련 위험에 대해 실시간적으로 공개하지 않거나 달러 대비 1:1 페깅 투명성이 의심시 되기만 해도 투자자들에게 기소되는 판에 테라의 경우는 담보의 실제성조차 갖춰지지 않은 형태로 시작했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2022년 5월 테라 가격은 물론 루나 가격도 동시에 폭락했고 이는 두 화폐를 사들인 투자자들에게 무려 60조원에 달하는 피해로 고스란히 돌아갔다. 판결에서 사건 피해 금액이 미국 연방 기소 사건 가운데 최대 규모였음이 밝혀졌다. 이게 미국 검찰 조사 결과다. 테라 사태는 스테이블코인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으며 이로 인해 미국 등 주요국들은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규제(미국 GENIUS 법안, 유럽연합MICA법안 및 싱가포르 MAS 법안 등)를 테라 사건이 터진 직후(2023년)부터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스테이블 코인의 위험성은 기술구조상 다층 형태를 지니고 있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디에 어떤 문제가 잠복해 있는지 예측하기 매우 힘들다. 일례로 담보를 은행에 예치하는 구조 역시 전적으로 안전하다고 보기 어렵다. 2023년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으로 미화 기반 스테이블 코인인 USDC는 한때 0.88달러까지 하락했다. 준비금 보관처도 투명하게 공개하고 24시간 모니터링 체계를 갖추기 전에는 안정적이라고 볼 수 없다. 또 다른 예로 담보 시스템 중앙화도 문제다. 단일 지점 장애 및 파산 리스크를 내포할 수 있는 까닭이다. 한국의 위믹스달러 실패사례가 이의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위믹스달러는 미화 기반 100% 담보를 내세웠지만 연쇄적인 브리지(암호화폐마다 채택한 블록체인 기술이 다르므로 2종 이상인 경우 블록체인 연결기술) 해킹을 겪으면서 중앙화된 담보에 대한 접근성이 상실되며 0.6~0.7달러 수준까지 가치가 하락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실물 담보형을 표방했으나 브리지 붕괴 오류로 인해 환급에 실패하거나 밧줄 이탈(디페깅) 현상이 발생한 사례가 이미 다수 존재하는 것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이처럼 기술 설계만으로는 방지할 수 없는 리스크가 존재하므로 기술 외적으로 법적·제도적 프레임까지도 치밀하게 병행되지 않으면 안전성 확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게 정론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우, 대선 공약의 일환으로 원화기반 스테이블 코인(K-coin)이 조만간 발행될 전망이다. 현재 한국은 가상자산 이용자 자산 보호와 불공정거래행위 규제에 중점을 둔 1단계 입법은 마쳤지만 그 후 무려 1년반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K-코인 규제는 정부(금융위원회, 한국은행)와 국회가 함께 추진하는 디지털자산기본법(가칭)이라는 2단계 입법 과제로서 여전히 논의 중이다. 그러나 1단계 입법도 도입시기가 너무 늦어 국회의원 등 여러 공직자들이 불법에 가까운 암호화폐 비행(非行) 투자를 하도록 방치한 얼마 전 사태를 상기한다면 K-코인에서도 규제 공백이 불러일으킬 파장을 예상할 수 있다. 지난해 시행된 가상자산법 1단계 역시 이용자 보호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해킹 사고가 발생해도 보고 의무조차 부과되지 않은 상태다(연합뉴스 2025년 12월 7일자). 가상자산 2단계 입법 과정에서는 해킹 사고 발생 시 사업자의 배상 책임과 구체적 규제 등을 마련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2025년 12월 14일자) 현재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 양 기관이 K-코인 규제에 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2단계 입법도 표류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부분은 K-코인 발행 주체에 관한 것으로서 은행 독점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비은행사 포함한 개방형 모델로 갈 것인지 양단간에 어떤 것을 택할지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 간의 조율이 장기화될 전망이다. 따라서 2단계 입법도 1단계 입법 때와 같은 양상으로 늦어진다면 법적 근거가 부재한 상태에서 암호화폐가 발행되거나 유통될 경우 불법적 발행에 무방비로 노출될 우려가 있다. 더욱이 만일 대규모 발행사가 부실해져 K-코인 가치가 1원 아래로 급락하는 디페깅 현상이 발생하면 대규모 코인 인출사태가 발생하여 금융 시스템 전체로 불안이 전이될 우려도 있다. K-코인은 미화 기반 스테이블 코인과 달리 통화 가치가 한국의 원화에 고정되어 운영된다. 따라서 K-코인이 만일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통화(법정화폐)를 대체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면 금리 조절이나 공개 시장 조작 등을 통해 통화량을 통제하는 한국은행 자체의 능력이 약화될 수 있다. 또 다른 위험은 민간이 발행한 코인의 발행 및 소멸이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경로를 우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은행 고유의 통화 주권이 훼손되고 심각하게 도전 받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이런 형국이 벌어진다면 한국은행이 통화 주권을 이유로 비은행권의 K-코인 발행을 강력히 제한하고 은행 독점 구조를 유도할 경우 핀테크 및 테크 기업의 혁신이 봉쇄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K-코인은 빠른 결제 수단일 수는 있겠으나 통화 정책이나 금융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에서 미화 기반 스테이블 코인에 비해 취약한 구조라고 봐야 한다. 국경 간 거래에서 K-코인의 사용이 증가할 경우에는 기존의 은행 채널을 통하지 않는 투기적 성격의 외국 자본 유출입이 증가할 수도 있다. 이는 외환 당국의 자본 유출입 통제를 어렵게 만들고 환율 변동성을 확대하여 거시 경제 안정성을 해칠 수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코인 분야에서 발생한 테라 사태나 김남국 사태의 공통점은 입법 미비라는 규제 공백을 틈타 벌어진 희대의 사건이었다. 금융위와 한은 간 권한 쟁탈이 장기화된다면 입법 공백을 노린 변종 사건, 즉 제2의 테라 사태나 제2의 김남국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므로 2단계 입법에 있어서 한국은행과 금융당국 간의 명확한 역할 분담이 무엇보다 선행돼야 한다. 미국 GENIUS 법안에 의하면 암호화폐 발행 감독 구조는 단순히 연방독점 대 주정부 자율 방식의 이분법이 아니라 연방정부가 일관된 최소 기준을 설정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대형 참여자에 대해서는 연방 감독이 이루어지고 소규모 발행 참여자에게는 주정부 감독을 허용하되 연방 기준과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협력적 접근을 취한다. 한 발행주체가 성장해 100억 달러를 넘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게 되면 주정부 감독에서 연방 감독 체계로 전환하는 것이 역할 분담의 큰 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권한 대립에 매몰되지 말고 이런 방향의 협력적 관계 설정으로 풀어 나감으로써 절대로 좌실양기(坐失良機) 우를 범하지 말기 바란다.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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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천의 디지털 산책] 잠근 대문, 털린 안방 …쿠팡 사태 진짜 정체
3370만건에 달하는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보면 정부는 AI 강국 같은 거창한 소리만 허공을 향해 계속 외쳐 댈 뿐 정작 그 기반인 데이터 설계와 데이터 보안에 대한 정부의 실질 기조는 전혀 보이질 않고 있다. 보안도 개인정보 보호 관련 인증 및 암호 수준에만 머물러 있고 정작 미국 국방부가 무려 30년 전부터 채택한 사이버보안 첨단기술의 근처에도 못 가고 있다. 10년 전 1억400만건의 정보 유출과 청와대 해킹사건, 원전 해킹 등 굵직한 사태들이 연이어 터졌을 때 했던 국정조사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하드웨어 중심의 압축 성장 과정에서 국가 정보시스템의 내실을 점검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는 정보화까지도 산업화 때처럼 그런 자세로 밀어붙이다 보니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실상을 전혀 볼 새가 없이 겉치장에만 신경 써왔던 것을 이제는 돌이켜봐야 한다.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 더 이상 외형에만 집착하지 말고 우리의 속살도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다면 새 시대에 데이터 주권과 데이터 보안을 위해 현 정부가 시급히 바꿔야 할 인식은 과연 무엇일까. 디지털 시대란 다시 바꿔 말하면 데이터 시대다. 클라우드라는 데이터 집합소로 모든 데이터가 모여드는 시대다. 클라우드란 말 자체도 1982년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데이터를 뜻했다. 즉 데이터와 완전 동격이다. 따라서 국가 핵심 자산인 데이터의 구조와 관리 체계가 이에 과연 맞는지 근본적으로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연이은 대규모 행정망 마비에서 봤듯이 데이터 관리가 부실했고 해킹공화국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각종 정보 유출 피해를 겪었다. 데이터를 잘 설계하려면 설계에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그때그때 산발적으로 데이터가 분절된 형태로 설계되다 보니 적정 시점에서 데이터를 통합할 시기를 놓쳐버리며 근근이 왔다. 사실은 처음부터 통합설계 철학을 지켰어야 했다. 이제는 통합방법론도 모른 채 국가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하루하루 요행을 바라는 처지에 놓였다. 데이터 보안도 데이터설계와 무관하지 않다. 보안의 시작은 데이터설계 단계에서부터 어느 데이터에 어떤 보안등급을 부여할 것인지가 결정되어야 한다. 일단 설계해 놓고 그 위에 보안을 덮어 씌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초기 속살 형성 단계에서부터 수준 높은 보안기술을 주입시켜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데이터설계 자체가 엉망이다 보니 보안마저도 엉터리일 수밖에 없다. 중대한 가치를 지닌 데이터들은 일반 데이터와 구분하여 DB라는 그릇 속에 별도로 넣어야 한다. 그래서 보안의 꽃은 데이터베이스(DB) 보안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번 국정조사에서도 이에 미치지 못했다. 어느 것이든 간에 설계 철학이 있고 그 근간 위에서 모든 것이 통합되고 어우러지게 만들어야 데이터 환각현상 없이 돌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서류(문서) 뗐는데 남의 서류(문서)가 나오는 국가행정망, 국가교육망 등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데이터 환각 현실 속에서 AI정부란 말이 과연 어디에 설 땅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현재 국회 과방위와 주무 부처인 과기정통부의 관리 감독이 실질적인 데이터 보안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정보보호 시스템이나 인증 유무 확인에만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많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이번 쿠팡 사태와 같은 일을 막기 위해 기존 역할 외에 반드시 추가하거나 보완해야 할 구체적인 권한이나 기능은 없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이다. 보호와 보안은 사실상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보안은 국가 안보급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입법과 제도는 주로 외형적 보호 조치와 인증 중심에 치우쳐 있었고 DB보안에 대해서는 충분한 제도적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니 국정조사도 이 수준에서 그쳤다. DB보안은 보안의 핵심이자 가장 고도화된 영역이다.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DB보안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뤄왔으나 우리는 이제야 국정원 등을 중심으로 검토 단계에 들어가려는 수준이다. 입법부와 행정부는 DB보안을 독립적인 규제·감독 영역으로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위한 별도의 법제화와 전문적 감독 권한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이번 쿠팡 사태의 본질은 데이터 관리자가 주전산기 DB 안방에서 정보를 턴 것이다. 외부에서 노트북PC 같은 단말기로 접속해서 턴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정보량이 크다. 유출 정보는 최소한 4TB로 추정되는데 이걸 외부 단말기 로그인 접속으로 꺼낸다는 건 턱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정보보호 수준을 훨씬 넘어 대형 서버 DB보안 수준에서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조사 등에서 정보보호에만 머무르는 이유는 뭘까. 이는 망 경계 방어와 DB보안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후자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안의 첨단은 미 국방부가 오래전부터 채택해온 다단계(다등급) 보안 체계에 있다. 여기서는 데이터 중요도에 따라 다수의 등급으로 분류하고 사용자 역시 중요도에 따라 차등 권한을 부여받아 사용자 등급보다 상위 등급 데이터에는 함부로 읽고 쓸 수 없도록 기계적 통제가 이뤄진다. 그러므로 설령 해커가 상당한 수준까지 침투하더라도 최고 등급의 데이터에는 접근하지 못하게 통제할 수 있다. 즉 부적법한 접근은 자동 차단하는 안전장치가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보안 현실은 여전히 망 경계 방어, 즉 출입문 보안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는 대단히 낮은 수준의 보안이다. 정작 금고에 해당하는 DB보안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한국의 근본적인 한계다. 전 직원이란 사람이 보안 키 하나로 수천만 명의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보안의 핵심인 권한 분리와 접근 통제를 스스로 무너트렸다는 점을 방증하는데 개발자에게 과도한 슈퍼 권한을 주는 현장 관행은 차제에 고쳐야 한다. 다등급 보안 체계를 적용하면 최고 관리자 권한은 극히 제한된 소수에게만 부여되고 그 외 인력은 단계별로 그보다 낮은 권한만을 부여받게 된다. 이를 통해 관리자나 내부 인력에 의한 과도한 접근 역시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은 무제한적 슈퍼 권한 부여 관행 역시 다등급 보안 설계의 부재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사태에서는 수천만 건이 넘는 데이터가 조회되는 장장 5개월 동안 이상 징후를 탐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감사 로그 시스템이 사실상 유명무실한 껍데기였다는 방증이다. 이 정도 기간이면 주전산기 DB를 통째로 외부 클라우드 공간으로 다 퍼 날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안인증 심사가 DB보안까지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는 맹점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도 다등급 데이터 접근 통제 체계를 경시했기 때문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태였다. 현재의 정부 보안 인증 및 심사 체계에는 DB보안 요건이 사실상 빠져 있다. 이는 제도적 규제 공백에 해당한다. 이런 공백을 틈타는 주체들은 기업과 해커다. 비용 절감을 노리는 기업뿐만 아니라 틈새를 좋은 먹잇감 사냥 호기로 파고 드는 해커들이다. 데이터댐(저수지)이라든가 AI강국 같은 거창한 구호를 정부가 외치지만 정작 데이터를 담는 그릇인 DB 관리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의 보안 최고관리자 체제만으로는 DB보안의 특수성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외면해서는 아니 된다. 이를 위해 별도의 데이터 보안 거버넌스 구축이나 법적 규제 강화도 필요하다. 다등급 보안은 충분히 법과 제도로 규제할 수 있는 영역이다. 다만 전제 조건이 있다. 아무거나 데이터라고 부르고 DB 아닌 것도 DB라고 부르면 안 된다. 모든 데이터를 아무거나 무분별하게 DB라고 부르거나 엑셀 파일과 같은 것을 DB로 혼동해서도 아니 된다. DB엔진에 의해 관리되는 체계적인 데이터만이 데이터베이스다. 그러나 DB엔진을 사용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올바른 데이터 설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데이터설계에는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이는 일관된 철학을 가진 전문 데이터 모델러의 역할이다. 만일 데이터 모델러가 여럿 있어 모델러마다 서로 다른 철학을 갖는다면 통합된 데이터 구조는 불가능해진다. 이때 진정한 데이터 거버넌스란 권위 있는 슈퍼 데이터 모델러가 전체 설계 철학을 총괄하고 그 아래에서 조직적으로 설계가 이루어지는 체계를 의미한다. 이게 사람 (데이터 모델러) 손끝이 예민하게 작용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는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는 코치 진 중 헤드코치와 같은 역할에 비유할 수 있다. 데이터 보안 거버넌스는 이러한 적법하고 통합된 데이터설계를 전제로 할 때만 성공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행정망 같은 류의 반복적인 실패를 피할 수 없다. 기업들이 보안 요건을 지키지 않을 이유는 여러 가지다. 예를 들면 보통 DB를 암호화했다고 항변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보듯이 내부 권한을 가진 자에게는 암호화는 무용지물이다. 대용량 데이터 트래픽 처리에 따른 성능 저하를 이유로 데이터 알맹이 자체를 암호화하지 않는 기업 관행은 공공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암호화를 기피하는 이유는 속도 저하에 대한 우려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따지고 보면 데이터설계가 근본적으로 적법하지 않게 돼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파생적 문제다. 원칙에 맞게 데이터가 애초부터 설계되었다면 암호·복호 과정을 거치더라도 시스템 속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설계 원칙이 깡그리 무너진 상태에서 속도 문제를 편법적으로 해결하다 보니 보안 기본 요구사항과 엉뚱하게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가장 민감한 개인정보인 주민등록번호의 경우 이미 국민 전체의 정보가 유출된 상황에서 암호화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온 국민의 주민번호가 이미 해커들 손에 들어가 있는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면 소용이 있겠나. 기업들도 이렇듯 문제의 진원지를 피해 나가는 게 고질화돼 있지만 정부 역시 정보 유출로 인한 후속 피해의 진원지가 그 번호임을 알면서도 수술대에 올리지 못하는 자기부정 불능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인터넷 시대에 맞게끔 제도를 개편하고 공공번호를 민간영역에서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한다. 안방 문은 활짝 열어 둔 채 대문 단속만 열심히 하는 이 부끄러운 행태는 기업이나 정부나 똑같다.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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